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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정치가와 군인들의 지난 길을 다시 살펴보다
『비극의 군인들―근대한일관계사의 비록秘錄』(일조각, 2020)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갔던 청년들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다. 1982년 동 출판사에서 발행했던 『비극의 군인들―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의 개정증보판으로, 지난 38년간 저자가 추가로 입수, 섭렵한 해당 인물 또는 가까운 인물이 직접 쓴 다채로운 자료를 기반으로 거의 새로운 책이라 하여도 좋을 만큼 내용을 대폭 추가하였다. 특히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은 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관이었던 김명수가 편집한 『일당기사一堂紀事』와 고종 재임시 시종무관을 지낸 어담이 쓴 『어담소장 회고록』 등 소중한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비극의 군인들―근대한일관계사의 비록秘錄』(일조각, 2020)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갔던 청년들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다. 1982년 동 출판사에서 발행했던 『비극의 군인들―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의 개정증보판으로, 지난 38년간 저자가 추가로 입수, 섭렵한 해당 인물 또는 가까운 인물이 직접 쓴 다채로운 자료를 기반으로 거의 새로운 책이라 하여도 좋을 만큼 내용을 대폭 추가하였다. 특히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은 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관이었던 김명수가 편집한 『일당기사一堂紀事』와 고종 재임시 시종무관을 지낸 어담이 쓴 『어담소장 회고록』 등 소중한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목차
신판 서언
초판 서언
Ⅰ 일본 육사 출신의 계보
Ⅱ 일심회의 야망
Ⅲ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Ⅳ 추정 이갑
Ⅴ 김광서의 꿈과 모험
Ⅵ 비극의 장군 홍사익
Ⅶ 이우 공, 저항의 생애
Ⅷ 계림회 시말기
부록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명부
초판 서언
Ⅰ 일본 육사 출신의 계보
Ⅱ 일심회의 야망
Ⅲ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Ⅳ 추정 이갑
Ⅴ 김광서의 꿈과 모험
Ⅵ 비극의 장군 홍사익
Ⅶ 이우 공, 저항의 생애
Ⅷ 계림회 시말기
부록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명부
책 속으로
갑오개혁이 단행된 이듬해인 1895년, 내부대신 박영효의 주선에 따라 일본에 건너간 유학생 가운데 군인을 지망한 21명은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으로 진학하여 1899년에 졸업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한 뒤로부터 그들은 당시의 배일적인 정부로부터 친일분자로 간주되어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 도쿄 시내에서 울분의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비밀결사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를 결성하여 보수정권 타도를 결의한 것은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 뒤 일부 장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게 되면서 더욱 과격한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이보다 조금 앞서 귀국한 동기생 중 일부가 민영환의 열성 어린 노력으로 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직이 되는 등 여건이 크게 호전되자 일심회 동지들도 1902년 초까지는 모두 귀국하여 군부 내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 정부 타도라는, 그들이 전에 품었던 혁명 결의도 점차 퇴색해 갔다.
--- p.118 「제2장 〈일심회의 야망〉」 중에서
고종 황제는 이른바 보호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가 보여준 강압적인 수법에 완전히 감정이 상해버렸다. 그에 대한 지난날의 신망은 원성으로 일변했다. 다만 황제는 조약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우국지사들과는 달리 그처럼 불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시종무관 어담은 회상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직 한 사람, 황제만은 이 보호조약을 그토록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측근의 신임 두터운 자만이 아는 바로서 황족, 각원閣員이라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물론 이를 표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왜 황제가 이를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하면, 과거 한국은 청국의 속국으로서 최근 일청전쟁 전까지는 어떤 것이나 청국의 지배 간섭을 받았는데, 이번 보호조약은 그 청국에 대신하여 일본으로 바꾸어진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외교권만 일본에 내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상代償이 적은 것을 오히려 축복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장래는 이 보호조약에 의해서 보장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때문에 받은 다소의 굴욕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폐하의 진의이다.”
