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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익숙한 이곳에 머물러 있는가,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려 하는가?”
격변의 시대에 반야심경이 던지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화두
철학자 최진석과 함께 읽는 삶의 지침서로서의 반야심경
인류의 고전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정수
오래도록 한국에서 사랑받아온 니체,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하고, 조금은 낯설던 쇼펜하우어의 철학까지 전에 없던 관심을 받는 중이다. 이 철학자들은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세상을 고통스러운 곳으로 바라본다. 그런 동시에 이 고통을 헤쳐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다만 이처럼 비관적인 시선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는 철학이 관심받는 현상은 조금 안타깝다. 지금이 여느 때보다 약간은 더 고통스러운 시대라는 방증일 것이므로.
이처럼 고통이 만연한 시대일 때면, 동양 철학은 어떤 지혜를 건네왔을까. 이 대답을 위해 『건너가는 자』가 나왔다. 철학자 최진석은 말한다. 인생이라는 고통을 건너는 법, 아주 오랜 시간에도 낡지 않는 ‘건너감의 지혜’가 바로 반야심경에 담겨 있다고. 오늘날에 맞게 읽어내는 ‘타인에게 베푸는 지혜’부터 시작해, 여섯 방식의 지혜와 그 실천법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건너가는 자』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반야심경을 풀어낸 지혜의 정수다.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통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인류의 고전이 답하는 ‘건너감의 지혜’를 탐독해본다.
격변의 시대에 반야심경이 던지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화두
철학자 최진석과 함께 읽는 삶의 지침서로서의 반야심경
인류의 고전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정수
오래도록 한국에서 사랑받아온 니체,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하고, 조금은 낯설던 쇼펜하우어의 철학까지 전에 없던 관심을 받는 중이다. 이 철학자들은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세상을 고통스러운 곳으로 바라본다. 그런 동시에 이 고통을 헤쳐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다만 이처럼 비관적인 시선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는 철학이 관심받는 현상은 조금 안타깝다. 지금이 여느 때보다 약간은 더 고통스러운 시대라는 방증일 것이므로.
이처럼 고통이 만연한 시대일 때면, 동양 철학은 어떤 지혜를 건네왔을까. 이 대답을 위해 『건너가는 자』가 나왔다. 철학자 최진석은 말한다. 인생이라는 고통을 건너는 법, 아주 오랜 시간에도 낡지 않는 ‘건너감의 지혜’가 바로 반야심경에 담겨 있다고. 오늘날에 맞게 읽어내는 ‘타인에게 베푸는 지혜’부터 시작해, 여섯 방식의 지혜와 그 실천법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건너가는 자』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반야심경을 풀어낸 지혜의 정수다.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통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인류의 고전이 답하는 ‘건너감의 지혜’를 탐독해본다.
목차
들어가며 - 세계의 법칙을 비추는 반야의 길
1장_인간의 소명을 깨닫고, 세상의 진실을 마주한다
1-1 당신의 고삐는 무엇입니까
1-2 천상천하 유아독존
1-3 왜 행복하지 않는가
1-4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
1-5 차유고피유 차멸고피멸
1-6 본무자성
1-7 세계의 실상, 공
2장_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니, 반야의 지혜를 딛고 저쪽으로 건넌다
2-1 마하반야바라밀다
2-2 바라밀다, 건너가기
2-3 나를 키우는 지혜
2-4 반복의 힘
2-5 성스러운 자리
2-6 오온, 색수상행식
2-7 오온이 다 공이다
3장_더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정확히 보기 위해 상을 짓지 않는다
3-1 마음 비우기
3-2 상을 짓지 말라
3-3 무소유
3-4 백척간두진일보
3-5 색즉시공 공즉시색
4장_뒤집힌 생각을 바로잡아, 가장 탁월한 길을 선택한다
4-1 삼법인과 전도몽상
4-2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4-3 가장 탁월한 길
5장,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뿐이다
5-1 십이연기와 사성제
5-2 극단적 부정
5-3 반야의 지혜
5-4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5-5 무상정등각
5-6 불가능을 건너가는 주문
나오며 - 경전을 족쇄 아닌 등불로 삼길
1장_인간의 소명을 깨닫고, 세상의 진실을 마주한다
1-1 당신의 고삐는 무엇입니까
1-2 천상천하 유아독존
1-3 왜 행복하지 않는가
1-4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
1-5 차유고피유 차멸고피멸
1-6 본무자성
1-7 세계의 실상, 공
2장_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니, 반야의 지혜를 딛고 저쪽으로 건넌다
2-1 마하반야바라밀다
2-2 바라밀다, 건너가기
2-3 나를 키우는 지혜
2-4 반복의 힘
2-5 성스러운 자리
2-6 오온, 색수상행식
2-7 오온이 다 공이다
3장_더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정확히 보기 위해 상을 짓지 않는다
3-1 마음 비우기
3-2 상을 짓지 말라
3-3 무소유
3-4 백척간두진일보
3-5 색즉시공 공즉시색
4장_뒤집힌 생각을 바로잡아, 가장 탁월한 길을 선택한다
4-1 삼법인과 전도몽상
4-2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4-3 가장 탁월한 길
5장,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뿐이다
5-1 십이연기와 사성제
5-2 극단적 부정
5-3 반야의 지혜
5-4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5-5 무상정등각
5-6 불가능을 건너가는 주문
나오며 - 경전을 족쇄 아닌 등불로 삼길
책 속으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고삐가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심지어는 말을 타고 있으면서도 말을 왜 탔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알 수 없고,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지지부진해지고, 오리무중에 빠지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고삐는 무엇입니까」중에서
붓다가 한 최초 자각은 바로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임을 진실로 알았으니 이제 붓다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집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을 건져 올려 구하는 것입니다. 불교, 붓다의 모든 설법은 한 가지 이야기를 달리 풀어낸 셈이지요. 결국은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자’라는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중에서
