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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밝히는
‘길들여진 맛’에 대한 도발적이고 위험한 민낯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에서 황교익은 우리의 기호를 추동하는 ‘어떤 힘’에 주목한다. 우리는 특정 음식에 대해 맛있다, 맛없다를 구분하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맛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음식에 들러붙은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면 나의 입맛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음식의 관성화된 이미지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종의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는 작업이다. 오천 년 전 단군 신화의 마늘부터 현대의 유튜브 먹방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아우른 다양한 한국의 음식들을 불러 세운다. ‘길들여진 맛’에 숨어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음모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목차
들어가며
1부 갑과 을의 밥상
떡볶이는 떡볶이가 아니다
치느님 치느님 맛없는 치느님
푸드포르노의 시대
갑과 을의 밥상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약은 약이고 음식은 음식이다
삼겹살 순대 돼지갈비 족발 돼지국밥의 내력
삼겹살과 생선회는 같은 음식이다
2부 한식 세계화 네버다이
한식 세계화와 민족주의
한국음식이기만 하면 슬로푸드
언제 어디서든 똑같은 비빔밥을 먹게 된 까닭
김밥은 비빔밥이다
간장과 된장의 ‘국적’에 관하여
평양냉면은 없다
남도음식의 탄생
한정식은 기생집 상차림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김치 세계화
3부 웅녀는 마늘을 먹지 않았다
한민족 최초의 곡물음식
오천년을 먹은 판타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의 해석 문제
떡의 시대, 공동체의 시대
산문 밖으로 나온 사찰음식
이밥에 고깃국은 한민족의 젖과 꿀
조선 왕이 먹었던 음식, 일본 왕족이 먹었던 음식
향토음식의 역사 조작 스토리텔링
차례와 제사 상차림의 예법
4부 맛 칼럼니스트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국가 권력이 앗아간 밥그릇의 아름다움
정치인과 요리사는 그 뿌리가 같다
음식 무정치의 판타지
정치인의 서민 코스프레를 끝내려면
정치인의 받아먹기에서 배울 것 하나
너무나 정치적인 음식, 칼국수
일제는 왜 한반도에 천일염전을 두었나
과학자들이 울고 갈 천일염 미네랄 마케팅
1부 갑과 을의 밥상
떡볶이는 떡볶이가 아니다
치느님 치느님 맛없는 치느님
푸드포르노의 시대
갑과 을의 밥상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약은 약이고 음식은 음식이다
삼겹살 순대 돼지갈비 족발 돼지국밥의 내력
삼겹살과 생선회는 같은 음식이다
2부 한식 세계화 네버다이
한식 세계화와 민족주의
한국음식이기만 하면 슬로푸드
언제 어디서든 똑같은 비빔밥을 먹게 된 까닭
김밥은 비빔밥이다
간장과 된장의 ‘국적’에 관하여
평양냉면은 없다
남도음식의 탄생
한정식은 기생집 상차림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김치 세계화
3부 웅녀는 마늘을 먹지 않았다
한민족 최초의 곡물음식
오천년을 먹은 판타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의 해석 문제
떡의 시대, 공동체의 시대
산문 밖으로 나온 사찰음식
이밥에 고깃국은 한민족의 젖과 꿀
조선 왕이 먹었던 음식, 일본 왕족이 먹었던 음식
향토음식의 역사 조작 스토리텔링
차례와 제사 상차림의 예법
4부 맛 칼럼니스트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국가 권력이 앗아간 밥그릇의 아름다움
정치인과 요리사는 그 뿌리가 같다
음식 무정치의 판타지
정치인의 서민 코스프레를 끝내려면
정치인의 받아먹기에서 배울 것 하나
너무나 정치적인 음식, 칼국수
일제는 왜 한반도에 천일염전을 두었나
과학자들이 울고 갈 천일염 미네랄 마케팅
책 속으로
인간 집단이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넉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소속 집단에게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안정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교 사회 시간에 배운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떠올려보시길 바란다.)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많이 주어진’이라는 조건은 그 집단이 처한 자연과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오래도록 빵이 아니라 밥을 맛있다고 생각해왔다.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밥을 맛있다고 생각하게끔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한반도의 자연은 몬순기후로 밀농사보다 벼농사에 유리하다. 값싼 밀이 수입되어도 국내산 쌀을 사 먹을 만큼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밥을 먹기에 적절하니 밥이 맛있는 것이다.
