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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에라스무스(1466-1536)는 중세 말기와 근대 초 유럽 전반에 널리 퍼진 “인문주의”(Humanismus)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기에 살고 활동했으며, 개혁자인 루터와 그 유명한 “자유의지”에 대한 토론을 벌인 사람으로서 종교개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에라스무스는 비록 개신교의 종교개혁가는 아니지만 신학의 영역에서 특별히 루터 신학과의 비교를 통해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특성을 한층 분명히 보여주는 연구의 테마로 자주 등장해왔다. 에라스무스가 살던 15-16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대격변의 시대였다. 에라스무스는 물리적, 사상적으로 갈등을 빚는 상대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들끓고 있던 유럽의 한복판에서 이성과 대화 그리고 관용과 타협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당시에는 타협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로 신앙의 중요한 측면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과거 냉전 체제의 단순한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명료하게 사안을 파악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전쟁이라는 물리적인 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의 시대 앞에 선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의 초상』은 에라스무스의 삶과 사상과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냄으로써 이 시대를 위한 통찰을 돕는 책이다. 저자인 크리스티네 크리스트 폰 베델은 에라스무스 연구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은 탁월한 스위스 학자로서, 성장 과정, 인간관계, 학문적 고민, 사상적 갈등이라는 다면적인 관점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서술하였다. 삽화가인 알베르 드 퓌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을 담백한 삽화로 그려내어, 두 인물의 애증 어린 관계와 신학적 대립점을 간략하게 제시하여 보여준다. 에라스무스는 젊은 시절부터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돌며 생활했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삶”은 그의 전 생애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가 세계주의적인 정신을 지닌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는 그의 그런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고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지한 연구와 묵상으로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고자 했던 그는 『우신예찬』을 비롯해 『신약성서』 주석 등을 저술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성서 해석법, 개혁 교회의 전례 및 교회 성악 등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세상의 인정과 성공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는 루터가 제시한 종교개혁의 방법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해 중도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개혁주의자와 기존 질서를 수호하던 사람들 모두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에라스무스는 발붙일 곳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에서의 관용과 평화에 대한 강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사후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에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평화와 종교적 관용이라는 근대적 이념이 수립될 수 있었다. 유럽은 오랜 고통과 큰 희생을 치른 후에야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그런 정치적인 측면의 추상적인 가르침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객관적 사고와 이성에 근거한 사회 개혁,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그리스도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대한 공존, 이웃 문화에 대한 감수성 있는 자세, 미래의 꿈나무가 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수법, 자유로운 사회, 비폭력적 정치, 인도주의적 법률 등 현실의 구체적인 지점에서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다.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갈등이 격화되는 현시점에 적용할 수 있는 대가의 아이디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순히 루터와 대립각을 세우던 신학자가 아닌 15-16세기의 문학, 신학, 역사학을 관통하던 한 인문주의자의 삶과 고뇌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의 초상』은 에라스무스의 삶과 사상과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냄으로써 이 시대를 위한 통찰을 돕는 책이다. 저자인 크리스티네 크리스트 폰 베델은 에라스무스 연구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은 탁월한 스위스 학자로서, 성장 과정, 인간관계, 학문적 고민, 사상적 갈등이라는 다면적인 관점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서술하였다. 삽화가인 알베르 드 퓌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을 담백한 삽화로 그려내어, 두 인물의 애증 어린 관계와 신학적 대립점을 간략하게 제시하여 보여준다. 에라스무스는 젊은 시절부터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돌며 생활했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삶”은 그의 전 생애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가 세계주의적인 정신을 지닌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는 그의 그런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고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지한 연구와 묵상으로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고자 했던 그는 『우신예찬』을 비롯해 『신약성서』 주석 등을 저술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성서 해석법, 개혁 교회의 전례 및 교회 성악 등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세상의 인정과 성공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는 루터가 제시한 종교개혁의 방법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해 중도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개혁주의자와 기존 질서를 수호하던 사람들 모두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에라스무스는 발붙일 곳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에서의 관용과 평화에 대한 강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사후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에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평화와 종교적 관용이라는 근대적 이념이 수립될 수 있었다. 