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사회학 연구 (독서>책소개)/10.사회사상(사)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2023) - 다시 보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동방박사님 2024. 4. 10. 07:53
728x90

책소개

“애덤 스미스는 누구보다 널리 알려졌으나
그만큼 잘못 알려져 있다”

300년이 지나 신화가 된 사상가, 애덤 스미스
자유의 반석을 다진 조용한 혁명을 다시 읽다
어떻게 그의 사상은 사회·경제 이론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나

올해는 애덤 스미스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다. 『국부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자유와 경쟁을 세계의 지고한 이상으로 자리매김시켜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의 세계를 본다면 “후세가 만들어낸 낯선 자신”을 보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그가 그린 이상은 반쪽짜리로, 그마저 어설프게 실현돼버린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채 살아남은 반쪽은 그의 『국부론』이며 시간 속에서 유실된 반쪽은 『도덕감정론』이다. 그의 사상은 진보·보수, 좌파·우파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진영 논리로 덧칠한 신화가 됐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재조명이 유독 더뎌, 그를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자나 시장 만능주의자로 여기고 있다.

이 책은 스미스에 관한 오래된 신화를 탈색시킨다. 각기 다른 자유를 말하는 진영들이 이념의 전투를 벌일 때, 애덤 스미스는 양날의 칼이 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은유인 ‘보이지 않는 손’만 해도 그렇다. 정작 스미스가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단 세 번뿐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시장에 전부 맡기라는 자유방임의 철학이라 믿고, 다른 이는 특권과 독점을 폐기하고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라는 혁명 구호로 풀이한다. 이렇게 해석이 엇갈리는 와중에, 이 책은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려 하기보다 되도록 애덤 스미스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한다. 『국부론』의 빛에 가려 있었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를 다시 보고, 놀라울 만큼 평등주의적인 그의 생각을 바로 읽자는 것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경제지 기자로서 한국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서 비판적 탐색을 해왔다. 세계의 저명한 경제학자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을 만나왔고, 그들의 책을 꾸준히 번역했으며, 애덤 스미스 문제와 번역에도 천착해왔다. 그런 이력을 살려, 저자는 두 원전 텍스트를 재번역하여 상투적인 해석과 오랜 편견을 걷어낸다.

이 책은 스미스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사상이 수용되는 바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보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이야기의 서두는 강진의 바닷가에서 스미스와 정약용이 대화를 나누며 시작된다. 유럽은 청어잡이로 부를 쌓았는데, 조선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이렇게 스미스를 통해 300년 전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것을 넘어, 이 책엔 저자가 토마 피케티, 아마르티아 센과 같은 경제학자들과 진행한 인터뷰도 녹아들어가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와 같은 작가를 경유하여 자본주의와 자유, 공감의 문제를 짚기도 한다. 국내에서 스미스를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사례를 모아 부록에 담은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목차

프롤로그: 타임슬립, 300년의 대화

제1장 여왕의 스타킹
부국 클럽 | 비스킷 공장에서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제2장 조용한 혁명
무기가 된 애덤 스미스 | 지킬인가, 하이드인가? | 우리는 저마다 다른 자유를 말한다
제3장 내 마음속의 위대한 재판관
공감이란 무엇인가? | 가난한 집 아들 | 나는 사랑받을 만한가?
제4장 물고기의 정의를 원하는가?
플루트는 누가 가져야 할까? | 작은 물고기를 보라 | 먼 곳의 목소리
제5장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
마법의 손 | 거인들을 공격하다 | 거품 속에서
제6장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없다
빵집 주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 | 다시 사람을 보라
제7장 우리에게 모든 것을
대상속의 시대가 왔다 | 누가 애덤 스미스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합리화하나? | 막걸리 도둑의 미래
제8장 손목을 자르리라
2+2=1 | 감자칩과 반도체 칩 | 절인 청어 이야기 | 금이냐 황소냐
제9장 우리는 모두 상인이다
상업사회와 자본주의 | 체스판의 말처럼 | 혁신의 예언자
제10장 스미스 씨의 벌통
세상에서 가장 멍한 사람 | 당파와 광신 | 나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네

에필로그: 상상하라
행복은 판돈에 있지 않다 |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부록: 마술의 교과서