--- 「치느님 치느님 맛없는 치느님」 중에서
유기농을 넘어 자연재배를 한다는 농장을 보라. 하우스가 지어져 있고 무경운, 무비료라 하지만 그 안의 땅은 그 바로 밖의 땅과 다르다. 그 바로 밖의 땅이란 농경지가 아닌 자연의 땅을 말한다. 유기물 함량을 조사해보면 자연의 땅보다 하우스 안의 땅에서 훨씬 높게 나올 것이다. 한반도 자연의 땅은 유기물 함량이 극히 적어서 그대로 농작물을 재배하기 적당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위적으로 자연과 단절시키고 유기물 함량을 높인 땅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두고 어찌 ‘자연’이란 말을 붙일 수가 있는가. 이건 ‘자연’의 남용이고 오용이다. 반자연의 일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나아가, 농업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혼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농업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반자연의 일이라고 생각하여야만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중에서
노동자는 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는 사람들이다.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도시농장을 운영하는 것조차 버겁다. 도시농장의 운영으로 농업의 가치를 확인하고 농민과의 연대를 생각하였다 하여도, 문제는 돈이다. 노동자의 주머니가 ‘우리 친환경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할까? 인간은 경제적으로 최적의 조건에 있는 먹을거리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한국 노동자의 최적 먹을거리 안에 ‘우리 친환경 농산물’이 들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로 ‘선한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함은 돈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한국 노동자는 하루 평균 점심 비용으로 6,000원 정도를 쓰고 있으며, 이도 버겁다고 한다. 점심 메뉴 선택의 기준도 맛이나 영양보다 가격이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편의점의 삼각김밥을 먹는 노동자들도 많다. 이 음식들이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이를 먹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에게 ‘선도적 도시민’이 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중에서
김치 종주국 선언을 하였고 ‘김치가 기무치를 이겼다’면서, 왜 한국인은 그 많은 양의 중국산 김치를 수입하게 되었으며, 또 왜 그 김치를 식탁에 올리고는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김장문화제 등 김치 관련 행사에는 늘 수많은 종류의 김치가 전시된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주려고 담근 김치이다. 옛날에 그런 다양한 김치가 있었든 없었든 그 김치들은 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다.
행사장에 전시된 그 김치들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현재의 한국인은 사계절 내내 대부분 배추김치만 먹는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김치도 배추김치이다.
--- 「한국인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김치 세계화」 중에서
문명 이전에 부족장은 정치인이며 제사장이며 요리사였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커지고, 더불어 인간 조직이 복잡해졌다. 부족장 하나에 정치와 종교, 요리를 다 맡길 수 없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두고 ‘정교분리’라 하여 역사에서 배운다. 권력화한 정치와 종교는 인간 집단을 통제하며 그 권력으로 자신을 영예로운 듯이 포장하였다. 심지어 정치인과 종교인은 제 스스로 신이나 되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런데, 요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별 중요하지 않은 듯이 밀려났다. 요리는 스스로 권력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시되었다.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고, 그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먹고 나서야 요리사가 먹는다. 이는 먼 옛날 부족장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부족장은 사냥물을 나눌 때에 자신이 먼저 선택하지 않는다. 맨 나중에, 부족원이 나누어진 사냥물을 다 가지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하나가 부족장의 것이 된다.
한국의 정치인에게서 나는 부족장의 그 위대한 전통을 보지 못한다. 다들 제 몫의 사냥물을 내놓으라고 아귀다툼이다. 앞에 나서 일을 도모하여도 내 몫을 버리는 것이 부족장임을 잊었다.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 이후에 부족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배덕의 부족장’을 견제하도록 만든 것이 민주공화국의 선거 제도이다. 나의 몫을 주장하지 않고 사냥물을 골고루 잘 분배해줄 듯한 부족장을 스스로 뽑자는 것이 이 제도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면, 요리사가 자신이 한 음식을 스스로 먹으며 맛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요리사가 정치인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이런 별종의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이끌 참된 부족장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많이 주어진’이라는 조건은 그 집단이 처한 자연과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오래도록 빵이 아니라 밥을 맛있다고 생각해왔다.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밥을 맛있다고 생각하게끔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한반도의 자연은 몬순기후로 밀농사보다 벼농사에 유리하다. 값싼 밀이 수입되어도 국내산 쌀을 사 먹을 만큼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밥을 먹기에 적절하니 밥이 맛있는 것이다.
