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1. 지옥섬 군함도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1)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km 떨어잔 작은 무인도 19세기에 석탄발견
(2) 1890년, 먼저 하시마에서 4.5km 떨어진 탄광을 경영하고 있던 미쓰비시광업이 매수, 확장
- 18세기에 석탄이 발견된 다카시마, 정부가 직접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죄수을 동원, 도주 방지를 위해 발에 족쇄를 채웠다. 이후에도 죄수노무관리 시스템 지속, 1881년에 미쓰비시 불하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지옥섬”
(3) 남북으로 약489m, 동서로 약160m, 둘레1.2km 면적 6.3ha높이 10m의 방파제
- 바다에 뜨는 감옥 , 외부와 철저히 차단, 전함 도사 (土佐)를 닮았다고“군함도”
(4) 1916년 콘크리트 아파트 건립, 이후 고층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 섰다.
- 아파트 위층에는 엘리트 일본인 거주
(5) “지옥문” 총을 들고 경비, 가장 높은 지대에 하시마신사, 학교식당
(6) 해저탄광, 바다 밑으로 개미집처럼 뻗은 갱도
(7) 1945년, 가장많은 5,300명거주
(8) 1974년 폐광
2. “지옥섬”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1) 강제동원과정
(1)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전쟁을 일본 제국주의
- 식민지 조선을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총동원할 체제를 정비, 강화
(2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인 노무동원 (1939년부터 1945년)
- 부족했던 노동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정부와 기업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수행
-“모집” (1939년) “관알선”(1942년), 영장에의한 징용 (1944년)
- 국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 광범위한 지역으로
- 마을 내에서 발언권이 없는 조선의 하층민을 ‘인질적 약탈, 납치’등 폭력적 방법으로 강제 동원
- 3~4명에 1명, 남겨진 가족들은 수입이 끊겨 궁핖
- 폭력적인 강제이동, 학대와 노예적 노동, 민족차별 9대우, 임금, 해방후 대응)
(3) 재일조선인
- 1942년10월, 재일 조선인에 대해 머너“국민징용령”적용
(4) 하시마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 약500명으로 추정, 다카시마를 포함해서 약4,000명으로 추정
- 마을에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뱃바닥에 화물과 같이 실리고 시모노세키까지 모지에서 열차 로 나가사키 까지,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 배를 타고 하시마 상륙.
- 도착할 때까지 해저탄광 일에 동원된다는 사실을 일체 알지 못했다.
(5) 사할린에서 ‘이중징용’
- 사할린에 있던 미쓰비시 탄관에 끌려갔다 1944년 8월에 ‘배치전환’
(6) ‘산업위안소’, ‘성노예 피해자들
- 갱부들의 가동률 향상과 도주방지, 치안유지
2) 지옥섬에서의 생활
(1) 숙소
- 골짜기 밑바닥과 같은 최하층, 늘 악취가 나고 습도가 높은 비 위생적인 곳
- 좁은 방에 많은 인원이 생활, 밤에는 덥고 벼룩에게 뜯겨 잠을 이루기 어려운 환경
- 밤8시가 되면 복도에 두 줄로 서서 점호시작. 동쪽 즉 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경례하고 전사자를 위해 1분간 묵도를 해야겠다. 명령에 의해 군대와 똑같이 해야 했다.
(2) 식사
- 기본적으로 식당에서는 주는대로 먹어야 했다.
- 주먹만한 감자에 약간의 베트남 쌀을 섞어 지은 밥 또는 콩깻묵에 약간의 현미 쌀을 썩어 지은 밥이었다. 정어리 조림의 부스러기나 된장국이 나올 때도 있었다. 가축 사료와 같은 밥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 노무관리자가 식량을 빼앗아가서 가뜩이나 적은 양이 더 줄어들기도 했고 아침에 같이 주는 점심을 제시간까지 남겨두지 못할 때도 많았다.
- 늘 배고픔에 시달렸고, 빈약한 식사 탓에 심하게 설사하는 일도 많았다. 몸은 쇠약해지고 영양실조로 경련이 일어나 죽을 지경이었다.
- 동네 어민들이 배를 끌고 자주 들어와 항상 생선이 넘쳤고 일본인 갱부들은 특히 정어리를 값싸게 많이 사먹었다. 그들은 식당이나 술집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었다.
(3) 갱내
-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설사를 해도 쉬지 못했다.
- 대부분 평생 농사만 지었다. 탄광이란 어떤 곳인지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 달 정도 훈련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 며칠 안에 바로 채탄 작업에 투입되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난생 처음 들어가는 해저탄광은 공포 그 자체
- 승강기를 타고 바다 속으로 수백 미터 내려가야 하는데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하강 속도가 빨랐다.
