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서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7.서양현대철학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2005)

동방박사님 2023. 9. 27.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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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전 지구화’라는 시대의 흐름 안에서 페미니즘적 해체론적 맑스주의 입장에 따라 “토착정보원”(Native Informant)의 형상을 중심으로 철학·문학·역사·문화를 비판한다. “토착장보원”은 서구 인류학자에게 식민지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류학의 원천이자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토착정보원은 전 지구화 시대에 사라지지 않았으며 은밀한 형태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저자 스피박의 기본적인 판단이다.

1장 「철학」은 칸트, 헤겔, 맑스를 문자 이전(avante de lettre)의 식민주의 철학자로 읽어내고, 2장 「문학」은 유럽 문학 전통에 들어가는 문학 텍스트들과 비서구 텍스트들을 분석하여 제국주의의 공리계가 문학에 미쳐온 파장을 분석한다. 3장 「역사」는 문서보관서의 공식기록들에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빠져 있는 빈약한 기록들을 갖고 서발턴 여성들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를 수행한다. 4장 「문화」는 전지구화의 문화적-경제적 영향을 치밀하게 짚어내는 가운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문화정치(학)를 보여준다.

목차

옮긴이 서문
저자 서문

1. 철학
2. 문학
3. 역사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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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1942~ )
인도 캘커타에서 1942년에 태어나 캘커타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1959), 미국 코넬 대학에서 문학석사(1962)와 박사(1967)를 받은 후 아이오와, 피츠버그, 브라운, 텍사스 오스틴, 스탠포드 대학 등에서 가르치다가 1991년부터 지금까지 콜럼비아 대학 교수로 있다. 1976년에 데리다의 『그래머톨러지』를 영역/출간함으로써 서구 문단에 등단했으며, 해체론, 맑스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문화론을 ...
 
역자 : 태혜숙(Heasook Tae, 1957- )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서 페미니즘 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3년부터 대구가톨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영미비평, 페미니즘 이론,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영어영문학회지, 한국여성학회지, 영미문학페미니즘 학회지, 『여/성이론』, 『문화/과학』, Asian Journal of Women's Studies의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버지니아 울프』(1...
 
역자 : 박미선(Mi-sun Park, 1972- )
서강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현재는 텍사스 A&M대학 영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그동안 발표한 글로는 「젠더」, 「로지 브라이도티의 존재론적 차이의 정치학과 유목적 페미니즘」, 「성차의 윤리학과 성별화된 권리」, 「재현」 등이 있으며, 역서로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2002), 『유목적 주체』(2004)가 있다.