저자 소개

저 : 장경덕
작가 겸 번역가. 33년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자본주의 정글을 탐사하며 석학들을 두루 만났다. 매일경제신문 런던 특파원, 금융팀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증권 24시』 『부자클럽 유럽』 『정글노믹스』 『정글경제 특강』을 썼고,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21세기 자본』 『불평등을 넘어』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책 속으로

애덤 스미스는 현재의 역사다. 21세기 사람들은 21세기의 눈으로 그를 본다. 사람들은 흔히 그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는 누군가의 정치적 무기가 된다. 그를 자유방임과 시장근본주의의 원조로 예찬하는 이와 바로 그런 이유로 그를 공격하는 이 모두 그의 책에서 자신의 무기를 발견한다. 그의 사상은 양날의 칼이다. 잘 쓰이면 참으로 유용하나 잘못 쓰이면 매우 위험하다.
--- p.13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와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스미스라는 생각은 뿌리 깊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공감하는 인간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굳이 대립 항으로 놓고 볼 필요는 없다. 스미스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에서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때 도덕적 가치와 규범이 아예 필요 없다거나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 p.57

스미스가 말한 “단순하고 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체제”는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체제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체제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건설하고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체제다. 순수하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질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체제다. 자연적 자유의 체제는 누구든 무엇이든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스미스가 옹호한 시장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 p.73

애덤 스미스는 부 자체에 대한 도덕적 판결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빈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는 도덕적 타락임을 분명히 한다. 지혜롭고 덕 있는 이들이 받아야 할 존경과 찬사는 흔히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어리석고 악한 이들에게 향해야 할 경멸은 종종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돌아간다.
--- p.96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의 “가장 뻔뻔한 열정”에 대해 죽비를 내리칠 수 있는 존재다. (...) 그는 다른 이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자신의 최대 이익을 단념하는 것이 왜 적정한지, 자신의 최대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부정의가 왜 흉측한지 보여준다.
--- p.105

스미스는 “정의가 제거되면 인간사회의 거대한 구조물은 틀림없이 한순간에 무너져 가루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자유, 그리고 완전한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모든 계급에 최고 수준의 번영을 효과적으로 확보해주는 아주 단순한 비법”이라고 밝혔다. 이 두 문장만 보더라도 그가 정의의 가치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 p.116

애덤 스미스는 자유로운 시장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방임을 주창하며 정부의 역할을 무시했다고 보는 것은 오해다. 그는 자유방임을 믿지 않았다. 그런 말 자체를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주장한 중농주의를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했다.
--- p.150

스미스는 상업사회의 그늘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비열한 탐욕과 독점욕”을 누구보다 강도 높게 비판했다. 산업 현장에서 끊임없이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노동자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고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했다. 또 상업사회는 상무 정신을 감퇴시키고 “부자와 권력자를 거의 숭배하는” 풍조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소외시킬 것으로 봤다. 스미스 사후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낸 문제를 모두 그의 잘못된 교리 탓으로 돌리는 것은 터무니없다.
--- pp.260~261

그는 시장을 정치경제학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시장은 규범과 도덕을 초월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보라고 했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공감하고 상상하는 인간을.
--- p.309

출판사 리뷰

애덤 스미스 문제

애덤 스미스에 대한 해석은 특정 시간과 장소의 산물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스미스를 계승하면서도 그를 “엉터리 부르주아 경제학자”로 몰아가며, 그의 이론이 자본가계급을 보호하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20세기 중반 미국 자본주의 이론의 병참기지였던 시카고에서 애덤 스미스는 시장경제의 놀라운 비밀을 밝힌 영웅으로 격상된다. 인간의 행동을 분석할 때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유일하게 타당한 전제로 삼았으며, 정부의 ‘무거운 손’이 아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이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식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한 사람인데, 상반되는 두 주장의 근거로 그의 사상이 활용된 적도 있다. 1795년 영국에서 식량 가격이 급등하자 농업 노동자를 위한 최저임금법이 발의되었다. 이때 찬성 측은 ‘인구 전체를 먹이는 노동자는 그 생산물 중에서 몫을 갖는 것이 공평하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인용했다. 동시에 반대 측에서도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관한 원칙들이 제한 없이 작동’해야 한다며, 스미스의 말대로 거주 이동의 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스미스의 사상은 일관성이 결여된 것일까?

‘애덤 스미스 문제’라는 말이 있다. 그의 사상에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가령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복에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국부론』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고 했다.