유럽은 오랜 고통과 큰 희생을 치른 후에야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그런 정치적인 측면의 추상적인 가르침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객관적 사고와 이성에 근거한 사회 개혁,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그리스도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대한 공존, 이웃 문화에 대한 감수성 있는 자세, 미래의 꿈나무가 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수법, 자유로운 사회, 비폭력적 정치, 인도주의적 법률 등 현실의 구체적인 지점에서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다.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갈등이 격화되는 현시점에 적용할 수 있는 대가의 아이디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순히 루터와 대립각을 세우던 신학자가 아닌 15-16세기의 문학, 신학, 역사학을 관통하던 한 인문주의자의 삶과 고뇌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목차
서문
2판 서문
역자의 글
1장 어린 시절: 네덜란드
2장 배움과 가르침: 파리
3장 평생의 과업을 찾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4장 신약성서 그리고 첫 번째 바젤 체류
5장 학자들과의 갈등, 루터 문제: 뢰벤
6장 복음과 개혁: 바젤
7장 마지막 나날: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다시 바젤로
8장 죽음과 그 이후
에라스무스 연보
약어표
약어로 표기하지 않은 참고문헌
2판 서문
역자의 글
1장 어린 시절: 네덜란드
2장 배움과 가르침: 파리
3장 평생의 과업을 찾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4장 신약성서 그리고 첫 번째 바젤 체류
5장 학자들과의 갈등, 루터 문제: 뢰벤
6장 복음과 개혁: 바젤
7장 마지막 나날: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다시 바젤로
8장 죽음과 그 이후
에라스무스 연보
약어표
약어로 표기하지 않은 참고문헌
책 속으로
몸의 청결함과 정신의 명료함을 추구하던 에라스무스였지만, 동시에 그는 애매모호함의 대가였다. 에라스무스는 질문 중에서도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들을 종종 유보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은 그가 무엇을 추구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부분은 분명히 알게 된다. 이것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교조적인 확고함을 추구하던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 여러 질문을 열린 채로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부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등 열성을 다해 자신의 출생 신분과 부모에 대한 기억을 감추던 에라스무스는 결코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창피했다.
---「1장 어린 시절: 네덜란드」중에서
에라스무스는 행실이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모르고 잘못 행동한 것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를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장 배움과 가르침: 파리」중에서
관용을 부르짖은 에라스무스는 오랜 세월 분리주의자들과 분파들의 영웅으로 남았다. 정확히는 그들만의 영웅으로 남았다. 반면 가톨릭 국가나 프로테스탄트 국가 모두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참된 신앙”을 관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관철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곳에 속한 신학자들은 그 신념을 위한 근거를 제공했다.
---「3장 평생의 과업을 찾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중에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또 그들에 앞서 신비주의와 데보티오 모데르나 전통이 그랬던 것처럼, 에라스무스 또한 성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본문을 묵상하며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의 본문과 독자 사이에 수천 년의 간극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성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를 기록한 언어를 공부해야 할 뿐 아니라, 누가 본문을 처음 기록했는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비로소 올바르게 본문을 정돈하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작업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시간의 간극이라는 껍질에 둘러싸인 알맹이인 성서의 본질적 가르침을 꺼내 독자 개인의 삶과 독자가 속한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본문의 맥락에 관한 철저한 연구가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장 신약성서 그리고 첫 번째 바젤 체류」중에서
에라스무스도 루터와 강조점은 달랐으나 이미 1516년 『신약성서』에서 칭의가 개인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로마서 주해』(1517)와 『갈라디아서 주해』(1519)에서도 칭의가 오직 믿음에 근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그는 루터와 달리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함을 찬미하기 위해 오직 믿음에 의거한 칭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5장 학자들과의 갈등, 루터 문제: 뢰벤」중에서
신앙이 신앙인 개개인의 삶 가운데 자라나야 하듯, 그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사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어슴푸레 인식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고 나서야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리스도는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교회사 속의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새롭게 만나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미 복음서 저자들이 신앙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에라스무스는 이를 들어 요한복음 저자가 왜 이미 존재하는 세 복음서와 다른 방식으로 또 하나의 복음서를 기록했는지 설명했다.
---「6장 복음과 개혁: 바젤」중에서
에라스무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독자들에게 성서의 중요한 본문에 커다란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상황과 정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었다.
