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책소개)/1.고대.삼국.신라

조선 상고사 (단채 신채호) - 국사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우리역사

동방박사님 2022. 12. 1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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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찾고자 노력한 신채호의 역작,
현대적 해설과 주석으로 새롭게 탄생하다!


『조선상고사』는 독립운동으로 10년 실형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투옥 중인 신채호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으로, 신채호가 순국한 지 12년이 지난 1948년에 출간되었다. 단군시대부터 백제부흥운동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시대, 제3편 삼조선 분립시대,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5편(二) 고구려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구려·백제 충돌,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 모두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상고사』 원문은 지금의 우리말과 큰 차이가 있어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신채호의 기억력에 의지한 부분이 많아 연도나 명칭 등에 오류가 다소 있다. 이 책은 『조선상고사』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원문에 없는 해설과 주석을 별도로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쉽고 정확하게 신채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목차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시대

제1장 고대 조선 총론| 제2장 대(大)단군왕검의 건국 | 제3장 수두의 전파와 문화의 발달

제3편 삼조선 분립시대

제1장 삼조선 총론 | 제2장 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 | 제3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불조선 | 제4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말조선 | 제5장 삼조선 붕괴의 원인과 결과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1장 열국 총론 | 제2장 열국의 분립 | 제3장 한무제의 침입 | 제4장 계립령 이남의 두 신생국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1장 1세기 초반 고구려의 국력 발전과 그 원인 | 제2장 태조대왕·차대왕 두 대왕의 문치 | 제3장 태조대왕·차대왕의 한족 축출과 고토 회복 | 제4장 차대왕의 왕위 찬탈 | 제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집권 | 제6장 을파소의 재상직 수행

제5편(二)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의 대(對)중국 패전 |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제6편 고구려·백제의 충돌

제1장 고구려·백제 관계의 유래 | 제2장 근구수왕의 무공과 고구려의 위축(백제의 해외정벌) |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정책과 선비족 정복 | 제4장 장수태왕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제1장 4개국 연합군의 전쟁과 고구려의 퇴각 | 제2장 백제의 북위 격퇴와 해외식민지 획득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1장 신라의 발흥 | 제2장 조령·죽령 이북 10개 군의 쟁탈 문제 | 제3장 동서(同?) 전쟁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제1장 임유관 전투 | 제2장 살수 전투 | 제3장 오열홀·회원진 양대 전투와 수나라의 멸망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여행과 혁명 | 제2장 요하 전쟁 | 제3장 안시성 전투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1장 부여성충의 위대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 |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 제3장 부여성충의 자살 | 제4장 신라·당나라 군대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체포 | 제5장 백제 의병의 봉기(부여복신의 역사) | 제6장 고구려의 당나라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융성(부여복신의 역사) | 제7장 부여복신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저자 소개

저 : 신채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

역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히스토리〉,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를 연재. 기독교방송(CBS)의 〈김미화의 여러분〉, 교통방송(TBS)의 〈송정애의 좋은 사람들〉(구 〈오지혜의 좋은 사람들〉), 불교방송(BBS)의 〈아름다운 초대〉에서 역사...

 
 

책 속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_ 21쪽, [제1편 총론] 중에서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오륙백 년간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였다. 『수문비고』에서는 청나라 직예성 영평부에 있었던 고죽국도 조선 종족이라고 했다. 고죽국 왕자인 백이·숙제 형제는 왕위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들은 오늘날의 섬서성에 있었던 주나라를 여행하다가 무왕에게 반전론을 열렬히 역설했다. 이 외에, 양자강·회수 유역으로도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소왕국을 많이 건설했다. 그중에서 서나라 언왕이 두각을 보이고 인의를 실천하니, 중국 36개국이 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이상은 조선 본국이 아닌 식민지에서 나온 한두호걸의 행적이다. _ 113쪽, [제2편 수두시대] 중에서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불·말, 세 한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삼한이 삼경에 각각 주재하며 조선을 통치했다는 점은 제2편에서 이미 설명했다. 삼조선은 삼한이 분립한 뒤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했던 것이다.(중략) 한(韓)은 국명이 아니라 왕의 칭호였다. 삼한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명의 대왕이고, 삼조선은 삼한 즉 세 왕이 각각 통치한 세 지방이었다._ 121~122쪽, [제2편 삼조선 분립시대] 중에서