- 일본인 갱부들은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쉽고 안전한 곳에서 일했으며, 조선인은 주로 일본인 조장의 지시에 따라 가장 위험하고 고된 막장일을 해야 했다.
- 높이가 5~60cm 밖에 안 되는 비좁은 막장에서 계속 누운 채로 석탄을 캐야 했다. 머리가 천장에 닿았고 헬멧에 붙은 소형 전등의 코드가 목과 다리에 감겼다. 10분도 안 돼 하반신이 저려오고 등뼈가 점점 변형될 만큼 호된 중노동
- 굴을 파는 일을 할 때는 굴착기를 고정시켜 탄층에 설치한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키고 나무 막대기를 세웠다. 낙반사고와 가스폭발사고를 당할 위험이 상당히 높은 일
- 가스 냄새가 심했다. 숨쉬기 힘들었고 산소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 하시마의 탄은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밀가루와 같은 것. 갱내에는 그 탄가루가 흩날리고 있어 온몸이 까매졌다. 눈을 뜨기도 어려웠고 온갖 질병에 노출되었다.
- 천장에서 집중호우처럼 지하수가 흘러내릴 때도 있었는데 염분이 많아 계속 맞다가 피부가 심하게 헐기도 했다. 게다가 워낙 차가워서 감기에 걸리거나 폐렴을 앓기도 했다. 고열이 나고 의식이 몽롱해지고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이 더욱 높아졌다.
- 갱내에서는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보통 더위가 아니었고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물통을 챙겨갔지만 목이 말라 금방 바닥이 났다. 일본인 갱부가 ‘조선인은 갱내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라고 막말을 내뱉으면서 물통을 훔쳐가기도 했다.
- 화장실이 없었다. 사방에서 떨어지고 흐르는 지하수는 항상 배설물로 오염되어 있었다.
- 침략전쟁이 장기화의 양상을 보이며 석탄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무모한 석탄증산정책이 강행되었다. 1943년경부터는 그전의 3교대 8시간이 2교대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으로 바뀌었다. 하루의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더 긴 시간을 일해야 했다.
- 1~2주에 한 번씩 밤낮이 바뀌었는데 바뀌는 날은 다음날 아침까지 초과노동을 해야 했다. 극도로 피로가 쌓였고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할 때에는 낮에 일할 때보다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일상이었고 천장에서 돌이 떨어져 다리나 허리를 다치는 사고도 빈번히 있었다.
- 끔찍한 바다 속에서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기어 나와도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한참동안 콘크리트 벽에 기대고 주저않아 있었야 했다. 죽을 것만 같았고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여왔다.
4) 고문
- ‘쉬고 싶다’라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관리사무소로 끌려가 일하러 나가겠다고 할 때가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지나가는 갱부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기도 했고 또 그들이 한 대씩 때리도록 전봇대에 묶긴 이도 있었다.
- 그리운 가족들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어도 많이 이들이 글을 쓸 줄을 몰랐다. 끌려온 지 2년이나 되었는데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배고파고 견딜 수가 없다는 것,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하시마의 실상을 편지에 담고 싶었지만 그러한 편지는 절대 전달되지 않았을뿐더러 자칫하면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끌려갔다. 3~4일 동안 못 돌아온 이도 있었다.
(5) 임금
- 월급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일본인과의 임금차별도 심했지만 애초에 월급이 얼만지 설명을 듣지도 못했고 아예 월급을 받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 회사 측은 용돈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나머지는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고향의 가족들 대부분은 받지 못했다.
- 강제저축도 있었는데 통장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중에 돌려주지도 않았다.
(6) 의료
- 노무 관리자는 감기를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도 진단서조차 작성해주지 않아 쉬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겨우 진단을 받아도 별다른 치료 없이 방치되었다.
- 병원과 진료소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는데도 결국 사망에 이르거나 평생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 부상자나 환자에게까지 자행된 민족차별,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일이 한 번 있을까 말까했고 대체로 참으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7) 도망
-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그만두고 싶어도, 최소한 하시마에서 나가고 싶어도 그러한 자유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갱부들은 장보러 나가사키 시내까지 나갈 수 있었고 행동이 자유로웠다. 조선인 중에도 회사 측이 도주방지를 목적으로 불러들인 가족들이 같이 사는 이들의 경우는 하시마 밖으로의 외출 허가가 날 때도 있었지만, 회사 측은 기본적으로 조선인을 하시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 24시간 감시의 눈이 번뜩였지만 살기 위해서 도주한 이들이 있었다. 배설물을 운반하는 배나 물자를 들이는 배에 몰래 타올라 숨거나 뗏목을 만들거나 헤엄을 쳐서 도망가다 성공한 이들이 드물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약 5킬로의 장거리를 견뎌야 했고 더군다나 조류가 살인적으로 빨랐다. 익사한 이들도 적지 않았고 헤엄을 잘 치는 이들도 도중에 힘이 빠져 잡히기 마련이었다. 겨우 육지에 도착해도 거기서도 감시망이 철저했다.
