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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 평전 - 민족대표 33인

동방박사님 2022. 10. 28.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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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근곡 박동완 지사,
그의 이름 앞에 하나의 수식어가 필요하다면 과연 무엇이라 할 것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평전 작가 김삼웅 저자의 이번 신작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셈해지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을 소환한다. 지금까지 저자의 평전이 주로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면, 새로 펴낸 ‘박동완 평전’은 ‘존재도 낯설고 실체도 낯선 독립지사’ 박동안에 초점을 맞췄다.

근현대사의 굴곡이 만든 역사의 빈칸을 메우려는 작업에 천착해온 저자가 주목한 박동완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참여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서 그의 치열한 행적과 사상이 평전으로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호가 근곡(槿谷)인 박동완은 우리나라에 여름성경학교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기독교 민주주의자로서 일제강점기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이자 언론인, 목사로서 투철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지만 “셈해지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즉 주연 못지않게 많은 역할을 하고도 묻히거나 잊힌 독립운동가였다. 저자는 “근곡 박동완 지사의 이름 앞에 하나의 수식어가 필요하다면 과연 무엇이라 할 것인가? 이를 찾고자 평전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목차

감사의 글
머리글_ 선생의 이름 앞에 붙일 수식어를 찾아서

1. 출생과 성장기

포천 출생, 서울에서 성장
기독교와 역사의식 깨우친 배재학당

2.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되다

상투 자르고 양복 입고 면학
현순·손정도·이필주 목사 만나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공부

3. ‘기독신보’에서 왕성한 집필활동

‘기독신보’ 참여, 창간사 집필
나라 빼앗긴 조선의 사회상
방황하는 민중에게 희망의 글쓰기

4. 민족운동 전면에 나서다

민족자결, 국제정세 포착하고
국내외에서 동시적으로 독립선언 준비

5.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독교계 이승훈 중심으로 대표선임
종교계 ‘비폭력’ 택한 배경
민족대표 33인 중 세 번째 연소자
태화관에서 자주독립 선언
민족사의 대전환 3·1혁명
‘3·1혁명’의 정명으로 불러야

6. 당당한 법정투쟁

구속당일부터 혹독한 조사받아
군중 모이면 소요는 당연
‘민족자결’ 원칙으로 독립운동하자고

7. 옥살이와 가족 그리고 출옥

가족들 굶기를 밥 먹듯이
석방되어 ‘기독신보’ 이어 ‘신생명’ 활동
핍박 받으며 ‘신생명’에 기고
‘지성일관’의 신념, 총독부가 글 일부 삭제
‘재만동포옹호동맹’ 조직, 현지조사활동
흥업구락부 등 민족운동에 앞장

8. 민족운동에 나서다

‘문화정치’ 내세우며 조선민족 말살 시도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창립주도
임시집행부 부의장 등 책임 맡아

9. 하와이 망명 또는 이민·이주

일제,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남산에 신궁 세워
한인교회 초청으로 하와이행
하와이 교포들에게 한글교육
교회성장, 고국지원 나서기도

10. 멈추지 않는 활동

병환에서도 목회와 한글교육 매진
3개월 고국방문, 각지에서 연설

11. 마지막 헌신

교민통합을 위한 거듭된 노력
월간 ‘한인기독교보’ 발행

12. 마지막 불꽃 그리고 서거

마지막 열정 ‘한인기독교보’
1941년 55세로 소천하다

덧붙이는 말
무궁화 아호로 상징되는 민족혼
지언행합일(知言行合一)의 실천적 삶의 궤적

근곡 박동완 연보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
 

출판사 리뷰

‘무궁화 피는 동산’이라는 ‘근곡’의 아호에는 선생의 민족혼이 배어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대한’이라는 국호와 ‘무궁화’라는 국화를 그냥 두지 않았다. 박동완은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무궁화를 아호로 삼을 만큼 강기와 결기가 있었으며, 3.1혁명 후 우리가 쓰는 시간은 일본의 표준 시각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항상 30분 늦추어 놓을 정도의 강단을 지녔다. 박동완은 3.1혁명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감된 뒤 일제의 감시와 협박, 회유를 견디면서 1927년 ‘민족반일당 민족협동전선’의 기치 아래 발족한 신간회 창립과 초창기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박동완은 기독교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과 민족혼 찾기에 진심전력했다. 3.1혁명에 참여하기 전 한글신문 『기독신보』의 편집위원과 서기로서 많은 논설과 사설을 쓰는 등 실질적 주필의 역할을 맡아 수행했다. 병탄과 함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강탈한 일제가 ‘대한’을 삭제하고 『매일신보』로 개칭하여 어용신문을 발행할 때 『기독신보』는 우리말글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박동완은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청년』, 『별건곤』 등 총독부의 간섭이 극심한 매체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닌 처지에서 민족대표로 선임되어 서명한 것은 이처럼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위상 때문이었다. 언론인의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이다.

신간회 활동이 총독부의 탄압과 내부갈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언론활동과 신앙운동 역시 극심한 압제의 대상이 되자 박동완은 1928년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활동과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는 한편, 교회 안에 별도의 한글학교를 세우고 우리말 교육을 통해 교포 1세와 2세의 민족의식 고취에 열정을 쏟았다. 하와이는 만주, 해삼위러시아령, 극동지역 일대에 이어 제3의 독립운동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렇듯 박동완은 활동 공간이 어디든 ‘민족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은 실천적 기독인의 삶을 견지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며 늠연한 기상과 고절한 인품으로 힘겨운 ‘골고다’를 쉼 없이 걸었던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뉘어 분열상이 심했으나 박동완은 이를 통합하고 치유하는 데에도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 1941년에 하와이에서 56세에 소천했다.

“박동완의 치열한 삶의 행적과 그의 사상이 김삼웅 선생님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적셔주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민초와 독립운동가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식민지배나 당할 수밖에 없는 열등한 민족이라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정당화되지 않기를, 그리고 지금의 K-문화는 저절로 주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독자 여러분에게 와닿기를 소망합니다.” - 박동완 선열의 장손 박재상· 장손부 임미선, 「감사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