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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연동된 한중 ‘관계’의 역사
『20세기 한중관계사 연구』는 역사학자 배경한이 근 30년에 걸쳐 발표한 19편의 논문을 단행본의 형태로 새롭게 엮어 펴낸, 한국과 중국 사이의 20세기 전반기 ‘관계사’를 총망라하는 대작이다. 교류, 외교, 이주, 교역, 상호인식 등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관계사’에 근거한 본서는 중국의 1903~1949년, 특히 신해혁명부터 국공내전 시기에 한정하여, 중국에서 펼쳐졌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인식과 본국 정부 및 임시정부가 수립했던 정책과 그 결과를 비롯하여 열강들의 다툼으로 재편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상 등을 상세히 다루었다.
20세기가 시작할 즈음 한국과 중국은 서구 열강의 격랑에 같이 휩쓸린 탓에 서로 교섭하고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서 벌어진 한인 지사들의 독립운동 활동상이나 중국 정부와 인사의 공적, 사적 지원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알려진 극히 일부분의 사실에 기댄 추상적인 기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졌던 부분을 저자는 중화권 각지의 도서관과 공문서 보관소를 섭렵하여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저술하고, 이 자료에 입각하여 당시 한인 지사들과 중국 지사들의 계획,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그렸던 ‘큰 그림’이 무엇이었을지를 다각도에서 추론한다.
또한 쑨원이나 장제스처럼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중화민국 정부 인사들과 김구와 여운형 같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이들 간에 이루어진 협의와 암묵적인 이해관계 속에 내재된 입장의 차이에 대해서도 상세히 살펴본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지구지역사 및 동아시아사 시각하의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기존 연구성과 및 연구시각 검토
Ⅰ.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Ⅱ. 새로운 관점의 모색: 지구지역사 및 동아시아사 시각하의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Ⅲ. 차례의 구성과 문제 제기
제1장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한국(1903?1913)
들어가는 말
제1절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
Ⅰ. 청일전쟁 이후 중화제국체제의 와해와 한중관계의 변화
Ⅱ. 중국 공화혁명의 전개와 청조의 멸망
Ⅲ. 공화혁명의 확산-한국과 베트남의 경우
Ⅳ. 변방의 이탈-티베트와 몽골의 경우
제2절 신해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의 본격화
―상하이·난징 지역의 초기(1911~1913) 한인 망명자들과 신해혁명
Ⅰ. ‘중국혁명’과 초기 한인 망명자들
Ⅱ. 우창기의와 위안스카이 토벌전쟁에의 참여
Ⅲ. 쑨원·혁명파 인사들과의 교류
제3절 신해혁명에 참여한 한국인들 1
―김규흥의 광둥廣東에서의 활동
Ⅰ. 중국 망명 이전의 교육구국운동
Ⅱ. 중국 망명과 상하이·난징에서의 활동
Ⅲ. 신해혁명과 광둥군정부에의 참여
Ⅳ. 토원운동과 『향강잡지』의 창간
제4절 신해혁명에 참여한 한국인들 2
―김병만의 허난河南에서의 활동
Ⅰ. 중국 망명 이전 애국계몽운동과 『민권자치제』 번역
Ⅱ. 중국 망명과 허난행
Ⅲ. 허난·산둥 지역 혁명파 인사들과의 교유
Ⅳ. 신해혁명 이후 허난에서의 활동
나오는 말
제2장 1910년대 동아시아의 반제민족운동과 한중연대의 모색(1914?1919)
들어가는 말
제1절 제1차 세계대전, 파리강화회의와 동아시아 반제민족운동의 고양
―신규식·동제사그룹의 중국 내 청원운동과 한중연대의 모색
Ⅰ. 1917년, 종전에의 전망과 강화회의 참여 준비
Ⅱ. 1918년 12월~1919년 1월, 광둥군정부 방문과 청원서 제출
Ⅲ. 1919년 1월~2월, 베이징정부와 미국 공사관에의 청원서 제출
Ⅳ. 강화회의 관련 청원에 대한 중국인들의 호응
제2절 동아시아 반제민족운동으로서의 3·1운동과 5·4운동
Ⅰ. 3·1운동과 5·4운동의 동시성
Ⅱ. 한국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전환
제3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지구지역사상의 의미
―동아시아 지역 민주공화, 반제연대의 출발점
Ⅰ. 근대적 국제도시 상하이 지역의 한인사회 형성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
Ⅱ. 상하이 한국임시정부 성립의 동아시아 역사상 의의
나오는 말
제3장 1920년대 동아시아 반제연대와 한중연대의 고양(1920?1930)
