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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경의 웅장한 파노라마가 시작되는 곳, 즉 성경의 관문이자 창세기의 서두인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소위 창세기 원역사의 성격을 정의하고 규명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가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에도 이 질문들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이 문제를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본문은 세 명의 전문 구약학자가 각자의 주장(문자적 실제 역사, 원형적 역사, 신학적 역사)을 개진하고 뒤에 다른 두 학자가 그 글에 대한 논평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학자들은 먼저, 창세기 1-11장의 장르를 밝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한다. 그리고 그 장르를 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경 해석상의 의미를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장르 연구를 네피림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바벨탑 사건 등 특정 부분에 적용하여 해석한다.
호프마이어는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 및 실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독자들을 겨냥했다고 보이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와 문학적인 요소 및 역사적인 요소로 해석되어야 하는 여러 특징을 가리키며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다. 웬함도 기본적으로는 호프마이어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웬함은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데 주저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서, 이를 추상화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즉 어떤 그림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그림의 세세한 사항들은 의미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웬함은 창세기 1-11장을 원형적인 역사로 믿고,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이 고대에 널리 통용되던 방법대로 창세기를 썼으며, 그들에게는 실제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이 단지 신학적 목적을 위해 재구성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책의 목적은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해 각 진영에 속한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기 다른 주장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다. 이들은 책임감 있게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장르에 관한 문제를 사려 깊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정확히 어떤 장르의 글이며,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세 명의 학자 모두 서로 자신들이 옹호하는 입장이 가장 설득력 있고 유익하다고 주장하지만, 본문은 이들의 이론과 학설을 소개만 할 뿐 특정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오히려 상호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이들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창세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이런 시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풍성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창세기 원역사의 해석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고 편협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통합적인 통찰력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로운 토론장이 될 것이다.
호프마이어는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 및 실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 독자들을 겨냥했다고 보이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와 문학적인 요소 및 역사적인 요소로 해석되어야 하는 여러 특징을 가리키며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다. 웬함도 기본적으로는 호프마이어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웬함은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데 주저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서, 이를 추상화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즉 어떤 그림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그림의 세세한 사항들은 의미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웬함은 창세기 1-11장을 원형적인 역사로 믿고,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이 고대에 널리 통용되던 방법대로 창세기를 썼으며, 그들에게는 실제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이 단지 신학적 목적을 위해 재구성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책의 목적은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해 각 진영에 속한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기 다른 주장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다. 이들은 책임감 있게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장르에 관한 문제를 사려 깊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정확히 어떤 장르의 글이며,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세 명의 학자 모두 서로 자신들이 옹호하는 입장이 가장 설득력 있고 유익하다고 주장하지만, 본문은 이들의 이론과 학설을 소개만 할 뿐 특정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오히려 상호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이들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창세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이런 시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풍성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창세기 원역사의 해석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고 편협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통합적인 통찰력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로운 토론장이 될 것이다.
목차
역자 서문
약어
서론: 바싹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장르에 관한 연구 _찰스 할톤
1장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제임스 K. 호프마이어
논평: 고든 J. 웬함, 켄톤 L. 스팍스
2장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고든 J. 웬함
논평: 제임스 K. 호프마이어, 켄톤 L. 스팍스
3장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켄톤 L. 스팍스
논평: 제임스 K. 호프마이어, 고든 J. 웬함
결론: 우리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약어
서론: 바싹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장르에 관한 연구 _찰스 할톤
1장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제임스 K. 호프마이어
논평: 고든 J. 웬함, 켄톤 L. 스팍스
2장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고든 J. 웬함
논평: 제임스 K. 호프마이어, 켄톤 L. 스팍스
3장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 _켄톤 L. 스팍스
논평: 제임스 K. 호프마이어, 고든 J. 웬함
결론: 우리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속으로
우리 문화에도 창세기 1-11장과 비슷한 장르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장르의 글일까? 또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진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물음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이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개인과 성도 모두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세 명의 학자들은 각기 자신들이 옹호하는 입장이 가장 설득력 있고 유익하다고 주장하겠지만, 이 책 자체는 그들의 이론과 학설을 소개만 해줄 뿐 어떤 특정한 입장과 의견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서론」중에서
그 장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창세기의 저작 목적은, 특히 창세기 1-11장의 저작 목적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묘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처럼 과거에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고대 문헌들은, 현대 역사학자나 신문기자처럼 역사적인 사료편찬의 정확성(historiographical precision)을 바탕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지리적인 증거는 그 사건들이 아주 오랜 과거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협곡이라는 실존 공간에서, 그리고 이 내러티브를 접하는 고대의 독자들이나 청자들이 인식할 수 있었던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했었음을 의미한다. 톨레도트 구문들이 둘러싸고 있는 창세기 전체의 틀을, 고대 독자들이 네피림 에피소드, 홍수 내러티브, 바벨탑 내러티브를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 특정 지역에 대한 지리적인 배경에 입각해서 자세히 검토하면, 21세기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들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1장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나는 장르와 관련하여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 다른 대안들보다도 원형으로서의 역사라는 범주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또 나는 창세기 1-11장이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10세대,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람까지 10세대로 구성된 직선적으로 확장된 족보/계보라고 주장했다. 이 족보에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은 그 이름과 첫아들을 낳았을 때의 나이 그리고 죽었을 때의 나이에 의해 구별이 가능하다. 그들 중 몇몇 사람에 대해서는 아들 노아에 대한 라멕의 기도라든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 관한 목격담 등 족보상의 기록 이외에 자세한 설명이 별도로 첨부되기도 한다. 또 에덴동산이나 홍수에 관해 추가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이 아주 긴 이야기의 형태로 확대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야기들이 족보의 연대기적인 뼈대에 부가적으로 추가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희미하고 멀고 먼 옛 시대에 있었던 연쇄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적인 순서와 인과관계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창세기 1-11장을 신화나 역사보다는 원형적인 역사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2장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서로 비교하되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자료들을 구성 및 재구성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그러나 그 저자들에게는 그들이 남긴 기록을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유사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고고학적인 저자는 뱀이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저자들이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처럼 완전히 역사적인 사안들을 회피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역사적인 물음들은 당시 성경 저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핵심 사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 그들은 역사적인 문제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3장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이 책에 글을 게재한 학자들은 성경 학계에서 이미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최고의 학자들이다. 이 학자들은 평생 동안 성경 연구에 매진하여 얻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글을 집필했다. 또 이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신학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교회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데 큰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서로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명의 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는 해당 주제의 복잡성에 대해 어느 정도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세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이 사안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이 문제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더욱 깊이 하나로 연결시켜준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문제와 비슷한 사안들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과 관련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잠잠하도록 종용한다는 점이다.
