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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인문학

동방박사님 2022. 7. 1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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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커피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커피의 탄생부터 인류를 매혹시키기까지”


왜 커피인문학인가?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의 목적은 첫째는 커피에 대한 교양과 상식의 전달이고, 둘째는 커피를 이야기할 때 달아오르는 기쁨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한 이야기 소재의 제공이며, 셋째는 감히 독자로 하여금 매사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커피인문학』은 커피를 이야기하지만, 구절구절 우리 인간의 삶이 비춰지도록 노력한다. 커피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거울이다.

커피인문학은 커피에 대한 또 하나의 발견이자 행복이다. 우리는 커피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추억한다. 커피를 통해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첫날밤을 엿본다. 커피를 통해 수피가 알라를 접신(接神)하려는 몸부림을 목격한다. 커피를 통해 새벽길 상궁 복장을 하고 가마에 오르는 고종의 눈물을 본다. 커피를 통해 1937년 4월 도쿄의 교도소에서 피를 토하며 스러진 시인 이상의 영혼을 만난다. 커피를 통해 해방에서 현재까지 온갖 불화(不和)를 거쳐온 겨레의 궤적을 훑는다.

이 책은 4장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는 커피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예멘, 에티오피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미국을 거치면서 일으켰던 풍파를 추적했다. 카페인을 통해 인류를 각성시키면서 벌어진 에덴동산 추방을 비롯해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오스트리아 빈 전투 등이 그것이다. 제2장에서는 한국의 커피 역사를 살펴보았다. 누군가의 뇌리에는 진하게 박혀 있을 일제 식민사관을 뒤집으려 애썼다. 제3장은 커피에 취미를 붙이고자 하는 분들이나 장(章)마다 독립된 단편 드라마를 감상하고픈 마음에서 책을 펴신 독자들이라면 이 부분부터 읽어도 좋겠다. 제4장은 커피 애호가라면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커피 산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커피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

 

목차

책머리에 · 5

씨앗에서 커피가 되기까지 · 12

제1장 커피, 역사를 만들다


태초에 커피나무가 있었다
커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을까? 27 |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왜 파급력이 떨어졌을까? 33 | 승리의 상징, ‘커피 당구공’ 36 | 생명의 고향, 에티오피아 39 | 마호메트와 커피 41 | 커피나무의 고향은 에덴동산이다 43

커피의 시원지는 어디일까?
예멘인가, 에티오피아인가? 46 | 시바 왕국은 어디인가? 51 | 시바 왕국의 여왕 53 | 에티오피아의 어머니 나라, 예멘 55 |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커피를 선물했다 57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이어진 시바의 운명 59

커피, 카페를 창조하다
커피, 세계를 흔들어 깨우다 61 | 최초의 고대 여성 바리스타 63 | “사지를 튼튼하게 하고 피부를 맑게 한다” 67 | “커피를 마시며 음탕한 짓을 한다” 70 | ‘이슬람의 음료’에서 ‘기독교의 음료’로 71 | 커피로 부를 쌓다 73 | ‘커피’에서 만납시다 76

커피의 향미에 빠지다
음료가 아닌 음식이었다 79 | 언제부터 커피를 로스팅했을까? 81 | 터키시 커피와 ‘신의 음료’ 83 | 비엔나 커피의 탄생 87 | 편의성과 신속성 89

시대의 정신을 깨우다
아침의 포도주 94 | “모닝커피가 없으면, 나는 말린 염소고기에 불과하다” 96 | 느리게 퍼지는 독 98 | 키스, 악마, 지옥, 천사 100 | 베토벤 넘버, 60 102 | 악명 높은 사기꾼과 귀족 나부랭이들의 집결지 104

미국의 독립은 커피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건국보다 앞선 커피의 역사 108 | 커피의 대중화와 계몽사상 110 | “대의권 없는 과세는 식민지의 자유에 대한 위협” 112 | “내게 커피를 주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시오” 118 | “아버지의 커피잔잔은 욕조보다 커 보였다” 120 | “커피는 현상이다” 124

커피 인문학 카페 + 커피, 시가 되다 126

제2장 커피, 조선을 깨우다

커피와 항일운동

최초의 커피하우스, 가히차칸 131 |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셨을까? 132 | 사무라이 커피 134 |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숭늉 마시듯 한다” 137 | 골스찰키와 윤용주의 커피 광고 139 | 손탁과 정동화옥 142 | 정동구락부와 항일운동 144

