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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비밀정보기관과 스파이, 잠재적 적을 염탐하고자 하는 욕구의 실현!
정보기관은 모든 나라에 존재하고, 모두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그 역사 역시 유구해서 고대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군사 첩자와 오늘날처럼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이용해 설명하는 정보원이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치의 기본 원칙, 심지어 군대의 기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특히 인간적 요소, 이를테면 한 사람의 첩자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의 갈등은 더욱 그렇다. 이런 정보기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중적이다. 잠재적 적의 동태를 파악해 우리를 지켜준다는 인식과 함께 도·감청을 통해 민간인 사찰 등 불법을 자행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사이버 공격은 에너지 공급, 교통망과 통신 체계, 공장, 은행, 병원 등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간접시설’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런 공격을 막으려면 비밀 정보원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 대량학살 무기로 인한 위협과 테러 위협이 비밀 정보 업무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위험을 적시에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비밀 정보 수단과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물론 결코 영웅적이지 않으며, 혐오스러운 동전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첩보 업무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억압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독재자들이 통치할 때 그러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책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첩보 활동과 고대부터 냉전의 종식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첩보기관의 장구한 역사를 조망한다. 특히 스파이 역사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름이나 부수적 사건보다는 비밀 정보 활동이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더욱 심도 있게 파헤친다.
목차
들어가는 말
01 첩보 활동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고 왜 연구할까
02 현대 이전 정치권에서의 첩보 활동
03 새로운 적: 종교적, 혁명적, 반혁명적, 민족적 세력들
04 강대국의 정치와 혁명에 대한 공포
05 1900년 이래 관료적이며 기술에 바탕을 둔 현대적 비밀 정보업
06 20세기 네 가지 적: 공산주의자, 파시스트/민족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제3세계의 ‘테러리스트’
07 냉전에서의 비밀 정보 활동 전쟁
08 은폐 작전, 스파이, 분석
09 비밀 정보 업무로 인한 인권 및 시민권 침해, 그리고 정치적 통제 가능성의 한계
10 비밀 정보, 인터넷과 사이버 전쟁: 간략한 조망
주
참고문헌
01 첩보 활동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고 왜 연구할까
02 현대 이전 정치권에서의 첩보 활동
03 새로운 적: 종교적, 혁명적, 반혁명적, 민족적 세력들
04 강대국의 정치와 혁명에 대한 공포
05 1900년 이래 관료적이며 기술에 바탕을 둔 현대적 비밀 정보업
06 20세기 네 가지 적: 공산주의자, 파시스트/민족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제3세계의 ‘테러리스트’
07 냉전에서의 비밀 정보 활동 전쟁
08 은폐 작전, 스파이, 분석
09 비밀 정보 업무로 인한 인권 및 시민권 침해, 그리고 정치적 통제 가능성의 한계
10 비밀 정보, 인터넷과 사이버 전쟁: 간략한 조망
주
참고문헌
출판사 리뷰
비밀정보기관과 스파이, 잠재적 적을 염탐하고자 하는 욕구의 실현!
정보기관은 모든 나라에 존재하고, 모두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그 역사 역시 유구해서 고대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군사 첩자와 오늘날처럼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이용해 설명하는 정보원이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치의 기본 원칙, 심지어 군대의 기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특히 인간적 요소, 이를테면 한 사람의 첩자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의 갈등은 더욱 그렇다. 이런 정보기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중적이다. 잠재적 적의 동태를 파악해 우리를 지켜준다는 인식과 함께 도·감청을 통해 민간인 사찰 등 불법을 자행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의 광범위한 감찰은 전 세계를 분노하게 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이 감찰한 대상은 테러 집단뿐 아니라 이들을 지원한 국가, 평범한 시민들, 더 놀라운 것은 독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외국 정상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덴마크 공영라디오방송인 DR은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이 덴마크 군사정보국(FE)과 맺은 안보 협력을 바탕으로 덴마크의 해저 정보 케이블을 이용해 2012~2014년 독일·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 등의 고위 정치인들과 관리들을 도청했다’고 보도했다(2021년 6월 1일 자 〈서울신문〉)”. 스노든의 폭로 이후에도 이런 일이 계속된 것이다.
한편 미국 국가안전보장국 스캔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국가 정보기관의 보호를 받는지 잊고는 한다. 사이버 공격은 에너지 공급, 교통망과 통신 체계, 공장, 은행, 병원 등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간접시설’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런 공격을 막으려면 비밀 정보원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 대량학살 무기로 인한 위협과 테러 위협이 비밀 정보 업무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위험을 적시에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비밀 정보 수단과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물론 결코 영웅적이지 않으며, 혐오스러운 동전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첩보 업무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억압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독재자들이 통치할 때 그러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책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첩보 활동과 고대부터 냉전의 종식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첩보기관의 장구한 역사를 조망한다. 특히 스파이 역사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름이나 부수적 사건보다는 비밀 정보 활동이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더욱 심도 있게 파헤친다.
첩보 활동이란 무엇인가
영어권에서는 ‘intelligence란 적에 대한 정보’라고 짤막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이 개념을 실질적으로 정의하려면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즉 첩보 활동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눈다. (1) 적에 대한 정보 획득, (2) 은폐된 영향력, (3) 첩보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통치 기구 보호, (4) 적의 첩보 활동 내부로 침입.
정치적 지배의 주요한 세 가지 영역은 1) 외부 적에 대한 방어, 2) 국내 갈등 통제, 3) 이러한 정치적 지배의 재정 지원을 위한 세제 시스템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특정 지식에 종속되어 행사되는지 알 수 있다. 대외적 안전을 위해 사람들은 스파이를 이용하고, 정보를 훔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강탈해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보편적 정부가 알고 있는 정보보다 첩보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은 해석할 게 더 많다. 게다가 이런 정보는 조심스럽게 진짜인지를 검증해봐야 하는데, 적이 거짓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첩보 활동으로 얻은 정보는 대부분 불완전한 데 반해, 지배자나 결정권자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많다.
