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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울 서신은 성경 본문을 바로 읽고 해석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구약이 인용되고 있는 신약 본문의 문맥을 읽어가는 일, 인요되는 구약 구절의 문학적 문맥에 대한 이해, 그리고 구약인용구절이 신약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줌으로써 성경 본문의 바른 해석의 방법들을 잘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 이 주석서들은 구약 구절의 인용 이면에 놓여 있는 신약 저자들의 성경-신학적 관점을 잘 드러내 줌으로써 이 주석서의 독자들이 성경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의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와 훌륭한 장을 제공한다.
목차
추천사 송영목박사
추천사 류호영박사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
약어표
서론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추천사 류호영박사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
약어표
서론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책 속으로
“주”가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은 바울이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이 메시아 예언이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다. 제웟(Jewett 1971: 377)은 “2:16a의 “주”에서 2:16b의 “그리스도”로 표현에 변화를 줌으로써 참된 신적 지혜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결한다”고 덧붙인다. 성령은 무에서 지혜를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과 십자가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nothing)에 관한 사고에 의해 경험되지 않는다. 도리어 바울이 고린도전서 1:18-2:5에서 고린도교회 내의 분열을 직면하면 서 한 것처럼, 십자가로 항상 돌이키는 영적인 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2:8).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런 행동에 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 p. 83
(5)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창세기 2:24의 사용
고린도전서 6:16-17에서 창세기 2:24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114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4) 마태복음 19:5 에베소서 5:31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후자의 두 가지 예는 각각 그 자체로 이혼과 결혼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지만, 고린도전서 6장은 음행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 모두는 결혼에 의해 만들어진 고귀한 결합의 개념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인용은 세 가지 기능을 한다. --- p.114
(3) 초기 유대주의에서 출애굽기 32:6
금송아지 대실패는 유대주의 사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Childs 1974: 573-81).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7:39-43에 서 이스라엘의 강퍅한 심령과 우상숭배의 예로서 다시 언급된다. 필로는 이 사건을 몇 번 언급한다(Moses 2.161-162, 270 Drunkenness 95 Spec. Laws 1.79).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참조, Ant. 3.99). 이것은 아무 것도 생략하지 않기로 한 그의 약속에 대한 “가장 명백한 예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Thackeray 1930: 363). 이 이야기는 성경 고대사(L. A. B.) 12에서 다시 말해진다. 토셉타 소타(t. So†ah) 3:10에서 먹고 마심에 대한 집중은 이스라엘에 대한 교만함, 자기에 게 몰두한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토셉타 소타 6:6에서 출애굽기 32:6의 “뛰놀더라”에 대한 명확한 우상숭배적 언급은 비슷한 방식으로 창세기 21:9에서 이스마엘의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상숭배에 대한 유대주의 사상의 역사에 제거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우상숭배의 원형적 행동으로서 기능한다(Hafemann1995: 279-81). --- p.144
실제로 골로새서 1:12-14에서 (역사적) 출애굽과 (예언적) 두 번째 출애굽 자료들의 결합이 나타난다. 왜냐하
면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빛과 흑암”의 결합은 이사야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출 19:6 23:22 70인역과 사 42:6-7, 12, 16 43:20-21을 결합하는 벧전 2:9이 하는 것처럼). 바울은 이사야의 두 번째 출애굽 예언들을 자신이 그것들을 인지할 정도로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두 번째 출애굽 예언들이 바울에 의해 명확하게 사용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독자들의 구원에 대한 그의 묘사에 영감을 주며, 그는 그의 생각에 자극을 주는 그러한 예언들과의 결합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 p. 456
주 예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바울의 선교(살전 215-16a)에 대한 유대주의 억압의 이 긴 역사는 논리적 결론을 가진다.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에이스 토 아나플레로사이 아우톤 타스 하마르티아스 판토테〈eis to
anapl??ai aut? tas hamartias pantote〉). 바울은 여기서 후기 유대주의 작품들에서 또한 발전된 구약의 주제를 사용한다. 즉 죄의 정해진 양이 채워진 그 후에 심판이 온다는 것이다. 동사 아나플레로오(anapl?ro?)
