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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는 20세기 전후에 태동한 사회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회학자 15명에 대한 책이다. 사회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콩트, 사회적 계급관계를 말한 마르크스, 사회학의 대부 베버, 아노미 개념을 제시한 뒤르켐부터 짐멜, 쿨리, 미드, 스펜서, 파크, 파레토, 베블런, 만하임, 소로킨, 즈나니에츠키, 토머스까지를 사상, 개인적 배경, 지적 배경, 사회적 배경 순으로 다룬다.
“학자는 시대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러셀의 말대로, 학자는 지식의 상아탑에 갇힌 독거노인이 아니다.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그 한가운데를 살아간 사람들이다. 사상은 이들의 경험에서 만들어진다. 이 책은 단순한 사회학이론서가 아니다.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학자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주목하여 사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학자 개인의 삶과 시대적 흐름, ‘사회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사회학에 대한 사회학인 것이다.
“학자는 시대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러셀의 말대로, 학자는 지식의 상아탑에 갇힌 독거노인이 아니다.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그 한가운데를 살아간 사람들이다. 사상은 이들의 경험에서 만들어진다. 이 책은 단순한 사회학이론서가 아니다.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학자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주목하여 사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학자 개인의 삶과 시대적 흐름, ‘사회적 관점’으로 설명한다. 사회학에 대한 사회학인 것이다.
출판사 리뷰
사회적 존재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한다
유럽에서 부르키니 논란이 한창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유럽의 대립이 부르키니 논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조금 더 파고들어가 보자. 유럽이 지향하는 것은 톨레랑스(관용)로, 그 핵심은 ‘자유’다. ‘세상과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 톨레랑스다. 부르키니는 이 자유를 억압한다.
그런데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은 정말로 ‘억지로’ 입은 것일까? 자유의 전제 조건은 인간이 ‘세상과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개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과 독립된 존재, ‘개인적 존재’인가? 우리는 한국식 아파트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한다. 우리는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식으로 사고했을 뿐이다.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도 그렇다. 그들은 이슬람식으로 사고했을 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사고의 틀 안에 있기에, 세상과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이 ‘억지로’ 입은 것인지, 본인이 ‘선택해서’ 입은 것인지를 알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소속될 수밖에 없는 틀, ‘사회’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고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사회적 존재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생각으로
혁명의 시대를 살다
쿨리의 거울자아이론을 보자. 자아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형성된다는 것은 쿨리 자신의 이야기다. 소심한 성격의 쿨리는 최고법원판사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에게서 소외된 채 자랐다. 그는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이 강했지만 타고난 성격 탓에 그러지 못했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거울자아’ 속에서 아버지처럼 성공한 인물이 된 것이다.
학자 개인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결된다. 산업혁명, 프랑스대혁명으로 시대상이 급변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한계가 19~2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존의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하는데, ‘과학적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신학적 상태에서 인간정신은 존재의 근원과 모든 결과의 제1원인 또는 궁극원인을 찾고 있었고,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직접적 행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다”(32쪽). 그러나 “뉴턴의 연구 이래로 자연과학자들은 제1원인 또는 궁극원인에 대한 쓸모없는 탐구를 포기하고 법칙, ‘속성과 유사성의 불변적 관계’의 연구를 수행하는 설명도식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과학은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적당히 결합된 추론과 관찰’을 강조했고, 모든 과학적 이론은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다”(27쪽).
이러한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콩트는 애초에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지만, 사회통계학자 케틀레에게 도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결합한 ‘사회학’(Sociolog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사회학을 선두에서 이끈 학자는 베버다. 사회학은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중하다. 그는 ‘가치중립’의 개념을 통해 사회학, 나아가 탈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추구하는 것을 제시한다.
‘가치중립’이란, 학자가 자신의 가치에 입각하여 문제를 선택한 후에는 자신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자료가 나타내는 것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326쪽). 학자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현자가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에 학자가 답을 한다면, 이는 광신적 종파를 만들어내는 학문적 예언”(328쪽)에 불과하다. “진리는 진리”(353쪽)이기에, “학자는 ‘무엇이 어떠한가’에 관심을 가져야지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381쪽). “가치판단을 과학적으로 검토하면 그 속에 깔려 있는 목표나 이상을 이해하고 적절히 분석할 수 있지만,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다. 그것은 의지나 양심의 문제지 지식의 문제는 아니다”(327쪽).