정보를 획득하고 조사하고 분석한 뒤 얻은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미국에서는 ‘actionable intelligence’라고 하는데, 결정하는 데 기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비밀 정보라는 의미다. 마침내 결정권자는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특정한 임무를 내린다. 이것이 ‘정보 사이클(intelligence cycle)’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정보 사이클’은 첩보 활동에 속하지 않는다. 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적의 지배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비밀공작’이라고 하는데, 은밀한 자금·물건·무기 등을 제공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비밀공작에는 적의 정치나 군사적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도 포함되며, 이때 자신들의 직원이나 외부의 인원(대부분 돈으로 고용한)을 투입한다. 정치적·인종적 소수나 이념적으로 무장한 집단을 이용할 때도 드물지 않다. 또 군인들처럼 특공대작전을 통해 방해공작을 펼치거나 침투를 통해 적의 지도자를 축출하기도 한다. 모든 첩보 활동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적의 첩보기관이 공격하는 것에 대비해 자신들의 지배기구를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의 첩보 활동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적국의 비밀을 획득할 뿐 아니라 첩보 활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스파이란 어떤 사람인가
스파이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에이전트’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애매하다. 따라서 ‘스파이가 무슨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해야 한다. 이들은 적국의 지도자나 적국의 국가 비밀을 염탐하므로 정부에서 어렵사리 마련하는 정부 기관의 일부다. 스파이와 배반자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매우 어렵다. 스파이는 파견되는 데 반해, 배반자는 이미 국가 비밀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 즉 적의 권력 장치 안에 있다. 그래서 스파이의 임무를 알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직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인물로 살고 있는 스파이나 국가 조직의 핵심에 있는 배반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고, 아무하고나 얘기하고 임무를 내린 당사자에게 직접 정보(특히 문서로 된)를 건넬 수 없다. 그래서 이들에겐 정보원이나 정보원으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스파이 활동의 전형적인 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스파이는 극단적인 충성심 사이를 오간다. 그는 자기편에 대해서는 지극히 충성을 해야 하지만, 배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적에 대해 충성심을 깨야만 한다. 둘째, 스파이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를 아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스파이는 조력자 없이는 활동할 수 없으며, 이들 조력자는 가령 처벌을 피하기 위해 스파이나 혹은 배반자를 밀고할 수 있다.
규범적 차원에서는 스파이 활동이나 배반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고, 이런 활동을 경멸해야 하는지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해 물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임무를 내리는 당사자와 이들과 싸우는 상대방의 윤리적 잣대에 달려 있다. 구 동독 국가공안국에서 활약한 사람과 구 동독 밖에서 국가공안국을 위해 배반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들어보자. 한 측에서는 사법적 처벌을 요구하고, 공안국을 위해 일한 비공식적인 사람들에게는 통일된 독일에서 공직을 맡지 못하도록 요구한다. 다른 측에서는 무엇보다 구 동독 공안국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당시에 국제법상 인정받은 국가를 위해 ‘정상적인 업무’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나치 독일이나 소련 혹은 다른 독재자에 맞서 싸운 스파이나 ‘배반자’는 윤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는다. 인간성의 원칙과 정당한 평화 원칙은 상위법에 속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독일의 전후 역사의 정치적·법적 경우에서 보듯 이런 견해를 항상 관철시킬 수는 없다. 독일이 항복하고 얼마 후인 1944년 7월 20일 쿠데타(히틀러의 반대파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 쿠데타)를 벌인 암살범들은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대항한 전투에서 서구의 정보기관에 소중한 도움을 준 ‘배반자들’은 그와 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고대의 첩보 활동
파라오의 외교 업무와 관련해서는 아크나톤으로 더 잘 알려진 파라오 아멘포테프 4세 때 자료가 존재한다. 기원전 13세기 중반에 이집트를 다스렸고 종교와 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이 파라오는 카파도키아(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에 거주하던 히타이트인들과 싸워 참패했다. 히타이트는 이집트 왕국의 동쪽 국경에 인접한 여러 속국이 이집트를 등지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히타이트는 비밀스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데 매우 탁월했다. 람세스 2세의 원정과 카데시 전투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이집트는 다양한 민족과 연대한 히타이트로 말미암아 상당히 놀랐던 것 같다. 게다가 파라오는 변장한 첩자 두 명에 속아 너무 성급하게 도시에 진입했다. 이들 외에 두 히타이트 첩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잔인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고서야 이집트는 자신들이 덫에 걸렸음을 알아차렸다. 히타이트인은 전차 1000대를 이끌고 강의 얕은 곳을 건너서 기습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의 2개 사단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람세스는 군대를 퇴각시켜야만 했다. 그의 충실한 친위대는 파라오가 체포되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그는 휴전해야만 했고 시리아를 잃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의 지도자 키루스 대제는 비밀 첩보의 기능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 이들 첩보기관의 구조와 성취에 대해서는 그리스 철학자 헤로도토스가 남긴 수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리우스 1세가 지배할 때 그리스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거대한 왕국은 20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지방을 총독 한 명이 페르시아 출신 고문 한 명과 함께 다스렸다. 지방에 있던 군대는 왕의 군대 관할 아래에 있었고, 죽지 않는다는 ‘불사부대’ 근위병 1만 명이 왕을 호위했다. 궁정에는 모든 지방과 관리를 감시하는 관청이 있었다. 이 관청의 관료는 ‘왕의 눈’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리스 장군이자 작가 크세노폰은 이 관료를 더욱 위대한 시스템의 일부라고 서술했다. 키루스 왕은 수많은 ‘눈’과 ‘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선물과 명예를 안겨주었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고위직 관리들을 매년 지방으로 파견해 그곳의 상태를 알아보고, 각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과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끔 했다.