책 속으로

나의 목적은 우선 철학, 문학, 역사, 문화라는 다양한 실천들을 통해 토착정보원의 형상을 추적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곧 그러한 추적이 자신을 토착정보원과 결별시키는 식민주체를 보여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1989년 이래 나는 특정한 포스트식민(postcolonial) 주체가 이제 식민주체를 재코드화하고 토착정보원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전 지구화가 절정에 이른 오늘날, 전자통신 정보학이 토착지식의 이름으로 토착정보원을 도청하며 생체음모(biopiracy)를 꾸며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1장에서 간파한 작동중인 폐제(foreclosure)는 더욱 공격적으로 진행된다. 유네스코가 기획 출간한 『삶의 지속체계 대백과 사전』은 인류 역사의 선주민(Aboriginal) 시대를 “환경의 악화와 지속가능성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태적 접근법으로 연상되는 … 머나먼 과거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내재한 역사적 한계” 때문에 “가치 표현의 비밀을 … 해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듯 물론 선주민이 지속가능성을 생각하기란 물론 불가능했다. 하지만 에코생명소(ecobiome)의 리듬 속에 사는 실천적 철학은 이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로 젖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의 책은 에코 쪽의 공격을 받고서 식민담론 연구에서 초국가적 문화연구로 옮아간 한 실천가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 텍스트가 사라져 가는 현재를 포착하려고 할 때 내가 서 있는 입장은 “움직이는 토대”인 초국가적 문화연구이다. 이 입장은 서사적 각주들을 통해 자체를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에 화가 나고 혼란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도전에 공감할 것인데 나는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4장에서 발견하는 내포 독자(implied reader)는 너무도 다양해서 하나의 명확한 관심사나 준비를 배당받을 수 없다. 나 자신의 불확실한 연구 탓인지 새로운 문화연구를 위해 어휘를 두루 살펴보는 독자를 나는 때때로 그려본다. 이 책은 이론적 엘리트와 자기 스타일을 지닌 학계 “실천가”의 “인가된 무지”(sanctioned ignorance)를 언급하려고 또한 애쓴다. 이러한 인가들 또한 이질적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 그리하여 독자의 자리는 작가의 자리만큼이나 안정되게 확보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와 읽기 속에서 저항을 받는 모든 텍스트들의 지위가 그렇지 않을까?
1장은 철학을 살펴본다. 즉 칸트가 선주민의 권리를 상실케 하는 과정, 헤겔이 규범적 일탈의 패턴에다 유럽의 타자를 놓는 과정, 식민 주체가 헤겔을 위생화하는 과정, 맑스가 차이와 협상하는 과정을 다룬다.
2장은 식민주의와 포스트식민성이 형상화되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브론테(Bronte), 메리 셸리(Mary Shelley), 보들레르(Baudelaire), 키플링(Kipling), 리스(Rhys), 마하스웨타(Mahasweta), 코에체(Coetzee)와 같은 일군의 작가들의 문학 텍스트들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메리 셸리가 이 명단의 마지막 세 사람과 합류한다. 우리 투쟁의 교훈이기도 한 타자의 윤리를 정체성의 정치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점에서 나는 최소한 자메이카 킨케이드(Jamaica Kincade)의 『루시』(Lucy)를 여기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착취자들에게 들이대는 날카로운 칼날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파라탁시스적(paratactic)인 강력한 텍스트이다. 『루시』는 결말에서 중심인물의 선택을 넘어서는 타자성으로서 루시라는 고유명사를 용감하게 해체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희생자의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행동?교섭 능력(agency)을 택하고 싶어 하는 주체(subject)에게 거부되는 사랑의 권리/책임을 가정법으로나마 주장할 수 있다.
3장은 문서보관소를 통해 19세기 히말라야 산악지대 국가의 여왕(hill queen)을 따라가 보며 과부 불태우기의 경과를 숙고해 본다. 3장이 『맑스주의와 문화의 해석』에 처음 게재된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의 수정본을 싣고 있음을 언급해야 하리라 본다.
4장은 포스트모던 패션과 텍스트 짜기(textile)의 역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본다.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 외에 이 책에 활용된 초기 판본의 내 논문들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시르무르의 라니: 문서보관소 독해 에세이」,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 「제국주의와 성차」, 「주변부의 판본들: 데포의 『크루소/록사나』를 읽는 코에체의 『포우』」, 「시간과 시간화: 법과 역사」.