이 어담의 관찰이 어느 정도 진상을 꿰뚫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쩌면 고종 황제는 조약체결 타결 과정에서 원안原案에 없던 제5조항이 추가되어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고 한 것에 적이 마음을 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이즈음 이토와 일본 군부에 대해서 전적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육군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한국과 만주정책에 있어서 무단적인 급진정책으로 나가려 했다. 이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게 국제협조를 중시하는 외교운영을 주장한 것이 이토를 정상으로 하는 문관들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이토를 견제하려는 속셈에서 일본 군부를 이용하려고 했다. 어담은 이 위험천만한 모험의 내막을 회고록에 쓰고 있는 것이다.
--- pp.224~225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중에서
이처럼 이토는 비교적 자주성이 강했던 지난날의 개혁정치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통감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는 이완용과 그 친일내각의 몇몇 각료만을 동반자로 하여 시정개혁을 이끌어 갔다. 그는 사법제도, 특히 재판 및 감옥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함으로써 고종 통치 40여 년간에 걸쳐 척족 민씨 일파와 황실의 근친들이 자행한 온갖 악정과 수탈에 시달려 온 한국 민중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개혁의 성격과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일본인이 지배하는 통감부라는 정치기구에 속박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통감부는 법전조사국을 만들어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조사 연구하여 참작하는 등 사법개혁에 신중하게 대처한 일면도 있었지만,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익숙한 관습을 무시한 채 일본이 서구문명에서 따온 근대적 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재판제도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 실적을 거둔 편이었지만, 그 밖에 재정·화폐·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은 실제로 민중의 부담을 줄여준다거나 생활에 획기적인 개선을 수반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차츰 불만이 쌓여 민심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토는 본국에서는 ‘지혜의 정치가’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으나, 한국에 와서는 자주성을 빼앗긴 한국민이 품고 있던 이 같은 민족적 감정이랄까 민족주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결국 보호정치를 실패로 끝나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 자신도 이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 pp.403~404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중에서
여기서 제기되는 하나의 의문은, 어찌하여 김광서는 항일 무장투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노령을 떠나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계속 항쟁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1924년 12월 30일 자의 『일록』에서 “아! 무의미한 이 세상을 한 해 두 해 맞아들이게 됨을 경천은 무엇보다도 아파한다. 정말 싫은 이 오가는 연년年年, 오직 나는 혁명에 목말라 죽겠다. 내가 이 시베리아 동단東端에 있는 것이 옳은가! 타처他處로 가는 것이 옳은가!” 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이 문제로 크게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연해주 지방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일본 육사 선후배들인 유동열이나 이청천은 1921년 6월 하순에 발생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은 것을 계기로 노령을 떠나 만주로 숨어들었으나, 그 같은 참변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김광서는 비록 미덥지 않은 소련 공산국가체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도 노령에 잔류한 이동휘李東輝와 같은 관북 출신으로, 고향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연해주에 어떤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일록』에서 그의 시국관이랄까 전쟁관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에서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가 3·1운동 직후 망명문제로 고민할 때의 심경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점이 주목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의 출분出奔이 좀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이가 젊고 기개와 용기가 있으므로 해외에서 몇 년간 표류漂流하여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가 이만시를 성공적으로 기습 공격한 뒤 물러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본거지인 아누치노로 돌아와 잠시 그간 악전고투했던 피로를 풀고 있을 때인 1922년 5월 15일 자 『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장래를 전망한 것도 역시 주목된다.
“이 세계는 어쨌든 간에 분분紛紛할 것이다. 전날의 구주歐洲59 대전란은 결국 무승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 승부는 미래에 맺을 것이다. 그때에는 유럽뿐 아니라 그 주동지主動地가 극동이 되리라. 그때는 우리에게 필요 이상의 필사적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 pp.569~570 「제5장 〈김광서의 꿈과 모험〉」 중에서
홍 중장에 대한 재판은 이해 3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마닐라에서 열렸다. 판사, 검사, 변호인 모두가 미국인이었다. 그의 재판기록은 영어 타이프 인쇄로 1,43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것인데 현재 도쿄 모처에 보관 중이라 한다. 이 기록과 필자의 구고舊稿를 토대로 하여 일본인 쓰쿠바 쇼지筑波常治가 집필한 「홍 육군중장의 형사刑死」에 의하면 당시 검사가 열거한 죄상은 무려 107개조에 달했다. 그중 검사단이 강조한 것이 포로수용소의 기아, 의료시설의 불비不備, 실내 환경의 불량, 기타 일본 병사에 의한 포로의 구타, 상해傷害, 강제노동, 살해, 혹은 포로수송 중에 있어서의 일본병의 발포 등이었다.
