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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19세기 미국 노동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의 공화주의 사상과 실천을 치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노동운동이 현대 공화주의 사유의 발전에 어떻게 공헌했는가를 밝힘은 물론,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를 야기할 정도로 타락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담론과 윤리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를 ‘노동공화주의’라 명명하고 현대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한다.
목차
한국어판 저자 서문: 우리 시대의 노동은 자유로운가?
역자 서문: 노동공화주의를 읽는 하나의 방법
서론: 노예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장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
노예제와 고대의 자유
딜레마에서 역설로: 노예제와 근대적 평등
자유노동의 내적 모순
2장 ‘자율계약과 독립적 노동자’: 방임적 공화주의의 전회
공화주의에서의 임금노동의 전사
자유노동의 위기
불간섭 자유의 공화적 기원에 대한 재검토
3장 ‘결핍이라는 칼’: 임금노동이 아닌 자유노동
농본주의적 공화주의
임금노동과 노동자 정당
노동가치설
“자산을 균등하게 배분하라”
4장 노동공화주의와 협력적 공화 체제
‘거짓 자유의 관념에서 벗어나기’ : 노동공화주의 총론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원칙을 기입하라”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에 대한 재검토
5장 연대와 이기: 종속계급의 정치이론
시민적 덕성의 이론과 역사
시민적 덕성과 연대
시민적 덕성의 정치학 재검토
결론 아직도 멀기만 한 자유
참고문헌
미주
찾아보기
역자 서문: 노동공화주의를 읽는 하나의 방법
서론: 노예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장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
노예제와 고대의 자유
딜레마에서 역설로: 노예제와 근대적 평등
자유노동의 내적 모순
2장 ‘자율계약과 독립적 노동자’: 방임적 공화주의의 전회
공화주의에서의 임금노동의 전사
자유노동의 위기
불간섭 자유의 공화적 기원에 대한 재검토
3장 ‘결핍이라는 칼’: 임금노동이 아닌 자유노동
농본주의적 공화주의
임금노동과 노동자 정당
노동가치설
“자산을 균등하게 배분하라”
4장 노동공화주의와 협력적 공화 체제
‘거짓 자유의 관념에서 벗어나기’ : 노동공화주의 총론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원칙을 기입하라”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에 대한 재검토
5장 연대와 이기: 종속계급의 정치이론
시민적 덕성의 이론과 역사
시민적 덕성과 연대
시민적 덕성의 정치학 재검토
결론 아직도 멀기만 한 자유
참고문헌
미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19세기 노동자들이 말하는 가장 보편적인 사실은 자신들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동자로서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고용주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였다. 그가 누구든 고용주를 위해 강제로 일해야 했고, 일단 작업장에 들어가면 고용주가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복종해야 했다. 이런 부자유(unfreedom)는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온당히 누려야 할 자유를 원천적으로 침해받는 상태다. 진정한 시민이라면 예속이 없어야 하며 경제적 자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
이런 주장을 펼친 노동공화주의자들은 자유에 대한 자신들만의 사유를 통해 임금노동 자체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 말, 이들이 내놓은 생각은 능동적이며 때로는 전투적이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료시켰다. 탄광과 철도산업, 구두 공장에서 사탕수수 농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노동공화주의의 지지자가 됐다. 19세기 최대의 노동자 정치조직인 노동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에 가입했고, 자유 쟁취라는 희망을 부여잡고 격렬한 저항을 벌여 나갔다.
--- p.5
노동공화주의는 (...) 제도정치가 아닌 노동/생활영역의 공화화를 전면에 제시해 [현대 공화주의가 놓치고 있는] 누락의 지점을 드러낸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그러나 중요한)’ 삶의 측면을 직접 겨냥하며 갱신을 시도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낡은 비판으로 자위하지 않는다.
일상 속 깊숙이 침투해 3생(생명·생존·생활)을 파괴하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사태(N. Fraser)를 직시하고 노동/생활의 지평에서 삶(생명)·경제(생존)·문화(생활)의 대안을 풍요롭게 모색한다. 공공선의 관점에서 비지배 자유, 협력과 연대, 시민적 덕성을 노동의 장에 구현함으로써 ‘공화적 생활세계’를 열어 낸다. 동시에 이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사회적/윤리적 감각’을 창조함으로써 현대 공화주의의 갱신을 완성한다. (...) 이 책의 저자 고레비치는 이 비판적 사유의 기원을 노동기사단에서 찾는 데 일단은 성공한 것 같다.
--- p.15
미국 노동 운동사의 한 장을 차지한 노동기사단은 노동의 장에 공화적 가치를 구현함으로써 개인적 해방과 사회적 공화를 꿈꿨다. 이론적 지도자였던 실비스(W. Sylvis)는 미국 혁명과 내전이 불완전한 정치혁명이라고 단언한다. 공화국이라는 정치 체제가 수립됐음에도 사회경제 체제는 임금노동제라는 새로운 형식의 노예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비스는 공화 체제의 보편적 자유와 임금노동제의 종속노동은 불화할 수밖에 없거니와 종속노동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가치를 기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불합리한 지배를 제거하고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노동기사단의 궁극 목표다.
--- p.16
이 목표[노동기사단이 구현하고자 제시한 목표]는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미완성이다. (...) 현대 자본주의의 작업장은 어떠한가. 작업장은 위험의 공간이다. 고용불안, 저임금, 과로사, 산업재해, 차별 등 노동자는 온갖 위험에 노출돼 있다. 노동조합이 잘 조직돼 있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 노동자는 드물다.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는, 종속적 임금노동 체제의 직접적 효과다. 임금노동 이외에는 다른 삶의 선택지가 제한된 상태에서 노동자는 계약노동이라는 ‘자발적’ 형식으로 위험의 공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 p.16
공화주의를 재조명한 퀜틴 스키너(Q. Skinner)는 “우리는 소극적 자유에 관한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이론을 공화주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셈이다.”라고 주장했다. 주류적인 사고인 자유주의는 자유를 ‘불간섭(non-interference)’으로만 파악한다. 반면, 공화주의는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로 사고한다. 자유주의자는 타인이 실제로 우리의 선택에 간섭하는 경우만을 문제 삼는 반면, 공화주의자는 타인이 실제로 간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간섭이 이뤄질 ‘가능성’이 존재하는 조건까지를 넓게 고려한다. 타인의 의지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야말로 부(不)자유의 핵심이라는 것이 공화주의 관점이다.