페르시아의 소식과 정보기관에 대한 그리스인의 감탄은 모든 그리스 장군과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0년 만에 페르시아 왕국을 정복하고, 특히 인도까지 출정한 알렉산더 대왕은 잘 정비된 조직을 통해 적군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 같은 일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민족들의 정치 분위기와 지리 조건에 대한 정보를 통해 군대에 보급품을 보내기 어렵다는 사정을 미리 알아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의심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경험과 실행 방식을 바탕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원전 333년 11월 이소스(터키의 도시 이스켄데룬의 북쪽)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을 때, 군 정보원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하마터면 대재난이 일어날 뻔했다. 알렉산더는 상세한 보고를 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가 군대를 이끌고 먼 곳에 가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군대는 자신들은 몰랐지만 서로를 지나쳐서 행진해갔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인들은 알렉산더의 등 뒤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두 군대는 거꾸로 된 전투 대형으로 싸워야만 했다. 만일 패배했다면 알렉산더는 퇴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리우스와 맞서 싸운 전투 가운데 세 번째로 대대적인 전투가 기원전 331년 10월 가우가멜라 평원(오늘날 이라크 북부)에서 일어났는데, 첩보원으로부터 들은 보고는 처음에 틀렸다. 그러니까 알렉산더에게 보고하기를, 다리우스가 소수의 선발대만 이끌고 이미 행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올라온 거짓 정보들은 체포된 페르시아 스파이들로부터 나온 내용으로, 마케도니아 왕을 혼란에 빠트릴 목적이 틀림없었다. 그와 같은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능통하며 신뢰하던 미틸레네의 라오메돈(알렉산더 3세의 친구이자 장군)에게 포로들 가운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염탐하도록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 포로는 군 스파이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은 비밀 누설과 전혀 관계없으며, 나중에 증명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은 참모부 소속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어떤 반역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 기밀조직, 군 지휘관, 높은 지위의 정치가, 언론과 법정이 나서서 저지른 수치스러운 스캔들이었다. 독일을 위해 첩보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894년 12월 드레퓌스 대위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뒤에 죄 없는 드레퓌스가 다시금 복권될 때까지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894년 9월 26일 여자 청소부 마리 바스티안(가명 오귀스트)은 자신에게 임무를 내려주는 프랑스 참모부 소속 비밀정보부에 놀라운 문서를 제공했다. 그녀는 5년 전부터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했고, 쓰레기통이나 열려 있는 금고에서 문서를 꺼내어 근처에 있는 교회에 넘겨주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참모본부의 서류에 접근 가능한 프랑스 장교로부터 나온, 이른바 프랑스 군사문서를 손 글씨로 쓴 목록이었다.
육군 방첩대장 장 상데어 대령과 정보국 소속 부하직원들은, 목록을 작성한 혐의를 드레퓌스에게 씌우려 했다. 우선 드레퓌스는 참모본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기득권자가 아니고, 알사스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드레퓌스를 통해 이중간첩으로 독일과 함께 모험적이고 의도적인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또 다른 장교에 대한 의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는 1895년 여름 방첩대장이던 육군 대령 장 상데어의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후임자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우연히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체가 독일에 비밀을 누설했다는 ‘목록’의 필체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앙리 소령이 병적으로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앙리와 매우 가까운 자가 군사정보부의 재정 관리자로 있으면서 사기 사건을 일으켰던 사실도 떠올렸다. 피카르는 이로써 진정한 반역자는 에스테라지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피카르는 1896년 8월 이 사실을 프랑스 국방부장관에게 알렸으나, 장관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피카르를 참모본부장에게 보냈다. 참모본부장은 피카르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오.” 피카르는 튀니지로 좌천되었고, 문서를 조작한 앙리는 군정보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피카르는 비밀 누설죄로 기소되었다.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여명)〉지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했다. 이 편지의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였다. 에밀 졸라는 사건의 책임은 참모본부에 있으며 에스테라지를 진짜 반역자라고 지명했는데, 이로 인해 에밀 졸라는 벌금형과 1년 감금형을 당했다. 1899년 여름에 피카르는 풀려났고, 드레퓌스는 상고 법원에서 재판을 앞두고 가이아나섬에서 돌아왔다. 드레퓌스는 1899년 9월 재심 끝에 10년 형을 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마침내 상소 법원은 이 판결을 폐기했다. 1906년에야 비로소 프랑스군은 명예를 회복한 드레퓌스를 군인으로 복귀시켰고, 90년이 지난 1995년에야 군은 공식적으로 드레퓌스가 ‘군의 음모’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영국의 군사비밀정보과 보어 전쟁
19세기 말의 영국군은 전략적 군사비밀정보 분야에서 탁월했다. 그럼에도 비밀 활동에서 보어 전쟁은 그야말로 재난에 해당했는데, 런던의 정치 지도부와 군 지도자들이 전쟁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적절하게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현장에서 일하는 군사정보원들이 보고한 보어군의 군사력을 알려 하지 않았다. 또 이 군대의 지휘관 레드버스 불러 장군은 정보부에서 보낸 남아프리카에 대한 안내서를, 자신은 이미 남아프리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며 읽기를 거절했다. 1899년 12월 결국 불러 장군은 ‘부활제 전주(前週)’에 많은 부하와 중요한 전투 한 곳과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잃었다.
