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4.조선역사문화

조선 평민 (2014) - 열전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동방박사님 2024. 5. 1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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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시대 평민들의 삶을 엿보는 의미 있는 역사 기록

이 책은 110여 명의 인물을 주로 직업에 따라 열여섯 가지 범주로 분류해 실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서는 최근 연구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가 방각본 출판업자로 인정된 점을 반영해, 서당 교재를 출판했던 장혼, 책장수 조신선과 함께 ‘출판’이라는 항목을 새로 설정해 넣었다.

평민서당 교재를 출판하고 인왕산 서당에서 오랫동안 많은 제자를 가르쳤던 장혼, 서른 살 무렵에 《청구도》 필사본을 제작하기 시작해서 환갑 무렵에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간행해 국가기관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누구나 쉽게 길을 알아볼 수 있도록 대량으로 지도를 찍어낸 김정호, 한양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주인이 더이상 읽지 않는 책을 구해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아 지식유통망을 넓혔던 조신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부름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 치료해주었던 의원 백광현, 정유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 나라 은혜에 보답하자”고 외치며 죽어갔던 문기방, 난리통에 일본으로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동래 노파 등이 바로 조선 후기에 평민문화를 확산시켰던 주역들이다.

목차

개정판에 부쳐서
들어가는 말_19세기 평민시대에 엮인 평민전기에 대하여

시인
홍유손/박계강/정치/유희경/백대붕/최기남/최대립/석희박과 아들 만재/임준원/이득원/강취주/홍세태/김만최/정내교/정민교/김순간/최윤창/엄계흥/이단전/차좌일/이양필/김낙서/천수경/서경창/조수삼/왕태/박윤묵/박기열/김희령/유정주/고진원/박응모/김양원/최경흠/최천익/이성중/김규/정봉/정이조/강위

화가
김시/이정/김명국/최북/김홍도/임희지/이재관/장승업

서예
엄한붕/조광진/차규헌/이희수

의원
안찬/안덕수/백광현/유상/조광일/이동/피재길/이익성/이희복/김응립

역관
이화종/홍순언/한원/유세통/김지남/고시언/이상조/정지윤/현기

천문학자
김영

출판
장혼/김정호/조신선

의협
김충렬/이충백/염시도/김수팽/이달문/김완철/장복선/장오복/천흥철/황고집/노동지/박장각

처사·선비
한순계/서기/고두표/정윤/안광수/신두병/박돌몽/박영석/김엄

바둑
유찬홍/이필/김종귀/정운창/김한흥

충렬
문기방/강효원/오효성/박의/이형익/김여준/전만거/이진화/안용복/최충신

장인
신아

효자
문계달/김창국/박태성/홍차기/송규휘/김중진/김익춘/윤명상/장석규/한용

효녀
동래 노파/김취매/이씨

절부·열녀
향랑/김씨/김씨/하씨/영동 열녀/황씨/분 파는 할미

기생·공녀
황진이/춘절/한보향/만덕

저자 소개

편자 : 허경진
허경진은 피난 시절 목포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지금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돌도 되기 전에 인천으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지만, 기억에도 없는 목포를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고교 시절부터 대학원에 입학할 때까지 시를 썼고 〈요나서〉라는 시로 연세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고서...

책 속으로

시인
강취주

강취주姜就周의 자는 여재汝載이고 호는 노주鷺洲다. 젊었을 때 동네 협객이 되어 건달 노릇을 하다가 끝내 다리가 부러져 폐인이 되었다. 늘그막에야 시를 배워 사대부들과 노닐며 즐겼다. 집안에서 털옷을 바느질해 살림했는데, 사람됨이 비분강개했다. 의기를 좋아하고 풍류가 있었다. 한쪽 발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뛰어다니므로, 조동강趙東岡이 ‘노주’라고 호를 지어주었다.
평소에는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가 시를 지으면 스스로 천기天機를 얻은 구절들이 보였다. 자못 맑고도 고고한 울림이 있었다. 한번은 홍순연洪舜衍과 함께 근자운根字韻으로 시를 지었는데, 강취주가 먼저 시를 읊었다.

적선은 표일해 시로 맞설 자 없고
동방삭의 우스갯소리에는 말의 근원이 없네.
謫仙飄逸詩無敵, 方朔談諧語不根.