--- p.48
자유에 대한 이론으로써 공화주의가 갖는 비판적 유연성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이론가들 자신이 외려 그 역사적 계기 - 즉 공화주의는 이미 자신의 기원을 넘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 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영국의 지배와 통치에 저항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공화적 자유 개념을 발전시킨 미국의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과연 ‘예속과 굴종’에 대해 발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었는가? 아니면 이들 역시 아메리카 선주민과 노예들에 대해 사적인 지배를 허용하는,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자기통치 개념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닌가? 혹시 식민지 미국의 이론가들은 타자의 자립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립 기반을 강화하는, 자기들만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들 때문에 신공화주의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한 귀족정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p.50
고대 로마의 입법자들은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들이야말로 자기 노예들에게 가장 혹독한 법을 입안한 장본인이었다 - 볼테르. (...) 당시 고전 공화국에서 ‘자유를 가장 열망했던 사람’은 바로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 프랑스 혁명을 거친 후,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은 같은 취지로 “만약 아테네에 노예가 없었다면 2만 명의 아테네 시민들이 매일 광장에 모여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 평가는 비록 논쟁적이기는 하나 명백한 진실을 드러내거니와 공화주의 사상을 계승한 근대 이론가들이 해명해야 하는 문제임이 틀림없다.
--- p.63
이 딜레마가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다. 이 역설은 다음 두 가장의 논리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가정은 공화적 자유는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타인을 노예로 삼을 때만 비로소 자립이 가능하다는 전제다. 두 번째 가정은 인간존재는 평등하며, 따라서 법이 정하는 정치적 권리는 보편적이며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가치여야 한다는 전제다. 특정 계급에만 자립을 허용하고 여타 계급을 특권층에 종속시키는 공화적 자유의 특권화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보편주의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래서 역설이다. 이는 논리적 역설이자 윤리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 p.65
신아테네(neo-Aristotelian)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주의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핵심은 시민권의 본질이 경제적 자립”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적 자립은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고 정치적 참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제공하는 필요조건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늘 강조한 바다. 그는 “자유시민은 반드시 ‘행정과 사법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참여는 개개인이 훌륭한 시민으로서 역할하는 데 필요한 덕성 혹은 탁월함을 요구하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지배하고 지배받는 능력’으로 요약했다.
--- p.72
로마의 자유인 ‘리베르타스’는 정치적 참여나 특정한 능력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자유는 독립을 의미하지만, 그 독립성이 어떤 역량을 계발하거나 행사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로마식 자유는 아테네식 자유에 비해 훨씬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식 자유는 법적인 지위로서 자유를 의미하며 당시 확장하고 있었던 다민족 국가인 로마의 모든 구성원에게 허용된 것이었다.
--- p.77
헤이튼은 정치 영역에서는 미국 혁명의 약속이 구현되고 있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닦아 놓은, 보통선거권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중요한 가치가 바로 우리 독립의 토대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선거권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얻습니다. (...)
그러나 그 거대한 구조 ‘자체’는 ‘하나의 이상’일뿐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농장이나 채석장, 대장간, 공장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실제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성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p.146
“통치자나 정치가,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공화주의의 근본 원칙이 무엇인지 잊었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p.228
“협력은 고용주의 위협이나 지배, 모욕 따위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게 만드는 궁핌에서 노동자를 자유롭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유권 자체가 아니라 통제권을 공유하는 협동조합 체제만이 작업장에 팽배한 고용주의 사적인 지배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체제에 노동자는 자신의 집합적 권위에만 복종할 뿐이다.
--- p.235
자립성의 가치가 위대한 이유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노동기사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목표는 “노동자가 자신의 지적·도덕적·사회적 역량을 스스로 함양할 수 있는, 보장된 자유시간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는 진전된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 p.246
“우리는[노동기사단]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8시간 노동으로도 10시간 노동분만큼 생산할 수 있는지.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아마도 하루 만에 당장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일 년이 걸려도 어려울지 모른다.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이 거듭해서 발전한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생산하는 만큼, 그 생산된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 여부다.”
--- p.251
[노동공화주의 프로젝트가 보편성을 획득했는지 여부를] 제대로 검증하려면 여성과 노동에 대한 노동공화주의자들의 인식을 살펴야 한다. 여성이 여전히 남성을 위해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면, 그들은 종속노동을 강요받는 계급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보편성에 대한 노동공화주의적 비전은 그만큼 의심할 수밖에 없다. (...) 우선 확실한 것은 노동기사단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남성과는 다른 역할이 부여돼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성의 가사노동 때문에 가능했다. 노동기사단이 비록 ‘진정한 여성성’이나 순종적 여성성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여성의 실질적인 공적 역할을 강조했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다른 조직들과는 달리 꽤 진보적이었다.
노동기사단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최초로 주장한 조직이며,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을 조직하기도 했다. (...) 대부분이 여성인 가사노동자를 조직한 첫 노동조합이기도 하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는 임금노동자인 남편보다 더 힘겹고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점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성 노동자를 위해 독서와 쓰기 교육 등 시민교육을 제공했고, 어거스트 베벨(August Bebel)의 『여성과 사회주의』와 같은 당대의 빼어난 페니미스트 작품을 낳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동기사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치능력을 갖춘 자율적 주체’로 보았다.