각 장들은 홀로 서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하나의 연쇄에 느슨하게 매달려 있다. 즉 철학적 전제들, 역사적 발굴들, 부상하는 포스트식민적인 것을 공유하는 지배적인 것의 문학적 재현들 또한 원주민이자/또는 서발턴인 “토착정보원”의 의식 경계의 하부에서 일어나는 불연속적 부상을 추적한다. 이것은 “제3세계 문학” 이미지, 말하기, 글쓰기를 통해 표현되는 비유가 아니다. 토착정보원이 불가능한 관점으로부터 스스로를 치환시켜 초강력-착취된 대상들뿐만 아니라 저항적 네트워크들을 향하게 되는 경위가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 텍스트 짜기라는 문제틀은 하나의 종결부를 포함하는 것 같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 사슬이 종종 잘려나간다. 하지만 잘려 나간 실오라기들이 다시금 등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 책은 페미니즘 책이다. 페미니즘적 논점들은 1장에서 “미리 부상한다”. 이 논점들이 나머지 장들의 실체를 이룬다. 4장에서는 우리 시대 문화주의적 보편주의 페미니즘이 비판된다.
이 책은 벨 훅스(bell hooks), 데니즈 칸디요티(Deniz Kandiyoti), 케투 카트락(Ketu Katrak), 와흐니마 루비아노(Wahneema Lubiano), 트린 티 민하(Trin-ti Minh-ha),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 아이와 옹(Aiwa Ong), 사라 술레리(Sara Suleri)의 작품들이 놓일 서가에 같이 꽂힐 만하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이 여성들과 또한 여기서 이름이 거론되지 못한 다른 여성들이 포스트식민 페미니즘 연구를 크게 진척시켰다. 술레리와 나는 주류 텍스트들에 더 많이 집중하는 편이다. 앞에 언급된 학자들의 작업과 나의 작업 사이에 있을 인정되지 않은 유사성은 우리가 공동 투쟁 속에 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나는 조직된 저항으로부터 어떤 서발턴들이 전략적으로 배제되는가를 탐색하고자 할 때에도 주류 텍스트들에 더 많이 집중한다. 우리가 서식하는(inhabit) 페미니즘은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것의 전통에 적대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어떤 관계 같은 것을 맺기 마련이다. 찬드라 모한티는 최근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세와(SEWA, Self-Employed Women’s Association)에 관해 유려한 구절을 펼쳐주고 있다. 남성지도자들은 당시 젊은 변호사였던 엘라 바트(Ella Bhatt)에게 “그[인도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자들을 고용할 사람들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조직하려고 하는가?”하고 거듭 훈계하였다. 그런데도 바트는 “자기 고용”이라는 범주를 탄생시켰으며, 그녀의 혁명적 기획에서 첫 움직임으로 은행을 세우기 위해 여자들에게 돈을 조금씩이나마 모으라고 권유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여자들은 조직된 노동운동으로부터 전략적으로 배제된 채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WWB의 니콜라 아르마트로드(Nicola Armatrod)가 WWB(세계여성은행)가 어떤 사회적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세와를 거듭 인용하면서 세와의 “찬드라 벤”이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는, WWB가 그들의 후원자! 라는 소리를 나는 오늘 듣는다. 세상을 읽는 문학적 습관을 길러온 사람은 공모성을 불편함으로 감지하지 않아야만 그러한 초강국 승리주의를 제어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식민 이성의 생산구조들을 점검하는 나의 책은 하나의 “비판”이다.
가장 깨끗한 건강 청구서가 없더라도 마냥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없다면 우리는 두 가지 문제 사이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쪽에는 모방과 위장을 통한 상층으로의 계급 유동성을 직접적인 저항이라고 정교하게 논의하며 지지하는 이론들이, 다른 한쪽에는 “서구가, 특히 미국이 제3세계의 수사학을 기꺼이 관용하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 인정하지” 못하는 실패가 가로놓여 있다. 문학작품 읽기를 가르치는 선생의 과제는 학생과 선생이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from)에서 ‘~로의 자유’(freedom-to)로 왕복할 때, 미국의 계급적 권력의지를 직접적인 저항이라고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러한 의지를 비강제적으로 재배치하는 아포리아에다 놓는 것이다.
아이자즈 아마드(Aijaz Ahmad)와 나는 메트로폴리탄 포스트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내 입장이 덜 지역주의적이기를, 공모성을 생산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더 많은 뉘앙스를 지니기를 바란다. 나는 항상 구석 주변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듯 자신을 보고자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업을 덜 배타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해체로부터 계속해서 배우는 바는 좀 특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견제하는 고삐로 남는다.
나는 상호학제적일 정도로 충분히 박학하지는 못하지만 규칙들을 깨뜨릴 수는 있다. 규칙 깨뜨리기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의 앞 세 장을 갖고 강의실에서 강의할 때 그것을 읽어내느라고 고생한 나의 두 학생 제니 샤프(Jenny Sharpe)와 트레스 파일(Tres Pyle)에게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 4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게 다른 배움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마하스웨타디(Mahaswetadi), 파리다(Farida), 파라드(Farhad)에게 감사한다.
--- 저자 서문
 

