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 185

철원 미육군 공병부대 전적비

미육군 공병부대 전적비 한국전쟁당시 미 육군 공병은 최선봉에서 적과 싸우며 기동부대의 전진로와 보급로를 건설하고, 후퇴 시에는 아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장애물을 설치하며 가장 늦게 전장을 떠나는 방패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 산악과 단애로 형성된 하천은 공병의 임무수행을 매우 어렵게 하였다.그러나 전통에 빛나는 미 공병부대는 성공적으로 모든 임무를 수행하여 공격부대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국민이 미 육군공병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한 교량과 도로를 통해 수많은 피난민이 남에서 자유를 얻었고, 특히 전후까지 그들을 우리에게 장비와 기술을 제공하여 한국의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

철원경찰서지 터

철원경찰서지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청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모르겠으나,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 의해 간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1937년 당시 경찰본서 인원은 36명 이었으며 철원역전 주재소를 비롯하여 관내 10개주재소와 1개의 출장소가 설립되어 있으며, 주재소마다 4명의 경찰력을 배치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전위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광복 후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사령부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인공치하에 서는 군내무서로 사용되었다. 6.25전쟁 당시 노동당사와 더불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나 후에 완전히 현재 그 터만 남아있다.

철원 노동당사

철원 노동당사 (등록문화제 제22호) 이 건물은 1945년 8.15해방후 븍한이 공산독재정권 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쟁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1개 리당 쌀 200가마씩 착취 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건물의 내부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조적만으로 지어진 무철근 3층 건물로써 당시 이건물 일대는 인구3만명이 살았던 철원읍 시가지 이었으나 6.25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었고 유일하게 노동당사 건물만 남아 있다. 여기저기 포탄자국과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 노동당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건물이..

최악의 지옥섬 (하시마탄광)

최악의 지옥섬 (하시마탄광) 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외관상으로는 극도의 황량함이 섬 전체를 감돌고 있다.보통 섬을 둘러싸고 자라는 울창한 숲이 이 주변에는 없다. 모래갈린 해변 조차 볼수 가 없었다.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섬 오직 시멘트로 싸바른 10m높이의 방파제가 섬과 바다의 경계를 두루고 있어 자연이 아닌 인공섬의 분위기를 물씬 퐁겼다. 섬전체가 탄광으로 개발된곳 , 바다속 지하 곳곳으로 수백 미터씩 갱도를 파내려간 전형적인 해저 탄광이다. 미쓰비시 광업은 다카시마 탄광에이어 1890년 하시마탄광을 인수 했다. 이곳 석탄은 순탄 발열량이 높고 유황과 인의 함유량이 적은 최고급탄으로 , 주로 제철이나 선박용으로 쓰였다가 .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면서 하시마탄광은 채탄량을 증가시키라는 심한 압박을 받았..

미쯔비시 나가사키조선소

자이언트 캔틸레버크레인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일본 최초의 전동크레인 . 자이언트캔틸레버 크레인은 조선업의 형성기였던 미스비시 합자회사 시대에 조선소 공장 설비의 전자화에 맞춰 동형으로는 일본에서 최초로 건설된 전동크레인 입니다. 이 크레인은 영국 애필비사가 제조한 것으로 전동 모터로 구동되는 당시로써 최신식 크레인 이었습니다. 원동기와 보일러 등의 대형기계를 선박에 싣거나 내리는 데 사용하기위해 1909년에 조선소의 기계공장 부근의 아쿠노우라 안벽에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1961년에 공장 확보공사로 인해 해체된후 미즈노우라 안벽 (현재의위치)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이 크레인은 기계공장에서 제조한 증기 원동기와 대형 선박용 플로펠라의 선적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

하시마탄광.군함도모형

하시마탄광의 흔적 하시마는 원래 사암바위가 가파른 작은 섬으로 남북320m 동서 110m 정도였다고 생각되며, 현재의3분의1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석탄채굴의 발전에 따라 해면의 매립에 의한 섬의 확장이 반복되며 1931년 즈음에는 현재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크기는 남북으로480m, 동서로160m 면적 63,000제곱미터 입니다. 하시마가 해저탄광의 섬으로 알려져, 1890년에 미쓰비시사가 경영하기 시작하여 1974년에 폐광하기 까지 85년간 조업이 이루어 졌습니다. 하시마는 동쪽으로 생산시설이 있었으며 서쪽에는 주거지역 이었습니다. 주거구역은 좁은 입지에 낞은 주거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최첨단기술을 사용한 고층아파트가 많이 지어졌습니다. 석탄의채굴 미쓰비시가 경영을 시작한 1890년부..

나가사키 군함도 가는길에 다카시마 도착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미쓰비시병기 스미요시터널

스미요시터널 제2차세계대건 (태평양전쟁)말기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나가사키 병기제작소를 피난 시킬 목적으로 이곳 (스미요시부근)에서 산을끼고 반대쪽 아카사코 부근 까지 6개의 터널이 나란히 만들어 졋습니다.하나의 터널은 높이 약3m 폭4.5m 길이 300m입니다. 터널안에는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공습을 면하기 위해 와성된 부분부터 차례로 중요한 정밀 기계를 올겨와 교대근무에 의한 24시간 태세로 어뢰 부품을 만들었습니다. 이터널을 총칭하여 "미쓰비시병기 스미요시터널 공장터" 라고 합니다

미이케탄광(이야노하라겡)

미이케탄광(이야노하라겡) [일본리프렛번역] 메이지31년 (1898) ~쇼와6년 (1931년)에 활약한 미이케 탄광의 주력 갱 이었습니다 철강제의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와 벽돌의 권양기실 건물에 남는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사적이며 세계유산 일람표에 기재된 "메이지일본산업혁명유산 . 제철.제강.조선. 석탄산업"의 구성자산 입니다 매일 10시부터 17시까지 공개 (2015년 8월현재) Tel 0944-41-2539 (미야노갱 가이드휴계실 . 가이드연락이 불가능경우도 있습니다)

미이케탄광 (만다겡)

미이케 탄광의 역사 [일본리플렛 내용] 미이케 탄광은 1496년에 한 농부가 석탄을 발견 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1860년대부터 근대국가를 지향한 일본은 1873년 미이케탄광을 국영탄광으로 하였습니다. 이후 신규갱도를 조영하여, 석탄의 인양에 증기동력이 사용되는 동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어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동시에 산출된 석탄은 증기동력이나 제철에 사용되어 근대산업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1889년 미이케탄광은 미츠이가 경영을 시작하여 국영탄광시대부터 기술자였던 타쿠마의 진두지휘하에 한층 더 근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유럽의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캇타치갱, 미야노하라갱이 개갱되고 그 집대성으로 개갱된 것이 만다갱 입니다. 미이케 탄광과 만다갱 만다갱은 미이케탄광 시스템의 하나로서 가능해 졌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