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 185

파주시

파주시 파주시는 임진강과 한강의 풍부한 수자원과 산과 수려한 자연경관 그리고 맑고 깨끗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명품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유구한 역사와 세계적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연관된 조선의 명재상 황희, 조선의 대 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등 자랑스런 역사의 인물 또한 광범위하다. 파주시는 한국 전쟁의 상흔을 조금은 더 생생하게 경험하고 통일의 염원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각을 비롯란 통일 안보 평화관련 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통일의 중심도시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 들리 찿아 오고 있다.

파주 마장호수와 흔들다리

파주감악산 마장호수와 흔들다리 호수의 맑은 물바람, 시원한 나무테크 산책로와 둘레길, 야생화 가득한 하늘계단에 국내 최장인 흔들다리 (길이 220m 폭1.5m 카누 카악등의 수상 레포츠시설 까지 테마형 관광 휴양시설이 새롭게 조성되어 평소 마장호수를 즐겨 찿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철원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투지 1952년 10월6일 철원 서북방 395고지 [효성산 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의 공경을 받았다. 이때부터 10월15일까지 열흘간 395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 전투가 반복되면서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UN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 9사단은 마침내 고지를 장악 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국군 제9사단은 총 3천 4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고, 중공군도 1만 4천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극심한 공중 포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백마에 누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철원 백마고지 기념관

백마고지의 유래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했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 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작전기간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어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 (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하여 비롯 되었다는 설. 또 전투중 9사단을 방문 격려한바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시대 임경업장군이 평북 의주군에 백마산성을 쌓고 중국 오랑캐에게 저항 하였던 지명을 따라 백마산이라고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나 일반..

철원 백마고지 전적비

백마고지 전적비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피비린네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으 대공세에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1만4천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 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데 마치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하여 백마고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위해 이곳에 백마고지 ..

다카시마 & 미쯔비시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높아지자 사가번의 스코틀랜드 출신 상인 글로버와 함께 1868년 사가번 (담당 :마쓰바야시겐조)과 글로버는 타카시마 탄광의 공동경영 계약을 맺고 합병회사를 설립하여 탄광개발을 시작 하였습니다.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초빙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차에 의한 수직갱도인 타카시마 탄갱 (홋케이정갱)을 만들엇습니다. 타카시마 탄갱은 1881년부터 미쓰비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타카시마 탄갱의 석탄기술은 일본 근대탄광산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에서는 이미 19세기 초에 사가번에 소규모의 채탄을 하고 있었으며, 1890년에 미쓰비시 합자 회사가 경영하게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저탄광으로서 조업이 시작되엇습니다. 석탄의 생산량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1916년에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의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고 ,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층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좁은 섬에 빾빽이 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어 그 특징적인 섬의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하여 "군함도"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이름도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전성기에는 약 5,300명이 살앗으며, 인구밀도가 당시 도쿄도의 약9배로 세게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수요..

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나가사키 미쯔비시조선소

미쓰비시는 어떤기업인가? 1부 에도 막부 시절인 1835년 도사번 (지금의 시코쿠지방 고치현)에서 출생한 하급무사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가 1870년 배 세척을 가지고 해상무역에 손을 대면서 기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73년 회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내 걸면서 미쓰비시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미쓰비시는 이와사키가의 문장이었던 3개의 마름 (*바늘꽃과의1년생) 에서 따온 것이다. 야타로는 이른바 "사가의 난"이 발생 했을때 정부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는등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기업을 성장 시켰다. 그는 막부정권을 무너 뜨리고 (대정봉환 :大政奉還 - 1867년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통치권을 넘겨준사건)을 성사시킨 일본의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료마의 사업을 승계한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