출판사 리뷰

1장은 3절로 되어 있는데 각기 칸트, 헤겔, 맑스를 통해서 토착정보원의 형상을 추적한다. 토착정보원이라는 용어는 원래 서구 식민주의 팽창과 더불어 전개된 인류학, 특히 인종문화기술학(ethnography)에서 나온 것이다. 토착정보원은 문자 그대로 ‘인류학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다. 토착정보원은 서구인에게 식민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므로 서구 지식의 원천이면서 또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토착정보원은 “유일하게 서구만이 각인할 수 있는 문화정체성에 관한 텍스트들을 발생시키면서도 하나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 스피박은 칸트, 헤겔, 맑스에게서 언급되면서도 사라지고 마는 토착정보원을 각기 ‘날 것의 인간,’ 인도,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잡고 1장의 논의를 펼친다.
자신의 칸트 읽기를 치밀하게 의도된 ‘오독’이라 부르는 스피박은 칸트를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명과 연결하여 논의한다. 즉, 칸트의 체계에서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서는 화해불가능한 모순이 나타나는데 칸트는 이 모순을 ‘숭고’라는 미학적 개념을 통해서 돌파하려 한다는 것이다. 숭고 분석에서 칸트는 인간의 합리적 역능 중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문화를 꼽는다. 미학적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문명화되고 교육받은 (남성)인간이라는 것이다. 합리적 의지의 자유를 위해서 칸트에게서 요구되면서도 폐제된 토착정보원은 본성상 교육되기 어려운 ‘날 것의 인간’인 여성과 야만인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날 것의 인간’으로 기술된 토착정보원은 유럽의 문명화 사명을 정당화하는 서사를 발생시키는 필수적인 자리로 기능한다. 스피박이 보기에, 칸트의 철학은 자유에 대한 도덕적 정의와 숭고 개념 사이의 불확정적인 (비)장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함으로써 확립된다. 칸트의 텍스트에서 뉴홀랜드인들이나 푸에고인들은 유럽인의 존재 목적을 밝히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선주민(Aboriginal; 식민지인을 폄하하는 의미가 묻어 있는 ‘원주민’이라는 용어를 대신해 원래부터 살았던 주민을 가리키는 용어임) 주체들은 인간 주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은근슬쩍 처리된다. 스피박은 칸트의 도덕적 주체를 구성하는 지정학적 결정항들을 밝히는 가운데 뉴홀랜드인들과 푸에고인들은 칸트의 철학에 부차적이면서도 칸트적 주체를 확립하는 대리보충적 기능을 담당한 다음 폐제된다고 논의한다. 데리다의 ‘파레르곤’이라는 용어를 빌려오자면, 칸트 철학에 ‘부차적인’ 이들의 ‘폐제’를 가시화한다면 칸트 철학의 고유한 내적 구조는 바로 이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1장 2절에서는 『미학』에서 말한 (서구) 절대정신의 목적론적 움직임의 특정 단계를 정당화하는 데 힌두 고전 『기타』를 활용하는 헤겔이 검토된다. 스피박은 그 과정에 주시하는 가운데 인도의 토착 민족주의 및 헤겔의 논의가 제국주의 공리계와 맺는 공모관계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헤겔이 『기타』를 역사적 단계에 이르지 못한 텍스트로 본 것과 같은 논리에서, 인도 민족주의자들에게 『기타』는 “아직-역사적이지-않은” 것이 아니라 인도 국가 형성을 위해서 “초강력-역사적인 무시간적 핵심을 지니”는 원천으로 떠받들어졌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장 3절에서는 맑스의 생산양식 서사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역사 이전의 영역, 그래서 이론화되지 못한 영역으로 기술된다. 스피박은 최근의 UN 회담들을 거론하면서,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에 재각인되고 있는 토착정보원의 시각은 계속 폐제되어 왔다는 점 또한 통렬히 예증한다. 그러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드러나는 맑스주의 이론의 부정합성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것이 스피박의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스피박은 맑스가 말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생산양식 서사에 정합적으로 맞아 들어가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대타성(alterity)으로 읽어내면서, 이러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맑스주의적 서사에 제기하는 윤리의 문제를 강조하고자 한다(이런 대타성의 핵심에 있는 빈곤국의 사회화된 [서발턴] 여성을 현재의 초국가적 문화연구에서 폐제되는 토착정보원으로 보는 논의는 4장에서 자세히 나온다).
스피박은 칸트(합리적 의지의 자유를 위해서), 헤겔(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가는 정신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맑스(생산양식 서사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에게서 요구되면서도 폐제된 토착정보원은 제3세계 피식민인이었음을 밝혀낸다. 그러면서 스피박은 필요하지만 폐제되어야 하는 바로 이러한 토착정보원의 관점에서 칸트, 헤겔, 맑스의 텍스트들을 다시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스피박의 읽기 전략인 폐제된 관점에서 읽기란 서구 제국주의의 담론적 공리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무엇보다 세계를 읽어내는 (담론)윤리를 재사유하게 한다. 칸트를 위시하여 유럽의 자기 재현물들이 발생되는 과정을 보면, 칸트의 뉴홀랜드인들이나 푸에고인들처럼 정보를 제공하며 지식의 원천이자 대상인 토착정보원들의 관점은 (불)가능한 관점이 된다. 스피박에게 토착정보원은 삭제의 필요성과 욕망을 보여주는 흔적 혹은 잔여물로 남으면서, 위대한 세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제시한 문화적 가치들이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호이자 그 과정을 다르게 비추어 줄 실마리로 작동한다.
서구의 위대한 텍스트들로부터 폐제된 토착정보원은 제3세계 출신으로 제1세계에 거주하면서 스스로를 서발턴화하는(self-subalternizing) 지식인들의 텍스트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폐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식민 이성의 문제다. 그렇다면 1장은 우리 시대의 다양한 담론들 및 포스트식민 연구에서도 스스로 토착정보원으로 행세하면서 스스로를 서발턴화함으로써 주어지는 담론적 권력을 챙기려는 경향은 없는지 우리에게 비판점 점검을 요청하는 셈이다.