홍 중장은 다만 “나는 무죄인 것을 주장한다”고 했을 뿐 다른 발언은 허가되지 않았다. 변호인 측의 증언도 불충분했다. 쓰쿠바는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홍 중장은 그보다 앞서 야마시타 대장에 대한 재판 때 증언대에 서서 “나는 한국인으로 국적은 일본이다”라고 했으나 재판장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변호인의 최후 변론에 가서야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본건에 있어서는, 이 군사재판이 일찍이 부딪친 일이 없는 사정이 있다. 이 자리에 있는 홍사익은 일본군의 일원으로 지금 사령관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인이다. 이 사실을, 본 법정이 특별히 고려해 주기를 바란다.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일본인에 억압되어 왔다. 일본 육군에 들어온 한국인이 어떤 지휘관 자리에 앉았건 간에 거의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본 사건의 피고는 일본군대 내부에서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로부터는 반항을 받았고 상관들로부터는 경멸을 받았다.”
그러나 변호인 측의 이 같은 정상 참작론에 대해 검사 측의 최종 논고는 이와 반대로 응수하고 있다.
“변호인은 피고를 한국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피고는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의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북중국에서는 일본군 여단장을 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그 점에서 본다면 피고는 ‘오퍼튜니스트’(기회주의자)인 셈이다. … 변호인은 피고를 환경의 희생자라고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은 변호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록에 있는 사실뿐이다.”
판사단은 홍사익을 둘러싼 ‘민족문제’에 대해서 조금만큼의 배려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를 일본군인의 포로학대사건으로 처리하여 검사단이 주장한 107개조의 죄상 가운데 84개조를 유죄로 인정했다. 그 결과 홍 중장에게는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 뒤 일부 장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게 되면서 더욱 과격한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이보다 조금 앞서 귀국한 동기생 중 일부가 민영환의 열성 어린 노력으로 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직이 되는 등 여건이 크게 호전되자 일심회 동지들도 1902년 초까지는 모두 귀국하여 군부 내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 정부 타도라는, 그들이 전에 품었던 혁명 결의도 점차 퇴색해 갔다.
--- p.118 「제2장 〈일심회의 야망〉」 중에서
고종 황제는 이른바 보호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가 보여준 강압적인 수법에 완전히 감정이 상해버렸다. 그에 대한 지난날의 신망은 원성으로 일변했다. 다만 황제는 조약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우국지사들과는 달리 그처럼 불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시종무관 어담은 회상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직 한 사람, 황제만은 이 보호조약을 그토록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측근의 신임 두터운 자만이 아는 바로서 황족, 각원閣員이라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물론 이를 표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왜 황제가 이를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하면, 과거 한국은 청국의 속국으로서 최근 일청전쟁 전까지는 어떤 것이나 청국의 지배 간섭을 받았는데, 이번 보호조약은 그 청국에 대신하여 일본으로 바꾸어진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외교권만 일본에 내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상代償이 적은 것을 오히려 축복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장래는 이 보호조약에 의해서 보장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때문에 받은 다소의 굴욕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폐하의 진의이다.”
이 어담의 관찰이 어느 정도 진상을 꿰뚫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쩌면 고종 황제는 조약체결 타결 과정에서 원안原案에 없던 제5조항이 추가되어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고 한 것에 적이 마음을 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이즈음 이토와 일본 군부에 대해서 전적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육군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한국과 만주정책에 있어서 무단적인 급진정책으로 나가려 했다. 이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게 국제협조를 중시하는 외교운영을 주장한 것이 이토를 정상으로 하는 문관들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이토를 견제하려는 속셈에서 일본 군부를 이용하려고 했다. 어담은 이 위험천만한 모험의 내막을 회고록에 쓰고 있는 것이다.