--- 「치느님 치느님 맛없는 치느님」 중에서
유기농을 넘어 자연재배를 한다는 농장을 보라. 하우스가 지어져 있고 무경운, 무비료라 하지만 그 안의 땅은 그 바로 밖의 땅과 다르다. 그 바로 밖의 땅이란 농경지가 아닌 자연의 땅을 말한다. 유기물 함량을 조사해보면 자연의 땅보다 하우스 안의 땅에서 훨씬 높게 나올 것이다. 한반도 자연의 땅은 유기물 함량이 극히 적어서 그대로 농작물을 재배하기 적당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위적으로 자연과 단절시키고 유기물 함량을 높인 땅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두고 어찌 ‘자연’이란 말을 붙일 수가 있는가. 이건 ‘자연’의 남용이고 오용이다. 반자연의 일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나아가, 농업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혼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농업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반자연의 일이라고 생각하여야만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중에서
노동자는 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는 사람들이다.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도시농장을 운영하는 것조차 버겁다. 도시농장의 운영으로 농업의 가치를 확인하고 농민과의 연대를 생각하였다 하여도, 문제는 돈이다. 노동자의 주머니가 ‘우리 친환경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할까? 인간은 경제적으로 최적의 조건에 있는 먹을거리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한국 노동자의 최적 먹을거리 안에 ‘우리 친환경 농산물’이 들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로 ‘선한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함은 돈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한국 노동자는 하루 평균 점심 비용으로 6,000원 정도를 쓰고 있으며, 이도 버겁다고 한다. 점심 메뉴 선택의 기준도 맛이나 영양보다 가격이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편의점의 삼각김밥을 먹는 노동자들도 많다. 이 음식들이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이를 먹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에게 ‘선도적 도시민’이 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중에서
김치 종주국 선언을 하였고 ‘김치가 기무치를 이겼다’면서, 왜 한국인은 그 많은 양의 중국산 김치를 수입하게 되었으며, 또 왜 그 김치를 식탁에 올리고는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김장문화제 등 김치 관련 행사에는 늘 수많은 종류의 김치가 전시된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주려고 담근 김치이다. 옛날에 그런 다양한 김치가 있었든 없었든 그 김치들은 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다.
행사장에 전시된 그 김치들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현재의 한국인은 사계절 내내 대부분 배추김치만 먹는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김치도 배추김치이다.
--- 「한국인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김치 세계화」 중에서
문명 이전에 부족장은 정치인이며 제사장이며 요리사였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커지고, 더불어 인간 조직이 복잡해졌다. 부족장 하나에 정치와 종교, 요리를 다 맡길 수 없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두고 ‘정교분리’라 하여 역사에서 배운다. 권력화한 정치와 종교는 인간 집단을 통제하며 그 권력으로 자신을 영예로운 듯이 포장하였다. 심지어 정치인과 종교인은 제 스스로 신이나 되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런데, 요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별 중요하지 않은 듯이 밀려났다. 요리는 스스로 권력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시되었다.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고, 그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먹고 나서야 요리사가 먹는다. 이는 먼 옛날 부족장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부족장은 사냥물을 나눌 때에 자신이 먼저 선택하지 않는다. 맨 나중에, 부족원이 나누어진 사냥물을 다 가지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하나가 부족장의 것이 된다.
한국의 정치인에게서 나는 부족장의 그 위대한 전통을 보지 못한다. 다들 제 몫의 사냥물을 내놓으라고 아귀다툼이다. 앞에 나서 일을 도모하여도 내 몫을 버리는 것이 부족장임을 잊었다.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 이후에 부족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배덕의 부족장’을 견제하도록 만든 것이 민주공화국의 선거 제도이다. 나의 몫을 주장하지 않고 사냥물을 골고루 잘 분배해줄 듯한 부족장을 스스로 뽑자는 것이 이 제도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면, 요리사가 자신이 한 음식을 스스로 먹으며 맛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요리사가 정치인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이런 별종의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이끌 참된 부족장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 「정치인과 요리사는 그 뿌리가 같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치킨은 맛이 없다?”