2장은 정전에 속하든 대항정전에 속하든 문학 작품들 속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토착정보원의 형상을 “유럽중심적 오만 혹은 검토되지 않은 토착주의로 인한 이중구속”을 파헤친다는 맥락에서 다룬다. 3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에서는 샬롯 브론테, 진 리스, 메리 셸리, 마하스웨타 데비라는 네 명의 여성작가의 작품들을 제국주의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읽어냄으로써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제국주의와 맺는 관계를 밝혀낸다. 2절에서는 보들레르의 「백조」, 키플링의 「정복자 윌리엄」과 같은 남성주의 텍스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읽기가 갖는 문제를 짚어내며 3절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남성작가 코에체가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록사나』를 다시 쓴, 아주 복잡한 포스트식민 텍스트 『포우』를 마지막까지 길게 분석하고 있다. 거기서 문학 재현물들에 구축되어 있는 (불)가능한 관점을 읽어내는 (불)가능한 읽기를 실행하는 스피박의 최종 논의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2장 1절에서 스피박은 본연의 페미니즘으로 정전화된 『제인 에어』(1848)에 구현된 페미니즘적 개인주의를 그 역사적 결정항 속에 위치시키는 읽기를 작동시킴으로써 19세기 영국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얽혀 있는 제국주의를 밝혀낸다. 『제인 에어』의 서두에 나오는 칩거를 통한 ‘나’의 구축은 여성주체를 ‘개인’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자’로서 호명하는 것인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적 상상력 이데올로기의 작동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제인이라는 개인의 상상력은 로체스터와의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라는 성적 재생산으로 영토화된다. 이와 함께 『제인 에어』에서는 영혼형성이라는 제국주의 기획이 기독교 심리전기의 알레고리적 언어를 통해 공공연하게 구사되고 있다. 사실 이 두 영역 사이에는 서로 접근불가능한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브론테는 자메이카라는 식민지로부터 온 다락방에 감금된 미친 여자/아내 버사 메이슨을 백인 자매 제인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미친 동물로 만들어 희생시킴으로써 제국주의 공리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리스의 『드넓은 사가소 바다』(1966)는 『제인 에어』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주변 인물 버사를 중심으로 『제인 에어』를 다시 쓴 작품이다. 리스의 작품은 제국의 남성이 식민지(여성)와의 관계에서 주권성과 법률성을 남용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또한 영국제국주의와 자메이카 흑인 토착민 사이에 붙들린 백인 크레올 앙트와넷은 이제 제국의 자매를 위해 희생되는 제3세계 여성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앙트와넷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항변하거나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다. 자메이카 태생이 아니라 마르티니크 태생인 하녀 크리스토핀이 이름도 없는 백인 남자에게 그의 부당성을 항의하며 그의 협박에 “읽고 쓸 줄은 몰라도 나는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말로 응수한다. 그런데 크리스토핀은 이 대목 이후 아무 설명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로써 스피박은 이 작품을 유럽소설의 범위 안에 구속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스피박은 『제인 에어』와 달리 『프랑켄슈타인』(1817)에서는 제국의 페미니즘적 주체도, 식민지 여성 주체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젠더화하는 페미니즘적 읽기를 무리하게 수행하거나 식민지 여성주체를 찾아내려고 급급하기보다 영국의 문화 정체성 형성이라는 견지에서 다음 측면에 주시하자고 제안한다. 즉, 이 작품의 주된 충동은 (서구 기독교도) 남성이 주관한 18세기 유럽 담론을 철저히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유럽 남성의 자연철학(순수이성의 영국 판본)적 결단으로 창조된 ‘괴물’은 그냥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로써 괴물이 과연 스스로 불타죽는지 어떤지 불확실한 채로 끝남으로써 텍스트에 의해 억류되지 않는 ‘비포섭’을 무대화하는 결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월튼 선장이 북극으로 항해하던 중에 만난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듣게 된 괴물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자기 누이 마가렛에게 보내는 작품 구조를 보건대, 마가렛도 하나의 틀로서 이 텍스트를 닫는 데 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수신자로서 그 편지를 읽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이 열린 상태로 작품이 끝나기 때문이다.
