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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평민만의 이익을 옹호하던 정무관에서
공화정의 전체적 조정자로 거듭났던
호민관의 탄생과 소명과 운명에 관한 통찰
정의와 공동선을 위한 협력에 동의한 "인민의 재산" 국가
각 정치 주체들의 권력과 의지를 조화시키려 한다면
로마 공화정의 적극적 조정자였던 호민관의 역사를 보라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혁명 지도자’로 선출된 정무관인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 이 책은 가장 안정적으로 정체(政體)가 운영되었던 로마 공화정 중기 호민관의 역할과 성격을 면밀히 조명하면서 로마 공화정의 실체를 현실감 있게 재구성해낸 역사 연구서다.
저자는 서양 고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정무관인 호민관이 로마 공화정의 ‘적극적인 조정자’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껏 호민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과두적 원로원의 도구나 평민의 대변자 정도로 지극히 단순했다. 때문에 여러 사료에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호민관의 다양한 활동들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었다.
이 책은 호민관에 관한 이러한 기존의 평가에 문제를 제기하고, 원로원과 인민 사이에서 권력과 의지의 조화를 유지시켰던 호민관의 역할을 재규명함으로써,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법적·헌정적 운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각 계층과 집단 간의 권력과 의지의 조화는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폭넓고 체계적인 사료 분석을 통해 고대 정치사에 관한 신뢰감 있는 단서들을 제공하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학술기획총서 ‘知의회랑’의 스물여섯 번째 책이다.
목차
서문
일러두기
제1장 서론
지금, 호민관 연구가 왜 필요한가|문헌 사료의 소개와 비판
제2장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
호민관의 기원|호민관 권한의 발전|호르텐시우스 법과 호민관|요약
제3장 기원전 3세기 말엽의 호민관 입법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메틸리우스 법|클라우디우스 법|요약
제4장 호민관의 비토권
상소와 호민관의 비토권|호민관의 비토권과 원로원|호민관의 비토권과 정치적 유력자(또는 집단)|호민관의 비토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5장 호민관의 사법권
대역죄|정무관의 직무유기죄 또는 직권남용죄|전리품의 횡령죄|동맹 공동체에 대한 착취죄|호민관의 사법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6장 호민관의 입법권
원로원과 호민관|정무관과 호민관|스키피오 가문과 호민관|호민관의 입법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7장 결론
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공화정(공화국)’의 의미: 고대 그리스ㆍ로마|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도전과 비판|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폴리테이아)|로마 공화정의 대두와 신분 투쟁|폴리비오스와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공화정의 쇠퇴와 키케로의 혼합정체론
부록 공화정 중기(기원전 286~134년) 호민관의 활동 연대기
참고문헌ㆍ찾아보기
총서 ‘知의회랑’을 기획하며
일러두기
제1장 서론
지금, 호민관 연구가 왜 필요한가|문헌 사료의 소개와 비판
제2장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
호민관의 기원|호민관 권한의 발전|호르텐시우스 법과 호민관|요약
제3장 기원전 3세기 말엽의 호민관 입법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메틸리우스 법|클라우디우스 법|요약
제4장 호민관의 비토권
상소와 호민관의 비토권|호민관의 비토권과 원로원|호민관의 비토권과 정치적 유력자(또는 집단)|호민관의 비토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5장 호민관의 사법권
대역죄|정무관의 직무유기죄 또는 직권남용죄|전리품의 횡령죄|동맹 공동체에 대한 착취죄|호민관의 사법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6장 호민관의 입법권
원로원과 호민관|정무관과 호민관|스키피오 가문과 호민관|호민관의 입법권: 역할과 정치적 함의
제7장 결론
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공화정(공화국)’의 의미: 고대 그리스ㆍ로마|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도전과 비판|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폴리테이아)|로마 공화정의 대두와 신분 투쟁|폴리비오스와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공화정의 쇠퇴와 키케로의 혼합정체론
부록 공화정 중기(기원전 286~134년) 호민관의 활동 연대기
참고문헌ㆍ찾아보기
총서 ‘知의회랑’을 기획하며
책 속으로
ㆍ이제는 공화정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공화정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해 질문할 때다.