그의 후임이자 일곱 살이나 더 많은 원수(元帥) ‘밥스’ 로버츠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대대와 중대는 자체 통신장교를 둬야만 했다. 그의 후임자 키치너 경은 부대 안에 통신센터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통신망을 구축했다. 장교 132명이 수천 명의 민간인 및 원주민과 함께 전쟁 중인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해 배포하는 새롭고도 거대한 조직에서 일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땅에서 유격대원으로 싸웠고 넓은 지역에 대한 지식도 훨씬 많았으며 싸울 동기도 충분한 보어족의 정보 체계와는 경쟁이 될 수 없었다.
1902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의 전쟁 수행은 왜 그토록 형편없고 끔찍하고 오랫동안 불행하게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군사 훈련도 전혀 받지 않은 소규모 보어족을 상대로, 왜 45만 영국군이 필요했던 것일까. 왕립 위원회는 부족한 점을 조사했고, 마침내 결론에 이르렀다. 군대의 정보과는 장교 18명(전쟁을 시작했을 때)으로 이루어져 인원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게다가 권한을 가진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인원은 고작 두 명이었는데도 제대로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적시에 보어 전쟁에 대해 경고했고 적의 군사력과 무장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비밀 활동
볼셰비키 혁명으로 비밀 활동의 역사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비밀 업무는 국방을 위한 도구에 속한다는 간단한 공식에서 출발한다면,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지극히 새로운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국가에 새로운 적개심이 등장했는데, 이는 더 이상 권력·영향력·영토·원자재를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이 아니라, 적대적 국가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했다. 이와 같은 방향 설정은 18~19세기 군주와 귀족의 특권을 얻기 위해 벌인 투쟁과 달리, 더 이상 정부와 사회의 주요 인물에게만 해당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와 경제 질서 전체에 해당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이제, 외국의 적과 국내의 적을 더 이상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세기 현대적·관료주의적 국가들이 제도적 차원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과 달리 말이다. 길고도 지루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경찰과 군대, 외국의 스파이와 내국의 스파이를 정교하게 분리하였으나 이런 분류로 말미암아 점점 더 문제가 발생했다. 적국들은 전통적 권력기구(재정, 무역, 군사) 외에도 적국의 국내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적인 도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비밀 정보 활동은 민주주의에 얼마나 위험할까
이런 의문은 오늘날 반복해서 논의되고 있으며 더욱 폭넓은 시각이 필요한데, 비밀 정보 활동과 경찰력을 동원할 때 윤리적 규범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모든 자유민주주의자들이 한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기준을 찾는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은 특별한 문제를 안게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오늘날의 법으로 판단해야 할까, 당시의 법으로 판단해야 할까. 각각 유효한 국가의 규범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국제앰네스티나 프로아질(ProAsyl) 같은 인권단체가 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비록 인권은 새로운 게 아니더라도 윤리적 규범은 1950년대 이후 ‘계속 발전’했던가.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비밀 정보 활동에 대해 거의 아무런 규정도 없는 국제법을 살펴보자. 지극히 소수의 경우에만, 예를 들어 특정 군비통제협정에 따른 감시가 필요할 때에는 비밀 정보 활동을 해도 된다는 특별한 국제적 전권 위임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 2001년 9월 28일의 유엔안전보장위원회 결의 제1373호는, 국가에 국제적 테러를 추적하기 위해 비밀정보부를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밖의 비밀 정보 활동은 정해지지 않은 공간에서 폭넓게 행해졌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책임을 지는가? 비밀 정보조직 스스로 아니면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국가? 상당히 드문 경우에 한해서 비밀 정보조직은 정부의 의지에 반하거나 이들 모르게 행동한다. 흔히 비도덕적이고 인권과 시민권에 손상을 입힌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의회와 사법부가 이와 같은 행동을 분명하게 불법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 정부의 모든 원칙에서 합법화된다. 이와 같은 일이 심지어 다수의 민주주의 대중의 찬성하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세상에서의 비밀 정보 업무와 사이버 전쟁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국영 방송국이나 개인 방송국이 내보내는 소리와 영상을 전달하는 데 반해, 인터넷은 영상과 소리를 모든 방향으로 중개한다. 즉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발송인이자 수신인이 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이 기술적·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낮아져 세계 인구의 절반, 선진국과 중진국에서는 4분의 3 이상이 인터넷을 이용한다.
이로써 인터넷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세계적 플랫폼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공간이자 시장이다. 처음에는 통신·시장·전자의 경이로운 세계에서 엄청난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보였으나, 곧 이런 시대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범죄자들은 어디에서든 이용할 수 있는 통신 가능성으로부터 이득을 취했다. 광고와 상품화는 국가가 정해둔 원칙(저작권, 청소년 보호 등등)을 위협적으로 무너뜨렸다. 게다가 인터넷 상거래는 전통적인 인쇄 매체나 백화점과 전문 상점의 몰락을 가져왔다. 제품 생산과 상품화는 최적의 비용에 맞추었고(전 세계 어디든 생산 비용이 적게 드는 곳에서 생산), 이는 노동시장과 사회적 표준에 아주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생산, 그리고 ‘정보 고속도로’와 중앙저장장치를 운영하고 만드는 회사는 신속하게 미국과 몇몇 아시아 국가 및 회사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와 같은 거대한 시장 집중이 발생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NSA 스캔들 폭로가 보여주듯이 지리적 전략이 작용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에도 NSA는, 만일 이들이 미국의 인터넷 거물들과 공생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전 세계에 걸쳐 그런 대량의 데이터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미국에 의해 지배되는 인터넷 운영자들은 사용자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데이터를 퍼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입구(‘윈도우’)를 많은 곳에 만들어놓았다. 세 번째로 미국은 데이터 관리와 저장 부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 미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클라우드 데이터 저장이 미국에 있고 인터넷 연결의 대부분이 미국 영토를 거쳐서 이루어지면, NSA는 다른 국가의 도청 조직과 비교할 때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NSA는 데이터 괴물로서 외국의 파트너에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다. 만일 외국 파트너들이 NSA 데이터로부터 뭔가 가져오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자국 내에서의 테러와 범죄자에 대하여 알고자 하면, NSA에 부탁하고 대신에 돈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NSA에 의존하지 않는 비밀 업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은 점점 범행이 일어나는 장소가 될 뿐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 전쟁터가 되고 있다. 오늘날 대략 40여 국가가 군사적 사이버 능력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몇몇만이 상당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 소수 국가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가 속한다.