--- pp.224~225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중에서
이처럼 이토는 비교적 자주성이 강했던 지난날의 개혁정치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통감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는 이완용과 그 친일내각의 몇몇 각료만을 동반자로 하여 시정개혁을 이끌어 갔다. 그는 사법제도, 특히 재판 및 감옥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함으로써 고종 통치 40여 년간에 걸쳐 척족 민씨 일파와 황실의 근친들이 자행한 온갖 악정과 수탈에 시달려 온 한국 민중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개혁의 성격과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일본인이 지배하는 통감부라는 정치기구에 속박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통감부는 법전조사국을 만들어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조사 연구하여 참작하는 등 사법개혁에 신중하게 대처한 일면도 있었지만,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익숙한 관습을 무시한 채 일본이 서구문명에서 따온 근대적 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재판제도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 실적을 거둔 편이었지만, 그 밖에 재정·화폐·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은 실제로 민중의 부담을 줄여준다거나 생활에 획기적인 개선을 수반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차츰 불만이 쌓여 민심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토는 본국에서는 ‘지혜의 정치가’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으나, 한국에 와서는 자주성을 빼앗긴 한국민이 품고 있던 이 같은 민족적 감정이랄까 민족주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결국 보호정치를 실패로 끝나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 자신도 이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 pp.403~404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중에서
여기서 제기되는 하나의 의문은, 어찌하여 김광서는 항일 무장투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노령을 떠나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계속 항쟁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1924년 12월 30일 자의 『일록』에서 “아! 무의미한 이 세상을 한 해 두 해 맞아들이게 됨을 경천은 무엇보다도 아파한다. 정말 싫은 이 오가는 연년年年, 오직 나는 혁명에 목말라 죽겠다. 내가 이 시베리아 동단東端에 있는 것이 옳은가! 타처他處로 가는 것이 옳은가!” 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이 문제로 크게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연해주 지방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일본 육사 선후배들인 유동열이나 이청천은 1921년 6월 하순에 발생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은 것을 계기로 노령을 떠나 만주로 숨어들었으나, 그 같은 참변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김광서는 비록 미덥지 않은 소련 공산국가체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도 노령에 잔류한 이동휘李東輝와 같은 관북 출신으로, 고향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연해주에 어떤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일록』에서 그의 시국관이랄까 전쟁관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에서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가 3·1운동 직후 망명문제로 고민할 때의 심경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점이 주목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의 출분出奔이 좀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이가 젊고 기개와 용기가 있으므로 해외에서 몇 년간 표류漂流하여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가 이만시를 성공적으로 기습 공격한 뒤 물러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본거지인 아누치노로 돌아와 잠시 그간 악전고투했던 피로를 풀고 있을 때인 1922년 5월 15일 자 『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장래를 전망한 것도 역시 주목된다.
“이 세계는 어쨌든 간에 분분紛紛할 것이다. 전날의 구주歐洲59 대전란은 결국 무승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 승부는 미래에 맺을 것이다. 그때에는 유럽뿐 아니라 그 주동지主動地가 극동이 되리라. 그때는 우리에게 필요 이상의 필사적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 pp.569~570 「제5장 〈김광서의 꿈과 모험〉」 중에서
홍 중장에 대한 재판은 이해 3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마닐라에서 열렸다. 판사, 검사, 변호인 모두가 미국인이었다. 그의 재판기록은 영어 타이프 인쇄로 1,43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것인데 현재 도쿄 모처에 보관 중이라 한다. 이 기록과 필자의 구고舊稿를 토대로 하여 일본인 쓰쿠바 쇼지筑波常治가 집필한 「홍 육군중장의 형사刑死」에 의하면 당시 검사가 열거한 죄상은 무려 107개조에 달했다. 그중 검사단이 강조한 것이 포로수용소의 기아, 의료시설의 불비不備, 실내 환경의 불량, 기타 일본 병사에 의한 포로의 구타, 상해傷害, 강제노동, 살해, 혹은 포로수송 중에 있어서의 일본병의 발포 등이었다.