--- p.258
여러 기관지[노동기사단 기관지] 기사들에서도 보이는 데 〈여성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기사에는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 기술돼 있고, 〈노동기사단과 여성의 권리〉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뿐만 아니라 ‘경제와 법에서 동등한 권리’가 여성에게 보장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의 당면 요구〉는 임금노동체제가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를 분석했고, 〈여성 노동자를 위한 조직〉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많은 파업과 협동조합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여성은 안 된다〉라는 글은 당시 여자들이 남자와 밖에 나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이상한 사회 풍조를 풍자하고 비판했다. 성경을 여성의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새롭게 편집해 실은 기사도 있는데, 새로 편집된 성경에는 성평등과 노동개혁이 진전돼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 p.260
“노동기사단이 터득한 것은 이것이다.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노동계급 전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 연대, 그것이 가장 올바른 생각이다. 연대는 자기만 살려는 이기심에 입각한 모든 시스템을 쓸어버릴 것이다.” - 모드 〈사슬을 끊어내며〉
--- p.267
“새벽 4시 반에 그들의 노동은 시작된다. 저녁 7시 반이 넘도록 그 노동은 쉼이 없다. 노동자들이 신문이나 책을 읽을 시간이 있겠는가.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누가 찾아오지도 않는다. 씻을 시간도 없다. 꽃을 가꾼다고? 가족과 산책할 여유도 없는데?” 몸을 씻고 꽃을 가꾸는 일, 가족과 산책하는 일은 공공선을 위한 이타적 행동과 같은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스미스가 말한 비가시적 빈곤(invisibility of poverty), 곧 감추고 싶은 궁색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과 매너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 p.281
노동공화주의자들이 직면한 난관은 외부의 억압과 종속계급 내부의 이질적 분화[균열]였다. 스튜어드가 가장 우려한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파괴적 모순이다. “생각해보자. 기계공 여러분들. 당신들은 무지한 노동자와 여러분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차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무지한, 보통 노동자들은 자본가들 편으로 돌아서서 당신들과는 정반대로 투표한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당신들은 약삭빠른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그들이 노동자를 무시하듯] ‘그 무지한, 보통’ 노동자들을 멀리하고 경멸한다.”
--- p.284
게다가 노동자 조직에 대한 신문 보도는 늘 불공정했고 가짜뉴스의 진원지였다. 노동기사단 사무총장이던 로버트 레이톤은 “정보를 신문에 의존하면 기만당하기 십상”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피츠버그 데일리 디스패치〉의 예를 들었는데, 그 신문은 왜곡 인용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도 않은 인터뷰를 가짜로 만들어 내보내기도 했다. (...) “자본가들은 수백만 달러를 뿌려서 뉴스 매체를 사들이고, 가짜뉴스로 사실을 날조하며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한다. 금융과 유통, 생산은 물론이고 뉴스 채널마저도 이미 독점자본의 손에 넘어가 있다.”
--- p.298
“분파주의와 편견이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깊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교육이 필요했다. 그 교육만이 당시 그들이 지지하고 있었던 부르주아 정당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을 획득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무도 노동자 교육에 나서지 않는다면, 노동자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공화주의자들, 특히 노동기사단이 공화주의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론만이 아닌 실천의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 p.299
노동기사단의 초대 통계국장을 지낸 테어도어 쿠노(Theodore Cuno)는 통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노동대중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전반적인 노동문제는 물론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하고 충분한 보상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신뢰할만한 통계 없이는, 임금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가치의 3분의 2 이상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통계 전문가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만이 우리에게 노동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다.”
--- p.301
한 노동기사단 조합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읽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 신문을 읽는 중이다.” (...) “우리는[노동기사단] 우리를 위한 교육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도서관과 강의실을 짓고, 우리가 기획하고 관리하는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활용할 수 있는 여유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
독서클럽, 강좌, 스터디그룹, 토론장,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 등을 갖춘 다양한 시설이 노동기사단 각 지부에서 활발히 건설됐다. 파우덜리는 특히 ‘노동자들의 문예회관과 독서클럽 건설’에 주목했고, 이를 “노동하는 자 역시 고용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를 학습할 권리, 즉 평등한 학습권을 행사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평가했다.
--- p.302
“우리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르도를 읽었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를 탐독했다. 헨리 조지와 허버트 스펜서의 책도 읽었다. 라쌀레의 정치 팜플렛 중 몇 개는 번역을 하기도 했다.” (...) 〈노동연대〉는 공개강좌를 다루는 특별 세션을 마련하고 “미국 임금노동자에게는 노동문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특히 협력이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공지했다. 첫 번째 강좌에서는 ‘협력:장점과 혜택, 그리고 노동기사단의 임무’를 주로 다뤘으며, 해마다 강좌 수를 늘려나갔다.
--- p.303
“협력이란 윤리의 과학에 기초해 있다. 협력은 안정의 윤리, 존중의 윤리, 우애의 윤리를 내포하는 과학이다. 협력은 동시에 ‘자기 이익’이라는 관념의 산물이다. 이기심은 타인을 뒤처지게 만든다 해도 나의 조건을 유리하게 개선할 수 있다면 이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반면, ‘자기 이익’은 타인과 함께하지 않으면 성취가 불가능한, 확고한 독립을 추구하는 속에서의 자신의 이익이다.”
--- p.307
노동공화주의가 성취한 개념적 진전[시민적 덕성 개념에서]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을 시민적 덕성의 담지자로 본 것이다. 자산가인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안정이라는 이익보다 피지배계급이 열망하는 자유노동에 대한 부분이익(partial interest)이 공화국의 일반이익(general interest)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시민적 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거니와 덕성은 종속된 피지배계급 스스로가 자기 교육과 자기 조직화를 통해 함양할 수 있는 윤리다.
--- p.324
노동공화주의자들은 매력적이면서도 풍부한 영감을 주는 사상적 그룹이다. 그러나 이들의 당시 관심사는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적어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쿠폰 따위로 주는 고용주는 없으며, 도시 전역에 계엄 선포를 허용하는 법원도 없다. 노동운동 지도자들 역시 테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파업 천막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기관총으로 살육당할 일도 없다.
국가권력은 설사 노동자들이 도시를 장악한다 해도 이를 진압한다고 탱크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빈민가 공동주택 거주자나 옥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가난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노동법과 복지제도, 첨단기술, 수많은 값싼 물건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19세기 말의 노동자보다는 풍족한 삶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19세기처럼 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우월감은 정당한가?]
--- p.328
[아직도] 채용과 해고, 작업장에 대한 지휘와 감독, 혹은 일과 후 사생활 감시를 둘러싸고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은 갖가지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댓글을 문제 삼는가 하면, 성적 지향이나, 너무 섹시하다 혹은 섹시함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해고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지지하면 해고했고, ‘충성도가 떨어진다’라거나 순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해고 사유가 됐다. (...)