준군사적 의미에서 사이버 공격이 2008년에 있었는데, 러시아가 조지아의 방공을 차단했을 때이며, 2010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의 일부를 파괴했을 때다. 적의 ‘중요한 사회간접시설’인 에너지 공급, 교통 체계, 병원 등을 인터넷으로 공격해 기존처럼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서도 사회를 마비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는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을 대대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특징인데, 목표를 고려할 때뿐 아니라 이를 추진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공격이라는 비밀 업무상의 방어와 직접 공격하는 것 사이의 기술적 한계는 유동적이다. 한때 비밀 정보만을 수집하는 데 제한되었던 비밀 업무는 그사이 전쟁 무기가 되었다. 간략하게 말해서, 인터넷 증축으로 비밀 업무는 훨씬 더 커지고 강력하게 군사전략적 논리에 속하게 되었다. 냉전의 끝에 꾸었던 꿈, 그러니까 전쟁의 종식에 대한 꿈은 사라져버렸다. 인터넷이 그런 꿈을 최종적으로 파괴해버린 것이다.
정보기관은 모든 나라에 존재하고, 모두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그 역사 역시 유구해서 고대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군사 첩자와 오늘날처럼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이용해 설명하는 정보원이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치의 기본 원칙, 심지어 군대의 기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특히 인간적 요소, 이를테면 한 사람의 첩자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의 갈등은 더욱 그렇다. 이런 정보기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중적이다. 잠재적 적의 동태를 파악해 우리를 지켜준다는 인식과 함께 도·감청을 통해 민간인 사찰 등 불법을 자행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의 광범위한 감찰은 전 세계를 분노하게 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이 감찰한 대상은 테러 집단뿐 아니라 이들을 지원한 국가, 평범한 시민들, 더 놀라운 것은 독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외국 정상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덴마크 공영라디오방송인 DR은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이 덴마크 군사정보국(FE)과 맺은 안보 협력을 바탕으로 덴마크의 해저 정보 케이블을 이용해 2012~2014년 독일·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 등의 고위 정치인들과 관리들을 도청했다’고 보도했다(2021년 6월 1일 자 〈서울신문〉)”. 스노든의 폭로 이후에도 이런 일이 계속된 것이다.
한편 미국 국가안전보장국 스캔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국가 정보기관의 보호를 받는지 잊고는 한다. 사이버 공격은 에너지 공급, 교통망과 통신 체계, 공장, 은행, 병원 등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간접시설’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런 공격을 막으려면 비밀 정보원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 대량학살 무기로 인한 위협과 테러 위협이 비밀 정보 업무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위험을 적시에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비밀 정보 수단과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물론 결코 영웅적이지 않으며, 혐오스러운 동전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첩보 업무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억압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독재자들이 통치할 때 그러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책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첩보 활동과 고대부터 냉전의 종식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첩보기관의 장구한 역사를 조망한다. 특히 스파이 역사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름이나 부수적 사건보다는 비밀 정보 활동이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더욱 심도 있게 파헤친다.
첩보 활동이란 무엇인가
영어권에서는 ‘intelligence란 적에 대한 정보’라고 짤막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이 개념을 실질적으로 정의하려면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즉 첩보 활동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눈다. (1) 적에 대한 정보 획득, (2) 은폐된 영향력, (3) 첩보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통치 기구 보호, (4) 적의 첩보 활동 내부로 침입.
정치적 지배의 주요한 세 가지 영역은 1) 외부 적에 대한 방어, 2) 국내 갈등 통제, 3) 이러한 정치적 지배의 재정 지원을 위한 세제 시스템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특정 지식에 종속되어 행사되는지 알 수 있다. 대외적 안전을 위해 사람들은 스파이를 이용하고, 정보를 훔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강탈해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보편적 정부가 알고 있는 정보보다 첩보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은 해석할 게 더 많다. 게다가 이런 정보는 조심스럽게 진짜인지를 검증해봐야 하는데, 적이 거짓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첩보 활동으로 얻은 정보는 대부분 불완전한 데 반해, 지배자나 결정권자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많다.
정보를 획득하고 조사하고 분석한 뒤 얻은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미국에서는 ‘actionable intelligence’라고 하는데, 결정하는 데 기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비밀 정보라는 의미다. 마침내 결정권자는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특정한 임무를 내린다. 이것이 ‘정보 사이클(intelligence cycle)’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정보 사이클’은 첩보 활동에 속하지 않는다. 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적의 지배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비밀공작’이라고 하는데, 은밀한 자금·물건·무기 등을 제공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비밀공작에는 적의 정치나 군사적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도 포함되며, 이때 자신들의 직원이나 외부의 인원(대부분 돈으로 고용한)을 투입한다. 정치적·인종적 소수나 이념적으로 무장한 집단을 이용할 때도 드물지 않다. 또 군인들처럼 특공대작전을 통해 방해공작을 펼치거나 침투를 통해 적의 지도자를 축출하기도 한다. 모든 첩보 활동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적의 첩보기관이 공격하는 것에 대비해 자신들의 지배기구를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의 첩보 활동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적국의 비밀을 획득할 뿐 아니라 첩보 활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스파이란 어떤 사람인가
스파이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에이전트’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애매하다. 따라서 ‘스파이가 무슨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해야 한다. 이들은 적국의 지도자나 적국의 국가 비밀을 염탐하므로 정부에서 어렵사리 마련하는 정부 기관의 일부다. 스파이와 배반자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매우 어렵다. 스파이는 파견되는 데 반해, 배반자는 이미 국가 비밀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 즉 적의 권력 장치 안에 있다. 그래서 스파이의 임무를 알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직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인물로 살고 있는 스파이나 국가 조직의 핵심에 있는 배반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고, 아무하고나 얘기하고 임무를 내린 당사자에게 직접 정보(특히 문서로 된)를 건넬 수 없다. 그래서 이들에겐 정보원이나 정보원으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스파이 활동의 전형적인 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스파이는 극단적인 충성심 사이를 오간다. 그는 자기편에 대해서는 지극히 충성을 해야 하지만, 배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적에 대해 충성심을 깨야만 한다. 둘째, 스파이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를 아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스파이는 조력자 없이는 활동할 수 없으며, 이들 조력자는 가령 처벌을 피하기 위해 스파이나 혹은 배반자를 밀고할 수 있다.