---「서문」중에서
ㆍ보통 호민관의 비토권은 로마 정무관의 활동이나 원로원에서 통과된 ‘원로원의 의결’을 포함한 공적 활동을 중단시키는 권한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비토권의 부정적인 권한 또는 기능에 주목한 현대 학자들은 호민관의 비토권을 원로원 또는 유력 정치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무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호민관의 비토권이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공화정 중기의 호민관은 정치적 결정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또는 정치적 충돌의 격화로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다시 말해서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세 가지 요소가?원로원, 정무관, (평)민회?서로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타협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물론 호민관의 비토권은 권력의 속성상 정치적 무기로 악용될 소지를 가졌지만, 공화정 중기에 그것은 국가의 정무관과 정치 기구들의 권한을 완화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소통하고 타협하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조정 기능을 수행했다.
---「호민관의 비토권」중에서
ㆍ이후 호민관직은 정치적 야심가(또는 집단)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원로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적 도구로 빠르게 전락하였는데, 호민관이 원로원과 평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던 역사적 사건이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서 첫 번째 단계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결론」중에서
ㆍ모두에게 똑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지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배의 부재는 권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간의 균형을 의미한다.
---「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중에서
ㆍ거의 200년에 걸친 신분 투쟁을 통해서 귀족과 평민 간의 완전한 정치적ㆍ경제적ㆍ법적 평등이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신분 투쟁은 귀족의 권력 독점을 제어함과 동시에 평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각각 소수와 다수의 지배를 함축하는 귀족정도 민주정도 아닌, 특정 계층의 지배가 없는 체제인 공화정을 창출하였다. 또 로마의 신분 투쟁은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의 타협과 양보를 통해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로마인을 공동체적인 일체감으로 견고하게 결속하였다.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을 방지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한 ‘신분 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국가의 ‘필연적 팽창(마키아벨리에 의하면, 국가는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는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분 투쟁’의 시기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문」중에서
ㆍ보통 호민관의 비토권은 로마 정무관의 활동이나 원로원에서 통과된 ‘원로원의 의결’을 포함한 공적 활동을 중단시키는 권한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비토권의 부정적인 권한 또는 기능에 주목한 현대 학자들은 호민관의 비토권을 원로원 또는 유력 정치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무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호민관의 비토권이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공화정 중기의 호민관은 정치적 결정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또는 정치적 충돌의 격화로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다시 말해서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세 가지 요소가?원로원, 정무관, (평)민회?서로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타협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물론 호민관의 비토권은 권력의 속성상 정치적 무기로 악용될 소지를 가졌지만, 공화정 중기에 그것은 국가의 정무관과 정치 기구들의 권한을 완화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소통하고 타협하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조정 기능을 수행했다.
---「호민관의 비토권」중에서
ㆍ이후 호민관직은 정치적 야심가(또는 집단)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원로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적 도구로 빠르게 전락하였는데, 호민관이 원로원과 평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던 역사적 사건이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서 첫 번째 단계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결론」중에서
ㆍ모두에게 똑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지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배의 부재는 권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간의 균형을 의미한다.