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선 역사상의 쟁점이다.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씨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지금의 개원 이북은 당시에는 북부여 땅이었다. 지금의 흥경 동쪽은 고구려 땅이었다.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 땅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 땅이었다. 따라서 이 네 지역 밖에서 한사군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_ 193쪽, [제4편 열국쟁웅시대] 중에서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훨씬 더 넓었다. 『구당서』 [백제 열전]에서는 백제의 영토에 관해 말하면서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도달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고려에 도달하며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도달한다”고 했다.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다.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월나라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명사였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서의 서쪽 즉 지금의 봉천성 서부는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구절에 의하면 당시의 일본 전역이 백제의 속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는 이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언제 잃었을까?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 패해 국세가 약해졌으니, 이때 해외 식민지를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_ 320~321쪽,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중에서

후세 사람들은 살수 전투가 거의 전적으로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또 을지문덕이 고작 수천 명의 병력으로 수나라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멸망 당시에 고구려의 상비군은 30만 명이었다. 그러니 영양대왕의 전성기인 을지문덕 당시에는 30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또 “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렸다”고 한 광개토태왕릉비문이나 “고구려가 거란과 함께 우리의 해상 경비병들을 죽였다”고 한 수양제의 선전포고문에서는 고구려 수군의 존재가 드러난다. 따라서 수군도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30여 만 명 중에서 몇 만 명은 남방의 백제와 신라를 막는 데 투입되고, 그 나머지 20여 만 명이 수나라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수륙대원수는 당연히 영양대왕이었다.
_ 394쪽,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난 1천 년간 역사가들이 감추고 축소한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규명하다!

신채호는 ‘역사는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 상고사는 ‘작자의 의도에 따라 많은 사실 관계가 달라진’ 불완전한 역사라 규정한다. 특히 묘청이 유교도 김부식에 패배한 이후 이 땅에는 유교도가 득세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중국을 높이고 스스로를 낮춰 역사를 서술하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신채호가 ‘유교도 김부식’과 그가 서술한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다. 또한 “내란의 빈발과 외적의 출몰이 우리나라 고대사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렸다”는 안정복의 의견에 대해 “내란이나 외환보다는 조선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선사가 쓰러지고 무너졌다”고 밝힌 까닭이기도 하다. 이에 신채호는 그 당시 “현존하는 서적들을 갖고 장단점을 파악하고 대조”하여 1천 년 이상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축소된 우리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군의 시대를 많은 부분 할애해 서술하고, ‘대중국 투쟁’의 선봉에 선 고구려의 역사를 중요하게 기록한 것 등은 ‘작자의 의도로 사실 관계가 달라진 불완전한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고자 한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수립하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부정하고,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설립했다. 훼손된 단군의 시대를 재조명함으로써 고조선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음을 명확히 규명했으며, 동부여와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두 나라를 우리 민족의 근원으로 포함시켰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일축했다.
신채호의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는 삼국시대 서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처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상고사를 개탄하며, 그 대신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 등의 역사를 균등히 기록하고자 노력했다. 『삼국사기』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백제가 『조선상고사』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중요하게 서술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일제강점기, 한국사 연구를 통해 독립투쟁을 계속하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다”는 『조선상고사』의 머리말 격인 총론에 나오는 명제다. 신채호는 계속해서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높이면 투쟁의 승자로서 미래 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반면에 ‘아’가 파멸되어 ‘아’가 ‘비아’에게 바쳐지면 투쟁의 패자로서 역사의 흔적 정도로 그치고 만다”고 강조한다. 즉,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아와 비아와 투쟁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채호는 우리 역사를 우리 민족인 ‘아’가 ‘비아’인 다른 민족과의 투쟁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이와 같은 ‘역사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인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신채호가 행한 다양한 독립투쟁 활동의 사상적 근간이었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기대와 달리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사람들이 항상 생겨나는” 까닭을 역사로 살펴봄으로써 ‘지금’을 경계하고 ‘훗날’을 준비하고자 했다. 신채호에게 한국사 연구는 독립투쟁의 또 하나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신채호의 역사 인식과 시대 인식이 담겨 있는 『조선상고사』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