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무더운 더위의 오늘이지만 마음먹고 식민지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강제동원 증언 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를 참관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과 공동 주최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노동 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한다.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2015)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래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사랑 특집호 회보 201908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강제동원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징용공 아닌 한반도 출신 노동자다?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아베 정부는 '징용공'이라고 불렀던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 구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국제사회를 상대로 강제동원, 강제노동은 없었고 민족차별은 없었다고 거짓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강제동원이란?
일본은 청일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끊임없는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고, 1930년대에 한반도를 중국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반도의 물자와 사람을 총동원했습니다.
강제동원은 이 기간에 조선인을 노동자와 군인으로 동원한 것을 말합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치밀한 노무동원 계획과, 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동원이 실행 되었습니다. 동원할 때는 생필품과 식료품 배급을 끊는다고 협박하거나 가족들을 괴롭혀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또 달콤한 말로 꾀이거나 유괴, 심지어 폭력을 써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피신과 도주를 막기 위해 감시와 폭행을 가하며 강제연행하기도 했습니다. 끌고 간 현장에서 사람들은 사업장과 노동조건을 선택할 수도 없었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과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도 예외 없이 동원되었습니다.
또 기업들은 노무 동원 계획에 따라 필요한 인원을 정부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고 직접 한반도에 와서 동원과정에 관계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동원한 사람들을 현지 사업장에 끌고 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따라서 기업도 강제동원. 강제노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관련학계에서는 "신체적 구속이나 협박은 몰론, 황민화 교육에 다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사기, 법적 강제"를 모두 강제동원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2004년 제정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장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강제동원 피해"를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군인. 군속. 노무자. 군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하는 자가 입은 생명. 신체. 재산 등의 피해라고 규정했습니다
세계유산이 된 '정한론'의 산실
'일본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가운데 하나인 쇼카 손주 쿡은 요시다 쇼인이 관여했던 사설 학당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군비확장과 대외침략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메이지 정부 안에서 '정한론'이라는 조선침략론이 등장했죠. 정한론은 이웃국가를 침략하는 전쟁론으로 강화도 사건, 정일, 러일전쟁 조선의 강제 점령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쇼가 손주 쿠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대외침략론을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의병 학살을 주도한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입니다.
일본 정부는 쇼카 손 주쿠를 일본 산업화를 추진한 인물로 키워낸 곳으로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집어넣어 평가하고 있지만 쇼카손주쿠는 아시아 침략의 사상과 역사를 정당화하는 역사관이 만들어진 곳이지 산업유산시설은 아닙니다. 대외팽창주의를 주장한 요시다쇼인의 쇼카손주쿠를 포함시킨 것은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과 침략을 받은 지역에 대한 배려가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일본 정부의 자세는 주변국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자 기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까?
정확란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일대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쟁을 벌인 일본은 자국민을 비롯해 아시아 각지의 민중을 전쟁에 대거 동원했습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조사와 연구는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오랜 기간 조사와 연구를 통해 강제동원 규모를 알 수 있는 정책 관련 문서와 동원된 사람들의 정보가 담긴 '명부'가 발견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조선인 동원자 수는 일본의 탄광. 광산. 군수공장이나 군사기지. 발전의 토목공사 현장 등에 동원된 노무자가 약 80만 명, 군인. 군속 등의 명력 동원이 약 37만 명입니다. 한반도 내에서도 연인원 650만 명 정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국내에서 근로 보국대 등으로 단기 동원된 경우 대개 1~3개월 동안 군수시설과 도로보수, 제방 공사장 등에서 노동했습니다. 국외 동원에 비해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끼니조차 잇지 못하던 조선 민중에게 무척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노무동원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5월 조선에서 국가 총동원 법을 시행하고 1939년 10월부터 국민 징용령을 시행했습니다.'총력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일본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한반도에서는 조선인 동원 계획이 세워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광업, 토목건설 등에 '모집' 방식으로 노무동원을 시작했습니다. 말이 모집이지 지역별로 할당하고 행정력을 이용해서 강제했습니다. 1940년부터는 군수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징용하여, 그 현장에서 이동할 수 없도록 하는 '현원 징용'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1942년 2월부터 노골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기관과 경찰 등 공권력을 활용하여 '알선'하고 기업 측의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가 보조하는 방식으로 동원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계획한 인원을 채울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지자 1944년 8월부터 '징용령'에 근거하여 청장년들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과하고 무차별 노무동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집' '관 알선' '징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이 강제되었고 때로는 동시에 병행되기도 했습니다. 강제동원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책으로 요구에 따라 시행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조선 현지에서 직접 동원 과정에 관여했고, 그러한 동원은 지원의 강요, 사기, 폭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당연히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불법 노동이었습니다.
노무자들은 주로 어디로 끌려갔을까?