노동자들의 소송 대상도 다양하거니와,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거나 고온의 작업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받는 문제, 근무시간 중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거나 점심시간을 주지 않는 일, 교대시간이 끝난 후 강제로 남아 있어야 하는 일, 휴게시간에 책 읽는 것을 금지하거나 냉난방기를 트는 일을 금지하는 것, 불시에 하는 임의적인 약물 검사, 모욕 행위,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두루 아는 것처럼, 거의 모든 소송에서 법은 사용자의 손을 들어준다.
--- p.331
노동공화주의자들이 간파한 것처럼, 고용주는 자기 권한을 악의적이거나 잔인한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화장실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고, 냉난방 시스템을 잘 갖추거나 작업장 안전규정을 준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선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라는 논쟁은 공화적 자유의 핵심을 벗어나는 문제다. 문제의 핵심은 고용주들만이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p.332
주체의 실패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정치이론은 없다. 이는 보편적인 교훈이며 동시에 경고이기도 하다. 해방의 약속을 완전히 구현하는 데는 많은 실패가 따른다. 그러나 모든 실패를 완전한 패배나 이론적 오류를 드러내는 징후로만 볼 일은 아니다. 노동기사단은 그들이 추구한 모든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에 활동한 어떤 조직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실패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왜 그들만큼 멋지게 실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소임은 노동기사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친 노동공화주의자들은 자유에 대한 자신들만의 사유를 통해 임금노동 자체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 말, 이들이 내놓은 생각은 능동적이며 때로는 전투적이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료시켰다. 탄광과 철도산업, 구두 공장에서 사탕수수 농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노동공화주의의 지지자가 됐다. 19세기 최대의 노동자 정치조직인 노동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에 가입했고, 자유 쟁취라는 희망을 부여잡고 격렬한 저항을 벌여 나갔다.
--- p.5
노동공화주의는 (...) 제도정치가 아닌 노동/생활영역의 공화화를 전면에 제시해 [현대 공화주의가 놓치고 있는] 누락의 지점을 드러낸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그러나 중요한)’ 삶의 측면을 직접 겨냥하며 갱신을 시도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낡은 비판으로 자위하지 않는다.
일상 속 깊숙이 침투해 3생(생명·생존·생활)을 파괴하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사태(N. Fraser)를 직시하고 노동/생활의 지평에서 삶(생명)·경제(생존)·문화(생활)의 대안을 풍요롭게 모색한다. 공공선의 관점에서 비지배 자유, 협력과 연대, 시민적 덕성을 노동의 장에 구현함으로써 ‘공화적 생활세계’를 열어 낸다. 동시에 이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사회적/윤리적 감각’을 창조함으로써 현대 공화주의의 갱신을 완성한다. (...) 이 책의 저자 고레비치는 이 비판적 사유의 기원을 노동기사단에서 찾는 데 일단은 성공한 것 같다.
--- p.15
미국 노동 운동사의 한 장을 차지한 노동기사단은 노동의 장에 공화적 가치를 구현함으로써 개인적 해방과 사회적 공화를 꿈꿨다. 이론적 지도자였던 실비스(W. Sylvis)는 미국 혁명과 내전이 불완전한 정치혁명이라고 단언한다. 공화국이라는 정치 체제가 수립됐음에도 사회경제 체제는 임금노동제라는 새로운 형식의 노예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비스는 공화 체제의 보편적 자유와 임금노동제의 종속노동은 불화할 수밖에 없거니와 종속노동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가치를 기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불합리한 지배를 제거하고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노동기사단의 궁극 목표다.
--- p.16
이 목표[노동기사단이 구현하고자 제시한 목표]는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미완성이다. (...) 현대 자본주의의 작업장은 어떠한가. 작업장은 위험의 공간이다. 고용불안, 저임금, 과로사, 산업재해, 차별 등 노동자는 온갖 위험에 노출돼 있다. 노동조합이 잘 조직돼 있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 노동자는 드물다.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는, 종속적 임금노동 체제의 직접적 효과다. 임금노동 이외에는 다른 삶의 선택지가 제한된 상태에서 노동자는 계약노동이라는 ‘자발적’ 형식으로 위험의 공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 p.16
공화주의를 재조명한 퀜틴 스키너(Q. Skinner)는 “우리는 소극적 자유에 관한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이론을 공화주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셈이다.”라고 주장했다. 주류적인 사고인 자유주의는 자유를 ‘불간섭(non-interference)’으로만 파악한다. 반면, 공화주의는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로 사고한다. 자유주의자는 타인이 실제로 우리의 선택에 간섭하는 경우만을 문제 삼는 반면, 공화주의자는 타인이 실제로 간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간섭이 이뤄질 ‘가능성’이 존재하는 조건까지를 넓게 고려한다. 타인의 의지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야말로 부(不)자유의 핵심이라는 것이 공화주의 관점이다.
--- p.48
자유에 대한 이론으로써 공화주의가 갖는 비판적 유연성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이론가들 자신이 외려 그 역사적 계기 - 즉 공화주의는 이미 자신의 기원을 넘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 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영국의 지배와 통치에 저항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공화적 자유 개념을 발전시킨 미국의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과연 ‘예속과 굴종’에 대해 발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었는가? 아니면 이들 역시 아메리카 선주민과 노예들에 대해 사적인 지배를 허용하는,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자기통치 개념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닌가? 혹시 식민지 미국의 이론가들은 타자의 자립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립 기반을 강화하는, 자기들만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들 때문에 신공화주의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한 귀족정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p.50
고대 로마의 입법자들은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들이야말로 자기 노예들에게 가장 혹독한 법을 입안한 장본인이었다 - 볼테르. (...) 당시 고전 공화국에서 ‘자유를 가장 열망했던 사람’은 바로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 프랑스 혁명을 거친 후,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은 같은 취지로 “만약 아테네에 노예가 없었다면 2만 명의 아테네 시민들이 매일 광장에 모여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 평가는 비록 논쟁적이기는 하나 명백한 진실을 드러내거니와 공화주의 사상을 계승한 근대 이론가들이 해명해야 하는 문제임이 틀림없다.
