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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백두산 및 백두산 수계(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변경사회의 삶과 인식 연구
본 연구 총서는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형성된 우리의 변경사회에 대한 시대적 인식, 특히 백두산 권역을 중심으로 한 만주 종족(민족) 사회의 구성과 역학 관계, 조선 왕조의 압록강 변경 지역에 대한 인식과 개척, 고지도에 투영된 백두산 인식, 일제 식민당국의 압록강-두만강 변경 지역에 대한 조사와 인식, 통치이데올로기화 그리고 압록강 지역 변경 도시의 건설과 통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과 만주국 변경사회의 교류·갈등·협력 실태, 중국의 두만강 인식과 두만강의 통한 동해 진출 노력, 북한과 중국의 국경 획정과 국경 관리 실태 등을 다루었다.
백두산그 자체를 비롯해서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와 만주(중국 동북 지역)의 경계 인식, 우리 왕조의 변경사회 개척과 통치 과정, 그 과정에서 형성된 변경사회의 특징, 종족 구성, 구성원들의 삶, 근대 시기 압록강-백두산-두만강 변경사회에 대한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의 국경관리와 상호 협력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총서는 향후 북·중 변경사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어 남북관계 개선 및 남북통일, 그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중국과의 국경·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데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본 연구 총서는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형성된 우리의 변경사회에 대한 시대적 인식, 특히 백두산 권역을 중심으로 한 만주 종족(민족) 사회의 구성과 역학 관계, 조선 왕조의 압록강 변경 지역에 대한 인식과 개척, 고지도에 투영된 백두산 인식, 일제 식민당국의 압록강-두만강 변경 지역에 대한 조사와 인식, 통치이데올로기화 그리고 압록강 지역 변경 도시의 건설과 통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과 만주국 변경사회의 교류·갈등·협력 실태, 중국의 두만강 인식과 두만강의 통한 동해 진출 노력, 북한과 중국의 국경 획정과 국경 관리 실태 등을 다루었다.
백두산그 자체를 비롯해서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와 만주(중국 동북 지역)의 경계 인식, 우리 왕조의 변경사회 개척과 통치 과정, 그 과정에서 형성된 변경사회의 특징, 종족 구성, 구성원들의 삶, 근대 시기 압록강-백두산-두만강 변경사회에 대한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의 국경관리와 상호 협력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총서는 향후 북·중 변경사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어 남북관계 개선 및 남북통일, 그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중국과의 국경·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데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목차
연구총서를 펴내며| 9
고려 말~조선 초 백두산 변경 지역의 개척 | 박정민 | 15
청대 만주 사회의 형성과 정체성 | 김준영 | 45
조선의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산 인식 | 문상명| 81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록강 변경 도시의 조성과 통치 | 오병한 | 115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지역 조사와 경계인식 | 배성준 | 151
일제가 노래한 압록강과 백두산의 여러 모습 | 최현식 | 187
조선과 만주국 변경 사회의 교류와 통제 | 윤휘탁 | 245
중국의 동해 진출 노력과 두만강| 윤휘탁 | 291
북한과 중국의 국경 관리 실태 | 윤휘탁 | 335
참고문헌| 371
고려 말~조선 초 백두산 변경 지역의 개척 | 박정민 | 15
청대 만주 사회의 형성과 정체성 | 김준영 | 45
조선의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산 인식 | 문상명| 81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록강 변경 도시의 조성과 통치 | 오병한 | 115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지역 조사와 경계인식 | 배성준 | 151
일제가 노래한 압록강과 백두산의 여러 모습 | 최현식 | 187
조선과 만주국 변경 사회의 교류와 통제 | 윤휘탁 | 245
중국의 동해 진출 노력과 두만강| 윤휘탁 | 291
북한과 중국의 국경 관리 실태 | 윤휘탁 | 335
참고문헌| 371
출판사 리뷰
역사, 지리, 문학, 민족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백두산에 대한 융복합적 연구 총서
박정민의 『여말선초 압록강 중상류 영토의 재검토』에서는 조선 왕조가 압록강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개척하고 통치했는지를 분석했다. 조선 왕조 때 설치된 두만강 방면의 6진(鎭)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폐지한 적이 없었지만, 압록강 방면의 4군(郡)은 세조 때 폐지되었다가 조선 말기에 다시 설치해 운영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글에서는 조선 왕조가 어떻게 4군을 개척해 나갔는지, 왜 조선 왕조가 압록강 유역의 4군을 지켜내기가 어려웠는지, 조선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토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인식 하에 [고려오도양계도]와 『고려사』 지리지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인식한 고려 말의 영토를 확인하고, 이후 4군 개척 이전에 조선에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영토로 편입해 나가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조선 왕조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언제부터 어떻게 영토로 편입해 나갔는지를 고찰하였다.