홍순연도 당시에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났지만 그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그는 사람들을 잘 가르쳤으므로 그에게 배우는 자가 아주 많았다. 조풍원趙豊原과 조동계趙東溪2도 일찍이 그에게 배웠다. ---p.58-59

김만최
김택보金澤甫의 이름은 만최(萬最, 1660?1735)다. 집안이 예전에는 벼슬하던 신분이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미천해졌다. 그 윗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의원醫員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도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으므로 가업을 이어서 의술을 배웠다. 그러나 뜻에 맞지 않아 집어 치웠다. 그래서 악소년들과 사귀며 개백정 노릇을 하여 맛있는 음식을 얻어다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의 성격은 거칠고 건방졌으며 매인 데가 없었다. 술을 좋아했는데 이따금 기세를 부려 사람을 쳤다.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고향 마을에서 그를 걱정했다. 하루는 백정들과 놀러 갔는데 한 동료가 풍자해 말했다.
“자네는 의사義士일세. 다음에 잡히게 되더라도 나까지 끌어들이진 말게.”
그는 즉시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그 동료에게 사죄했다. 그러곤 태도를 바꾸어 책을 읽었는데 하루에도 수천 마디씩 외웠다. 베옷에 가죽띠를 하고 온화하게 처사의 행동을 했다.
내 나이 열여덟 때 삼청정사三淸精舍에서 그를 만났다. 키는 여덟 자에다 수염이 아름다웠다. 이야기를 끝없이 펼치는 것을 보아 그가 어질고도 호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매우 기뻐하면서 친구라고 불렀으며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었다. 당시 그의 문장이 크게 나아져서 이미 뛰어나다고 이름이 났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그를 문인이라 보지 않고 반드시 협사俠士라고 불렀다. 그가 젊은 시절의 기백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말이나 의논 또는 시 가운데 연燕나라, 조趙나라의 선비들처럼 비분강개하는 뜻이 많이 나타났다.
그는 40여 년을 떠돌아다녔으므로 가난이 더욱 심해졌다. 살림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썰렁한 집에서 아내와 자식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남에게 급한 사정이 생긴 걸 보면 남들보다 뒤늦을세라 걱정하며 달려갔다. 남들과 사귈 때는 청탁 淸濁을 묻지 않았다. 뜻에 맞으면 천하고 더러운 사람일수록 더욱 공경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p.66-67

화가
김홍도

김홍도(金弘道, 1745??)의 자는 사능士能이고 호는 단원檀園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이 넓어서 얽매임이 없으니 남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 속의 사람이라고 했다.
산수, 인물, 꽃과 나무, 새와 짐승을 그려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신선의 그림이 가장 뛰어났다. 준찰?擦, 구염句染, 구간軀幹, 의문衣紋을 앞사람들의 수법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하늘로부터 받은 소질을 발휘했다. 신묘한 솜씨가 말쑥하고도 아름다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의 별조別調였다.
정조 때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셨는데, 그림 한 폭을 바칠 때마다 임금의 마음에 들곤 했다. 한번은 임금이 명을 내리시어 커다란 벽에다 바탕칠을 하고 바다 위에 여러 신선들이 모여 있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내시에게 진한 먹물 두어 되를 받들게 하고는 모자를 벗고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선 채로 마치 비바람이 부는 것처럼 붓을 휘둘렀다. 두어 시간도 못 되어 다 그리고 보니, 물은 어지럽게 파도쳐 집채라도 무너뜨릴 듯하고, 사람은 터벅터벅 걸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옛날의 대동전大同殿 벽화도 이보다 나을 게 없을 듯했다.
금강산이 있는 네 고을의 산수를 그리라 명하시고는 각 고을에 영을 내려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는 신하처럼 대접하도록 하셨다. 특별한 은총인 것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이 연풍延豊 현감에 이르렀지만 집이 가난해 끼니를 잇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매우 기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살 만한 돈이 없었다. 마침 돈 삼천 냥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는데 그림을 그려달라는 폐백이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이천 냥을 떼어 매화를 사고 팔백 냥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 동인同人들을 모아 매화 턱 술잔치를 베풀었다. 나머지 이백 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들이니 하루 살림도 안 되었다. 그의 성품이 이처럼 대범했다.
그의 아들 양기良驥의 자는 천리千里이고 호는 긍원肯園이다. 그림 솜씨가 가법家法을 물려받아 산수라든가 집, 나무 따위는 자기 아버지를 넘어섰다. 나와 가깝게 사귀었는데 이젠 죽은 지 두어 해가 지났다. ---p.167-169