규범적 차원에서는 스파이 활동이나 배반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고, 이런 활동을 경멸해야 하는지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해 물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임무를 내리는 당사자와 이들과 싸우는 상대방의 윤리적 잣대에 달려 있다. 구 동독 국가공안국에서 활약한 사람과 구 동독 밖에서 국가공안국을 위해 배반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들어보자. 한 측에서는 사법적 처벌을 요구하고, 공안국을 위해 일한 비공식적인 사람들에게는 통일된 독일에서 공직을 맡지 못하도록 요구한다. 다른 측에서는 무엇보다 구 동독 공안국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당시에 국제법상 인정받은 국가를 위해 ‘정상적인 업무’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나치 독일이나 소련 혹은 다른 독재자에 맞서 싸운 스파이나 ‘배반자’는 윤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는다. 인간성의 원칙과 정당한 평화 원칙은 상위법에 속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독일의 전후 역사의 정치적·법적 경우에서 보듯 이런 견해를 항상 관철시킬 수는 없다. 독일이 항복하고 얼마 후인 1944년 7월 20일 쿠데타(히틀러의 반대파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 쿠데타)를 벌인 암살범들은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대항한 전투에서 서구의 정보기관에 소중한 도움을 준 ‘배반자들’은 그와 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고대의 첩보 활동
파라오의 외교 업무와 관련해서는 아크나톤으로 더 잘 알려진 파라오 아멘포테프 4세 때 자료가 존재한다. 기원전 13세기 중반에 이집트를 다스렸고 종교와 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이 파라오는 카파도키아(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에 거주하던 히타이트인들과 싸워 참패했다. 히타이트는 이집트 왕국의 동쪽 국경에 인접한 여러 속국이 이집트를 등지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히타이트는 비밀스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데 매우 탁월했다. 람세스 2세의 원정과 카데시 전투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이집트는 다양한 민족과 연대한 히타이트로 말미암아 상당히 놀랐던 것 같다. 게다가 파라오는 변장한 첩자 두 명에 속아 너무 성급하게 도시에 진입했다. 이들 외에 두 히타이트 첩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잔인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고서야 이집트는 자신들이 덫에 걸렸음을 알아차렸다. 히타이트인은 전차 1000대를 이끌고 강의 얕은 곳을 건너서 기습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의 2개 사단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람세스는 군대를 퇴각시켜야만 했다. 그의 충실한 친위대는 파라오가 체포되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그는 휴전해야만 했고 시리아를 잃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의 지도자 키루스 대제는 비밀 첩보의 기능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 이들 첩보기관의 구조와 성취에 대해서는 그리스 철학자 헤로도토스가 남긴 수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리우스 1세가 지배할 때 그리스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거대한 왕국은 20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지방을 총독 한 명이 페르시아 출신 고문 한 명과 함께 다스렸다. 지방에 있던 군대는 왕의 군대 관할 아래에 있었고, 죽지 않는다는 ‘불사부대’ 근위병 1만 명이 왕을 호위했다. 궁정에는 모든 지방과 관리를 감시하는 관청이 있었다. 이 관청의 관료는 ‘왕의 눈’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리스 장군이자 작가 크세노폰은 이 관료를 더욱 위대한 시스템의 일부라고 서술했다. 키루스 왕은 수많은 ‘눈’과 ‘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선물과 명예를 안겨주었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고위직 관리들을 매년 지방으로 파견해 그곳의 상태를 알아보고, 각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과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끔 했다.