김준영의 『청대 만주 사회의 형성과 정체성』에서는 만주 사회의 다종족(多種族) 구성과 다원적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만주족 하면 여진족의 후예로만 인식하고 그들의 종족적 다양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인식은 소위 중국학계의 “숙신계 만주 주인론”, 즉 “숙신계 민족(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짐)이 만주 사회의 주인 역할을 해왔다.”는 숙신계 민족의 계보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중국학계가 주장하는 “장백산=숙신계 민족의 발상지·성산” 논리의 문제점을 밝히는 데도 인식상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청대의 팔기(八旗)는 만주족 · 몽골족· 한인(漢人) 각각의 팔기들로 구성되었으며, 만주 사회 역시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에 나타나듯이, 만주족 · 몽골족 · 한인·조선인 등 다양한 종족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청대의 요동 이주 정책을 비롯해서 만주인의 민간 자료인 『청대만주족가보선집(·代滿族家譜選輯)··(上 · 下冊) 등을 바탕으로 만주 사회의 다종족(多種族) 구성과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문상명의 『조선의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산 인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추상적인 세계 지도 [천하도(天下圖)]에 나타난 조선인의 백두산 인식을 다루었다. 〈천하도〉의 짜임새는 지도의 중심에 중심 대륙이 있고, 그 주위를 바다[內海]가 둘러싸고 있다. 다시 그 주위는 육지[外大陸]와 이를 둘러싼 바다[外海]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內大陸]은 중국의 대하천과 오악(五嶽)을 중심으로 표현되었고 내해와 외대륙의 지명은 대부분 『산해경』에 등장한다. 지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천하도〉에는 140여 개의 지명 혹은 명칭이 나타난다. 그런데 〈천하도〉에서 『산해경』의 지명이나 명칭을 표현한 이유, 어떤 연유로 조선 후기에 〈천하도〉가 유행했는지, 이를 누가 어떤 목적에서 제작했는지 등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백두산이 그려진 〈천하도〉에 주목하여 〈천하도〉에 담긴 백두산을 통해 〈천하도〉의 제작 목적과 의미를 다시 조명하고, 조선 후기의 백두산 인식을 새로운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오병한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록강 변경 도시의 조성과 통치』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1910년대까지 일본이 조성한 안동(지금의 중국 단동)의 신시가지 조성과 통치 실태를 다룬 글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신시가 조성 이전 사하진의 형성 과정과 주요 시가의 명칭을 분석하였다. 또한 시정준비위원회와 신시가조성위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본의 신시가 조성을 위한 토지 매입 과정과 행정 조직 변화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1906년 10월 군정이 폐지된 이후 안동거류민단 행정위원회의 신시가 조성 과정과 문제점을 고찰하였다.
배성준의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지역 조사와 경계 인식』은 1910-20년대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대한 조사,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인 담당자가 되었던 청국(중국) 및 러시아와의 국경 교섭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경계 및 국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다루었다. 1920년대까지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압록강-두만강 유역 조사와 경계 인식은 1930년대 ‘만주사변’ 및 만주국 수립 이후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 사이의 경계, 즉 일본제국 내부의 경계로 전환된다.