들어가는 말
제1절 임시정부의 워싱턴회의 참석 외교와 중국
―신규식의 광저우 호법정부 방문과 쑨원
Ⅰ. 신규식 광저우 방문의 배경과 일정
Ⅱ. 임시정부 승인 문제와 쑨원의 입장
제2절 1920~1923년 중한호조사의 성립과 한중연대 활동
Ⅰ. 중한호조사의 성립과정
Ⅱ. 상하이 중한호조총사와 우산, 박은식
제3절 임시정부와 동아시아 반제연대
―장저우회의(1920년 4~5월)와 한·중·러 사회주의자들의 반제연대
Ⅰ. 임시정부 성립 직후 소비에트러시아·코민테른과의 접촉과 여운형
Ⅱ. 장저우회의와 여운형
제4절 임시정부와 국민혁명
―여운형의 중국국민당이전대회 참석과 반제연대 활동
Ⅰ. 코민테른에의 접근
Ⅱ. 국민당이전대회 참석과 ‘반제연대’ 연설
Ⅲ. ‘반제연대’로서의 북벌 지원
나오는 말
제4장 중일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1931?1940)
들어가는 말
제1절 중일전쟁 초기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장기항전에의 “동원”
― 윤봉길의거 이후 김원봉·김구에 대한 지원과 장제스·국민정부의 입장
Ⅰ. 1·28 상하이사변과 윤봉길의거
Ⅱ. 장제스·국민정부의 김원봉·김구 지원과 ‘장기항전’
제2절 중일 전면전쟁 발발 직후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그 성격
― 조선의용대 창설·운영에 대한 군통·군사위원회의 “지원”과 대적선전전에의 “동원”
Ⅰ. 국민정부의 군사정보기관, 군통의 성립과 역할
Ⅱ.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역행사(군통),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원”
Ⅲ. 조선의용대의 “대적선전전”에의 동원
제3절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국민정부의 한국 인식
―한국광복군에 대한 통제와 임시정부 승인 유보
Ⅰ.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장제스·국민정부의 입장
Ⅱ. 임시정부 승인 문제와 장제스·국민정부의 태도
Ⅲ. 한국임시정부 승인 문제와 중미관계
제4절 1941년의 “꿈”
―미국 참전 직전 한국광복군의 국제정세 인식과 종전에의 전망
Ⅰ.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한국청년』, 『광복』의 발간
Ⅱ. 『한국청년』, 『광복』에 나타난 국제정세 인식
나오는 말
제5장 태평양전쟁·국공내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변동(1941?1949)
들어가는 말
제1절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장제스·국민정부의 입장
Ⅰ. 장제스 국민정부의 카이로회담 준비과정과 한국문제
Ⅱ.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장제스의 입장
제2절 종전 직전 중미·한미관계의 변화와 중국의 한국광복군 통제 완화
― 1944년 6월 미국 부통령 월리스의 중국 방문 전후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과
국민정부의 한국광복군 통제 완화
Ⅰ. 월리스 부통령의 방중과 중미관계
Ⅱ. 임시정부의 월리스 면담 시도와 비망록 전달
Ⅲ. 국민정부의 대응: 구개준승의 철폐와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완화”
제3절 종전 전후 시기 중미관계와 국민정부의 대한정책
―종전 직전 전후 한국문제 처리 구상과 종전 직후 임시정부 환국 과정
Ⅰ. 종전 직전 국민정부의 한국문제 처리 구상
Ⅱ. 종전 직후 임시정부의 환국 문제와 국민정부의 입장
제4절 국공내전 시기(1946~1949) 국민정부의 대한정책
―국민정부의 둥베이 한인·한반도 관련 정보 수집 노력과 주화대표단
Ⅰ. 둥베이에서의 국공내전과 주화대표단
Ⅱ. 국민정부의 둥베이 한인·한반도 관련 정보 수집과 주화대표단
나오는 말
종장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와 21세기 한중관계와의 연속성
Ⅰ. 이 책의 내용 요약
Ⅱ.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와 21세기 한중관계와의 연속성 문제
참고문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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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절의 출처
사항·인명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배경한 (裴京漢)
1953년 경북 김천 출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난징(南京)대학 역사연구소 연구교수(1995~1996), 미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 방문연구원(2006~2007), 중국 저장(浙江)대학 장제스연구소 객좌교수(2010~2024),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2001~2002), 한일역사가회의 한국 측 운영위원장(2018~2022) 등을 지냈다. 19...
