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3.조선왕실궁궐

2.창덕궁 (내전: 희정당.대조전.동궁.후원입구)

동방박사님 2024. 9. 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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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인정전 바로 동쪽에서 인정전과 나란히 남향하고 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선정전은 인조 반정 때 불에 탄 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옮겨 지은 전각으로, 지붕은 푸른색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궁궐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 하고, 선정전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을 편전(便殿)이라 하였다. 정전인 인정전에 비하여 선정전은 건물이나 마당의 규모가 매우 작다. 다만 지붕을 청기와로 덮어 다른 건물과 구분했을 따름이다.

선정전은 특이하게도 정면에 지붕, 기둥만 있고 벽체는 없는 복도가 붙어있어 인정전으로 이어진다. 선정전 앞에 돌출된 전면 복도는 정조 사후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정전은 순조 즉위년(1800)에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선정전에도 혼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 순조 이후 선정전이 혼전으로 빈번하게 쓰이자, 편전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정전 바닥에는 지금은 마루가 깔려 있으나, 원래 방전(方甎)이라 하여 네모난 벽돌이 깔려있었다.선정전 바닥이 언제 마루로 변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선전관청에 근무하는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다.장방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시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있던 곳도 장방이라고 하였다.

선전관청 남쪽으로 인정전 동쪽 행각에 붙어 남북으로 나란히 마당이 두 개 있다.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문서고(文書庫)가 있다. 우사와 당후는 임금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일컫는 말로, 사관이 머물던 곳이다. 사관은 임금 가까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남겼다.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비록 임금이라도볼 수 없도록 금하였다. 우사와 당후에서는 임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여 사초를 쓰는 곳이었으므로, 계속 생산되는 사초를 보관하고자 옆에 문서고를 세웠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 육선루와 악기고, 대청(臺廳)이 사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은대와 상서성은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다. 육선루는 승정원의 다락이다. 육선루와 나란한 누마루에는 악기고가 있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손쉽게 악기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곳에 보관한 것이다. 대청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름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곳이었다.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궁방(弓房), 주원(廚院), 공상청(供上廳), 서리방(書吏房),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촉방(燈燭房), 사알방(司謁房), 소주방,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자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주원은 사옹원(司甕院)의 다른 이름으로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다.

궁방은 활과 화살촉, 등촉방은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내시부(內侍府)에 속한다.사알방은 액정서에 소속된 정6품 잡직 관원으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사알(司謁)하는 곳이었다. 서리방은 궁궐내 각 기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머물던 곳으로, 이들은 문서 처리, 기록,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정청은 이조의 당상관 및 병조판서 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 곳이다.

소주방은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내반원은 환관들의 관청인 내시부의 다른 이름으로, 궐내 음식물 감독, 명령 전달, 궁문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궁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했던 이런 기관들이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에 조밀하게 모인 까닭은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의 마당과 건물과 에워싸기 위해서였다.이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보호하는 동시에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전각이 모두 없어지고 빈 땅으로 남아 선정전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현재 이 곳에는 선정전만 원래대로 남아있고 선정전 앞의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홑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선정전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임금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침전이 있는 곳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선정전 동쪽으로 맨 앞에는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이 자리 잡고 있다.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희정당은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이었다. 희정당은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으로, 선정전은 건물의 최고 위계를 나타내는 ''(殿)인데, 희정당은 그 다음 위계인 ''()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희정당은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翼工) 양식을 썼다. 임금의 거처답게 거의 담 높이에 이르는 높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어, 이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행랑과 확인히 구별되었으며, 그리 넓지 않은 마당 한쪽에 하월지(荷月池)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고 등을 두어 밤에 마당을 밝힐 수 있게끔 하였다. 희정당 남쪽에는 숙종 13(1687)에 세워진 제정각(齊政閣)이 있었다. 여기에 천체를 관측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설치하고 임금이 천체를 관찰하여 하늘의 도를 본받기에 힘썼다고 한다.

동궐도에서 희정당은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기단 서쪽 한 곳에는 아궁이가 보이며, 건물 동쪽에는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현재의 전각은 정면 11, 측면 5칸 규모로, 정면 9, 측면 3칸 주위로 툇간을 설치하여 통로로 썼다. 정면에서 가운데 3칸의 주칸은 좌우의 주칸보다 넓고 우물마루를 깔아 전체를 튼 통칸으로 서양식 접객실로 만들었고, 서쪽 3칸도 통칸으로 만들어 회의실로 꾸몄으며,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고, 동서쪽 양 옆칸 뒤쪽에 골방과 목욕탕 등을 설치하여 용도에 맞게 썼다.

궁 밖에서 대조전까지 가려면 돈화문과 진선문, 숙장문을 지나 적어도 5개 이상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하였다. 희정당에서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宣平門)까지는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고,선평문에서 대조전 월대까지는 어도가 깔려있어 두 건물 사이를 오가는 데 배려하고 있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대조전은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였다. 성종, 광해군, 인조, 효종, 철종, 순종 등이 거처하였으며,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태어난 곳이다. 또 폐비 유씨, 효현왕후, 효정왕후 등 왕비들이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다. 가운데 정면 3, 측면 2칸은 통칸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ㆍ서쪽으로 각가 정면 2,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퇴칸은 월대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뒤 퇴칸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종들의 처소로 삼았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큰 의자를 두었으며, 침실과 작은 방은 온돌로 꾸몄다.

대조전에는 희정당보다 훨씬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다. 대조전의 높고 넓은 월대는 삼면이 모두 화려한 휘장문이 있는 녹색 판장(板牆, 나무판으로 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왕비의 활동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가렸다. 대조전의 뒷마당은 넓고 화려하다. 여기에 징광루와 집상전이 있고, 대석 위에 올려진 세 개의 괴석과 석분에 심은 작은 소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경사지에는 큰 돌을 다듬어 계단식 석축을 쌓고 꽃나무를 심는 화계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갇혀지내는 왕비의 단조로운 생활을 배려하였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수라간이 위치해 있으며 더 안쪽으로는 2층 건물인 장광루(澄光樓)와 경훈각(景薰閣)이 있다. 그 바로 오른쪽에는 대비의 처소인 집상전(集祥殿)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광해군 15(1623)에 인조반정으로 모두 불탄 뒤 인조 25(1647)에 옛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위쪽 건물은 징광루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높은 월대 위에 올려진 이층집으로 청기와로 지붕을 덮어 모습이 화려하였다. 경훈각은 1층이므로 온돌방이 있으나, 징광루는 2층이어서 마루로 되어 있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온돌로 따듯한 경훈각을 주로 이용하고 봄과 여름에는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징광루를 썼다.

순조 33(1833)에 까닭 모를 화재로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하여 징광루, 양심합(養心閤) 등이 불타 재건된 바 있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타 1920년에 새로 지었다. 불이 나고 나흘 뒤 이왕직에서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은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을 다시 짓되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강녕전은 희정당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으로, 건순각은 흥복헌으로, 만경전은 경훈각으로 옮겨 지어졌다. 당시 화재로 주요 전각 뿐 아니라 궁중의 가구와 집기와 오래된 유물도 모두 소실되었다. 원래 대조전은 지붕이 일자형식이 아닌 솟을지붕 형식이었으며 뒤에 집상전도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집상전자리에 현 대조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화계뒤로 후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이 문뒤에는 잔디밭이 있고 그 한가운데 덕수궁에서 옮겨온 가정당이 홀로 외로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