마하스웨타 데비의 작품은 제국주의와 불연속적인 비포섭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에 거론된다. 벵골 여성 작가의 「프테로닥필, 퓨란 사하이, 피르타」(1994)는 프테로닥틸 신화와 아직 밀착되어 있는 인도 소수부족 문화와 삶의 환원불가능한 내적 이질성을 그려냄으로써, 시민권, 주권, 민주주의, 진보니 하는 서구의 계몽주의적 개념들은 현재 인도의 소수 부족민들의 삶과 역사를 기술하는 데 전혀 정합성을 갖지 못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 나오는 발전 서사에 저항하는 힌두 언론인 퓨란과 인도 소수부족 소년 비크히아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의 관점 속으로 전유될 수 없는 강력한 두 인물이다. 퓨란은 피르타 계곡을 거쳐 강바닥의 굴에 프테로닥틸(조상의 영혼)을 묻는 장례식을 치르는 부족 소년과 함께 하는 가운데 소수 부족민에 대한 서발턴적 책임에 입문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퓨란은 손을 들어 트럭에 올라탄다”는 작품의 마지막 대목이 시사하듯, 퓨란은 포스트식민 국가의 틀 안으로 귀속된다. 스피박이 이 작품을 유럽소설의 범위에 필연적으로 구속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범위를 외부로 확장하는 것은 코에체의 『포우』이므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2장 2절에서 스피박은 남성주의 텍스트의 남성주의를 비판하는 데 머무는 페미니즘적 읽기의 제국주의 공리계와의 연속성 혹은 공모성을 보들레르와 키플링 읽기를 통해서 예증한다. 보들레르의 시는 앤드로매쉬라는 백인여성을 찬양하면서 유럽시의 형제애의 고전적 연속성을 확립하는 데 그녀를 이용하는 동시에, “나는 검둥이 여자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검둥이 여자를 무시해버리는 흔한 구도를 보여준다. 신여성을 창조하면서 남성적 속성을, 남자주인공에게는 여성적 속성을 부여하는 키플링의 능글맞은 투는 여성폄하와 멸시를 담고 있으며 남인도 지방에 비해 더 영국적인 북서부 인도를 부각하면서 틀린 힌두 방언을 마구 구사하는 키플링의 어법을 봐도, 여성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남성주의를 강화하는 수사와 비유 자체에 이미 인종차별주의적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남성주의를 비유론적으로 해체한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거짓말하기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2장 3절에서 스피박은 “중국인, 인도인, 혹은 아프리카인의 기획을 자신 속에서 다시 꾸며낼 수 있다”라는 사르트르의 유럽중심적 오만함과 이것을 합법화할 수 있는 검토되지 않은 토착주의 둘 다를 문제삼는 열린 비판적 틀을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스피박은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the wholly other)을 주변으로 적극 형상화하는 재현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 18세기 초반 주변성을 형성하려 했던 두 영국 텍스트(『로빈슨 크루소』와 『록사나』)를 다시 열어제치는 『포우』(1987)를 논의한다. 『포우』는 자본의 이야기라기보다 제국과 젠더 이야기인데, 거기서 수전 바튼이라는 여성화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바튼은 그러한 그녀를 상상하는 포 씨(Mr. Foe)를 상상하는 허구적 인물이다. 데포의 수전 록사나와 달리 코에체의 수전 바튼은 소유적 개인주의적 야심을 지닌 여성이 아니다. 『포우』의 바튼은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갖고 어머니-딸의 하위플롯에 따라 저자되기-어머니되기의 축을 맴도는 타자지향적인 윤리의 행위자로 나온다. 어머니-딸의 이야기인 그녀가 썼다는 『난파당한 여성』과 자본주의와 식민지를 말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연속적인 공간을 차지할 수 없는데도 코에체는 그렇게 서사를 만들고 있다. 그 서사에서 수전은 포 씨에게 “안내하고 수정하는 것은 여전히 내 권한이에요. 무엇보다 보류하는 것 말이죠”라고 말한다.
또 하나의 주변으로서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길들여진 성공적인 식민주체의 원형과 달리, 석판을 달라는 크루소의 말을 듣지 않고 석판의 글씨를 보지 못하게 석판을 깨끗이 문지른다. 이것은 식민주의, 또 메트로폴리탄 반식민주의가 토착민에게 해대는 말해 보라는 명령을 보류하는 행위이다. 수전의 프라이데이는 순순히 “정보를 털어놓지 않으려는, 주변에 있는 신기한 보초”, “이상한 주변들을 가리키는 허구적 표시”이다. 이렇게 코에체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변화된 주변은 “인종적으로 차별화된 식민 타자들을 돕고자 하는 그녀[미국 학계의 엘리트 페미니스트 지식인]의 욕망이 하나의 문턱이자 한계”임을 상기한다. 그런데 정작 『포우』의 마지막 장면은 독자가 주체입장을 채우도록 무대화된다. 수전 버튼이 두 번째 난파를 당해 죽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극적인 주변화를 행하는 코에체의 소설은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 등장하는 것을 무대화한다”. 스피박은 이러한 코에체의 무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문학 본연의 특이성 혹은 입증불가능성이라고 하며, 이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결론은 허구와 사실의 이분법에 구속된 문학과 역사의 분과학문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영역들의 가로지르기를 꾀하면서도 각 영역의 특수성을 열어두려는 스피박의 태도에서 나온다.