의원
백광현

태의太醫 백광현(白光炫, ??1697)은 인조 때 태어났는데, 사람됨이 순박하고도 조심스러웠다. 동네에서도 너무나 진실스러워 마치 바보 같았다. 키가 큰 데다 수염이 났으며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처음엔 말의 병을 잘 고쳤는데 오로지 침鍼만 써서 치료할 뿐이지 방서方書에 근본하지 않았다. 침을 오래 놓아 손에 익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험해보았다. 기이한 효험을 많이 보게 되자 드디어 사람 고치는 것만 일삼았다.
이때부터 그는 여염을 두루 돌아다녔으므로 사람들의 종기를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그의 진단도 더욱 정확해졌다. 대개 종기에 독이 가득 차면 근 根이 생기는데 옛 처방으로는 이를 고칠 법이 없었다. 광현은 이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커다란 침을 써서 근을 발라내어 죽을 사람도 살렸다. 처음엔 침을 너무 세게 써서 어떨 때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에게 효험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으므로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대문에 모여들었다. 광현 또한 의술 베풀기를 즐겨 해서 더욱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비법을 써 그의 이름이 크게 떨쳤으므로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숙종 초엽에 어의로 뽑혔는데, 공을 세울 때마다 품계가 더해지곤 해서 종1품에 이르렀다. 벼슬도 현감을 지내 여항에서 영예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병자들을 대할 때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부름이 있으면 곧 달려갔고, 가서는 반드시 자기의 정성과 능력을 다했다. 병이 나아진 것을 본 뒤에라야 치료를 그만두었다. 늙고 고귀해졌다고 해서 게을러지지 않았으니, 그의 치료 솜씨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내 나이 열다섯 때 외삼촌 강군姜君이 입술에 종기를 앓았다. 백태의白太醫을 불러왔더니, 그가 살펴보고는 “어쩔 수가 없소. 이틀 전에 보지 못한 게 한스럽소. 빨리 장례 치를 준비를 하시오. 밤이 되면 반드시 죽을 게요”라고 말했다.
밤이 되니 과연 죽었다. 그때 백태의는 몹시 늙었지만 신통한 진단은 여전했다. 죽을 병인지 살릴 병인지 알아내는 데 조금치도 잘못이 없었다. 그가 한창때는 신기한 효험이 있어서 죽은 자도 일으켰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 흥령興齡이 대를 이어 의원이 되었는데 꽤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제자 가운데 박순朴淳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 또한 종기를 잘 고친다고 이름이 났다. ---p.203-206

바둑
김종귀

김종귀金鍾貴는 바둑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이 나라에서 으뜸가는 솜씨라고 칭찬했는데 아흔이 넘어 죽었다.
종귀 다음으로는 김한흥金漢興, 고동高同, 이학술李學述 세 사람이 있었다. 학술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한흥은 종귀와 나란히 이름을 날렸는데 그때 나이가 더 젊었다. 자기에게 맞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오다가 한번은 종귀와 바둑을 겨루게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들었다. 한흥의 눈빛은 바둑판을 꿰뚫을 듯했다. 종횡으로 두어 나가는데 마치 말이 달리듯, 굶주린 매가 덮치듯 했다.
종귀는 손이 둔해져서 바둑알을 놓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듯했다. 그 형세를 살펴보니 벌써 반쯤 두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로 귀에다 대고 “오늘 대국은 한흥에게 으뜸자리를 물려줘야겠군” 하고 수군거렸다.
종귀도 바둑판을 밀치며 탄식했다.
“늙어 눈이 흐려진 탓이야. 내일 아침을 기다렸다가 정신이 좀 맑아지면 다시 두자.”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말했다.
“옛부터 명수들이 한 판을 이틀씩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종귀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바둑판을 끌어당기고 앉았다. 바둑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기이한 한 수를 냈다. 마치 흐르는 물을 끊어내듯, 관문을 깨부수고 달려나오듯 다 졌던 판을 끝내는 이겨버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식했다. 이야말로 ‘잘못 두지 않는 것을 두려워 않고, 잘못 두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할 만하다. 호산거사는 이렇게 말한다.
“예부터 전해지는 노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바둑이다. 그 개합開闔이라든가 조종, 진퇴, 취사, 기정奇正, 허실 등은 참으로 병법 가운데서도 윗길이다. 혁추 奕秋, 두부자杜夫子, 왕항王抗, 왕반王?, 왕적신王積薪의 미끄러운 재주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아직도 전하는 바, 왕적신이 만났다는 시어미와 며느리 이야기 같은 것이 사실이야 있고 없고 간에, 황탄해 믿을 수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기보들 가운데 이른바 크고 작은 철망鐵網, 권렴捲簾, 변금?金, 정난?欄 따위의 여러 수는 모두 모방한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육상산陸象山이 바둑판을 높이 걸어놓고 올려보다가 하도河圖의 수를 깨달았지만, 총명하고 재주 있는 선비가 마음을 다해 연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엄우嚴羽가 ‘시에는 별다른 재주가 있으니 배우는 것과 관계 있는 게 아니다’ 하고 말했는데, 나는 바둑의 도道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p.379-381