최현식의 『일제가 노래한 압록강과 백두산의 여러 모습』은 1920년대∼1945년 패전 때까지 조선과 일본, 만주에서 널리 불렸던 일제의 신민요 ·압록강절·의 발생과 유행, 그리고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백두산절·을 분석한 글이다. 이 글에서 다룬 두 신민요는 단순히 노래로 불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음반과 서적, 무용, 그림엽서도 등 다양한 방식의 대중 매체로 변용, 발매되어 일본의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형성했다. 즉 두 신민요는 장르의 확장성이 컸고, 거기에는 일본 정신의 심화 및 영토 확장에 관련된 제국의 심상(心象) 지리를 내면화하기 위한 파시즘의 예술화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윤휘탁의 『조선과 만주국 변경사회의 교류와 통제』에서는 조선과 만주국의 경계를 이룬 압록강-백두산-두만강 변경사회의 교류와 교역, 삶, 이 변경사회에 대한 조선과 만주국 식민당국의 통제와 단속, 갈등, 상호 협력 등을 다루었다. 특히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발간된 ··每日申報··, ··朝鮮中央日報··, ··朝鮮新聞··, ··朝鮮日報··, ··東亞日報·· 등의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그동안 선행연구에서 다루지 못하였던 압록강-백두산-두만강변연사회에서의 철도·도로의 부설, 원활한 물자 유통을 위한 통관 제도, 세관 설치와 관세 실태, 통행·교역·밀수·통신·화폐 유통·전염병 문제, 국경변경지대 사람들의 유동적인 삶 그리고 조선과 만주국 식민당국의 변경사회에 대한 단속·통제와 협력 활동, 그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 상황 등을 밝혔다.
윤휘탁의 『중국의 동해 진출 노력과 두만강』에서는 길림성 동부 변강(邊疆)의 역사적 변천과 추이, 그에 따른 중국의 두만강 출해권(出海權)상실, 회복의 역사적 변천과 재(再)상실, 재(再)회복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나 인식, 거시적인 전략을 다루었다. 중국이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나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단순히 북·중·러 3국의 국경·무역·교류 등의 차원을 넘어서 동북아시아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남북한과 미·중·일·러의 국제 관계 및 각국의 위상·역량·전략·국제 물류·경제 발전·관광 산업 등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복잡다기한 지정학적·지경학적(地經學的)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만주의 강역(疆域) 및 두만강 유역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비롯해 통일 정책, 남북 관계, 통일 이후 한반도와 중국·러시아의 관계 및 이들 국가에 대한 우리의 동북아 전략 수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백두산에 대한 융복합적 연구 총서
박정민의 『여말선초 압록강 중상류 영토의 재검토』에서는 조선 왕조가 압록강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개척하고 통치했는지를 분석했다. 조선 왕조 때 설치된 두만강 방면의 6진(鎭)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폐지한 적이 없었지만, 압록강 방면의 4군(郡)은 세조 때 폐지되었다가 조선 말기에 다시 설치해 운영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글에서는 조선 왕조가 어떻게 4군을 개척해 나갔는지, 왜 조선 왕조가 압록강 유역의 4군을 지켜내기가 어려웠는지, 조선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토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인식 하에 [고려오도양계도]와 『고려사』 지리지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인식한 고려 말의 영토를 확인하고, 이후 4군 개척 이전에 조선에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영토로 편입해 나가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조선 왕조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언제부터 어떻게 영토로 편입해 나갔는지를 고찰하였다.
김준영의 『청대 만주 사회의 형성과 정체성』에서는 만주 사회의 다종족(多種族) 구성과 다원적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만주족 하면 여진족의 후예로만 인식하고 그들의 종족적 다양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인식은 소위 중국학계의 “숙신계 만주 주인론”, 즉 “숙신계 민족(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짐)이 만주 사회의 주인 역할을 해왔다.”는 숙신계 민족의 계보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중국학계가 주장하는 “장백산=숙신계 민족의 발상지·성산” 논리의 문제점을 밝히는 데도 인식상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청대의 팔기(八旗)는 만주족 · 몽골족· 한인(漢人) 각각의 팔기들로 구성되었으며, 만주 사회 역시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에 나타나듯이, 만주족 · 몽골족 · 한인·조선인 등 다양한 종족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청대의 요동 이주 정책을 비롯해서 만주인의 민간 자료인 『청대만주족가보선집(·代滿族家譜選輯)··(上 · 下冊) 등을 바탕으로 만주 사회의 다종족(多種族) 구성과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문상명의 『조선의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산 인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추상적인 세계 지도 [천하도(天下圖)]에 나타난 조선인의 백두산 인식을 다루었다. 〈천하도〉의 짜임새는 지도의 중심에 중심 대륙이 있고, 그 주위를 바다[內海]가 둘러싸고 있다. 다시 그 주위는 육지[外大陸]와 이를 둘러싼 바다[外海]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內大陸]은 중국의 대하천과 오악(五嶽)을 중심으로 표현되었고 내해와 외대륙의 지명은 대부분 『산해경』에 등장한다. 지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천하도〉에는 140여 개의 지명 혹은 명칭이 나타난다. 그런데 〈천하도〉에서 『산해경』의 지명이나 명칭을 표현한 이유, 어떤 연유로 조선 후기에 〈천하도〉가 유행했는지, 이를 누가 어떤 목적에서 제작했는지 등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백두산이 그려진 〈천하도〉에 주목하여 〈천하도〉에 담긴 백두산을 통해 〈천하도〉의 제작 목적과 의미를 다시 조명하고, 조선 후기의 백두산 인식을 새로운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오병한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록강 변경 도시의 조성과 통치』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1910년대까지 일본이 조성한 안동(지금의 중국 단동)의 신시가지 조성과 통치 실태를 다룬 글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신시가 조성 이전 사하진의 형성 과정과 주요 시가의 명칭을 분석하였다. 또한 시정준비위원회와 신시가조성위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본의 신시가 조성을 위한 토지 매입 과정과 행정 조직 변화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1906년 10월 군정이 폐지된 이후 안동거류민단 행정위원회의 신시가 조성 과정과 문제점을 고찰하였다.