다방, 지식인의 아지트가 되다
‘정동파’와 고종 147 | 커피 외교 152 | 고종의 승하와 ‘문화통치’ 153 | 카카듀와 항일운동 155 | 이상의 다방 157

인스턴트커피와 다방의 시대
접대용 ‘인삼 커피’ 161 | 최승희와 인스턴트커피 164 | 위안과 자부심이 되다 168 |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다방 170 | ‘제25 강의실’, 학림다방 172

얼굴마담에서 스타벅스까지
얼굴마담과 ‘거리의 응접실’ 175 | ‘커피믹스’의 등장 178 | 여성을 해방시킨 커피 자동자판기 180 | 원두커피의 르네상스 182 | ‘스페셜티 커피’ 전성시대 186

커피 인문학 카페 + 낙엽을 태우면서 189

제3장 커피, 문화를 만들다

커피, 와인, 스페셜티 커피

인류는 커피의 향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195 | 와인의 길을 따르는 커피 197 | ‘테루아 와인’ 문화가 뿌리를 내리다 201 | 최상의 향미를 지닌 커피 204 | 스페셜티 커피의 매력 207 | 한 잔의 향미를 오롯이 담다 209

인스턴트커피 혁명
카우보이 커피 211 |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르다 215 | 조지 워싱턴 커피 217 | 네슬레의 인스턴트커피, 네스카페 220

커피와 식민지
‘노예 참혹사’를 불러온 커피 223 | 오스만제국과 ‘터키시 커피’ 225 | 교황이 허락한 노예제 227 | 참극의 전주곡, 대항해 231 | ‘식민지 커피’의 탄생 234

커피 대국 브라질을 만든 ‘미인계’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 브라질 238 | 라틴아메리카 커피의 기원을 만든 루이 14세 239 | 브라질의 카사노바 팔헤타 242 | 재나 흙의 향미를 지닌 브라질 커피 245 | 브라질의 커피 생두 등급 분류법 247

커피와 성
모세는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지 않았다 249 | 커피의 향기로 솔로몬 왕을 유혹한 시바의 여왕 253 | 최음제는 사랑뿐만 아니라 목숨에도 치명적이다 256 | 커피가 필수품인 터키와 에티오피아의 결혼식 259 | “남자들이 커피 때문에 침대에서 참새처럼 나약해졌다” 261 | 카페인이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위안이 될까? 263

커피 인문학 카페 + 코피 루왁은 그리움이어야 한다 265

제4장 커피 인문 여행

자메이카와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

‘커피의 황제’와 ‘왕실의 커피’로 불리는 이유 271 | 루이 14세, 커피나무를 심다 273 | 자메이카 커피는 아픔이다 275 | 자메이카 커피의 부흥과 프랑스혁명 278 | 블루마운틴 커피를 ‘커피의 황제’로 포장한 일본 280 | 블루마운틴 커피의 등급과 ‘자블럼’ 283 | 신이 내린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 284

파나마 에스메랄다의 게이샤 커피
천혜의 커피 재배지, 바루화산 286 | 처음으로 커피 꽃을 피운 보케테 290 | ‘풍부하다’는 뜻처럼 커피를 잘 키워낸 파나마 291 | 게이샤 커피로 전성기를 열다 293 | 게이샤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 294 | 왜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가 특별했을까? 296

르완다 커피와 우간다 커피
천 개의 언덕, 르완다 301 | 르완다 커피에서 나는 감자맛 305 | 검은 대륙의 진주, 우간다 308 | 로부스타의 천국 310 | 커피나무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막을 수 있다 313

하와이와 하와이안 코나 커피
하와이와 하와일로아 316 | 미국, 하와이를 약탈하다 319 | 하와이 왕국의 전성기를 연 사탕수수 322 | 사탕수수보다 먼저 재배된 커피나무 323 | 향미가 뛰어난 하와이안 코나 커피 325 | 마크 트웨인이 사랑한 하와이안 코나 커피 327

신이 빚어낸 콜롬비아 커피
콜롬비아 농업의 뿌리 330 | 고해성사를 통해 번져나간 커피나무 심기 운동 334 | 안데스산맥이 셋으로 나뉘는 곳에서 커피가 자란다 337 | 콜롬비아 커피의 상징, 후안 발데즈 339 | 꽃처럼 달콤하고 살구처럼 달달한 콜롬비아 커피 342 | 커피 재배는 자연이 허락하는 것이다 345 | “신이 주신 축복” 348