이입 조선인 노무자 상황조라는 자료에 의하면 1942년 6월까지 동원 장소는 396곳, 동원인원은 약 17만 4,000명에 이릅니다. 이 자료를 통해 조선인들이 일본 곳곳의 광산, 탄광, 공장, 토목 현장 등으로 끌려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 패전 후 후생성 근로 국이 집계한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라는 자료에는 일본이 16개현에 조선인을 동원한 기업들의 명부가 들어 있습니다. 그 외에 홋가이도 탄광 기선, 스미토모 광업, 일본제철 등 개별 기업의 명부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등 탄광지대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은 행정기관의 매장. 화장 관계 문서에서는 일부 명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끌려가 노동했던 수많은 일본 기업의 자료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선인들이 끌려가 노동했던 수많은 일본 일본기업의 자료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노무동원 관계 사료나 현지조사를 통해 밝혀진 동원 장소는 일본 전국에 1,000곳이 남아 있습니다.
죽어야 벗어날 수 있던 지옥섬 , 하시마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14.5km 떨어져 있는 섬입니다. 다카시마 탄광은 서양식 채탄기술을 도입해 개발되었고 죄수 노동으로 채굴을 시작한 곳입니다. 1881년과 1890년에 다카시마와 하시마를 소유한 미쓰비시는 폭압적인 노무관리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갱부에 대한 폭행이나 산업재해 사고도 많았습니다.
죄수 노동은 금지되고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미쓰비시는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식민지로 눈을 돌립니다. 1917년 9월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지속적으로 조선인을 데려갔습니다. 전시 총동원령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이 시작된 1939년에는 다카시마와 하시마에만 4,000명 정도가 끌려갔습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이곳은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강제노동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부둣가에 일부 남아 있는 문은 '지옥문'이라 불렸고, 섬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제방은 도망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습니다.
하시마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북향 4층 건물 등에 수용되었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하시마에는 1,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되는데 화장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정도입니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고사였습니다. 매몰에 의한 질식, 압사, 외상사 등이 있고 익사도 있었습니다. 강제동원 생존자은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절단까지 생각했다' 고 증언했습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나가사키 시내의 복구작업에 투입되어 피폭을 당한 조선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없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낸 이웃이었다는 일본인의 증언만을 내세우며 이를 군함도의 진실인양 홍보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지은 야하다 제철소
1984년 일본은 조선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주된 전쟁터는 한반도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에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는데요, 청이 지불한 2억 량은 당시 일본의 4년 치 국가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일본은 배상금 80%를 군비확장에 썼고, 나머지 20%를 관영 야하다 제철소 건설, 철도 전산화사업에 투자했습니다. 이때 파운드로 지불된 배상금으로 일본은 금 본위제를 확립했습니다. 관영 야하다 제철소는 1901년부터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야하다 제철소는 일본은 중공업 발전을 이끌었으며 1906년 일본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 일본이 중국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자 철강의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1945년 패전할 때까지 야하타가 생산한 철강은으로 군함과 어뢰, 전투기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야하타 제철소는 동양 최대 제철공장이 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생활은 고되었습니다. 하루 12시간 2교대였으며 임금도 낮앗습니다. 전쟁 때문에 폭팔적으로 늘어난 철강수요을 감당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등 각지에서 노동력을 동원하였습니다. 야하타제철소에 동원도니 조선인만도 12,000명이 넘을 정도였습니다.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도 강제노동을 시켜 철강 생산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들은 '거짓말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린 것'에 대해 일본제철 (관영 야하타제철소 후신)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재판 투쟁을 제게 했던 것입니다.
죄수 노동에서 노예노동, 강제노동으로 성장한 미쓰이 탄광
규슈는 홋가이도와 함께 손꼽히는 탄탕이 많은 지역입니다. 미쓰이 탄광이 운영한 미케이 탄광은 일본 최대의 탄광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이케 탄광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죄수를 이용하여 채굴을 했습니다. 미쓰이 물산은 미이케 석탄을 팔아 수익을 올렸습니다. 미이케 탄광은 1873년부터 석탄 운반에 죄수를 강제동원시켰습니다. 1883년 미이케 탄광은 전용 감옥이 설치되었고, 죄수들은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죄수 노동은 193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사망자수는 2,400명을 헤아립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인 노동자가 병사로 전쟁에 동원되자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을 조직적으로 동원했습니다. 탄광은 조선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작업장이었습니다. 탄광은 노동강도가 극심하고 사망률이 가장 높은 작업장이었습니다. 1938~45년 일본 본토에 끌려간 조선인은 약 40%가 탄광에 배치되었습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미이케탄광만 9,000명에 이릅니다. 이 지역에는' 석탄 3만 톤을 팔 째마다 사망자가 한 사람씩 나온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조선인은 죄수를 대신하는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암흑의 핵심이었던 미이케탄광이 이 어두운 역사는 지운채 '일본의 산업화'라는 얼굴을 내세워 '세계인의 문화산'으로 변신한 겁니다.
전함 무사시와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과 함께 성장한 재벌입니다. 미쓰비시 광업과 중공업은 전쟁수행 애 서 없어서는 안 되는 회사였죠, 일본이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동안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는 82척의 군함과 1만 개 이상의 어뢰를 생산했습니다. 당시 '일본 전함의 자랑'이라고 선전한 무사시를 비롯해 진주만 기습에 사용된 어뢰도 바로 이곳 나가사키에 만들어졌습니다.