---「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중에서
ㆍ거의 200년에 걸친 신분 투쟁을 통해서 귀족과 평민 간의 완전한 정치적ㆍ경제적ㆍ법적 평등이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신분 투쟁은 귀족의 권력 독점을 제어함과 동시에 평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각각 소수와 다수의 지배를 함축하는 귀족정도 민주정도 아닌, 특정 계층의 지배가 없는 체제인 공화정을 창출하였다. 또 로마의 신분 투쟁은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의 타협과 양보를 통해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로마인을 공동체적인 일체감으로 견고하게 결속하였다.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을 방지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한 ‘신분 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국가의 ‘필연적 팽창(마키아벨리에 의하면, 국가는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는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분 투쟁’의 시기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론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금, 호민관 연구가 왜 필요한가
이 책은 로마 정치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던 공화정 중기(286 BC~134 BC)와 당대의 호민관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고대 로마 공화정체에 관한 연구지평을 확대하고자 기획되었다. 역사 연구의 밀도를 높이려는 이 시도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재고하고, 향후 정치 발전의 토대를 재수립하기 위한 인문학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정치 환경이 급변하는 21세기에 고대 로마의 공화정체에 대한 논의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유럽이나 미국에서 등장한 공화국의 모델이 바로 로마의 공화정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형태의 수립에도 이 모델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치체제 논의에서 반성적 지점―정치 과정이 행정 관료들과 부유한 시민들에 의해 지배―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민관의 설치가 제안되고 있다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민관, 그는 누구인가
호민관은 다른 고대 도시국가들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로마만의 특별한 정무관이다. 초창기 평민만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혁명 지도자’로 선출되었던 호민관은 끝내 로마의 공식 정무관으로 발전하면서 로마 정체의 한 부분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처음에 호민관의 권한은 귀족 정무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평민 개개인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공화정의 발전과 함께 호민관의 권한과 역할도 변화를 경험하였다. 로마의 다른 정무관과 달리 권한이나 역할이 특정되지 않은 호민관은 입법·사법·행정 등 거의 전 영역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평민으로만 구성된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소집하고 주재하여 법을 제정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정무관이 바로 호민관이었다. 심지어 원로원과 콘술(consul) 등의 공적 활동에 비토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의 운영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500년 동안 가장 독특하고도 중요한 정무관으로서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진화 및 작동과 밀착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의 문제의식
하지만 아쉽게도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전히 호민관 개인에 대한 파편적인 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물론 호민관은 다른 정무관들과 달리 ‘명령권(imperium,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거나 법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나 특별한 징표를 갖고 있지 않았고, 이른바 ‘관직의 사다리(cursus honorum)’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정치 입문자가 반드시 역임해야 하는 직책도 아니었다. 직급 상 집정관 및 법무관보다 하위에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과소평가의 끝엔 호민관을 원로원의 ‘정치적 도구’나 원로원에 대항하는 ‘평민의 대변자’로 한정하는,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호민관은 정치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통일된 정치체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정부에서는 상위 정무관이 하위 정무관에게 정책을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공화정기 정치가들이 역임할 수 있는 공직의 수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호민관을 단순하게 하급 정무관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키케로(Cicero)도 지적하고 있듯이, 호민관의 수는 10명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독립적인 정무관이었다. 또 호민관은 결코 원로원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원로원을 소집·주재하고 그 토론에도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민관은 원로원, 인민 또는 개인적인 정치가들을 대신해서 자신들의 고유 권한을 사용했던 정무관이라기보다, 콘술, 원로원, 인민 사이의 정치적 대화를 중재하고 촉진하는 정무관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로마 정체의 세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원로원의 의지에 협조하거나 개별 정치가들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무관이나 원로원과 충돌하면서 평민의 이익을 위해 힘썼다. 정무관, 원로원, 평민회 등 완전하지 않는 공화정체의 제반 요소들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조정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기원전 133년, 결정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호민관이 로마 정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로 끌어낼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후 호민관직은 정치적 야심가(또는 집단)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원로원이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빠르게 전락하였다. 호민관이 원로원과 평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던 저 역사적 사건이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서 첫 번째 단계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구성과 서사
이 책은 로마 공화정 중기 호민관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을 시도한다. 당대의 호민관들은 자신들의 권한―비토권, 입법권, 사법권―을 근거로, 정치적 소추, 해외정책, 시민권 문제, 토지 문제, 종교·사회적 이슈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책은 호민관의 탄생에서부터 그 직분이 로마 정체에 점진적으로 수용되는 과정, 소명과 활약 그리고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帝政)의 시작을 초래한 이들의 운명까지 체계적으로 통사화하면서, 그 역할과 권한을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해나간다. 아울러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정갈한 보론을 보강해 민주시민사회의 토대 형성 과정을 거시적으로 조감해볼 수 있게 도왔다. 부록으로 덧붙여진 당대 호민관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연표 또한 한 편의 고대사 사료로서 손색이 없다.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
현재 남아 있는 문헌 사료의 특성상 공화정 초기 호민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중기 호민관의 활동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은 전해지는 문헌 사료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나 회의에서 벗어나 그것을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해나감으로써 공화정 초기 호민관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성에 관해 논의한다. 무엇보다 호민관 선출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이 입법 영역에서 권한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비록 고대 역사 기술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호민관을 로마 공화정의 공식 정무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촉매로 기능한 ‘호르텐시우스 법’에 대해 언급한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세 개의 호민관 법
보통 공화정 중기는 기원전 286년부터 134년까지의 시대를 지칭한다. 하지만 기원전 286년부터 219년까지의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연대기적 서술은 남아 있지 않다. 로마에서 발생한 사건의 개요를 균형 있게 제공하는 역사가 리비우스(Livius)의 『로마사(AbUrbe Condita)』 제11-20권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ios)와 다른 연대기 작가들의 단편은 몇몇 호민관의 활동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준다. 특히 기원전 3세기 말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세 가지 호민관 법들―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lex Flaminia), 메틸리우스 법(lex Metilia),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이 있다. 비록 세 개에 불과하지만, 호민관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와 다른 성격을 보이는 이 법들은 향후 호민관 활동의 방향과 성격을 충분히 암시한다. 이 장에서 자세하게 다뤄질 테마들이다.