책 속으로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하는 20세기 한중관계는 바로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마찬가지로 서구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아식민지亞植民地, semi-colony로 전락한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아래 식민지에 버금가는 처지에 놓이게 된 중국과, 아시아의 신흥 열강 일본의 식민지로서 국가적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한국의 관계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사”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기의 한중관계는 아식민지와 식민지 간의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한편으로 식민지 한국의 아식민지 중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의 전통적 중화체제로의 회귀라는 다면적·비대칭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존성, 회귀성 및 비대칭성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 근대국가에 대한 모색 단계로서의 중국의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과 연동하면서 전개된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의 공화(민주)와 독립(자주)에 대한 지향과 이를 둘러싼 한중 간의 협력, 길항관계가 될 것이다. 이른바 중화제국체제의 와해라는 위기현상은 신해혁명의 또 다른 면모인 것이다.
---「제1장 -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한국(1903~1913)」중에서
중국혁명의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되는 경우는 1913년 초에 상하이·난징으로 망명해 갔던 정원택한테서도 확인되고 있다. 정원택은 1912년 초에 대종교 쪽과 연줄이 닿아 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1년을 지낸 뒤 1913년 초에 다시 상하이·난징 쪽으로 유학을 갔던 것인데, 그의 중국 망명 결심은 당시 한 선비로부터 ‘중국에서 쑨원과 황싱黃興을 중심으로 한 혁명운동이 한창이고 뜻있는 한국의 청년들도 다수 참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 1912년 초에 난징에 망명하여 기독교병원에서 일하며 그곳의 정치지도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던 이태준李泰俊도 1911년 말 친구인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망명을 모의하게 된 것이 “일제의 폭압으로 불만이 쌓여가던 중에 마침 이웃 대륙에서 혁명군의 소식이 천하에 진동하자 이에 감격되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3년 4월경에 상하이로 망명해 간 김규식金奎植의 경우에도 신해혁명(우창기의)의 성공이 주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제1장 -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한국(1903~1913)」중에서
5·4운동 발발 전후까지 계속된 3·1운동에 대한 중국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1운동의 반일 독립 주장과 산둥문제를 둘러싼 중국인들의 반일 주장을 하나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3·1운동 직후인 3월 14일자 『대공보』 제1면에는 중요기사로 「강화회의에 대한 로이터통신路透社의 보도」를 다루고 있는 동시에 베이징의 영자지 『Peking and Tientsin Times 京津泰晤士報』의 보도를 인용하여 「한인독립운동의 추가 소식餘聞」을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니 바로 옆에 붙은 이 기사들을 보는 경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산둥문제와 한국의 독립문제가 모두 일본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대공보』의 경우, 3·1운동 내지 한국독립운동과 파리강화회의 내지 산둥문제를 병렬하는 이러한 보도는 그 후에도 연이어 나타나고 있었으니 3월 26일자, 28일자, 29일, 4월 13일자, 14일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를테면 5·4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시기 중국인들에게 3·1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산둥반도를 회수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창구였던 것이다.