출판사 리뷰

양반의 아닌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흔히 조선을 양반을 위한 나라였다고 말한다. 조선 개국 초기 극소수에 불과했던 이들 사대부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자학 명분론을 내세워 먼저 천인賤人 신분을 가려냈고, 양인良人 신분 안에서도 계층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이는 주자학 지배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비사업이기도 했지만, 한정된 벼슬자리에 대비해 양반의 수적 증가를 억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일이기도 했다. 이들의 의도대로 조선은 양반?중인?상인?천인이라는 네 계층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이들을 다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묶어본다면 양반과 그 나머지인 평민으로 양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진다. 집권층인 양반의 무능과 허세가 드러나면서 상대적으로 눌려 지내던 평민의 저력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세를 바라거나 들어 앉아 제자를 키우는 허세 가득한 양반들의 길을 따를 필요가 없었던 평민들은 여러 분야에서 실무와 기예를 담당했기에 그 활약상 또한 굉장히 다양했다. 문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양반들은 단지 출세의 도구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평민들은 그보다 훨씬 순수한 목적에서 시나 산문을 즐겼다. 형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작품들을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문학만이 아니라 그림, 의술, 천문, 출판, 역술, 서예 같은 분야에서도 평민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이러한 평민들의 이야기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 양이 방대해졌는데, 결국 누군가가 기록하기 시작했다. 남다르게 살았던 평민들의 삶을 전傳 형식으로 서술해 남기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난 것이다. 그 가운데는 주인공의 제자나 유족에게 부탁을 받고 지어주거나 죽은 사람과의 친분 때문에 지어준 경우도 있고,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생애가 감동적이어서 스스로 지은 경우도 있다. 이들 전기 작가로는 보통 같은 처지에 있는 평민이 많았지만 때로는 재상이 직접 지어준 경우도 있다. 본격적인 평민전기의 시대가 조선 후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傳이라는 형태로 평민들의 진솔한 삶을 보여주다

한 인물의 행적을 서술한 ‘전’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지어졌는데,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아직 종이가 없어서 역사 기록을 대나무 쪽에 먹으로 써서 남겨야 했으므로 표현에 군더더기를 다 제거하고 간결해질 수밖에 없었다. 뒷날 중국과 한국 전기들은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열전’은 어디까지나 역사 기록상의 전기인 까닭에 평범한 사적은 싣지 않는다. 즉 한 사람의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라 전해야 할 사건만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는 구성인 것이다. 이러한 전은 사실의 기록이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이나 인간성이 더욱 부각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짧은 지면 안에서 그 인물의 남다른 삶을 표현하는 것이 전의 생명이다.
이 책의 주요 출전들도 전의 형태로 기록된 것들인데, 평민 출신의 화가 조희룡이 1844년에 지은 평민전기집 《호산외기壺山外記》, 아전 출신의 유재건이 1862년에 엮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그들의 친구였던 시인 이경민이 1866년에 엮은 《희조질사熙朝?事》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이들 문헌에 담긴,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평민 110여 명의 삶을 ‘전’이라는 그릇에 담아 짧고 간명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평민들의 삶을 엿보는 의미 있는 역사 기록

이 책은 110여 명의 인물을 주로 직업에 따라 열여섯 가지 범주로 분류해 실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서는 최근 연구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가 방각본 출판업자로 인정된 점을 반영해, 서당 교재를 출판했던 장혼, 책장수 조신선과 함께 ‘출판’이라는 항목을 새로 설정해 넣었다.
평민서당 교재를 출판하고 인왕산 서당에서 오랫동안 많은 제자를 가르쳤던 장혼, 서른 살 무렵에 《청구도》 필사본을 제작하기 시작해서 환갑 무렵에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간행해 국가기관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누구나 쉽게 길을 알아볼 수 있도록 대량으로 지도를 찍어낸 김정호, 한양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주인이 더이상 읽지 않는 책을 구해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아 지식유통망을 넓혔던 조신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부름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 치료해주었던 의원 백광현, 정유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 나라 은혜에 보답하자”고 외치며 죽어갔던 문기방, 난리통에 일본으로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동래 노파 등이 바로 조선 후기에 평민문화를 확산시켰던 주역들이다.
편역자 허경진은 “남다르게 살았던 평민들은 이들 외에도 무척 많았을 것이다. 종이책이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하면 많은 분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으려 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선시대 평민들의 삶을 엿보는 역사 기록으로서 《조선평민열전》이 꽤 의미 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