―호민관의 비토권
정무관의 자의적인 행동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움(auxilium)’을 요청한 평민을 위해서 호민관은 정무관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비토권(ius intercessionis)’을 필요로 했다. 물론 호민관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의 비토권을 보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원전 449년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 법(lex Valeria Horatia)’이 호민관의 신체불가침권을 법적으로 재승인함으로써, 호민관의 비토권은 행정상의 공적 행위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귀족도 호민관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암시하듯이, 비토권은 공화정 중기쯤이면 호민관의 아주 중요한 권한으로 정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의 비토권은 주로 원로원 또는 유력 정치가(또는 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한 무기로만 평가되었다. 이 장에서는 호민관의 비토권에 관한 현대 학자들의 세 가지 가정을 중심으로 호민관의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호민관의 비토권이 로마 공화정체와 정치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관해 살펴본다.
―호민관의 사법권
비토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호민관은 명령권을 보유한 정무관들의 ‘강제권(ius coercitionis)’을 필요로 했다. 즉, 호민관도 자신들의 금지사항을 위반한 자를 체포하고 벌금을 부과하거나 투옥시키고 또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물론 그 강제권은 집단적인 맹세가 보장하는 평민 모임의 결정에 기초했다. 그럼에도 ‘신분 투쟁’ 말엽 호민관은 엄격한 법적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국가의 공식 정무관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정체를 위협하고 공적인 이해관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에 대한 공적 기소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민관의 사법권은 원로원이 강력한 정치적 개인의 등장을 막거나 정치적 유력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무기로 인식되어온 바 크다.
(아쉽게도 정치적 재판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이 장에서는 호민관의 활동을 크게 네 가지 죄목에 따라 구분하여 고찰한다. 이는 호민관이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로마 공화정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정무관으로서 자신들의 사법적 권한을 사용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호민관의 입법권
호민관은 평민의 정무관으로서 평민으로만 구성된 평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평민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입법으로, 호민관이 소집한 평민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평민의 의결(plebiscitum)’이라 한다. 이것은 처음에 평민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어떤 법적 효력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기원전 449년에 평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전체 인민에게 구속력을 갖는다고 규정한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법’이 통과됨으로써 극복되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339년의 ‘푸블리리우스 법(lex Publilia)’과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을 통해 평민의 일방적인 결정이, 즉 ‘평민의 의결’이 완전한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호민관은 입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은 신귀족의 아성인 원로원의 정책이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입법권을 사용한 정치적 하수인 정도로만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공화정 중기에 통과되었던 호민관 법들을 직접 고찰해나감으로써, 입법의 주도권이 호민관이 아닌 원로원, 정무관 그리고 당대 명문가였던 스키피오(Scipio) 가문에 있었다는 현대 학자들의 주장이 다소 단선적이고 일방적임을 비판적으로 해명해나가고자 한다.