홍 중장은 다만 “나는 무죄인 것을 주장한다”고 했을 뿐 다른 발언은 허가되지 않았다. 변호인 측의 증언도 불충분했다. 쓰쿠바는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홍 중장은 그보다 앞서 야마시타 대장에 대한 재판 때 증언대에 서서 “나는 한국인으로 국적은 일본이다”라고 했으나 재판장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변호인의 최후 변론에 가서야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본건에 있어서는, 이 군사재판이 일찍이 부딪친 일이 없는 사정이 있다. 이 자리에 있는 홍사익은 일본군의 일원으로 지금 사령관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인이다. 이 사실을, 본 법정이 특별히 고려해 주기를 바란다.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일본인에 억압되어 왔다. 일본 육군에 들어온 한국인이 어떤 지휘관 자리에 앉았건 간에 거의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본 사건의 피고는 일본군대 내부에서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로부터는 반항을 받았고 상관들로부터는 경멸을 받았다.”
그러나 변호인 측의 이 같은 정상 참작론에 대해 검사 측의 최종 논고는 이와 반대로 응수하고 있다.
“변호인은 피고를 한국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피고는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의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북중국에서는 일본군 여단장을 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그 점에서 본다면 피고는 ‘오퍼튜니스트’(기회주의자)인 셈이다. … 변호인은 피고를 환경의 희생자라고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은 변호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록에 있는 사실뿐이다.”
판사단은 홍사익을 둘러싼 ‘민족문제’에 대해서 조금만큼의 배려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를 일본군인의 포로학대사건으로 처리하여 검사단이 주장한 107개조의 죄상 가운데 84개조를 유죄로 인정했다. 그 결과 홍 중장에게는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 pp.625~626 「제6장 〈비극의 장군 홍사익〉」 중에서
출판사 리뷰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난 조국, 팍팍한 현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타국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창창한 앞날을 꿈꾸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조선 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정한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882년 박영효의 수행원이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 유년과정에 입교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청년들 상당수가 각자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떤 이는 근대식 군대의 핵심이 되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이는 입신출세를 하여 이름을 떨치고 집안을 일으키려고, 어떤 이는 암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처음에 그들은 모두 이 학교에서 끝까지 버티고 신문물을 배워 조국으로 돌아가면 꽃길이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일례로 조국의 정정불안 탓에 겪어야 했던 생활고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앞날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 초기 유학생 박유굉은 졸업 1년을 앞두고 자결하였다. 그 후에도 자국 내 권력의 향방에 따라 정부는 청년들에게 유학을 장려하기도 하고 귀국명령을 내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예측불가의 시간이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보수적인 정부의 전복을 꿈꿨다가 처형당하거나 귀양 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 이들도 있었다.
시대에 휩쓸려 간 제각각의 인생
모든 유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거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괴로움과 고충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식민지에서 온 학생이라는 이유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고, 조국에서조차 그들을 크게 반기지 않았다. 진급이나 더 큰 출세를 바라는 건 욕심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어린 학생들과 젊은 군인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세파에 휩쓸렸고, 때로는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전쟁의 위협에 내몰리기도 했다. 따라서 망국의 신민이 되었을 때 결심했던 대로 임관한 뒤 독립운동에 전념한 사람도 있었지만, 사정상 군을 떠나 민간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고, 나라를 저버리고 변절하는 사람, 일본군 장교로서 해외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까지, 시작은 비슷했어도 끝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국내외를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던 풍운아 김광서, 졸업 후 동기생 8명이 모두 대한제국 원수부의 관전장교로 러일전쟁에 스스로 종군하면서 팔형제배(八兄弟輩)라 일컬으며 한때 영광과 명예를 누렸지만 러시아에서 운명을 다한 이갑,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필리핀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인 부하들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했다는 가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전범으로 처형당한 홍사익, 조선왕공족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어 했지만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이우 공 등, 이들 중 그 누구도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상상했던 미래를 살지 못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 인생의 행로를 가늠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 그들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연속 끝에 어디로 갔으며, 어떤 운명을 맞이하였을까.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풍운아들의 삶, 교차하는 시선과 평가
사학자 이기동은 일심회의 일원이었던 김형섭,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 출신인 어담, 이갑을 비롯하여 김광서, 이우 공, 홍사익, 그리고 윤치호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들이 직접 쓴 회고록, 일기나 혹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비극의 군인들―근대한일관계사의 비록秘錄〉(일조각, 2020)을 써내려갔다.