- 도주를 시도하다 발각되면서 다시 하시마로 끌려와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지도록 맞고 반죽음을 당했다.
- 숙소도 작업장도 달라 일본인 갱부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간혹 조선인과 같이 도망친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일본인 갱부는 ‘일본이 빨리 패망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 나가사키 협화회를 통해 통제
(8) 사망자
- 1925년부터 1945년까지 20년 간 조선인 123명 (여성13명, 남성110명)이 사망
- 병사60명, 사고사 (질식사,압사,외상, 변사, 추락사 등)63명
-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낙반사고, 가스폭팔사고가 빈번히 발생, 매몰되어 질식사 또는 압사를 당한조선이이 많았다.열악한 주거 환경에 빈약한 식사, 안전장치도 지극히 부실하고 위험한 막장에서 장시간에 걸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억울한 죽음으로 몰렸다.
- 사망자기록에 의하면 초기치료로 충분히 희복할 수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이들이 일본인보다 많았다. 고문으로 인한 죽음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 일본인 사망자 중에는자살이 많은 것이 특징, 조선인보다 안전하고 자유도 있던 그들에게 조차 하시마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 하시마에서 북동 방향으로 400m 떨어진 나카노시마, 우뚝 서 있던 빨간 벽돌로 만든 굴뚝, 화장하는곳
- 조선인 유골은 하시마로 다시옮겨져 절에 안치 되었다고 하고 나카노시마의 페갱에 버려졌다고도 한다. 주검이 바다에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3) 강제노동에 시달린 중국인들
(1) 1942년 각의 결정으로 중구인 약 39,000명이 일본에 글려와 135개 작업장에서 강제노 동, 약6,800명사망
(2) 1944년 6월“지옥섬”에 글려온중국인 240명 (농민,상인,포로들)
-미쓰비시는 중국인 철조망으로 둘러싼 목조 2층건물에 가둬놓고 총을 들고 감시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일본인 갱부들이 먹다남은 정어리 머리와 뼈를 버린 곳에 피골상접한 중국인이 모여들어 주어 먹었다.
-가장 가혹한 작업장에 중구인을 투입했고 일상적으로 학대했다.
- 중국인의 저항은 거셌다. 채탄 중에 일본인 지도원 에게서 폭행을 당한 중국인 두명이 삽으로 반격을 했는데 회사측은 그 책임을 중구인에게 물어 사무실에 연행을 해 고문을 가했다. 또 중국인이 파업을 일으키자 회사 측은 군대를 끌어들여 무력으로 탄압했다.
- 1945년 7월31일에는 전기동급을 받았던 다카시마의 발전소가 미국에게 폭격을 받아 하시마에 정전이 일어났는데 그때 회사 측은 전기를 끊은 혐의를 걸어 중국인 전원을 대상으로 취조를 자행했다.
- 미쓰비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대를 두려워했다. 조선인이 하시마에서 쟁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다카시마에서는 ‘공복’을 견디다 못한 조선인 13명이 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노무 관리자들은 조선인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고 수시로 폭행과 모진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미쓰비시는 조선인의 반격, 저항, 특히 중국인과 힘을 합치는 일을 늘 두려워했다.
- 미쓰비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 채탄 현장도 나눴고 수용소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고 서로 마주치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갱내에서 중국인이 파는 굴과 조선인이 파는 굴이 연결될 때가 있었다. 갱 밖에서도 들키면 바로 총을 든 사람들이 달려와 모두 다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쉽게 말을 걸 수는 없었지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일본인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가 있어서 그럴 때면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3) 1944년을 기준으로 인구 비율을 보면, 일본인 69%, 조선인 22%, 중국인 9%
- 사망률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높다.
(4) 원폭투하 그리고 귀국
(1) 1945년 8월 9일 중공업지대의 중심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 조선인 피해자 약20,000명, 사망자 약10,000명으로 추정
- 하시마에 있던 조선인들, 폐허가 된 나가사키이 청소에 등원
(2) 2년이면 만기가 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도 많았지만 알고 있었어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3) ‘해방’의 기쁨, 정부와 미쓰비시의 무책임한 태도, 8월 말 이후에 귀국
- 사할린에서 ‘이중징용’ 된 조선인들,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해 몇 십 년 후에야 겨우 재회할 수 있거나 평생 만나지 못했다.
자료출처 : 근대사기념관 특강 (2016년 12.3) 영화 일제강점기를 말하다.
5강 : 세계문화유산 등재1년 지옥섬의진실 - 미리보는 군함도 <강의요약집>
'09.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 > 4.일본군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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