커피 인문학 카페 + 에스프레소의 의미 353

참고문헌 356
 

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저 : 박영순
커피 향미와 인문학을 접목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피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강의를 시작했다. 세계적인 커피 석학인 숀 스테이먼 박사와 커피 향미를 올바로 평가하고 묘사하는 커피 테이스터 교육 과정을 공동 창안했다. 커피비평가협회 회장 자격으로 미국 뉴욕의 명문요리대학 CIA와 교육 협약을 체결해 향미 전문가 자격증 과정을 개설했다. 커피인문학, 커피 테이스터, 플레이버(flavour) 마스터 분야를 개척한 ...

그림 : 유사랑

 
장르를 가리지 않고 주로 신문 매체를 중심으로 종횡무진 활동 중인 게릴라형 아티스트다. 『중앙일보』, 『전자신문』, 『데일리포커스』 등 여러 언론을 거치면서 약 30년 간 시사만평가로 활동해왔다. 『스포츠서울』, 『문화일보』 등 일간신문과 다수의 잡지에 인물 캐리커처와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7년 전부터 커피에 빠져 커피를 물감 삼아 ‘커피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이 책에 실린 그림은 모두 에스프레소로 그렸다....
 
그림 : 유사랑
장르를 가리지 않고 주로 신문 매체를 중심으로 종횡무진 활동 중인 게릴라형 아티스트다. 『중앙일보』, 『전자신문』, 『데일리포커스』 등 여러 언론을 거치면서 약 30년 간 시사만평가로 활동해왔다. 『스포츠서울』, 『문화일보』 등 일간신문과 다수의 잡지에 인물 캐리커처와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7년 전부터 커피에 빠져 커피를 물감 삼아 ‘커피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이 책에 실린 그림은 모두 에스프레소로 그렸다....
 

책 속으로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에 관한 구전이 있을 뿐이지만, 예멘·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이란 등 이슬람 권역에서는 9세기쯤부터 커피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다. 이에 따라 커피는 에티오피아를 제쳐두고 애초부터 이슬람의 음료인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18세기 커피가 유럽인들을 매료시키며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질 즈음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칼 폰 린네(Carl von Linne)가 식물을 분류하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종의 기원을 추적한 데 이어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1953년 유전자의 구조를 밝히는 등 일련의 과학적 탐구 끝에 커피의 시원지는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하지만 예멘은 커피의 역사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예멘이 없었다면, 아직도 커피는 아프리카의 깊숙한 계곡에 숨겨 있을지 모른다. 「커피의 시원지는 어디일까?」--- pp.46-47

커피가 유럽에 전파된 경로가 하나 더 있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1683년 오스만제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빈(Wien) 전투다. 오스만제국의 공격에서 오스트리아를 사수한 이 전투는 이슬람의 공격에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켜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폴란드의 가세로 혼비백산한 오스만제국은 힘들게 싣고 온 커피 생두를 챙기지 못한 채 퇴각했다. 산더미처럼 남은 이 생두들이 오스트리아로 전해져 ‘비엔나 커피’를 탄생하게 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아랍 지역 출정이 잦아 커피의 가치를 잘 알던 군인 조지 프란츠 콜시츠키(Georg Franz Kolschitzky)가 이를 활용해 1683년 빈에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고전음악의 탄생지답게 빈 사람들은 ‘터키식’으로 커피를 끓이되 이를 여과장치로 거르고 우유와 꿀을 넣어 부드럽게 즐겼다. 「커피의 향미에 빠지다」--- p.87

조선에서는 일본의 영향력과는 무관하게 상업적으로 커피가 1890년대부터 판매되고 있었음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독립신문』 1897년 3월 20일자에 정동의 ‘골스찰키(Gorschalki)’에서 자바 커피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게재되었다. 골스찰키는 1884년 입국해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상점을 차린 독일 상인이다. 당시 한양에서 신문광고에 날 만큼 커피가 대중화했음을 보여준다. 『독립신문』 1899년 8월 31일자에는 “윤용주가 홍릉 전차정거장 앞에서 다과점(Refreshments)을 개업하고 커피와 차, 코코아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 문구만으로는 시설과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윤용주의 다과점’은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할 만하다. 「커피와 항일운동」--- p.141