우리가 열광한 음식에 감춰진 진짜 이야기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밝히는
‘길들여진 맛’에 대한 도발적이고 위험한 민낯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이 치킨을 좋아한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하여 인터넷에서는 치킨을 ‘치느님(치킨+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더구나 방송에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치킨을 맛있게 먹으며 엄지를 치켜든다. 이 정도의 치킨이라면, 치킨을 좋아하는 것이 애국이 아닌가 싶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치킨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좋아해야 하는) 대표 음식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치킨은 맛이 없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맛이 없다”는 까탈스러운 입맛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다. “맛이 없다”라는 주장을 통해 그는 “치킨은 맛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성을 흔든다. 그리고 밥상 위에 놓인 치킨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추적해나간다. 다시 말해, 그는 “맛이 없다”는 주장을 통해 치킨이 왜 맛있게 느껴지는지, 정말 맛있는 닭으로 만들어지는지, 치킨의 유통 가격은 적절한지 등을 돌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에서 황교익은 우리의 기호를 추동하는 ‘어떤 힘’에 주목한다. 우리는 특정 음식에 대해 맛있다, 맛없다를 구분하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맛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음식에 들러붙은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면 나의 입맛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음식의 관성화된 이미지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종의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는 작업이다. 오천 년 전 단군 신화의 마늘부터 현대의 유튜브 먹방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아우른 다양한 한국의 음식들을 불러 세운다. ‘길들여진 맛’에 숨어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음모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떡볶이, 치킨, 삼겹살, 비빔밥, 평양냉면…
“당신이 알던 맛은 진짜가 아니다!”
본능 너머에 존재하는 음식 기호에 대한 탐구!
황교익의 시선은 낯설다.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음식에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은 매일 우리 앞에 놓이는 일상의 음식이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곧 놀라움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치킨은 마리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 닭이 크든 작든 수량에 의해 동일 가격이 매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계사에서는 최대한 많은 닭을 최대한 이른 시일에 잡아 판매한다. 그러다보니 닭 한 마리가 A4용지 하나의 면적에서 버틴다. 밀실 사육을 하니 닭은 질병에 약할 수밖에 없고, 병들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45일 이상 키웠을 때 잡는 닭을 우리나라에서는 30일 즈음 잡는다. 몸무게도 1.5kg으로 제대로 맛이 들었을 리 만무하다.
닭고기가 맛이 없으니 여러 첨가물의 튀김옷을 입히고 이를 튀겨서 또 양념으로 범벅을 한다. 사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치킨은 닭고기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튀김옷 맛, 기름 맛, 양념 맛으로 먹는다. 그것은 치킨을 마리로 판매하는 상술 때문에 벌어진 결과다. 우리가 “치킨은 맛있다”고 여기는 동안 이 악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나를 추동하고 제어하는 것들에 대한 관찰이자 사색이다
인간의 기억은 편집된다. 국가나 민족 단위에서 일어나는 집단의 기억도 편집된다. 그 편집된 기억을, 개인의 것은 추억이라 하고 집단의 것은 역사라 한다. 추억과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현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의 사실을 호출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이다. 음식에 대한 추억과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개인과 집단의 음식에 대한 현재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판타지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한국음식에 붙여둔 판타지를 읽어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작업의 도구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주제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대는 일이다. 그 “왜?”라는 질문과 그로 인해 얻어내는 대답이라는 것도 결국은 질문자의 욕망이 투사된 판타지일 뿐이다.