--- p.63
이 딜레마가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다. 이 역설은 다음 두 가장의 논리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가정은 공화적 자유는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타인을 노예로 삼을 때만 비로소 자립이 가능하다는 전제다. 두 번째 가정은 인간존재는 평등하며, 따라서 법이 정하는 정치적 권리는 보편적이며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가치여야 한다는 전제다. 특정 계급에만 자립을 허용하고 여타 계급을 특권층에 종속시키는 공화적 자유의 특권화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보편주의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래서 역설이다. 이는 논리적 역설이자 윤리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 p.65
신아테네(neo-Aristotelian)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주의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핵심은 시민권의 본질이 경제적 자립”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적 자립은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고 정치적 참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제공하는 필요조건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늘 강조한 바다. 그는 “자유시민은 반드시 ‘행정과 사법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참여는 개개인이 훌륭한 시민으로서 역할하는 데 필요한 덕성 혹은 탁월함을 요구하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지배하고 지배받는 능력’으로 요약했다.
--- p.72
로마의 자유인 ‘리베르타스’는 정치적 참여나 특정한 능력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자유는 독립을 의미하지만, 그 독립성이 어떤 역량을 계발하거나 행사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로마식 자유는 아테네식 자유에 비해 훨씬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식 자유는 법적인 지위로서 자유를 의미하며 당시 확장하고 있었던 다민족 국가인 로마의 모든 구성원에게 허용된 것이었다.
--- p.77
헤이튼은 정치 영역에서는 미국 혁명의 약속이 구현되고 있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닦아 놓은, 보통선거권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중요한 가치가 바로 우리 독립의 토대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선거권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얻습니다. (...)
그러나 그 거대한 구조 ‘자체’는 ‘하나의 이상’일뿐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농장이나 채석장, 대장간, 공장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실제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성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p.146
“통치자나 정치가,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에 공화주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공화주의의 근본 원칙이 무엇인지 잊었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p.228
“협력은 고용주의 위협이나 지배, 모욕 따위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게 만드는 궁핌에서 노동자를 자유롭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유권 자체가 아니라 통제권을 공유하는 협동조합 체제만이 작업장에 팽배한 고용주의 사적인 지배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체제에 노동자는 자신의 집합적 권위에만 복종할 뿐이다.
--- p.235
자립성의 가치가 위대한 이유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노동기사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목표는 “노동자가 자신의 지적·도덕적·사회적 역량을 스스로 함양할 수 있는, 보장된 자유시간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는 진전된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 p.246
“우리는[노동기사단]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8시간 노동으로도 10시간 노동분만큼 생산할 수 있는지.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아마도 하루 만에 당장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일 년이 걸려도 어려울지 모른다.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이 거듭해서 발전한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생산하는 만큼, 그 생산된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 여부다.”
--- p.251
[노동공화주의 프로젝트가 보편성을 획득했는지 여부를] 제대로 검증하려면 여성과 노동에 대한 노동공화주의자들의 인식을 살펴야 한다. 여성이 여전히 남성을 위해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면, 그들은 종속노동을 강요받는 계급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보편성에 대한 노동공화주의적 비전은 그만큼 의심할 수밖에 없다. (...) 우선 확실한 것은 노동기사단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남성과는 다른 역할이 부여돼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성의 가사노동 때문에 가능했다. 노동기사단이 비록 ‘진정한 여성성’이나 순종적 여성성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여성의 실질적인 공적 역할을 강조했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다른 조직들과는 달리 꽤 진보적이었다.
노동기사단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최초로 주장한 조직이며,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을 조직하기도 했다. (...) 대부분이 여성인 가사노동자를 조직한 첫 노동조합이기도 하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는 임금노동자인 남편보다 더 힘겹고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점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성 노동자를 위해 독서와 쓰기 교육 등 시민교육을 제공했고, 어거스트 베벨(August Bebel)의 『여성과 사회주의』와 같은 당대의 빼어난 페니미스트 작품을 낳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동기사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치능력을 갖춘 자율적 주체’로 보았다.
--- p.258
여러 기관지[노동기사단 기관지] 기사들에서도 보이는 데 〈여성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기사에는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 기술돼 있고, 〈노동기사단과 여성의 권리〉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뿐만 아니라 ‘경제와 법에서 동등한 권리’가 여성에게 보장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의 당면 요구〉는 임금노동체제가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를 분석했고, 〈여성 노동자를 위한 조직〉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많은 파업과 협동조합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여성은 안 된다〉라는 글은 당시 여자들이 남자와 밖에 나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이상한 사회 풍조를 풍자하고 비판했다. 성경을 여성의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새롭게 편집해 실은 기사도 있는데, 새로 편집된 성경에는 성평등과 노동개혁이 진전돼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 p.260
“노동기사단이 터득한 것은 이것이다.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노동계급 전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 연대, 그것이 가장 올바른 생각이다. 연대는 자기만 살려는 이기심에 입각한 모든 시스템을 쓸어버릴 것이다.” - 모드 〈사슬을 끊어내며〉
--- p.267
“새벽 4시 반에 그들의 노동은 시작된다. 저녁 7시 반이 넘도록 그 노동은 쉼이 없다. 노동자들이 신문이나 책을 읽을 시간이 있겠는가.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누가 찾아오지도 않는다. 씻을 시간도 없다. 꽃을 가꾼다고? 가족과 산책할 여유도 없는데?” 몸을 씻고 꽃을 가꾸는 일, 가족과 산책하는 일은 공공선을 위한 이타적 행동과 같은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스미스가 말한 비가시적 빈곤(invisibility of poverty), 곧 감추고 싶은 궁색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과 매너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 p.281
노동공화주의자들이 직면한 난관은 외부의 억압과 종속계급 내부의 이질적 분화[균열]였다. 스튜어드가 가장 우려한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파괴적 모순이다. “생각해보자. 기계공 여러분들. 당신들은 무지한 노동자와 여러분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차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무지한, 보통 노동자들은 자본가들 편으로 돌아서서 당신들과는 정반대로 투표한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당신들은 약삭빠른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그들이 노동자를 무시하듯] ‘그 무지한, 보통’ 노동자들을 멀리하고 경멸한다.”