이 책은 로마 정치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던 공화정 중기(286 BC~134 BC)와 당대의 호민관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고대 로마 공화정체에 관한 연구지평을 확대하고자 기획되었다. 역사 연구의 밀도를 높이려는 이 시도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재고하고, 향후 정치 발전의 토대를 재수립하기 위한 인문학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정치 환경이 급변하는 21세기에 고대 로마의 공화정체에 대한 논의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유럽이나 미국에서 등장한 공화국의 모델이 바로 로마의 공화정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형태의 수립에도 이 모델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치체제 논의에서 반성적 지점―정치 과정이 행정 관료들과 부유한 시민들에 의해 지배―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민관의 설치가 제안되고 있다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민관, 그는 누구인가
호민관은 다른 고대 도시국가들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로마만의 특별한 정무관이다. 초창기 평민만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혁명 지도자’로 선출되었던 호민관은 끝내 로마의 공식 정무관으로 발전하면서 로마 정체의 한 부분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처음에 호민관의 권한은 귀족 정무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평민 개개인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공화정의 발전과 함께 호민관의 권한과 역할도 변화를 경험하였다. 로마의 다른 정무관과 달리 권한이나 역할이 특정되지 않은 호민관은 입법·사법·행정 등 거의 전 영역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평민으로만 구성된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소집하고 주재하여 법을 제정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정무관이 바로 호민관이었다. 심지어 원로원과 콘술(consul) 등의 공적 활동에 비토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의 운영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500년 동안 가장 독특하고도 중요한 정무관으로서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진화 및 작동과 밀착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의 문제의식
하지만 아쉽게도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전히 호민관 개인에 대한 파편적인 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물론 호민관은 다른 정무관들과 달리 ‘명령권(imperium,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거나 법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나 특별한 징표를 갖고 있지 않았고, 이른바 ‘관직의 사다리(cursus honorum)’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정치 입문자가 반드시 역임해야 하는 직책도 아니었다. 직급 상 집정관 및 법무관보다 하위에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과소평가의 끝엔 호민관을 원로원의 ‘정치적 도구’나 원로원에 대항하는 ‘평민의 대변자’로 한정하는,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호민관은 정치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통일된 정치체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정부에서는 상위 정무관이 하위 정무관에게 정책을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공화정기 정치가들이 역임할 수 있는 공직의 수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호민관을 단순하게 하급 정무관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키케로(Cicero)도 지적하고 있듯이, 호민관의 수는 10명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독립적인 정무관이었다. 또 호민관은 결코 원로원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원로원을 소집·주재하고 그 토론에도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민관은 원로원, 인민 또는 개인적인 정치가들을 대신해서 자신들의 고유 권한을 사용했던 정무관이라기보다, 콘술, 원로원, 인민 사이의 정치적 대화를 중재하고 촉진하는 정무관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로마 정체의 세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원로원의 의지에 협조하거나 개별 정치가들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무관이나 원로원과 충돌하면서 평민의 이익을 위해 힘썼다. 정무관, 원로원, 평민회 등 완전하지 않는 공화정체의 제반 요소들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조정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기원전 133년, 결정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호민관이 로마 정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로 끌어낼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후 호민관직은 정치적 야심가(또는 집단)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원로원이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빠르게 전락하였다. 호민관이 원로원과 평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던 저 역사적 사건이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서 첫 번째 단계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구성과 서사
이 책은 로마 공화정 중기 호민관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을 시도한다. 당대의 호민관들은 자신들의 권한―비토권, 입법권, 사법권―을 근거로, 정치적 소추, 해외정책, 시민권 문제, 토지 문제, 종교·사회적 이슈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책은 호민관의 탄생에서부터 그 직분이 로마 정체에 점진적으로 수용되는 과정, 소명과 활약 그리고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帝政)의 시작을 초래한 이들의 운명까지 체계적으로 통사화하면서, 그 역할과 권한을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해나간다. 아울러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정갈한 보론을 보강해 민주시민사회의 토대 형성 과정을 거시적으로 조감해볼 수 있게 도왔다. 부록으로 덧붙여진 당대 호민관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연표 또한 한 편의 고대사 사료로서 손색이 없다.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