다방 문화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으로 바통을 건네주는 구실을 한 건 대학생들이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에 ‘학림다방’이 문을 열었다. ‘학림(學林)’은 ‘학자나 지식인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국내 최고 학부의 학생들이 드나들던 이곳은 단지 커피를 즐기며 잡담을 나누던 공간이 아니었다. 당시 문리대에는 24개 강의실이 있었는데, 학림다방은 ‘제25 강의실’로 불릴 만큼 진지함이 묻어나는 지성의 공간이자, 청춘의 영원한 강의실 기능을 톡톡히 해냈다. 문리대 학생회는 1962년부터 축제를 열었는데, 그 명칭을 다방 이름을 딴 ‘학림제’라고 할 정도였다. 학림다방이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껏 많은 사람에게 잊히지 않는 것은 단지 서울대생의 사랑방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60년 봄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대규모 부정·불법선거가 판을 치면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거국적 민중봉기의 불을 지핀 아지트들 중 하나가 학림다방이기도 했다. 「인스턴트커피와 다방의 시대」--- p.172

북군은 전투 교범에 “커피는 강인함과 에너지의 원천이다”라고 천명하고, 병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커피를 공급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은 병사 1명이 하루 평균 1.8리터의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병사 1명당 제공된 커피는 1년에 16킬로그램에 달했다. 그들의 커피 사랑은 지극했다.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커피 원두를 재빨리 갈아 마시려고 아예 소총의 밑동, 일명 ‘개머리판’에 그라인더를 장착했다. 병사들이 든 모든 총에 커피 그라인더가 장착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 저격병에게는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필요할 때가 많았다. 저격병을 위해 1948년 특허 등록이 된 무기가 ‘샤프스 소총(Sharps Rifle)’인데, 적중률이 뛰어났다. 명중률이 좋음에 따라 기마병도 사용하게 되고 점차 보병에게도 확산되었는데, 커피 그라인더도 옵션처럼 따라 붙으며 ‘커피를 마시며 싸우는 총’으로 인기 속에 널리 퍼져나갔다. 「인스턴트커피 혁명」--- pp.216-217

클리외가 마르티니크섬에 커피나무를 심은 지 10년쯤 지나 커피나무는 수만 그루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는 커피나무를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기아나에 옮겨 심었다. 1727년 마침내 브라질에 기회가 찾아왔다. 기아나를 두고 국경 분쟁을 벌이던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브라질에 중재를 요청했던 것이다. 브라질을 통치하던 포르투갈은 잘생긴 군인을 수소문했다. 프랑스의 총독 부인을 꼬드겨 커피 묘목을 들여오자는 이른바 ‘미인계(美人計)’를 꾸민 것이다. 은밀한 심사 과정을 거쳐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헤타(Francisco de Melo Palheta)가 선정되었다. 그가 군인인 것은 분명한데, 대령인지 특무상사인지 그 직책은 명확하지 않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콧대 높은 프랑스 총독의 부인을 브라질 군인이 홀렸다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커피 대국 브라질을 만든 ‘미인계’」--- pp.242-243

영국은 자메이카를 점령한 뒤에 이를 전초기지로 삼아 도미니카연방, 가이아나, 바하마, 벨리즈,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중남미 12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았다. 자메이카는 1830년대 중남미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40여 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식민지 농장에 공급한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전락했다. 17세기 중엽부터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세계 인구와 영토의 25퍼센트가량을 차지한 영국에 자메이카 커피는 여러 식민지 국가에서 착취한 수많은 커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런 정황들을 고려할 때,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를 ‘여왕의 커피’ 또는 ‘왕실의 커피’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품질에 대한 자랑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아픔이다. 「자메이카와 자메이카 마운틴블루 커피」--- p.276-277

코나 커피는 특히 ‘미국 문학의 링컨’으로 불리는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찬사를 보내면서 ‘마크 트웨인이 사랑한 커피’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세계 곳곳을 여행했던 그는 1866년 하와이에서 4개월 동안 머물며 쓴 『하와이에서 보낸 편지(Letters From Hawaii)』에 “코나 커피는 그 어느 곳에서 재배되는 커피보다 향미가 풍성하다. 코나 커피는 최고의 커피가 자라야 할 곳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당신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적었다. 「하와이와 하와이안 코나 커피」
--- p.329
 

출판사 리뷰

커피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커피의 탄생부터 인류를 매혹시키기까지”