3장은 「시르무르의 라니: 문서보관소 읽기에 관한 에세이」(1985)와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1988)를 1990년대 중?후반 맥락에 비추어 다시 쓴 글들로 되어 있다. 특히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가 10여 년간 일으켜 온 오해 및 뜨거운 논쟁들에 담겨 있는 쟁점들이 고찰되고 있다. 그 쟁점들은 크게 보면 권리와 자격을 박탈당한 서발턴 여성의 재현(representation)에서 불가피하게 부딪치는 대상화 문제, 제국주의의 유산으로서 역사적 재현에서 빠져 있거나 왜곡된 기록들을 복원하고 수정한다고 할 때 제기되는 문서보관소 자료연구의 방법론적 문제, 역사적 재현물에 깃들어 있는 제국주의적 인식소가 현재의 지식 및 주체생산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 등 세 가지로 정리된다. 서발턴 여성연구가 새로운 역사 쓰기를 시도할 때 부딪치는 이러한 쟁점들은 좀더 근본적으로는 결국 역사기술(historiography) 자체의 일반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스피박은 먼저 제국주의적이면서 객관성을 표방한 19세기 유럽의 헤게모니적 역사기술에서 ‘사실’의 저장소로 지목되었던 문서보관소의 자료들과 관련해 그것이 지닌다는 사실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결을 거슬러 읽는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공식기록이 말하기를 거절한 것을 되짚어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스피박은 시르무르의 여왕 라니가 식민무역 및 통치의 편의를 위한 “부족국가” 복원 계획 및 인도의 과부 순사(殉死) 제도인 사티(sati)와 관련하여 기록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문서보관소의 자료들을 통해서 추적되는 시르무르의 라니는 철저하게 영국의 영토적?경제적 이익과 관련되어서만 기록될 뿐이다. 스피박은 역사적 현실 역시 재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라니를 사티와 연결시킨 영국 제국주의를 스스로를 합법화하기 위해 식민지 여성을 자유롭게 해주는 척하면서 써먹는 과정을 밝혀낸다.
스피박은 라니에 이어 사티에 관해 길게 논의한 후, 사티에 덧붙여 검색되고 읽혀져야 할 자료를 남기고자 자신의 몸으로 글을 썼던 20세기 초반 인도독립운동 언저리에 있었던 부바네스와리를 사티 담론의 페미니즘적 재맥락화를 통해 다시 읽어낸다. 여기서 사티 담론이란 과부희생에서 “여자들이 정말로 죽고 싶어 했다”와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로부터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었다”는 두 진술을 둘러싸고 작동되는 제국주의 담론의 정치를 말한다. 실로 이 두 진술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서로를 합법화했다. 과부희생은 제국주의의 계몽담론에서 인권의 구실을 강조하는 데 필요한 기표가 되었고, 그리하여 사적 영역에 있던 과부희생이 공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즉, 과부희생에 관해 “여자들이 정말로 죽고 싶어 했다”는 말이 함의하는 성적 주체의 자유의지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그러한 의지를 실질적으로는 사라지게 하면서, 불타는 장작 위에서 생사람을 태워 죽이는 끔찍한 현장에 구원자로서 제국주의 남성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주체구성과 대상형성 사이에서 여성의 모습은 본래의 무가 아니라 격렬한 진동 속으로,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 사로잡힌 ‘제3세계 여성’이라는 잘못된 형상화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즉, 중요하지만 말소되어야 하는 토착정보원의 주체입장 또한 지정학적 이해관계, 젠더, 인종에 따라 역사적으로 각인되는 동시에 지워지고 만다.
사티 담론에서 폐제된 토착정보원의 주체입장은 재현이 갖는 대표와 묘사라는 두 층위 사이의 공모적 불연속성 문제와 연관된다. 스피박은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에서 억압받는 주변부 사람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면서 지식인의 재현책임을 면하려 하거나 주변부 사람들만이 그들의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고 대표할 수 있다는 논리는 부지불식간에 제국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 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에 공모한다는 점을 이미 낱낱이 분석하고 비판한 바 있다. 1988년의 “(젠더화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스피박의 단언은 자본과 제국의 신식민적 재배치 속에서 서발턴이 더욱 침묵하게 되는 맥락을 보건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진의는 재현에 깔려 있는 이해관계를, 전 지구적 자본 재배치하에 있는 이론가의 정치적 입장을 이 야기하는 지식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주권적 주체를 가장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이론가들(푸코와 들뢰즈)조차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국제적 노동분업에서 제1세계의 특권적 지식인이라는 물질적?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이제 서발턴들이 말할 수 있다고 그들에게 시혜적으로 주체성을 부여하면서 자신들은 슬그머니 빠져 버리는 것은 아직 ‘주체’도 아니고, 상징 자본도 없는 서발턴들을 더욱 깊은 침묵 속에 밀어 넣는 데 일조한다.
스피박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다시 읽는 것도 거기서 이미 맑스가 정치경제에서의 대표와 주체 이론에서의 묘사 사이의 공모적 불연속성을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스피박은 맑스의 “흩어지고 전위된 계급 주체의 구조적 원리”야말로 대표와 묘사 사이의 불연속성을 사고하게 해준다고 본다. 『브뤼메르』에서 맑스가 제기하는 질문은, 왜 프랑스 소자작농들이 계급의식으로 냉정하게 보면 절대로 자기들을 대변해줄 사람이 아닌 루이 나폴레옹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삼아야 했던가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맑스가 인정해야 했던 것은 먼저 그들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정치적 대변자는 계급주체에 상정될 수 있는 변혁적 계급의식과 그러한 계급으로 형성되지 못한 혹은 형성 중인 일단의 집단이 추구하는 이해관계 사이의 괴리를 각인한다. 루이 나폴레옹이 소자작농들의 대표자로 낙점된 사건은 특정 집단의 계급주체가 추구할 의식내용과 그 정치적 대표 사이에 있는 불일치와 모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스피박은 묘사와 대표가 동일선상에 있는 것처럼 얼버무릴 게 아니라, 묘사와 대표 사이의 상관적이고도 은폐적인 공모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스피박이 보기에 그 공모적 불연속성의 핵심에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있고, 그것은 젠더 및 인종과 또한 얽혀 있다.
이러한 1980년대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그것을 수정?확대하는 스피박의 면모는 1990년대 맥락을 선점하는 전 지구적 자본이 북과 남의 여성들의 삶에 각기 달리 초래하는 파장을 어떤 지평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를 페미니즘적 역사기술의 주요한 사안으로 제시하는 데서 나타난다. 스피박은 페미니즘적 역사기술이 식민담론 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연구의 지평을 현재의 전 지구적 금용 자본주의의 식민화 문제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식민담론 연구가 피식민지인의 재현이나 식민지 문제에만 집중할 때 식민주의/제국주의를 과거 속에 안전하게 놓고/거나 그러한 과거로부터 우리의 현재에 이르는 연속적인 선을 시사함으로써 현재의 신식민적 지식생산을 때로 도와줄 수 있다”. 현재의 신식민적 지식생산 구도는 더욱 교묘하게 제국주의 공리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현재의 전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 속에서 발전 속의 여성 대신 쓰이고 있는 젠더와 발전이라는 수사를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는데, 이는 4장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다.