페르시아의 소식과 정보기관에 대한 그리스인의 감탄은 모든 그리스 장군과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0년 만에 페르시아 왕국을 정복하고, 특히 인도까지 출정한 알렉산더 대왕은 잘 정비된 조직을 통해 적군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 같은 일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민족들의 정치 분위기와 지리 조건에 대한 정보를 통해 군대에 보급품을 보내기 어렵다는 사정을 미리 알아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의심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경험과 실행 방식을 바탕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원전 333년 11월 이소스(터키의 도시 이스켄데룬의 북쪽)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을 때, 군 정보원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하마터면 대재난이 일어날 뻔했다. 알렉산더는 상세한 보고를 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가 군대를 이끌고 먼 곳에 가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군대는 자신들은 몰랐지만 서로를 지나쳐서 행진해갔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인들은 알렉산더의 등 뒤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두 군대는 거꾸로 된 전투 대형으로 싸워야만 했다. 만일 패배했다면 알렉산더는 퇴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리우스와 맞서 싸운 전투 가운데 세 번째로 대대적인 전투가 기원전 331년 10월 가우가멜라 평원(오늘날 이라크 북부)에서 일어났는데, 첩보원으로부터 들은 보고는 처음에 틀렸다. 그러니까 알렉산더에게 보고하기를, 다리우스가 소수의 선발대만 이끌고 이미 행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올라온 거짓 정보들은 체포된 페르시아 스파이들로부터 나온 내용으로, 마케도니아 왕을 혼란에 빠트릴 목적이 틀림없었다. 그와 같은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 능통하며 신뢰하던 미틸레네의 라오메돈(알렉산더 3세의 친구이자 장군)에게 포로들 가운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염탐하도록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 포로는 군 스파이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은 비밀 누설과 전혀 관계없으며, 나중에 증명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은 참모부 소속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어떤 반역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 기밀조직, 군 지휘관, 높은 지위의 정치가, 언론과 법정이 나서서 저지른 수치스러운 스캔들이었다. 독일을 위해 첩보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894년 12월 드레퓌스 대위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뒤에 죄 없는 드레퓌스가 다시금 복권될 때까지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894년 9월 26일 여자 청소부 마리 바스티안(가명 오귀스트)은 자신에게 임무를 내려주는 프랑스 참모부 소속 비밀정보부에 놀라운 문서를 제공했다. 그녀는 5년 전부터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했고, 쓰레기통이나 열려 있는 금고에서 문서를 꺼내어 근처에 있는 교회에 넘겨주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참모본부의 서류에 접근 가능한 프랑스 장교로부터 나온, 이른바 프랑스 군사문서를 손 글씨로 쓴 목록이었다.
육군 방첩대장 장 상데어 대령과 정보국 소속 부하직원들은, 목록을 작성한 혐의를 드레퓌스에게 씌우려 했다. 우선 드레퓌스는 참모본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기득권자가 아니고, 알사스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드레퓌스를 통해 이중간첩으로 독일과 함께 모험적이고 의도적인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또 다른 장교에 대한 의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는 1895년 여름 방첩대장이던 육군 대령 장 상데어의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후임자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우연히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체가 독일에 비밀을 누설했다는 ‘목록’의 필체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앙리 소령이 병적으로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앙리와 매우 가까운 자가 군사정보부의 재정 관리자로 있으면서 사기 사건을 일으켰던 사실도 떠올렸다. 피카르는 이로써 진정한 반역자는 에스테라지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피카르는 1896년 8월 이 사실을 프랑스 국방부장관에게 알렸으나, 장관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피카르를 참모본부장에게 보냈다. 참모본부장은 피카르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오.” 피카르는 튀니지로 좌천되었고, 문서를 조작한 앙리는 군정보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피카르는 비밀 누설죄로 기소되었다.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여명)〉지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했다. 이 편지의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였다. 에밀 졸라는 사건의 책임은 참모본부에 있으며 에스테라지를 진짜 반역자라고 지명했는데, 이로 인해 에밀 졸라는 벌금형과 1년 감금형을 당했다. 1899년 여름에 피카르는 풀려났고, 드레퓌스는 상고 법원에서 재판을 앞두고 가이아나섬에서 돌아왔다. 드레퓌스는 1899년 9월 재심 끝에 10년 형을 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마침내 상소 법원은 이 판결을 폐기했다. 1906년에야 비로소 프랑스군은 명예를 회복한 드레퓌스를 군인으로 복귀시켰고, 90년이 지난 1995년에야 군은 공식적으로 드레퓌스가 ‘군의 음모’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영국의 군사비밀정보과 보어 전쟁
19세기 말의 영국군은 전략적 군사비밀정보 분야에서 탁월했다. 그럼에도 비밀 활동에서 보어 전쟁은 그야말로 재난에 해당했는데, 런던의 정치 지도부와 군 지도자들이 전쟁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적절하게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현장에서 일하는 군사정보원들이 보고한 보어군의 군사력을 알려 하지 않았다. 또 이 군대의 지휘관 레드버스 불러 장군은 정보부에서 보낸 남아프리카에 대한 안내서를, 자신은 이미 남아프리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며 읽기를 거절했다. 1899년 12월 결국 불러 장군은 ‘부활제 전주(前週)’에 많은 부하와 중요한 전투 한 곳과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잃었다.
그의 후임이자 일곱 살이나 더 많은 원수(元帥) ‘밥스’ 로버츠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대대와 중대는 자체 통신장교를 둬야만 했다. 그의 후임자 키치너 경은 부대 안에 통신센터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통신망을 구축했다. 장교 132명이 수천 명의 민간인 및 원주민과 함께 전쟁 중인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해 배포하는 새롭고도 거대한 조직에서 일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땅에서 유격대원으로 싸웠고 넓은 지역에 대한 지식도 훨씬 많았으며 싸울 동기도 충분한 보어족의 정보 체계와는 경쟁이 될 수 없었다.