일본 개항 당시 에도막부는 네덜란드 지도를 받아 해군 전습소와 함선을 수리하는 나 가사 키용 철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나가사키 조선소의 출발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것을 관영 나가사키 조선국으로 운영했습니다. 작은 상회에서 출발한 미쓰비시는 해운 석탄 조선으로 이익을 올리면서 미쓰비시 재벌로 성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1934년 설립된 미쓰비시중공업은 군함과 어뢰, 항공기 생산을 담당하는 일본 최대 군수기업으로 성장했고, 그 거점이 바로 나가사키였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의 확대와 함께 미쓰비시는 아시아 각지에서 자원을 수탈하였으며 현지 민중을 혹사시켰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만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병기, 미쓰비시 나가사키전시, 지하공장건설, 항만수송 등에도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었습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강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피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 희생자의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가사키 피폭자 30여만 명 중 10%가 조선인 희생자였다고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연합군 포로도 동원되었고 중국인 포로들도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미스비시 머티리얼은 이들 연합군과 중국인 포로의 강제노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여전히 사과는커녕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부터 원폭이 투하된 날까지 나가사키는 무기 생산의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해상자위대의 이지스함을 비롯해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일본 패전 후 어떻게 되었을까?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조선인 들은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시카와 조반 탄광지대에서는 한 목소리로 귀국을 요구하는 큰 쟁의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일부 기업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귀국을 돕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일부 기업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귀국을 돕기도 했으나 대부분 피해자들이 스스로 돌아갈 방법을 마련해서 1945년 12월 무렵까지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귀국해도 생활기반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남기로 한 사람들, 귀국이 늦어지는 사이 분단된 조국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조선인 군인군속 희생자 약 2만 2,000명은 일본 정부에 의해 창씨명과 본적지가 밝혀져 있지만 강제 노동현장에서 사고나 피폭 등으로 사망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가 개별 사업장의 노무자 사망 실태를 전혀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7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곳곳에 방치된 유골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조선인들이 받지 못한 임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패전 후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기업과 군인. 군속을 동원한 일본 정부에는 조선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미수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열악한 강제노동 현장을 견디지 못하고 조선인 노무자들이 도주할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10엔 정도의 용돈 외에는 모두 저금' 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기업의 미지급금은 정부에 의해 법무성에 공탁되었는데 그 총액이 2억 엔에 이릅니다. 패전 후 작성된 일본 대장성의 경제협력-한국 105호 노동성 조사 조선인에 대한 임금 미불채무 조 와 노동성의 조선인의 재일자산조사보고 서철 에 미지급금의 실태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이 실태를 감추고 오히려 한국 측에 미수금 내역과 총액을 대라는 식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 정부는 '가해 기록'을 협상카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65년 한일 청구 건협 정이 정치적 타결로 매듭지어지면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수금은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병력동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조선에서 징병령 은 1944년 실시되었지만 조선인의 병력 동원은 1938년부터 육군 지원병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군사기지 건설이나 군사물자 수송 등의 작업을 했던 군속(군무원)은 1939년부터 동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원된 지역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모든 곳이었습니다. 서쪽 버마에서부터 동쪽 사이판까지, 북쪽 알래스카 서남단에서 남쪽 적도 아래 뉴기니아까지 광범위했습니다.
전체의 역사를 밝혀라
식민지 민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찍부터 일본의 탄광, 제철소. 조선소에 값싼 노동력으로 팔려갔습니다. 침략전쟁이 확대되자 조선인 청년뿐 아니라 여성과 미성년 아동까지 강제 동원되어 노예처럼 노동해야 했습니다.
미쓰비시와 미쓰이 계열 전국 탄광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은 6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중국인도 9,000명 넘게 강제 연행 당해 노예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미쓰비시, 미쓰이와 일본제 철도 이러한 강제 노동의 중심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아베 정부는 이런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고 찬란한 성공의 역사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 초기의 산업화 느 전쟁을 위한 산업화였으며, 대만과 한반도, 랴오둥 반도 등지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등재 시기를 1910년 이전으로 한정했다는 것은 아시아 침략의 역사를 숨기려는 의도입니다. 특히 대외 팽창주의를 대표하는 요시 쇼인의 쇼카 손 주쿠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주변국에 대한 모욕이자 기망입니다. 또한 산업시설의 대다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연합국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한 역사의 현장들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메이지 시기 산업유산의 조건부 등재를 결정했던 제39차 유네스코위원회는 일제 강제동원 시설의 '전체 역사를 제대로 반영하라, 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사토 쿠니 유네스코 일본대사는 강제노동을 인정하느 공식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등재 결정 직후 이런 입장을 공식 부인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강제동원, 강제노동 부정론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 침략의 역사는 지우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길로만 매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권고를 지지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제철, 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혁명유산) 시설에서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권고 문안을 공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의해 시행된 조선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 대한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서 다수의 조선인들과 여타 사람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실 등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도록 일본에 권고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전 세계에 약속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도록 일본정부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강한 유감을 표합니다.
우리는 2015년 이후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수차례의 현장조사를 통해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2020년 6월 도쿄에서 개설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가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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