---「7장 마지막 나날: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다시 바젤로」중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향한 변함없는 찬탄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낭만주의 시대는 에라스무스를 지나치게 세계적이고, 건조하며, 신중한 인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교 정통주의도 에라스무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톨릭 진영이 보기에도, 개신교 진영이 보기에도, 에라스무스는 너무 대담하고 너무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그러나 양 진영 모두 에라스무스의 명성과 영향이 퍼져나가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학교와 대학들이 설립되었고, 20세기에는 에라스무스 협회가 창립되어 그의 작품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1969년부터 주석을 포함한 새로운 에라스무스 판본이 출판되고 있다. 1974년부터는 영어 번역본도 출판되었다. 기술 발달에 힘입어 에라스무스의 많은 저작을 온라인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학생 교환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았다. 번역으로만 또 선집으로만 에라스무스를 읽는,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이나 인용문 몇 개만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끊임없이 이어짐으로써 자유롭고 편견 없는 사고와 미래 지향적 개혁을 자극하고 있다.
---「1장 어린 시절: 네덜란드」중에서
에라스무스는 행실이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모르고 잘못 행동한 것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를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장 배움과 가르침: 파리」중에서
관용을 부르짖은 에라스무스는 오랜 세월 분리주의자들과 분파들의 영웅으로 남았다. 정확히는 그들만의 영웅으로 남았다. 반면 가톨릭 국가나 프로테스탄트 국가 모두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참된 신앙”을 관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관철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곳에 속한 신학자들은 그 신념을 위한 근거를 제공했다.
---「3장 평생의 과업을 찾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중에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또 그들에 앞서 신비주의와 데보티오 모데르나 전통이 그랬던 것처럼, 에라스무스 또한 성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본문을 묵상하며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의 본문과 독자 사이에 수천 년의 간극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성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를 기록한 언어를 공부해야 할 뿐 아니라, 누가 본문을 처음 기록했는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비로소 올바르게 본문을 정돈하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작업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시간의 간극이라는 껍질에 둘러싸인 알맹이인 성서의 본질적 가르침을 꺼내 독자 개인의 삶과 독자가 속한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본문의 맥락에 관한 철저한 연구가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장 신약성서 그리고 첫 번째 바젤 체류」중에서
에라스무스도 루터와 강조점은 달랐으나 이미 1516년 『신약성서』에서 칭의가 개인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로마서 주해』(1517)와 『갈라디아서 주해』(1519)에서도 칭의가 오직 믿음에 근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그는 루터와 달리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함을 찬미하기 위해 오직 믿음에 의거한 칭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5장 학자들과의 갈등, 루터 문제: 뢰벤」중에서
신앙이 신앙인 개개인의 삶 가운데 자라나야 하듯, 그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사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어슴푸레 인식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고 나서야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리스도는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교회사 속의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새롭게 만나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미 복음서 저자들이 신앙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에라스무스는 이를 들어 요한복음 저자가 왜 이미 존재하는 세 복음서와 다른 방식으로 또 하나의 복음서를 기록했는지 설명했다.
---「6장 복음과 개혁: 바젤」중에서
에라스무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독자들에게 성서의 중요한 본문에 커다란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상황과 정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었다.
---「7장 마지막 나날: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다시 바젤로」중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향한 변함없는 찬탄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낭만주의 시대는 에라스무스를 지나치게 세계적이고, 건조하며, 신중한 인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교 정통주의도 에라스무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톨릭 진영이 보기에도, 개신교 진영이 보기에도, 에라스무스는 너무 대담하고 너무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그러나 양 진영 모두 에라스무스의 명성과 영향이 퍼져나가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학교와 대학들이 설립되었고, 20세기에는 에라스무스 협회가 창립되어 그의 작품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1969년부터 주석을 포함한 새로운 에라스무스 판본이 출판되고 있다. 1974년부터는 영어 번역본도 출판되었다. 기술 발달에 힘입어 에라스무스의 많은 저작을 온라인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학생 교환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았다. 번역으로만 또 선집으로만 에라스무스를 읽는,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이나 인용문 몇 개만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끊임없이 이어짐으로써 자유롭고 편견 없는 사고와 미래 지향적 개혁을 자극하고 있다.
---「8장 죽음과 그 이후」중에서
'45.성서신학 (연구>책소개) > 1.교회사.성서고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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