베버는 ‘가치중립’을 자신의 삶에서도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대표단 자문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참여도 활발히 했는데,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 15명 모두 이러한 ‘가치중립’에 기반을 둔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라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했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마르크스는 계급론을, 뒤르켐은 사회통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연구했다. 이외에 콩트는 실증적 분석방법, 스펜서는 사회진화론, 쿨리는 거울자아이론을 제시했으며, 짐멜은 개인의 상호작용 형식에 주목했고, 베블런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했으며, 미드는 상징을 매개로 상호작용하여 형성되는 일반화된 타자 개념을 제시했다. 파크는 공간과 환경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사회학이론을 발전시켰고, 파레토는 인간행위에서 감정의 역할에 주목했으며, 만하임은 지식과 지식인의 문제를, 소로킨은 문화유형의 변동을 연구했다. 마지막으로 토머스와 즈나니에츠키는 공동저작인 『폴란드 농민』을 통해 개성의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했다.
사회학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하며 혁명의 시대를 이끌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20세기 초반의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는 ‘루터 신학의 발전단계’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여성을 위한 공장법’ ‘시카고의 쓰레기 문제’ 등의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다(544쪽). 바야흐로 “탈주술화의 세계”(베버)가 열린 것이다.
현대사회와
사회학
『사회사상사』에서 나타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본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함께 나타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이다. 사회학은 주체철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사상에서 벗어나 탈주체적 관점에 기반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푸코, 라캉, 바르트 등의 후기구조주의와 사회심리학, 사회생물학 등의 통섭이 그것이다. 이렇게 근대사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패러다임, ‘탈근대성’을 이끄는 사회학은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주요한 사고방식의 뿌리로 기능하고 있다.
다시 부르키니 이야기를 해보자. ‘세상과 독립된 존재’인 개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둔 자유는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오류다. 이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현자의 말은 될 수 있어도 학자의 말은 될 수 없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부르키니 논란의 시발점이 된 이슬람 극단주의와 유럽의 대립에서 그 원인을 자유주의의 한계에서 찾는다. 자유가 ‘세상과 독립된 존재’인 개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두었기에 나타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의 자유가 ‘사회적 자유’로 갱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키니를 입고 안 입고의 문제는 사회적 자유, 이슬람의 자유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한국식으로 사는 것처럼 이들 또한 이슬람식으로 살 권리가 있다. “사회적 존재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니깐.
우리의 의식을 결정한다
유럽에서 부르키니 논란이 한창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유럽의 대립이 부르키니 논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조금 더 파고들어가 보자. 유럽이 지향하는 것은 톨레랑스(관용)로, 그 핵심은 ‘자유’다. ‘세상과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 톨레랑스다. 부르키니는 이 자유를 억압한다.
그런데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은 정말로 ‘억지로’ 입은 것일까? 자유의 전제 조건은 인간이 ‘세상과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개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과 독립된 존재, ‘개인적 존재’인가? 우리는 한국식 아파트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한다. 우리는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식으로 사고했을 뿐이다.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도 그렇다. 그들은 이슬람식으로 사고했을 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사고의 틀 안에 있기에, 세상과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이 ‘억지로’ 입은 것인지, 본인이 ‘선택해서’ 입은 것인지를 알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소속될 수밖에 없는 틀, ‘사회’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고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사회적 존재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생각으로
혁명의 시대를 살다
쿨리의 거울자아이론을 보자. 자아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형성된다는 것은 쿨리 자신의 이야기다. 소심한 성격의 쿨리는 최고법원판사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에게서 소외된 채 자랐다. 그는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이 강했지만 타고난 성격 탓에 그러지 못했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거울자아’ 속에서 아버지처럼 성공한 인물이 된 것이다.