---「제2장 - 1910년대 동아시아의 반제민족운동과 한중연대의 모색」중에서
여운형의 중국혁명에 관한 관심은 중국혁명 영수 쑨원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운형이 쑨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16년 『자림서보字林西報』 기자였던 천한밍陳漢明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당시 여운형의 쑨원에 대한 첫인상은 쌀쌀하고 교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로 탕샤오이唐紹儀, 쉬첸徐謙, 장타이옌章太炎 등과 상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쉬첸의 소개로 쑨원을 다시 만난 이후 여운형의 쑨원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당시 쑨원은 여운형을 환대하며 부인 쑹칭링宋慶齡을 소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방정부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우차오슈伍朝樞, 천요우런陳友仁 등과 협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여운형은 상하이 모리아이로莫利愛路(현재의 香山路)에 있는 쑨원의 사저를 자주 방문하여 한국의 독립과 혁명 방안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여운형이 쑨원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4년 11월, 쑨원이 북상北上 도중 상하이에 들렀을 때였다. 쑨원의 도착 소식을 듣고 직접 부두로 환영을 나간 여운형은 그와 함께 사저로 가서 몇 시간을 환담했는데 이 때 여운형이 쑨원의 백발이 많아진 것을 보고 “선생의 머리칼은 더 희어졌으나 선생의 혁명은 더 붉어졌다”고 말하자 쑨원은 “사람의 머리털은 늙으면 하얘지지만 혁명은 늙으면 붉어진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뒤에 여운형이 국민당이전대회에 참석하여 연설하면서 서두에 이 일화를 소개한 것을 보면, 쑨원의 이 말이 여운형에게 남긴 인상이 매우 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3장 - 1920년대 동아시아 반제연대와 한중연대의 고양」중에서
그리고 중한호조사의 성립과정과 활동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우산이 주도하고 있던 사회단체 중화전국도로건설협회(도로협회)와 그 기관잡지 『도로월간道路月刊』에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던 박은식의 기고와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은 ‘중한호조’의 실제적 사례로서 주목받아야 한다. 당대 한국 최고의 언론가, 역사학자이던 박은식은 『도로월간』의 명예논설위원名譽撰述로서 이름을 올렸고 여러 편의 논설을 기고하는 가운데 한국독립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를 강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 근대화의 출발점으로서 도로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침탈당한 철로 등 경제적 교통 주권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방안으로서 도로 건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박은식의 논설들은 동시에 반제연대를 통한 국가적 자주와 독립의 회복이라는 한중 간의 공동목표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3장 - 1920년대 동아시아 반제연대와 한중연대의 고양」중에서
한편으로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지 하루 뒤인 4월 30일 난징에서 관련 신문보도를 통하여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장제스는, “옛날 사마자장司馬子長(곧 司馬遷)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산 개인도 (그 정도가) 정말 심하다고 할 텐데 한 국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을 산다면 (그 정도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라는 고인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무력을 남용하며 침략을 좋아하는 자들 또한 (이번에) 뉘우치는 바가 있을까?”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윤봉길의거는 결국 일본이 다른 국가(한국)의 원수가 되어 생긴 일이라는 것이고 이 사건을 통하여 전쟁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좋아하는 일본이 반성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것 정도가 이날의 일기에 나타난 장제스의 입장이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원론적 비판에 머무를 뿐, 윤봉길의거에 대한 분명한 지지나 찬양의 입장을 밝히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제4장 - 중일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중에서
그러나 임시정부 측의 독자적인 광복군 출범은 장제스 및 군사위원회 측과의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으니 장제스는 1941년 7월 초 한국광복군의 성립을 인가한다고 하면서 “다만 일정한 한도를 정해야 한다”고 하고 허잉친에게 군정부가 직접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또 1941년 10월 말 허잉친에게 보낸 지시에서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모두 군사위원회에 예속케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며, 이어서 11월 중순 군사위원회 판공청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구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이라는 규정을 만들어 직접적인 통제 정책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제4장 - 중일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중에서
이상 언급한 장제스의 카이로회담 참가 여부와 회의 일정, 장소를 둘러싼 협의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자면 당시 미국의 배려에 의하여 사강에 합류하게 된 장제스로서는 사강회담 참석을 통하여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에 참여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입장 표명에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과 군사적 협력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영국과도 여러 가지 문제로 불편한 관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사강의 일원으로 초청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미국조차도 중국이 아시아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견제 의사를 표하고 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사강 진입은 장제스의 말대로 들러리로서의 “허영”에 불과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마디로 대국의 회복을 노리는 장제스로서는 대국의 지위를 받쳐줄 만한 국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식이든 대국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난국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런 점에서 카이로회담에 임하는 장제스의 태도는 처음부터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5장 - 태평양전쟁·국공내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변동」중에서
요컨대 둥베이 지역 국공내전의 진전 속에서 중국공산당 군대가 초반 국민당군의 우세 속에서도 세력을 유지해가는 것뿐만 아니라 1947년 중반 이후 우세적 위치를 확보해 가는 데에 조선의용대와 둥베이항일연군으로 대표되는 한인 군대의 참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 북한을 통한 교통로의 확보와 북한으로부터의 군수품 지원, 북한과의 경제적 교역 확대 또한 중국공산당 군대의 우세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둥베이에서의 국공내전을 비롯하여 전국적 국공내전의 진전과 관련하여 국민정부로 하여금 둥베이 한인과 북한의 중요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제5장 - 태평양전쟁·국공내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변동」중에서
출판사 리뷰