인류는 커피를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을까? 이를 두고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오래도록 경쟁을 벌였다. 이는 아프리카냐 아라비아반도냐, 그리스도 국가냐 이슬람 국가냐의 자존심이 걸린 논쟁이기도 했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지만, 최초로 재배한 곳은 예멘이다’라는 절충안이 나왔지만, 혹 모를 일이다. 역사가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류는 커피를 사랑한다. 미국의 작가 마크 펜더그라스트가 “커피가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원자재로서는 지구에서 오일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가장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커피의 위세’는 대단하다. 커피의 무엇이 인류를 이토록 매혹시키는 걸까? 커피는 우리에게 맛과 향뿐만 아니라 그 뛰어난 향미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피워내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그래서 커피를 신이 빚어낸 음료라고 말한다.
왜 커피인문학인가?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의 목적은 첫째는 커피에 대한 교양과 상식의 전달이고, 둘째는 커피를 이야기할 때 달아오르는 기쁨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한 이야기 소재의 제공이며, 셋째는 감히 독자로 하여금 매사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책은 커피를 이야기하지만, 구절구절 우리 인간의 삶이 비춰지도록 노력한다. 커피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거울이다.
커피인문학은 커피에 대한 또 하나의 발견이자 행복이다. 우리는 커피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추억한다. 커피를 통해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첫날밤을 엿본다. 커피를 통해 수피가 알라를 접신(接神)하려는 몸부림을 목격한다. 커피를 통해 새벽길 상궁 복장을 하고 가마에 오르는 고종의 눈물을 본다. 커피를 통해 1937년 4월 도쿄의 교도소에서 피를 토하며 스러진 시인 이상의 영혼을 만난다. 커피를 통해 해방에서 현재까지 온갖 불화(不和)를 거쳐온 겨레의 궤적을 훑는다.
이 책은 4장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는 커피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예멘, 에티오피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미국을 거치면서 일으켰던 풍파를 추적했다. 카페인을 통해 인류를 각성시키면서 벌어진 에덴동산 추방을 비롯해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오스트리아 빈 전투 등이 그것이다. 제2장에서는 한국의 커피 역사를 살펴보았다. 누군가의 뇌리에는 진하게 박혀 있을 일제 식민사관을 뒤집으려 애썼다. 제3장은 커피에 취미를 붙이고자 하는 분들이나 장(章)마다 독립된 단편 드라마를 감상하고픈 마음에서 책을 펴신 독자들이라면 이 부분부터 읽어도 좋겠다. 제4장은 커피 애호가라면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커피 산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커피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

커피는 역사다

커피의 기원에는 칼디의 전설, 셰이크 오마르의 전설, 마호메트의 전설, 에티오피아 기원설 등 4가지 설이 있다. 이 중에서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로 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는 구전인 탓에 생명력을 지니기에는 부족해 파급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진실은 세월이 드러내주는 법이다. DNA 분석을 통해 커피나무의 기원이 에티오피아 고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티오피아 고원에서는 재래종 커피나무가 속속 발견된다.
커피나무가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자라나 예멘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상식으로 통하지만, 1,000년을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커피의 시원지는 예멘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역사에서 커피나무를 처음으로 경작한 나라가 예멘이며, 커피나무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거쳐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예멘이 없었다면, 아직도 커피는 아프리카의 깊숙한 계곡에 숨겨 있을지 모른다.
6세기쯤 커피가 처음 발견된 이후 예멘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란 등 이슬람 권역에서는 9세기쯤부터 커피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다. 1615년 커피는 이스탄불을 오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게 된다. 에티오피아의 커피가 예멘으로 전해진 뒤 1,000여 년간 아라비아반도에 갇혀 있던 커피가 마침내 유럽의 그리스도 국가들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를 처음 접한 유럽인들은 ‘아라비아의 와인’이라며 ‘카와’라고 불렀다. 그 후 커피는 유럽으로 전해진 뒤 세계적 무역상품으로 급부상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커피는 대중화에 성공한다. 바로 ‘카페 문화’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4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문을 연 것으로 알려졌다. 165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야곱이라는 유대인이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1652년에는 런던 최초의 카페 ‘파스카 로제’가 문을 열었다. 1686년에는 프랑스 최초로 이탈리아 출신이 만든 ‘카페 르 프로코프’가 문을 열었다. 1696년에는 뉴욕 최초로 ‘더 킹스 암스’가 문을 열었다.
커피는 ‘노예 참혹사’를 불러오기도 했다. 17세기 유럽 국가들은 부를 안겨줄 새로운 상품을 찾고 있었다. 소금, 향신료, 설탕, 담배, 면화 등 오랫동안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던 상품들의 구매력이 떨어질 때쯤 커피가 등장했다. 커피나무를 심고 키우고 열매를 많이 수확하려면 그만큼 인력이 필요했는데,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의 인력을 노예로 동원했다. 유럽이 커피에 빠져들면서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강국들은 커피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들 국가는 기존 식민지만으로는 물량이 달리자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점령해 커피나무를 심었다.
16~19세기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은 4,0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을 착취해 유럽 열강과 미국은 큰돈을 벌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동력은 삼각무역에서 조달되었고, 삼각무역은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인권유린과 참혹의 상징이었다. 노예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끝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과 독일이 아프리카 개척에 나서면서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등지에서 커피밭을 일구었다. 아프리카에서도 흑인들의 처참한 아픔이 새겨진 것이다. 아프리카 노예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참상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인물은 고종 황제가 아니다. 고종 황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참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896년 2월 11일 칼바람 부는 한겨울 새벽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아관파천보다 10년 앞선 1886년, 관료이던 윤치호는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커피집)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라고 적었다.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5년 펴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1884년 1월 한강변에서 커피를 접대받은 사연을 기록했다. 그는 이 책 180쪽에서 커피를 마신 당일의 상세한 내용을 적었다.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언덕에 있는 ‘슬리핑 웨이브’라는 별장에 가서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 유길준도 1895년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된 『서유견문』에서 미국의 상황을 전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우리네 숭늉 마시듯 한다”고 기록했다.