우리는 근대의 역사를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기 어렵다. 자국의 역사에 무관심해서라기보다는 그간 일반 대중이 아는 범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했고, 또한 일부 자료는 방향성이 편향된 데다 그 자료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시선도 비교적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공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에게 대해선 일괄적으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향도 있다. 〈비극의 군인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그들의 삶을 속단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각 인물이 그 당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차분히 들여다보고, 동시에 역사 속 개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타국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창창한 앞날을 꿈꾸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조선 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정한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882년 박영효의 수행원이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 유년과정에 입교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청년들 상당수가 각자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떤 이는 근대식 군대의 핵심이 되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이는 입신출세를 하여 이름을 떨치고 집안을 일으키려고, 어떤 이는 암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처음에 그들은 모두 이 학교에서 끝까지 버티고 신문물을 배워 조국으로 돌아가면 꽃길이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일례로 조국의 정정불안 탓에 겪어야 했던 생활고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앞날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 초기 유학생 박유굉은 졸업 1년을 앞두고 자결하였다. 그 후에도 자국 내 권력의 향방에 따라 정부는 청년들에게 유학을 장려하기도 하고 귀국명령을 내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예측불가의 시간이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보수적인 정부의 전복을 꿈꿨다가 처형당하거나 귀양 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 이들도 있었다.
시대에 휩쓸려 간 제각각의 인생
모든 유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거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괴로움과 고충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식민지에서 온 학생이라는 이유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고, 조국에서조차 그들을 크게 반기지 않았다. 진급이나 더 큰 출세를 바라는 건 욕심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어린 학생들과 젊은 군인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세파에 휩쓸렸고, 때로는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전쟁의 위협에 내몰리기도 했다. 따라서 망국의 신민이 되었을 때 결심했던 대로 임관한 뒤 독립운동에 전념한 사람도 있었지만, 사정상 군을 떠나 민간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고, 나라를 저버리고 변절하는 사람, 일본군 장교로서 해외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까지, 시작은 비슷했어도 끝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국내외를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던 풍운아 김광서, 졸업 후 동기생 8명이 모두 대한제국 원수부의 관전장교로 러일전쟁에 스스로 종군하면서 팔형제배(八兄弟輩)라 일컬으며 한때 영광과 명예를 누렸지만 러시아에서 운명을 다한 이갑,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필리핀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인 부하들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했다는 가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전범으로 처형당한 홍사익, 조선왕공족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어 했지만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이우 공 등, 이들 중 그 누구도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상상했던 미래를 살지 못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 인생의 행로를 가늠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 그들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연속 끝에 어디로 갔으며, 어떤 운명을 맞이하였을까.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풍운아들의 삶, 교차하는 시선과 평가
사학자 이기동은 일심회의 일원이었던 김형섭,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 출신인 어담, 이갑을 비롯하여 김광서, 이우 공, 홍사익, 그리고 윤치호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들이 직접 쓴 회고록, 일기나 혹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비극의 군인들―근대한일관계사의 비록秘錄〉(일조각, 2020)을 써내려갔다.
우리는 근대의 역사를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기 어렵다. 자국의 역사에 무관심해서라기보다는 그간 일반 대중이 아는 범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했고, 또한 일부 자료는 방향성이 편향된 데다 그 자료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시선도 비교적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공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에게 대해선 일괄적으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향도 있다. 〈비극의 군인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그들의 삶을 속단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각 인물이 그 당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차분히 들여다보고, 동시에 역사 속 개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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