관계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에는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등등 여러 갈래의 연구 분야가 있다. 그중에서도 관계사는 결이 조금 다르다. ‘관계’라는 단어의 뜻만 보더라도 둘 이상의 주체가 있다는 뜻이고, 그 주체들이 서로 엮이면서 생겨나는 모든 사항이 그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배경한은 관계사를 교류, 외교, 이주, 교역, 상호인식을 포함한 ‘관계’를 다루는 사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곧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국가와 국가가 관계를 맺게 되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분야가 더욱 광범위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주장은 저자의 최신작 『20세기한중관계사 연구』에서 잘 설명된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청 제국에서 중화민국이 되면서 일어난 변화
오래전부터 한국과 중국은 긴 인연을 이어 왔다. 사대관계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은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계에서 중국은 으레 한국을 상대로 우위를 차지했고 한국 역시 중국을 선진문화국 내지 종주국으로 대접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변화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중국의 위치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베트남과 몽골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은 서구열강과 일본이 20세기를 전후하여 제국주의의 기치를 앞세우며 등장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새로운 역사의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40년, 1856년)에서 패배한 이후 근대화를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한 개혁정책 노력에 실패한 청 제국은 청일전쟁(1894년)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하여 민국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1876년)을 계기로 강제로 문호 개방을 하게 된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거듭났지만 1910년에 일본에 합병된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중국에서 발발한 신해혁명은 열강의 억압을 받고 있던 동아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오랜 시간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을 세웠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완전히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한국인들에게 신해혁명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폭압적으로 행동하는 만주족 왕조에 맞서서 자신들의 주권을 부르짖으며 기어이 임시정부를 세운 중국 내 혁명파 세력의 행동력은, 일제에 핍박받는 한국인들에게 감동과 동시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한국 내에서 일제에 반감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시도하던 인사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아예 중국 현지, 혹은 중국을 거쳐 해외로 나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중국으로 간 한인 지사들의 치열한 타향살이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현지 중국인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는 편이 일제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외국인이 단독으로 행동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자연히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연대하고, 중국과 한국이 서로를 돕는다는, 이른바 반제연대(反帝連帶)와 중한호조(中韓互助)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광둥 지역과 허난 지역, 상하이와 충칭 등 중국 현지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양태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하였던 쑨원 등 혁명지사들에게 적극적인 인적, 물적 도움을 요청하거나,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한국 내 정세를 해외로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는 세력도 있었고, 더 나아가 중국 현지에서 보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인재 양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한 임시정부 요인도 있었다. 김구의 요청으로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를세워 한국인 학생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대로 중국에 한국이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한인 지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위안스카이의 전횡에 맞서는 토원운동에 직접 참가하는 한국인들도 있었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으로 대립한 끝에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전까지 장제스의 정치적 의견에 공감하고, 그가 제안한 한중호조 연대를 따르는 임시정부 요인들 또한 많았다. 이 기간 동안 여운형과 쑨원, 김구와 장제스, 신규식과 천치메이 등 한중 인사들이 직접적으로 교류를 주고받은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손은 맞잡되 다른 꿈을 꾸었으니
이처럼 20세기 초중반에 한국과 중국은 물적으로든 인적으로든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다만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과연 중국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과거부터 쌓아 온 의리만으로 조선을 도와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일본이나 미국을 포함한 외세의 입김을 견디기가 힘들어, 힘을 합쳐 고통을 줄이고 의무를 나눠 가질 요량으로 먼저 손을 내민 것일까?
저자의 시각으로 보면 20세기 초중반 동안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한 의리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그 외의 숱한 국지전이 빈발하는 각박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동질감 위에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누는 인사들도 있었으나 각자의 목표는 달랐다. 의도가 나쁘거나 사이가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고자 열강들이 속속들이 끼어드는 시기에 서로의 입장이 달랐고, 그러다 보니 같은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즉, 손은 맞잡았어도 머릿속에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조바심으로 상대에게 제한적인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상태는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중국 내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1903년부터 1949년까지, 한국과 중국이 맺어 온 ‘관계’의 역사
저자가 중화권 각지의 도서관과 공문서 보관소를 섭렵하며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어낸 이 연구서는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대중(對中)교류와 호법정부나 북양정부, 국민정부 등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독립운동 세력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이나 태도, 정책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의 잘 알려진 독립운동 인사들 외에도 일제강점기 초기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김규흥과 김병만 등 다소 생소한 한인 독립지사들의 행적까지, 우리가 여태까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세계화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 지금의 시대에 관계의 우위를 논하는 건 그다지 효용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계를 구성하는 나라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진척되어왔는지, 나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 또한 그러할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4766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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