--- p.284
게다가 노동자 조직에 대한 신문 보도는 늘 불공정했고 가짜뉴스의 진원지였다. 노동기사단 사무총장이던 로버트 레이톤은 “정보를 신문에 의존하면 기만당하기 십상”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피츠버그 데일리 디스패치〉의 예를 들었는데, 그 신문은 왜곡 인용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도 않은 인터뷰를 가짜로 만들어 내보내기도 했다. (...) “자본가들은 수백만 달러를 뿌려서 뉴스 매체를 사들이고, 가짜뉴스로 사실을 날조하며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한다. 금융과 유통, 생산은 물론이고 뉴스 채널마저도 이미 독점자본의 손에 넘어가 있다.”
--- p.298
“분파주의와 편견이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깊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교육이 필요했다. 그 교육만이 당시 그들이 지지하고 있었던 부르주아 정당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을 획득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무도 노동자 교육에 나서지 않는다면, 노동자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공화주의자들, 특히 노동기사단이 공화주의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론만이 아닌 실천의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 p.299
노동기사단의 초대 통계국장을 지낸 테어도어 쿠노(Theodore Cuno)는 통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노동대중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전반적인 노동문제는 물론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하고 충분한 보상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신뢰할만한 통계 없이는, 임금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가치의 3분의 2 이상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통계 전문가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만이 우리에게 노동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다.”
--- p.301
한 노동기사단 조합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읽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 신문을 읽는 중이다.” (...) “우리는[노동기사단] 우리를 위한 교육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도서관과 강의실을 짓고, 우리가 기획하고 관리하는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활용할 수 있는 여유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
독서클럽, 강좌, 스터디그룹, 토론장,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 등을 갖춘 다양한 시설이 노동기사단 각 지부에서 활발히 건설됐다. 파우덜리는 특히 ‘노동자들의 문예회관과 독서클럽 건설’에 주목했고, 이를 “노동하는 자 역시 고용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를 학습할 권리, 즉 평등한 학습권을 행사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평가했다.
--- p.302
“우리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르도를 읽었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를 탐독했다. 헨리 조지와 허버트 스펜서의 책도 읽었다. 라쌀레의 정치 팜플렛 중 몇 개는 번역을 하기도 했다.” (...) 〈노동연대〉는 공개강좌를 다루는 특별 세션을 마련하고 “미국 임금노동자에게는 노동문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특히 협력이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공지했다. 첫 번째 강좌에서는 ‘협력:장점과 혜택, 그리고 노동기사단의 임무’를 주로 다뤘으며, 해마다 강좌 수를 늘려나갔다.
--- p.303
“협력이란 윤리의 과학에 기초해 있다. 협력은 안정의 윤리, 존중의 윤리, 우애의 윤리를 내포하는 과학이다. 협력은 동시에 ‘자기 이익’이라는 관념의 산물이다. 이기심은 타인을 뒤처지게 만든다 해도 나의 조건을 유리하게 개선할 수 있다면 이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반면, ‘자기 이익’은 타인과 함께하지 않으면 성취가 불가능한, 확고한 독립을 추구하는 속에서의 자신의 이익이다.”
--- p.307
노동공화주의가 성취한 개념적 진전[시민적 덕성 개념에서]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을 시민적 덕성의 담지자로 본 것이다. 자산가인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안정이라는 이익보다 피지배계급이 열망하는 자유노동에 대한 부분이익(partial interest)이 공화국의 일반이익(general interest)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시민적 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거니와 덕성은 종속된 피지배계급 스스로가 자기 교육과 자기 조직화를 통해 함양할 수 있는 윤리다.
--- p.324
노동공화주의자들은 매력적이면서도 풍부한 영감을 주는 사상적 그룹이다. 그러나 이들의 당시 관심사는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적어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쿠폰 따위로 주는 고용주는 없으며, 도시 전역에 계엄 선포를 허용하는 법원도 없다. 노동운동 지도자들 역시 테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파업 천막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기관총으로 살육당할 일도 없다.
국가권력은 설사 노동자들이 도시를 장악한다 해도 이를 진압한다고 탱크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빈민가 공동주택 거주자나 옥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가난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노동법과 복지제도, 첨단기술, 수많은 값싼 물건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19세기 말의 노동자보다는 풍족한 삶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19세기처럼 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우월감은 정당한가?]
--- p.328
[아직도] 채용과 해고, 작업장에 대한 지휘와 감독, 혹은 일과 후 사생활 감시를 둘러싸고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은 갖가지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댓글을 문제 삼는가 하면, 성적 지향이나, 너무 섹시하다 혹은 섹시함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해고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지지하면 해고했고, ‘충성도가 떨어진다’라거나 순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해고 사유가 됐다. (...)
노동자들의 소송 대상도 다양하거니와,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거나 고온의 작업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받는 문제, 근무시간 중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거나 점심시간을 주지 않는 일, 교대시간이 끝난 후 강제로 남아 있어야 하는 일, 휴게시간에 책 읽는 것을 금지하거나 냉난방기를 트는 일을 금지하는 것, 불시에 하는 임의적인 약물 검사, 모욕 행위,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두루 아는 것처럼, 거의 모든 소송에서 법은 사용자의 손을 들어준다.
--- p.331
노동공화주의자들이 간파한 것처럼, 고용주는 자기 권한을 악의적이거나 잔인한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화장실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고, 냉난방 시스템을 잘 갖추거나 작업장 안전규정을 준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선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라는 논쟁은 공화적 자유의 핵심을 벗어나는 문제다. 문제의 핵심은 고용주들만이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p.332
주체의 실패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정치이론은 없다. 이는 보편적인 교훈이며 동시에 경고이기도 하다. 해방의 약속을 완전히 구현하는 데는 많은 실패가 따른다. 그러나 모든 실패를 완전한 패배나 이론적 오류를 드러내는 징후로만 볼 일은 아니다. 노동기사단은 그들이 추구한 모든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에 활동한 어떤 조직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실패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왜 그들만큼 멋지게 실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소임은 노동기사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 서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책은 19세기 미국 노동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의 공화주의 사상과 실천을 치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노동운동이 현대 공화주의 사유의 발전에 어떻게 공헌했는가를 밝힘은 물론,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를 야기할 정도로 타락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담론과 윤리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를 ‘노동공화주의’라 명명하고 현대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한다. 그 핵심내용과 시사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공화주의는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으로 불리는 현대 공화주의 사상의 흠결을 보완한다. 90년대 이후 신공화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자유의 제도화에 대해 천착했다면, 이 책의 저자인 고레비치는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자립’을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이를 구현하려고 했던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역사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공화적 자유의 보편화와 이를 통한 사회경제적 자립,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한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지향을 ‘노동공화주의(labor republicanism)’로 명명한다.