커피는 혁명이다

커피는 프랑스에서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각성의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카페는 민중의 혁명 의식을 고취한 아지트로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냈다.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는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백과전서』가 공동 편집장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 처음 기획된 장소이자, 이후 26년 동안 『백과전서』가 완간될 때까지 계몽사상가들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아르튀르 랭보 등이 단골이었으며, 비운의 급진주의적 혁명가 장 폴 마라를 비롯해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 공화주의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커피는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독립혁명을 촉발한 보스턴 차 사건의 중요한 오브제로 한몫했다. 영국은 1764년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설탕에 세금을 부과한데 이어 1765년에는 인쇄물에도 ‘인지 조례’라며 세금을 매겼다. 버지니아 의회는 즉각 “대의권 없는 과세는 식민지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반발하고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매일 모여 토론하고 성토하며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던 곳이 1697년 보스턴에 문을 연 커피하우스 ‘그린 드래건 태번’이다.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미국독립혁명의 지도자들과 시민들은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턴항에 정박한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하고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려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 차 불매운동이 시민의 저항심에 불을 붙이면서 커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영국 차 불매운동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이른바 문화 시위가 널리 확산되면서 식민지 시민들의 독립 의지를 북돋우는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마침내 1775년 5월 식민지 대륙회의가 열려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했다.
커피는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치러진 남북전쟁에서 활약했다. 북군을 이끈 링컨 대통령이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하자, 남군은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다. 커피에 굶주린 남군은 고구마나 사탕무를 커피처럼 진하게
볶아 물에 넣어 끓여 마시기도 했다. 담배 생산지를 끼고 있던 남군은 휴전이 이어질 때면 담배와 커피를 맞바꾸자고 북군에 매달리기도 했다. 남군은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들꽃과 허브를 채취해 끓여 마시는 것으로 달래기도 했다. 북군을 이끈 벤저민 버틀러 장군은 병사들에게 물통에 커피를 담아 수시로 마시게 하면서 각성 상태가 극에 달했을 때 공격을 지시하는 전략으로 전투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병사들이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그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커피 음용을 권했다.
커피가 지닌 ‘계몽의 힘’은 조선 땅에서도 작용했다. ‘커피의 마력’을 외교에 활용한 고종과 정동파, 조선인 최초로 다방을 차린 이경손, 천재 시인 이상의 활동이 그랬다. 커피가 이끌어낸 시대적 각성은 구습을 타파하는 용기나 부당한 압력을 거부하는 저항으로 표출되었다. 커피가 전파된 구한말은 계몽과 저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다.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땅과 한옥 한 채를 하사해 외교관들을 맞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했다. 고종이 손탁에게 서양식 침실과 카페 공간까지 만들게 하는데,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이곳을 사실상 영빈관으로 활용하며, 정동파 인사들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외교전을 펼치게 했다. 손탁호텔의 레스토랑은 당시 외국 인사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정동파는 이곳에서 구미의 외교관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친미·친러 개화파 인사들이 주축인 정동파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조선 외교의 상징이 되었다. 고종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커피의 마력’을 외교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방을 차린 인물인 영화감독 이경손은 1927년 안국동 네거리 근처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열었다. 카카듀는 일제강점기에 시대적 각성과 조선인 간 문화 교류를 시도한 곳이었다. 이경손은 “카카듀는 프랑스혁명 때 계몽주의 사상가와 시민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만난 비밀 아지트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했다. 그는 나운규를 발굴하기도 하고, 『조선일보』에 영화소설 「백의인」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항일 색채를 띠었다고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시인 이상은 제비다방, 카페 쓰루, 무기 등 다방을 열어 문인들의 모임 장소와 지식인과 일반인의 교류 장소로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창작과 계몽의 혼을 불살랐다. 이상의 다방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킨 아지트였다.