- 본문 중에서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갑과 을의 밥상’에서는 음식 기호의 이면을 들춘다. “맛있다”라는 기호를 자본과 정치권력이 조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부 ‘한식 세계화 네버다이’에서는 한국의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지니는 판타지와 정부가 추진하는 ‘한식 세계화’의 모순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3부 ‘웅녀는 마늘을 먹지 않았다’에서는 오천 년 역사를 지닌 한반도 음식의 역사적 판타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비틀고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마지막 4부 ‘맛 칼럼니스트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에서는 음식과 정치가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한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음식에 대한 판타지가 걷히고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나를 추동하고 제어하고 있던 내밀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본능 기저에 존재하는 역사, 사회, 문화적인 강제성이 음식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가? 이것은 분명 음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열광한 음식에 감춰진 진짜 이야기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밝히는
‘길들여진 맛’에 대한 도발적이고 위험한 민낯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이 치킨을 좋아한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하여 인터넷에서는 치킨을 ‘치느님(치킨+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더구나 방송에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치킨을 맛있게 먹으며 엄지를 치켜든다. 이 정도의 치킨이라면, 치킨을 좋아하는 것이 애국이 아닌가 싶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치킨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좋아해야 하는) 대표 음식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치킨은 맛이 없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맛이 없다”는 까탈스러운 입맛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다. “맛이 없다”라는 주장을 통해 그는 “치킨은 맛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성을 흔든다. 그리고 밥상 위에 놓인 치킨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추적해나간다. 다시 말해, 그는 “맛이 없다”는 주장을 통해 치킨이 왜 맛있게 느껴지는지, 정말 맛있는 닭으로 만들어지는지, 치킨의 유통 가격은 적절한지 등을 돌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에서 황교익은 우리의 기호를 추동하는 ‘어떤 힘’에 주목한다. 우리는 특정 음식에 대해 맛있다, 맛없다를 구분하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맛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음식에 들러붙은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면 나의 입맛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음식의 관성화된 이미지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종의 판타지를 거두어들이는 작업이다. 오천 년 전 단군 신화의 마늘부터 현대의 유튜브 먹방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아우른 다양한 한국의 음식들을 불러 세운다. ‘길들여진 맛’에 숨어 있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음모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떡볶이, 치킨, 삼겹살, 비빔밥, 평양냉면…
“당신이 알던 맛은 진짜가 아니다!”
본능 너머에 존재하는 음식 기호에 대한 탐구!
황교익의 시선은 낯설다.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음식에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은 매일 우리 앞에 놓이는 일상의 음식이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곧 놀라움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치킨은 마리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 닭이 크든 작든 수량에 의해 동일 가격이 매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계사에서는 최대한 많은 닭을 최대한 이른 시일에 잡아 판매한다. 그러다보니 닭 한 마리가 A4용지 하나의 면적에서 버틴다. 밀실 사육을 하니 닭은 질병에 약할 수밖에 없고, 병들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45일 이상 키웠을 때 잡는 닭을 우리나라에서는 30일 즈음 잡는다. 몸무게도 1.5kg으로 제대로 맛이 들었을 리 만무하다.
닭고기가 맛이 없으니 여러 첨가물의 튀김옷을 입히고 이를 튀겨서 또 양념으로 범벅을 한다. 사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치킨은 닭고기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튀김옷 맛, 기름 맛, 양념 맛으로 먹는다. 그것은 치킨을 마리로 판매하는 상술 때문에 벌어진 결과다. 우리가 “치킨은 맛있다”고 여기는 동안 이 악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나를 추동하고 제어하는 것들에 대한 관찰이자 사색이다
인간의 기억은 편집된다. 국가나 민족 단위에서 일어나는 집단의 기억도 편집된다. 그 편집된 기억을, 개인의 것은 추억이라 하고 집단의 것은 역사라 한다. 추억과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현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의 사실을 호출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이다. 음식에 대한 추억과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개인과 집단의 음식에 대한 현재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판타지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한국음식에 붙여둔 판타지를 읽어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작업의 도구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주제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대는 일이다. 그 “왜?”라는 질문과 그로 인해 얻어내는 대답이라는 것도 결국은 질문자의 욕망이 투사된 판타지일 뿐이다.
- 본문 중에서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갑과 을의 밥상’에서는 음식 기호의 이면을 들춘다. “맛있다”라는 기호를 자본과 정치권력이 조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부 ‘한식 세계화 네버다이’에서는 한국의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지니는 판타지와 정부가 추진하는 ‘한식 세계화’의 모순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3부 ‘웅녀는 마늘을 먹지 않았다’에서는 오천 년 역사를 지닌 한반도 음식의 역사적 판타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비틀고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마지막 4부 ‘맛 칼럼니스트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에서는 음식과 정치가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한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음식에 대한 판타지가 걷히고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나를 추동하고 제어하고 있던 내밀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본능 기저에 존재하는 역사, 사회, 문화적인 강제성이 음식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가? 이것은 분명 음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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