4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대한 긴 설명으로 시작되는데, 사라져가는 현재의 역사를 ‘문화’라는 코드명으로 살펴보고 있다. 스피박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를 엄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임슨은 이 둘을 융합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을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의 지배류로 생산하는 서사를 구사한 것이다. 제임슨의 이러한 태도의 근간에는 포스트모던 문화현상을 도덕적 엄숙주의로 대하는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제임슨은 맑스에게서 받아들일 것은 자본주의를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태도라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제임슨의 이러한 주장을 환원된 맑스 읽기, “맑스주의를 권력분석으로 중화하는 읽기”라고 하면서 그러한 방식은 포스트모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 관리용이자 제3세계의 폐제를 은폐하는 데 봉사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자는 논리가 어느덧 내부의 위기관리를 위해 제국주의적 공리계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럴먼의 시를 분석하면서 미국 메트로폴리스 내부의 차이나타운과 본토 중국을 아무 생각 없이 동일시하는 피럴먼의 작품 세계를 포스트모던한 것이라고 읽어내는 제임슨에게서 잘 드러난다. 제임슨은 피럴먼과 마찬가지로 중국어의 풍부한 의미화 실천을 삭제하고 전유한다. 일본이라는 대상을 ‘타자’로, ‘차이’로 구성하는 바르트도 자신의 주체 입장이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지정학적으로 차별화되는 주체임을 자각하지 않는 시혜적인 오만함 속에서 일본에 관심을 갖는다. 이렇게 구성되는 미국 포스트모던 문화의 맥락은 페미니즘에도 어김없이 관철된다. 스피박은 그 단적인 예로 일본 출신이면서 뉴욕에서 성공한 포스트모던 패션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의 경우를 들고 있다. 특정 지리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구가하는 그녀가 디자인한 아주 비싼 일본 풍 옷들은 전 지구적 혼종적 하이테크 주체들이나 사 입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 미국이 선호하는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레이 같은 다국적 부르주아 개인주의 페미니스트가 부상하는 것은 다른 여성들을 사라지도록 할 뿐이다. 레이가 표방하고 포스트모던 문화이론가들이 옹호하는 기치들 속에서 작동하는 제국주의 공리들로 말미암아 결국 토착정보원(일본인 노동자, 차이나타운의 노동자, 중국 노동자)의 시각은 철저하게 변조된다는 것이 4장 중간까지 펼쳐지는 스피박의 주요 논지다.
1990년대 이후 미국 포스트모던 문화연구를 미국 메트로폴리탄 에스닉 문화연구, 급진적 메트로폴리탄 다문화주의적 연구, 미국 학계의 문화적 혹은 엘리트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로 집결되게 하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이 4장 후반부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 스피박은 자신도 몸담고 있는 미국학계를 감염시키고 있는 “자비로운 제3세계주의적 문화연구 충동”을 지식생산을 통한 위기관리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이 충동은 향수어린 토착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편승하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으로 변한 식민주체들 속에서 둥지를 틀고 승리에 도취하는 혼종주의와 야합한다. 신생 독립국가들에서의 토착 엘리트들이 신식민주의를 주도하는 미국의 자기재현(탈식민화, 민주화, 근대화, 발전의 수호자라는)을 지지하는 역할 속으로 흡수되는 과정이 바로 그 배경을 이룬다. 소위 발전 서사가 미국의 사명에 알리바이를 제공함으로써 착취를 일삼는 새로운 제국주의에 토착엘리트들도 공모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위대한 발전 서사의 자금을 지원하고 협조체계를 만드는 대리인들로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적 기구들뿐만 아니라 생태론적 통찰을 전유한 ‘지속가능한 발전’ 논리, “인종차별주의적 온정주의 혹은 자매주의라는 전 지구적 발전 이데올로기”를 지적한다. 이렇게 강력한 물적?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포스트식민 정보원은 탈식민화된 국가 내부의 억압받는 소수자들보다 메트로폴리스 공간에 있는 다른 인종적?에스닉 소수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인종적 하층계급과 서발턴적 남을 어둠 속으로 물러나게 한다. 스피박은 바로 이 점을 가장 문제시한다. 새로운 이민자로서 메트로폴리탄 공간을 점점 더 많이 채우고 있는 이들은 계급 상승 유동성을 ‘저항’이라고 서술하면서 ‘새로운 제3세계’라는 시뮬레이션 효과를 냄으로써 전 지구화에 대항하는 투쟁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피박은 미국문화연구 진영에서 말하는 ‘문화’도 발전을 위한 알리바이, 전 지구의 금융화에 유리한 알리바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초국가적 지평에서 문화연구를 제대로 하는 데 필요한 초국가적 지식능력을 강조한다. 이것은 남의 민족주의, 북의 복지국가라는 식으로 재편되는 초국가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면서 ‘문화적인 것이 갖는 환원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어떤 동일성에 영원히 붙잡힌 채 남아 있기보다 대타성을 환기하는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작업”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은 4장의 마지막에 제시되는 예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런던 이주민 공동체의 연대지상주의(solidaritarianism)에 깃들어 있는 성차별주의가 비판적으로 검토되는 가운데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가내노동을 하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수천 명의 재택근무 여성노동자들과, 방글라데시의 의류사업장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미숙련 여성노동자들에게 몰아닥치는 이상한 경쟁관계와 방글라데시 아동노동문제이다. 이렇게 하여 4장에서 언급된 포스트모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 텍스트들은 메트로폴리탄 이주 여성노동자들과 방글라데시 토착 여성/아동 노동자들의 실제 직물 짜기(textile)와 연결된다.
스피박이 말하는 사라져가는 현재란 전 지구의 금융화가 포스트식민 주체를 새로운 이민자로 만들어내는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현재이다. 그러한 현재 속에서 스스로 서발턴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담론 권력을 챙기려 드는 엘리트 포스트식민적 문화연구로 인해 가장 음지로 사라지는 것은 남의 토착 여성노동자들의 초과착취 노동현실이다. 스피박은 초국가적 지평 속에서의 바로 이 현실을 사라지지 않게 붙들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고 가르치며 행동할 때 잠정적이지만 분명히 더 나은 대안이 부상될 수 있다고 본다.
 

추천평

이 책은 정점에 이른 스피박을, 우리를 매혹 시키고 격앙시키는 강력한 스피박을 보여준다.
파르타 차테르지, 「민족과 그 파편들」의 저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이 책에서 '식민담론연구'로부터 '초국가적 문화연구'로 진전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횃불을 들고 얽혀 있는 미로를 헤쳐나가며 놀라운 발전을 이룬다.
사스키아 사센, 『전 지구화와 그 불만들』의 저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국제적 틀에서 부상하는 행위자들의 지역적 세부사항들을 환기시키는 데에 놀라운 복잡성과 솜씨를 보여준다. 텍스트들에 대한 그녀의 비상한 관심, 그리고 전 지구적 권력의 범위를 추적해 내는 능력은 그녀를 우리 시대의 견줄 데 없는 지식인들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심리적 삶』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