---「서론」중에서
그 장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창세기의 저작 목적은, 특히 창세기 1-11장의 저작 목적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묘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처럼 과거에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고대 문헌들은, 현대 역사학자나 신문기자처럼 역사적인 사료편찬의 정확성(historiographical precision)을 바탕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지리적인 증거는 그 사건들이 아주 오랜 과거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협곡이라는 실존 공간에서, 그리고 이 내러티브를 접하는 고대의 독자들이나 청자들이 인식할 수 있었던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했었음을 의미한다. 톨레도트 구문들이 둘러싸고 있는 창세기 전체의 틀을, 고대 독자들이 네피림 에피소드, 홍수 내러티브, 바벨탑 내러티브를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 특정 지역에 대한 지리적인 배경에 입각해서 자세히 검토하면, 21세기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들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1장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나는 장르와 관련하여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 다른 대안들보다도 원형으로서의 역사라는 범주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또 나는 창세기 1-11장이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10세대,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람까지 10세대로 구성된 직선적으로 확장된 족보/계보라고 주장했다. 이 족보에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은 그 이름과 첫아들을 낳았을 때의 나이 그리고 죽었을 때의 나이에 의해 구별이 가능하다. 그들 중 몇몇 사람에 대해서는 아들 노아에 대한 라멕의 기도라든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 관한 목격담 등 족보상의 기록 이외에 자세한 설명이 별도로 첨부되기도 한다. 또 에덴동산이나 홍수에 관해 추가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이 아주 긴 이야기의 형태로 확대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야기들이 족보의 연대기적인 뼈대에 부가적으로 추가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희미하고 멀고 먼 옛 시대에 있었던 연쇄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적인 순서와 인과관계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창세기 1-11장을 신화나 역사보다는 원형적인 역사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2장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서로 비교하되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자료들을 구성 및 재구성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그러나 그 저자들에게는 그들이 남긴 기록을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유사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고고학적인 저자는 뱀이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저자들이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처럼 완전히 역사적인 사안들을 회피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역사적인 물음들은 당시 성경 저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핵심 사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 그들은 역사적인 문제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3장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중에서
이 책에 글을 게재한 학자들은 성경 학계에서 이미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최고의 학자들이다. 이 학자들은 평생 동안 성경 연구에 매진하여 얻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글을 집필했다. 또 이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신학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교회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데 큰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서로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명의 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는 해당 주제의 복잡성에 대해 어느 정도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세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이 사안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이 문제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더욱 깊이 하나로 연결시켜준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문제와 비슷한 사안들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과 관련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잠잠하도록 종용한다는 점이다.
---「결론」중에서
추천평
근년에 들어와 고고학, 고대 인류학 및 과학의 발전과 함께 창세기의 앞장들, 이른바 창세기의 원역사는 기독교 내외적으로 가장 많은 의심의 해석학에 시달려왔다. 결국 창세기 문제는 해석학의 문제이며 동시에 장르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책에는 세 명의 전문 구약학자들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세 가지 의견(역사-신학적 문헌, 고대 역사 편찬 문헌, 원형적 역사 문헌)을 제시하고 열띤 토론을 한다. 정교한 논리, 흥미로운 전개, 대조적 개진 등이 이 책의 매력이다. 재미있다. 흥미롭다. 가독성이 높다. 성경학도나 목회자, 사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교수)
-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교수)
이 책은 창세기 1-11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와 신학도가 꼭 참고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대표적인 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꼭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추천한다.
- 기동연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 기동연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전문가들이 공통된 주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굉장한 지적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원역사에 대해 다소 보수적 견해, 중도적 견해, 다소 진보적 견해, 그리고 그 세 견해 사이에 오가는 토론을 함께 읽으면서 독자들은 창세기 1-11장의 원역사에 대해 편협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통합적인 통찰력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정훈 (부산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 김정훈 (부산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책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인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성경 해석을 달리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자애로운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창세기 1-11장은 충격적일 정도로 인간지과(人間之過), 곧 인간 관점의 편향성과 오류 가능성을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이 권고하는 대로 우리는 성경 해석상의 차이로 교단 분열을 정당화하거나 어제의 형제자매를 악마화하는 교만을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유익한 책이다.
- 김회권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 김회권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창세기 1-11장의 장르 이해와 역사성 이해는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연구 대상이 되어왔고, 오늘날까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창세기 1-11장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성서 해석학의 좌표를 결정한다. 이 시대 최고의 구약학자들이 흥미진진한 주제에 관해 치고받는 고급스러운 토론의 현장에 독자들을 초청하고 싶다.
- 차준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 차준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46.기독교신학 (연구>책소개) > 8.목회신학(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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