배성준의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지역 조사와 경계 인식』은 1910-20년대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대한 조사,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인 담당자가 되었던 청국(중국) 및 러시아와의 국경 교섭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압록강-두만강 경계 및 국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다루었다. 1920년대까지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압록강-두만강 유역 조사와 경계 인식은 1930년대 ‘만주사변’ 및 만주국 수립 이후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 사이의 경계, 즉 일본제국 내부의 경계로 전환된다.
최현식의 『일제가 노래한 압록강과 백두산의 여러 모습』은 1920년대∼1945년 패전 때까지 조선과 일본, 만주에서 널리 불렸던 일제의 신민요 ·압록강절·의 발생과 유행, 그리고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백두산절·을 분석한 글이다. 이 글에서 다룬 두 신민요는 단순히 노래로 불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음반과 서적, 무용, 그림엽서도 등 다양한 방식의 대중 매체로 변용, 발매되어 일본의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형성했다. 즉 두 신민요는 장르의 확장성이 컸고, 거기에는 일본 정신의 심화 및 영토 확장에 관련된 제국의 심상(心象) 지리를 내면화하기 위한 파시즘의 예술화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윤휘탁의 『조선과 만주국 변경사회의 교류와 통제』에서는 조선과 만주국의 경계를 이룬 압록강-백두산-두만강 변경사회의 교류와 교역, 삶, 이 변경사회에 대한 조선과 만주국 식민당국의 통제와 단속, 갈등, 상호 협력 등을 다루었다. 특히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발간된 ··每日申報··, ··朝鮮中央日報··, ··朝鮮新聞··, ··朝鮮日報··, ··東亞日報·· 등의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그동안 선행연구에서 다루지 못하였던 압록강-백두산-두만강변연사회에서의 철도·도로의 부설, 원활한 물자 유통을 위한 통관 제도, 세관 설치와 관세 실태, 통행·교역·밀수·통신·화폐 유통·전염병 문제, 국경변경지대 사람들의 유동적인 삶 그리고 조선과 만주국 식민당국의 변경사회에 대한 단속·통제와 협력 활동, 그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 상황 등을 밝혔다.
윤휘탁의 『중국의 동해 진출 노력과 두만강』에서는 길림성 동부 변강(邊疆)의 역사적 변천과 추이, 그에 따른 중국의 두만강 출해권(出海權)상실, 회복의 역사적 변천과 재(再)상실, 재(再)회복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나 인식, 거시적인 전략을 다루었다. 중국이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나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단순히 북·중·러 3국의 국경·무역·교류 등의 차원을 넘어서 동북아시아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남북한과 미·중·일·러의 국제 관계 및 각국의 위상·역량·전략·국제 물류·경제 발전·관광 산업 등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복잡다기한 지정학적·지경학적(地經學的)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만주의 강역(疆域) 및 두만강 유역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비롯해 통일 정책, 남북 관계, 통일 이후 한반도와 중국·러시아의 관계 및 이들 국가에 대한 우리의 동북아 전략 수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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