커피는 문화다

바흐는 ‘커피 칸타타’라고 알려진 ‘칸타타 BWV 211’을 작곡했다. 이 곡은 그가 맏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딸과 커피를 그만 마시라고 다그치는 아버지가 승강이를 벌이며 장면이 인상적이다. 커피를 끊지 않으면 약혼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버지의 최후통첩에 딸은 굴복하는 척하지만, 혼인계약서에 ‘커피 자유섭취 보장’이라는 조항을 슬쩍 써넣으면서 결혼에 성공하고 커피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바흐의 이 곡은 ‘커피 애호가로서 커피에 대한 헌정’이었다. 그도 “모닝커피가 없으면, 나는 그저 말린 염소고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
베토벤은 오전에 작품 쓰기를 좋아했는데, 모닝커피용으로 원두 60알을 골라낸 뒤 추출하게 했다. 그래서 커피에서 ‘60’은 ‘베토벤 넘버’라고도 불린다.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불리는 브람스도 커피 애호가였다. 그는 자신이 마실 커피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추출해 마셨다고 한다. 커피를 습관처럼 마시는 게 아니라 추구하는 향미가 분명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이들은 일찍이 향미를 평가하고 묘사하는 전문가인 ‘커피 테이스터’의 면모를 갖춘 게 아닌가 싶다.
괴테도 하루에 커피를 20~30잔 마셨다. 그는 커피 중독에 대한 주변의 걱정에 나 보란 듯이 83세까지 장수했다. 괴테의 시 「마왕」을 곡으로 만든 독일 가곡의 왕 슈베르트도 소문난 커피 애호가였다. 낡은 원두 그라인더를 ‘재산목록 1호’라고 자랑했는데, 그의 가곡 ‘죽음과 소녀’는 커피를 분쇄하면서 향기를 감상하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쓴 곡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셔 주치의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커피를 끊지 않았다. 그는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毒)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84세까지 장수함으로써 커피의 유익함을 몸으로 증명했다. 프랑스의 외교관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이렇게 말했다. “커피의 본능은 유혹이다.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루스벨트도 소문난 커피 마니아였는데, 하루에 3.8리터나 마셨다고 한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습관 탓에 그의 커피잔은 유난히 컸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커피잔은 욕조보다 커 보였다”고 했을 정도다. 그가 1907년 테네시주 내슈빌의 맥스웰하우스 호텔에 머물 때 그곳의 커피 맛에 매료되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구먼!”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맥스웰하우스 커피는 이를 놓치지 않고 이 문구를 광고에 활용했고, 지금까지 상품마다 브랜드 아래에 표기하고 있다.
1674년 런던의 여성들은 남편들의 커피 음용을 금지시켜달라는 청원서를 시에 제출했다. 커피가 정력에 나쁘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남편들을 ‘사막처럼 메마르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음료’로 커피를 묘사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대책을 호소했다. 여성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강인하다고 칭송 받던 영국 남자들이 커피 때문에 침대에서 참새처럼 나약해졌다”며 “남편들이 단지 턱수염만으로 남자임을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대해 남성들은 “모함이다”라며 ‘여성 청원서에 대한 남성의 답변’이라는 성명을 냈다. 남성들은 성명에서 “커피는 무해하고 치유 효과가 있는 음료”라고 주장했다. 또 “맥주는 남자를 염소처럼 음란하게 만들지만, 커피는 정신을 집중시키고 안정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발기를 더욱 왕성하게 하며 사정도 풍성해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