저자는 스미스의 ‘공감하는 인간’과 ‘자기 이익을 좇는 인간’을 대립항으로 놓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시장이 자유롭고 공정하다면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으로 유익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시장이 공정하려면 신뢰와 공감과 정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은 ‘도와주는 손’의 존재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스미스의 한쪽 얼굴만 바라봤던 것이다.

스미스가 비판한 자유방임주의

이 책은 애덤 스미스를 편파적인 오해에서 구해내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부터 다시 파헤친다. 그가 말한 자유는 기본적으로 ‘자연적 자유’다. 특혜나 제한을 주는 모든 체제가 완전히 제거되면 자연적 자유가 확립된다. 이때 자기 처지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강한 원동력이 되어, 권력이나 법률의 개입 없이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준다. 다만 스미스는 여기에 “정의의 법률을 어기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자연적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은 철폐돼야 하지만, 모든 규제와 제도가 사라지면 사회는 개인들의 이익이 부딪치면서 붕괴될 것이다.

스미스 시대에 영국에서 지역 간 자유로운 이동을 금했던 것이 자연적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의 대표적인 예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일할 자유가 없다면 노동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고, 경제의 비효율성이 커지며 국가는 부유해질 수 없다. 농업인이 중간상의 역할을 겸하게 하거나 제조업자가 소매업을 겸하지 못하게 한 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자유로운 상거래를 막으면 상품이 원활히 흐를 수 없으며, 어리석은 법률과 행정이 특정 계층에게만 이익을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신뢰와 질서,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도입해야 하는 법률도 있다고 주장했다. 더 큰 자유를 위해 어떤 자유는 제한할 수 있다. 서민들이 마시는 맥주보다는 증류주에 세금을 더 많이 물려야 한다. 노동자보다 지주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건축물에 방화벽을 세우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낭비벽이 심한 사람과 투기꾼만 대출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자율 상한을 정해야 한다. 공공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공립학교를 세워야 한다. 이렇듯 그가 주창한 자유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야경국가 체제로는 수행할 수 없는, 부정의를 막고 이익의 충돌을 중재하는 적극적 개입에 기반한 자유였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은 오해의 극단을 보여준다. 자연적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고민과 갈등과 조정을 거쳐 추구해나가야 하는 이상이다.

빈자의 편에 선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가 이기심의 옹호자라는 해석은 또 하나의 단편적인 오해다. 오히려 그는 일생 동안 『도덕감정론』의 개정을 거듭하며 공감하는 인간상, 이타적인 인간상을 정립하려 애썼다. 이 책은 스미스의 도덕론을 세심하게 살피며 평등의 길을 모색한 도덕철학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는 노예해방선언보다 한 세기 앞서서 노예제를 비판했고,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해가 부딪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못 가진 자 편에 섰다.

그는 『도덕감정론』 첫머리에서 공감이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한다.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인간에게는 다른 이의 처지를 상상하고 거기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 다만 그 상상의 과정에서 내면의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 법정을 세운다. 이 재판관은 상황에 따라 타인이나 내 감정이 적정한지 그렇지 않은지 도덕적으로 승인한다. 이때 승인의 기준은 ‘효용’이나 ‘이득’이 아님을 애덤 스미스는 분명히 한다. 자기 이익을 좇는 마음은 경제활동을 추동하는 힘이지만, 그것이 도덕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 공정한 재판관의 판단 능력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한다.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거치며 점점 다듬어지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런 시각은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유용한 통찰을 던진다. 우리는 마음속의 재판관과 대화함으로써 더 정의롭게 행동할 수 있다. 더 낮은 목소리, 더 먼 곳의 목소리까지 듣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 판관의 눈, 즉 우리 내면의 눈을 통하여, 내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의가 왜 흉측한지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꿈꾼 것은 분명 지금의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정글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 현대 자본주의의 열쇠

저자는 스미스를 충실히 재해석한 이후, 지금을 사는 우리 곁으로 그를 데려온다. 지구의 부는 어디로 이동하고 있나?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까? 대한민국은 지난 세기의 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변화를 선도하고 부를 창출할까? 스미스가 명쾌한 답을 내줄 수는 없다. 새로운 기술이 낡은 체제를 뒤엎고, 초국가적 거대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며, 극심한 양극화가 사람들을 갈라놓는 오늘날의 사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통찰은 지금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다면성을 이해하려 시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경제와 사회를 다시 바라볼 단초를 제공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