현재 남아 있는 문헌 사료의 특성상 공화정 초기 호민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중기 호민관의 활동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은 전해지는 문헌 사료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나 회의에서 벗어나 그것을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해나감으로써 공화정 초기 호민관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성에 관해 논의한다. 무엇보다 호민관 선출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이 입법 영역에서 권한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비록 고대 역사 기술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호민관을 로마 공화정의 공식 정무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촉매로 기능한 ‘호르텐시우스 법’에 대해 언급한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세 개의 호민관 법
보통 공화정 중기는 기원전 286년부터 134년까지의 시대를 지칭한다. 하지만 기원전 286년부터 219년까지의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연대기적 서술은 남아 있지 않다. 로마에서 발생한 사건의 개요를 균형 있게 제공하는 역사가 리비우스(Livius)의 『로마사(AbUrbe Condita)』 제11-20권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ios)와 다른 연대기 작가들의 단편은 몇몇 호민관의 활동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준다. 특히 기원전 3세기 말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세 가지 호민관 법들―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lex Flaminia), 메틸리우스 법(lex Metilia),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이 있다. 비록 세 개에 불과하지만, 호민관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와 다른 성격을 보이는 이 법들은 향후 호민관 활동의 방향과 성격을 충분히 암시한다. 이 장에서 자세하게 다뤄질 테마들이다.
―호민관의 비토권
정무관의 자의적인 행동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움(auxilium)’을 요청한 평민을 위해서 호민관은 정무관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비토권(ius intercessionis)’을 필요로 했다. 물론 호민관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의 비토권을 보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원전 449년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 법(lex Valeria Horatia)’이 호민관의 신체불가침권을 법적으로 재승인함으로써, 호민관의 비토권은 행정상의 공적 행위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귀족도 호민관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암시하듯이, 비토권은 공화정 중기쯤이면 호민관의 아주 중요한 권한으로 정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의 비토권은 주로 원로원 또는 유력 정치가(또는 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한 무기로만 평가되었다. 이 장에서는 호민관의 비토권에 관한 현대 학자들의 세 가지 가정을 중심으로 호민관의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호민관의 비토권이 로마 공화정체와 정치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관해 살펴본다.
―호민관의 사법권
비토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호민관은 명령권을 보유한 정무관들의 ‘강제권(ius coercitionis)’을 필요로 했다. 즉, 호민관도 자신들의 금지사항을 위반한 자를 체포하고 벌금을 부과하거나 투옥시키고 또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물론 그 강제권은 집단적인 맹세가 보장하는 평민 모임의 결정에 기초했다. 그럼에도 ‘신분 투쟁’ 말엽 호민관은 엄격한 법적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국가의 공식 정무관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정체를 위협하고 공적인 이해관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에 대한 공적 기소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민관의 사법권은 원로원이 강력한 정치적 개인의 등장을 막거나 정치적 유력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무기로 인식되어온 바 크다.
(아쉽게도 정치적 재판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이 장에서는 호민관의 활동을 크게 네 가지 죄목에 따라 구분하여 고찰한다. 이는 호민관이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로마 공화정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정무관으로서 자신들의 사법적 권한을 사용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호민관의 입법권
호민관은 평민의 정무관으로서 평민으로만 구성된 평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평민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입법으로, 호민관이 소집한 평민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평민의 의결(plebiscitum)’이라 한다. 이것은 처음에 평민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어떤 법적 효력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기원전 449년에 평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전체 인민에게 구속력을 갖는다고 규정한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법’이 통과됨으로써 극복되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339년의 ‘푸블리리우스 법(lex Publilia)’과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을 통해 평민의 일방적인 결정이, 즉 ‘평민의 의결’이 완전한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호민관은 입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은 신귀족의 아성인 원로원의 정책이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입법권을 사용한 정치적 하수인 정도로만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공화정 중기에 통과되었던 호민관 법들을 직접 고찰해나감으로써, 입법의 주도권이 호민관이 아닌 원로원, 정무관 그리고 당대 명문가였던 스키피오(Scipio) 가문에 있었다는 현대 학자들의 주장이 다소 단선적이고 일방적임을 비판적으로 해명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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