둘째, 노동공화주의는 임노동체제를 대체할 대안적 생산체제로서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제시한다. 노동기사단은 임노동 체제 아래에서는 공화적 자유가 보장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협력의 가치에 기초한 공화적 생산체제를 대안을 구상했다. 또한,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5천여 개가 넘는 협동조합을 조직해 운영했다. 이 실험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으나, 19세기 산업사회 초기라는 당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협동조합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한 노동기사단의 활동은 말 그대로 ‘선진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셋째,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가 중요한데, 저자는 고전 사상가(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나 근대 인문주의 사상가(마키아벨리, 해밀톤 등)에 의해 정초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개념을 현대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 즉 노동공화주의적 윤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윤리의 핵심은 연대다.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자개연)’이라는 이론적 성취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축하되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를 내장한 주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 윤리란 공화주의적 삶의 양식인 덕성(아리스토텔레스의 아레테(?ρετ?, 영어: arete) 구별되는)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대다.
그렇기에 옮긴이는 노동공화주의를 ‘정치경제학’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찍이 칸트를 경유해 마르크스를 읽어낸 방식 - 『자본』에 내재한 윤리적 계기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는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 은 노동공화주의 독법으로 안성맞춤이다. 노동기사단의 사유와 실천을 사회운동사나 지성사의 관점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낼 때,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라는 이상은 현실적 전망이 된다. 이를 구현할 주체의 상이 명확해지며 동시에 그 주체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과 윤리 감각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노동기사단의 역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넷째, 노동공화주의는 공화주의의 핵심인 지배/종속에 대한 개념을 세밀하게 벼림으로써 지배/종속의 공간이자 위험의 공간인 현대 작업장의 부자유 문제를 새롭게 드러낸다. 특히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작업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이제 고전적 양식을 지나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지나친 성과주의로 인해 자기착취가 일상화되고 있는 반면 착취자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알랭 쉬피오가 지적한 숫자에 의한 통치(數治)는 성과주의적 지배의 가장 발전된 형식이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자본의 자의적 지배의 기술적 결합으로 노동자의 (비지배) 자유를 침식하고 자본의 지배를 완성한다. 태움 등 직장 괴롭힘 문제의 배후에는 자본이 자기통제를 내면화한 노동자(복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데서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시를 대행하는 주체’를 생산한 결과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노동공화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다 깊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다섯째, 노동공화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현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허술하다 못해 반(反)민주적이기까지 한 선거제도를 목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거니와 자유의 개념을 새로이 정초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유는 민주주의의 중핵적 가치로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자유의 왜곡, 곧 불간섭 자유의 이기와 타자에 대한 배제의 확산이 민주주의의 타락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를 자유의 패러독스라 불러도 좋겠다. 노동공화주의는 이 역설의 배후를 사회경제적 자유의 부재에서 찾는다. 제도정치의 영역이 아닌 사회경제적 영역, 즉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의 부자유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고레비치의 저작이 현재 미국과 유럽의 정치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작’이 된 것은 기존의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자유’를 공화적 자유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이론적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8월, 정치학계의 최고 권위 저널인 [Political Theory]는 이런 가치를 인정해서 이 책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논쟁을 담은 지상 심포지엄을 실었다.
섯째, 매우 주목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노동공화주의가 19세기 페미니즘을 노동의 관점에서 정초한 담론 중 하나라는 점이다. 노동기사단은 당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노동’을 운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여성의 참정권 보장은 물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최초로 주장한 조직이다. 대부분이 여성인 가사노동자를 조직한 첫 노동조합이 노동기사단이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 노동자야말로 남편보다 더 힘겹고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들을 위한 독서와 쓰기 교육 등 시민교육을 제공했다. 노동기사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치능력을 갖춘 자율적 주체’로 본 최초의 노동조직이며 노동의 관점에서 근대적 페미니즘을 발전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일곱째,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방법론과 그 효과다. 푸코의 고고학, 계보학적 방법론에 필적할 만큼, 저자는 방대한 사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평을 통해 노동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개척하고 있다. 고레비치가 인용하고 분석한 사료는 새로 발굴된 자료로 노동의 지성사를 개척하게 하는 귀중한 자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고고학적 발견이 주는 효과와 영향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 눈부신 기록 속에는 공화적 자유를 꿈꾸고 이를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 구현하기 위해 협력하고 학습하며 연대하는 80만 노동기사단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들은 공화적 자유라는 깃발을 가슴에 품고 역사의 한 국면을 형성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찬란한 몰락이다. 살아 숨 쉬는 영감을 고스란히 역사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성취에 무엇을 더 보탰는가? 아니 그들을 알기는 하나? 노동기사단의 열정과 몰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저자와 역자는 노동과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공화적 자유를 구현하고자 했던 노동기사단에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세계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은 외려 실천적 의미를 더한다. 바꾸어야 할 현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그 궁극의 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왜 그들만큼 멋지게 실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 질문은 새로운 노동세계를 고민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만 모든 이들이 다시 품어야 할 물음이다.
첫째, 노동공화주의는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으로 불리는 현대 공화주의 사상의 흠결을 보완한다. 90년대 이후 신공화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자유의 제도화에 대해 천착했다면, 이 책의 저자인 고레비치는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자립’을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이를 구현하려고 했던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역사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공화적 자유의 보편화와 이를 통한 사회경제적 자립,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한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지향을 ‘노동공화주의(labor republicanism)’로 명명한다.