1902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의 전쟁 수행은 왜 그토록 형편없고 끔찍하고 오랫동안 불행하게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군사 훈련도 전혀 받지 않은 소규모 보어족을 상대로, 왜 45만 영국군이 필요했던 것일까. 왕립 위원회는 부족한 점을 조사했고, 마침내 결론에 이르렀다. 군대의 정보과는 장교 18명(전쟁을 시작했을 때)으로 이루어져 인원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게다가 권한을 가진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 인원은 고작 두 명이었는데도 제대로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적시에 보어 전쟁에 대해 경고했고 적의 군사력과 무장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비밀 활동
볼셰비키 혁명으로 비밀 활동의 역사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비밀 업무는 국방을 위한 도구에 속한다는 간단한 공식에서 출발한다면,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지극히 새로운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국가에 새로운 적개심이 등장했는데, 이는 더 이상 권력·영향력·영토·원자재를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이 아니라, 적대적 국가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했다. 이와 같은 방향 설정은 18~19세기 군주와 귀족의 특권을 얻기 위해 벌인 투쟁과 달리, 더 이상 정부와 사회의 주요 인물에게만 해당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와 경제 질서 전체에 해당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이제, 외국의 적과 국내의 적을 더 이상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세기 현대적·관료주의적 국가들이 제도적 차원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과 달리 말이다. 길고도 지루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경찰과 군대, 외국의 스파이와 내국의 스파이를 정교하게 분리하였으나 이런 분류로 말미암아 점점 더 문제가 발생했다. 적국들은 전통적 권력기구(재정, 무역, 군사) 외에도 적국의 국내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적인 도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비밀 정보 활동은 민주주의에 얼마나 위험할까
이런 의문은 오늘날 반복해서 논의되고 있으며 더욱 폭넓은 시각이 필요한데, 비밀 정보 활동과 경찰력을 동원할 때 윤리적 규범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모든 자유민주주의자들이 한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기준을 찾는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은 특별한 문제를 안게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오늘날의 법으로 판단해야 할까, 당시의 법으로 판단해야 할까. 각각 유효한 국가의 규범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국제앰네스티나 프로아질(ProAsyl) 같은 인권단체가 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비록 인권은 새로운 게 아니더라도 윤리적 규범은 1950년대 이후 ‘계속 발전’했던가.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비밀 정보 활동에 대해 거의 아무런 규정도 없는 국제법을 살펴보자. 지극히 소수의 경우에만, 예를 들어 특정 군비통제협정에 따른 감시가 필요할 때에는 비밀 정보 활동을 해도 된다는 특별한 국제적 전권 위임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 2001년 9월 28일의 유엔안전보장위원회 결의 제1373호는, 국가에 국제적 테러를 추적하기 위해 비밀정보부를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밖의 비밀 정보 활동은 정해지지 않은 공간에서 폭넓게 행해졌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책임을 지는가? 비밀 정보조직 스스로 아니면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국가? 상당히 드문 경우에 한해서 비밀 정보조직은 정부의 의지에 반하거나 이들 모르게 행동한다. 흔히 비도덕적이고 인권과 시민권에 손상을 입힌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의회와 사법부가 이와 같은 행동을 분명하게 불법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 정부의 모든 원칙에서 합법화된다. 이와 같은 일이 심지어 다수의 민주주의 대중의 찬성하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세상에서의 비밀 정보 업무와 사이버 전쟁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국영 방송국이나 개인 방송국이 내보내는 소리와 영상을 전달하는 데 반해, 인터넷은 영상과 소리를 모든 방향으로 중개한다. 즉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발송인이자 수신인이 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이 기술적·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낮아져 세계 인구의 절반, 선진국과 중진국에서는 4분의 3 이상이 인터넷을 이용한다.
이로써 인터넷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세계적 플랫폼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공간이자 시장이다. 처음에는 통신·시장·전자의 경이로운 세계에서 엄청난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보였으나, 곧 이런 시대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범죄자들은 어디에서든 이용할 수 있는 통신 가능성으로부터 이득을 취했다. 광고와 상품화는 국가가 정해둔 원칙(저작권, 청소년 보호 등등)을 위협적으로 무너뜨렸다. 게다가 인터넷 상거래는 전통적인 인쇄 매체나 백화점과 전문 상점의 몰락을 가져왔다. 제품 생산과 상품화는 최적의 비용에 맞추었고(전 세계 어디든 생산 비용이 적게 드는 곳에서 생산), 이는 노동시장과 사회적 표준에 아주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생산, 그리고 ‘정보 고속도로’와 중앙저장장치를 운영하고 만드는 회사는 신속하게 미국과 몇몇 아시아 국가 및 회사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와 같은 거대한 시장 집중이 발생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NSA 스캔들 폭로가 보여주듯이 지리적 전략이 작용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에도 NSA는, 만일 이들이 미국의 인터넷 거물들과 공생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전 세계에 걸쳐 그런 대량의 데이터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미국에 의해 지배되는 인터넷 운영자들은 사용자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데이터를 퍼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입구(‘윈도우’)를 많은 곳에 만들어놓았다. 세 번째로 미국은 데이터 관리와 저장 부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 미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클라우드 데이터 저장이 미국에 있고 인터넷 연결의 대부분이 미국 영토를 거쳐서 이루어지면, NSA는 다른 국가의 도청 조직과 비교할 때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NSA는 데이터 괴물로서 외국의 파트너에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다. 만일 외국 파트너들이 NSA 데이터로부터 뭔가 가져오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자국 내에서의 테러와 범죄자에 대하여 알고자 하면, NSA에 부탁하고 대신에 돈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NSA에 의존하지 않는 비밀 업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은 점점 범행이 일어나는 장소가 될 뿐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 전쟁터가 되고 있다. 오늘날 대략 40여 국가가 군사적 사이버 능력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몇몇만이 상당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 소수 국가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가 속한다.
준군사적 의미에서 사이버 공격이 2008년에 있었는데, 러시아가 조지아의 방공을 차단했을 때이며, 2010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의 일부를 파괴했을 때다. 적의 ‘중요한 사회간접시설’인 에너지 공급, 교통 체계, 병원 등을 인터넷으로 공격해 기존처럼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서도 사회를 마비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는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을 대대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특징인데, 목표를 고려할 때뿐 아니라 이를 추진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공격이라는 비밀 업무상의 방어와 직접 공격하는 것 사이의 기술적 한계는 유동적이다. 한때 비밀 정보만을 수집하는 데 제한되었던 비밀 업무는 그사이 전쟁 무기가 되었다. 간략하게 말해서, 인터넷 증축으로 비밀 업무는 훨씬 더 커지고 강력하게 군사전략적 논리에 속하게 되었다. 냉전의 끝에 꾸었던 꿈, 그러니까 전쟁의 종식에 대한 꿈은 사라져버렸다. 인터넷이 그런 꿈을 최종적으로 파괴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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