는 그릇 혹은 컵이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묘사하며, 그것이 완전하게 채워졌을 때 심판이 발생한다. 동일한 동사는 70인역 창세기 15:16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관영치 아니하였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람의 죄의 충만하게 채워짐”의 이 주제는 다니엘 8:23 솔로몬의 지혜서(Wisdoms of Solomon) 516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4) 19:4 마카비 2서(2 Maccabees) 6:4에 또한 나타난다.--- p.515
(5)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창세기 2:24의 사용
고린도전서 6:16-17에서 창세기 2:24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114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4) 마태복음 19:5 에베소서 5:31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후자의 두 가지 예는 각각 그 자체로 이혼과 결혼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지만, 고린도전서 6장은 음행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 모두는 결혼에 의해 만들어진 고귀한 결합의 개념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인용은 세 가지 기능을 한다. --- p.114
(3) 초기 유대주의에서 출애굽기 32:6
금송아지 대실패는 유대주의 사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Childs 1974: 573-81).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7:39-43에 서 이스라엘의 강퍅한 심령과 우상숭배의 예로서 다시 언급된다. 필로는 이 사건을 몇 번 언급한다(Moses 2.161-162, 270 Drunkenness 95 Spec. Laws 1.79).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참조, Ant. 3.99). 이것은 아무 것도 생략하지 않기로 한 그의 약속에 대한 “가장 명백한 예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Thackeray 1930: 363). 이 이야기는 성경 고대사(L. A. B.) 12에서 다시 말해진다. 토셉타 소타(t. So†ah) 3:10에서 먹고 마심에 대한 집중은 이스라엘에 대한 교만함, 자기에 게 몰두한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토셉타 소타 6:6에서 출애굽기 32:6의 “뛰놀더라”에 대한 명확한 우상숭배적 언급은 비슷한 방식으로 창세기 21:9에서 이스마엘의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상숭배에 대한 유대주의 사상의 역사에 제거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우상숭배의 원형적 행동으로서 기능한다(Hafemann1995: 279-81). --- p.144
실제로 골로새서 1:12-14에서 (역사적) 출애굽과 (예언적) 두 번째 출애굽 자료들의 결합이 나타난다. 왜냐하
면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빛과 흑암”의 결합은 이사야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출 19:6 23:22 70인역과 사 42:6-7, 12, 16 43:20-21을 결합하는 벧전 2:9이 하는 것처럼). 바울은 이사야의 두 번째 출애굽 예언들을 자신이 그것들을 인지할 정도로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두 번째 출애굽 예언들이 바울에 의해 명확하게 사용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독자들의 구원에 대한 그의 묘사에 영감을 주며, 그는 그의 생각에 자극을 주는 그러한 예언들과의 결합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 p. 456
주 예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바울의 선교(살전 215-16a)에 대한 유대주의 억압의 이 긴 역사는 논리적 결론을 가진다.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에이스 토 아나플레로사이 아우톤 타스 하마르티아스 판토테〈eis to
anapl??ai aut? tas hamartias pantote〉). 바울은 여기서 후기 유대주의 작품들에서 또한 발전된 구약의 주제를 사용한다. 즉 죄의 정해진 양이 채워진 그 후에 심판이 온다는 것이다. 동사 아나플레로오(anapl?ro?)
는 그릇 혹은 컵이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묘사하며, 그것이 완전하게 채워졌을 때 심판이 발생한다. 동일한 동사는 70인역 창세기 15:16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관영치 아니하였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람의 죄의 충만하게 채워짐”의 이 주제는 다니엘 8:23 솔로몬의 지혜서(Wisdoms of Solomon) 516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4) 19:4 마카비 2서(2 Maccabees) 6:4에 또한 나타난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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