학자 개인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결된다. 산업혁명, 프랑스대혁명으로 시대상이 급변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한계가 19~2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존의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하는데, ‘과학적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신학적 상태에서 인간정신은 존재의 근원과 모든 결과의 제1원인 또는 궁극원인을 찾고 있었고,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직접적 행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다”(32쪽). 그러나 “뉴턴의 연구 이래로 자연과학자들은 제1원인 또는 궁극원인에 대한 쓸모없는 탐구를 포기하고 법칙, ‘속성과 유사성의 불변적 관계’의 연구를 수행하는 설명도식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과학은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적당히 결합된 추론과 관찰’을 강조했고, 모든 과학적 이론은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다”(27쪽).
이러한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콩트는 애초에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지만, 사회통계학자 케틀레에게 도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결합한 ‘사회학’(Sociolog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사회학을 선두에서 이끈 학자는 베버다. 사회학은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중하다. 그는 ‘가치중립’의 개념을 통해 사회학, 나아가 탈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추구하는 것을 제시한다.
‘가치중립’이란, 학자가 자신의 가치에 입각하여 문제를 선택한 후에는 자신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자료가 나타내는 것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326쪽). 학자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현자가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에 학자가 답을 한다면, 이는 광신적 종파를 만들어내는 학문적 예언”(328쪽)에 불과하다. “진리는 진리”(353쪽)이기에, “학자는 ‘무엇이 어떠한가’에 관심을 가져야지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381쪽). “가치판단을 과학적으로 검토하면 그 속에 깔려 있는 목표나 이상을 이해하고 적절히 분석할 수 있지만,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다. 그것은 의지나 양심의 문제지 지식의 문제는 아니다”(327쪽).
베버는 ‘가치중립’을 자신의 삶에서도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대표단 자문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참여도 활발히 했는데,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 15명 모두 이러한 ‘가치중립’에 기반을 둔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라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했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마르크스는 계급론을, 뒤르켐은 사회통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연구했다. 이외에 콩트는 실증적 분석방법, 스펜서는 사회진화론, 쿨리는 거울자아이론을 제시했으며, 짐멜은 개인의 상호작용 형식에 주목했고, 베블런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했으며, 미드는 상징을 매개로 상호작용하여 형성되는 일반화된 타자 개념을 제시했다. 파크는 공간과 환경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사회학이론을 발전시켰고, 파레토는 인간행위에서 감정의 역할에 주목했으며, 만하임은 지식과 지식인의 문제를, 소로킨은 문화유형의 변동을 연구했다. 마지막으로 토머스와 즈나니에츠키는 공동저작인 『폴란드 농민』을 통해 개성의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했다.
사회학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하며 혁명의 시대를 이끌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20세기 초반의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는 ‘루터 신학의 발전단계’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여성을 위한 공장법’ ‘시카고의 쓰레기 문제’ 등의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다(544쪽). 바야흐로 “탈주술화의 세계”(베버)가 열린 것이다.
현대사회와
사회학
『사회사상사』에서 나타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본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함께 나타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이다. 사회학은 주체철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사상에서 벗어나 탈주체적 관점에 기반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푸코, 라캉, 바르트 등의 후기구조주의와 사회심리학, 사회생물학 등의 통섭이 그것이다. 이렇게 근대사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패러다임, ‘탈근대성’을 이끄는 사회학은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주요한 사고방식의 뿌리로 기능하고 있다.
다시 부르키니 이야기를 해보자. ‘세상과 독립된 존재’인 개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둔 자유는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오류다. 이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현자의 말은 될 수 있어도 학자의 말은 될 수 없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부르키니 논란의 시발점이 된 이슬람 극단주의와 유럽의 대립에서 그 원인을 자유주의의 한계에서 찾는다. 자유가 ‘세상과 독립된 존재’인 개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두었기에 나타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의 자유가 ‘사회적 자유’로 갱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키니를 입고 안 입고의 문제는 사회적 자유, 이슬람의 자유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한국식으로 사는 것처럼 이들 또한 이슬람식으로 살 권리가 있다. “사회적 존재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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