둘째, 노동공화주의는 임노동체제를 대체할 대안적 생산체제로서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제시한다. 노동기사단은 임노동 체제 아래에서는 공화적 자유가 보장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협력의 가치에 기초한 공화적 생산체제를 대안을 구상했다. 또한,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5천여 개가 넘는 협동조합을 조직해 운영했다. 이 실험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으나, 19세기 산업사회 초기라는 당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협동조합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한 노동기사단의 활동은 말 그대로 ‘선진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셋째,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가 중요한데, 저자는 고전 사상가(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나 근대 인문주의 사상가(마키아벨리, 해밀톤 등)에 의해 정초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개념을 현대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 즉 노동공화주의적 윤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윤리의 핵심은 연대다.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자개연)’이라는 이론적 성취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축하되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를 내장한 주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 윤리란 공화주의적 삶의 양식인 덕성(아리스토텔레스의 아레테(?ρετ?, 영어: arete) 구별되는)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대다.
그렇기에 옮긴이는 노동공화주의를 ‘정치경제학’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찍이 칸트를 경유해 마르크스를 읽어낸 방식 - 『자본』에 내재한 윤리적 계기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는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 은 노동공화주의 독법으로 안성맞춤이다. 노동기사단의 사유와 실천을 사회운동사나 지성사의 관점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낼 때,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라는 이상은 현실적 전망이 된다. 이를 구현할 주체의 상이 명확해지며 동시에 그 주체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과 윤리 감각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노동기사단의 역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넷째, 노동공화주의는 공화주의의 핵심인 지배/종속에 대한 개념을 세밀하게 벼림으로써 지배/종속의 공간이자 위험의 공간인 현대 작업장의 부자유 문제를 새롭게 드러낸다. 특히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작업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이제 고전적 양식을 지나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지나친 성과주의로 인해 자기착취가 일상화되고 있는 반면 착취자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알랭 쉬피오가 지적한 숫자에 의한 통치(數治)는 성과주의적 지배의 가장 발전된 형식이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자본의 자의적 지배의 기술적 결합으로 노동자의 (비지배) 자유를 침식하고 자본의 지배를 완성한다. 태움 등 직장 괴롭힘 문제의 배후에는 자본이 자기통제를 내면화한 노동자(복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데서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시를 대행하는 주체’를 생산한 결과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노동공화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다 깊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다섯째, 노동공화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현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허술하다 못해 반(反)민주적이기까지 한 선거제도를 목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거니와 자유의 개념을 새로이 정초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유는 민주주의의 중핵적 가치로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자유의 왜곡, 곧 불간섭 자유의 이기와 타자에 대한 배제의 확산이 민주주의의 타락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를 자유의 패러독스라 불러도 좋겠다. 노동공화주의는 이 역설의 배후를 사회경제적 자유의 부재에서 찾는다. 제도정치의 영역이 아닌 사회경제적 영역, 즉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의 부자유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고레비치의 저작이 현재 미국과 유럽의 정치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작’이 된 것은 기존의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자유’를 공화적 자유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이론적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8월, 정치학계의 최고 권위 저널인 [Political Theory]는 이런 가치를 인정해서 이 책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논쟁을 담은 지상 심포지엄을 실었다.
섯째, 매우 주목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노동공화주의가 19세기 페미니즘을 노동의 관점에서 정초한 담론 중 하나라는 점이다. 노동기사단은 당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노동’을 운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여성의 참정권 보장은 물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최초로 주장한 조직이다. 대부분이 여성인 가사노동자를 조직한 첫 노동조합이 노동기사단이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 노동자야말로 남편보다 더 힘겹고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들을 위한 독서와 쓰기 교육 등 시민교육을 제공했다. 노동기사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치능력을 갖춘 자율적 주체’로 본 최초의 노동조직이며 노동의 관점에서 근대적 페미니즘을 발전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일곱째,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방법론과 그 효과다. 푸코의 고고학, 계보학적 방법론에 필적할 만큼, 저자는 방대한 사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평을 통해 노동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개척하고 있다. 고레비치가 인용하고 분석한 사료는 새로 발굴된 자료로 노동의 지성사를 개척하게 하는 귀중한 자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고고학적 발견이 주는 효과와 영향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 눈부신 기록 속에는 공화적 자유를 꿈꾸고 이를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 구현하기 위해 협력하고 학습하며 연대하는 80만 노동기사단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들은 공화적 자유라는 깃발을 가슴에 품고 역사의 한 국면을 형성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찬란한 몰락이다. 살아 숨 쉬는 영감을 고스란히 역사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성취에 무엇을 더 보탰는가? 아니 그들을 알기는 하나? 노동기사단의 열정과 몰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저자와 역자는 노동과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공화적 자유를 구현하고자 했던 노동기사단에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세계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은 외려 실천적 의미를 더한다. 바꾸어야 할 현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그 궁극의 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왜 그들만큼 멋지게 실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 질문은 새로운 노동세계를 고민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만 모든 이들이 다시 품어야 할 물음이다.
추천평
이 책은 미국의 사회운동에 관한 논쟁적인 연구로, 공화적 자유 개념이 노동자의 지지를 바탕으로 발흥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자유가 개방적 시장과 투명한 정부만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예속과 굴종에서 벗어난 고용과 노동조건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기업 친화적인’ 정부가 대세인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탁월한 비평이다.
- 필립 페팃(Philip Pettit)(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호주국립대학 석좌교수)
알렉스 고레비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의 관계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 도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노동공화주의자’로 명명한 이들이 미국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에 대해 매력적이고 차별화된 비평을 수행했다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조명해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다.
- 제이콥 리비(Jacob T. Levy)(맥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가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나올 때가 있다. 그보다 더 드물게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회의하게 만드는 책이 나오는데, 알렉스 고레비치가 바로 그런 책을 썼다.
- 코리 로빈(Corey Robin)(브루클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 필립 페팃(Philip Pettit)(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호주국립대학 석좌교수)
알렉스 고레비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의 관계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 도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노동공화주의자’로 명명한 이들이 미국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에 대해 매력적이고 차별화된 비평을 수행했다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조명해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다.
- 제이콥 리비(Jacob T. Levy)(맥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가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나올 때가 있다. 그보다 더 드물게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회의하게 만드는 책이 나오는데, 알렉스 고레비치가 바로 그런 책을 썼다.
- 코리 로빈(Corey Robin)(브루클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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