공은 존재라기보다는 기호인 셈이지요. 그냥 표지판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공은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의 상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논리적 개념일 뿐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공이라는 단어를 보면 항상 본무자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세계의 실상 - 공」중에서
피안이라는 높은 경지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그 높은 경지를 향해서 부단히 나아간다고 하면 아주 멋진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만이 바라밀다는 아닙니다. 어디에 서 있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을 도모하는 것, 익숙함을 뒤로 하고 낯설면서도 위험하고도 해석되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는 용기 있는 동작, 이것이 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 - 건너가기」중에서
건너가기가 일어나는 순간에 ‘저기’의 문법은 아직 인정받을 정도로 성숙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건너가는 자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대개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때로는 이상하다거나 나쁘다고까지 하지요. 붓다도 브라만들의 비방과 폄훼를 견뎌야 했고, 예수도 율법주의자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반복의 힘」중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야망이라는 단어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붓다가 대발원大發願을 세우는 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용맹정진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진하는 태도를 잃으면, 바로 멈춰서게 됩니다. 그러니 물러섬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끝까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성스러운 자리」중에서
자유분방함을 동물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발전하려는 욕망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인간적인 삶,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기류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류는 이상하게도 불교나 도교를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공이나 허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상을 짓지 말라」중에서
소유적 태도로 접할 수 있는 세계란 얕고 좁은 세계에 불과합니다. 정해진 마음만 없어지면, 상만 없어지면, 소유적 태도만 없애면 세계의 진실을 직접 대면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훨씬 깊고 넓게 만날 수 있지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붓다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자기가 정해진 틀만큼만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붓다에 가까울까요.
---「무소유」중에서
성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행복이나 자유 등의 아름다운 보편 개념을 사용해야 더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잘 압니다. (중략) 대부분이 속세의 삶을 가볍게 무시해야 수준 높은 삶을 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중략) 불교를 잘못 공부하면 성공도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고 진짜 가치 있는 것은 청정하고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불교에서는 격이 있는 성공, 격이 있는 돈, 격이 있는 명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부정」중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사이에는 큰 골이 있습니다. 둘은 아주 다른 영역입니다. 공을 이해하는 일과 공의 논리대로 사는 것 사이에도 큰 골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이 주문이 나오기 전까지가 공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면, 이 주문은 반야바라밀다를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려는 의지를 천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이해하는 일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 사이에 있는 큰 골을 메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삐는 무엇입니까」중에서
붓다가 한 최초 자각은 바로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임을 진실로 알았으니 이제 붓다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집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을 건져 올려 구하는 것입니다. 불교, 붓다의 모든 설법은 한 가지 이야기를 달리 풀어낸 셈이지요. 결국은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자’라는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중에서
공은 존재라기보다는 기호인 셈이지요. 그냥 표지판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공은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의 상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논리적 개념일 뿐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공이라는 단어를 보면 항상 본무자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세계의 실상 - 공」중에서
피안이라는 높은 경지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그 높은 경지를 향해서 부단히 나아간다고 하면 아주 멋진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만이 바라밀다는 아닙니다. 어디에 서 있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을 도모하는 것, 익숙함을 뒤로 하고 낯설면서도 위험하고도 해석되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는 용기 있는 동작, 이것이 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 - 건너가기」중에서
건너가기가 일어나는 순간에 ‘저기’의 문법은 아직 인정받을 정도로 성숙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건너가는 자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대개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때로는 이상하다거나 나쁘다고까지 하지요. 붓다도 브라만들의 비방과 폄훼를 견뎌야 했고, 예수도 율법주의자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반복의 힘」중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야망이라는 단어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붓다가 대발원大發願을 세우는 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용맹정진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진하는 태도를 잃으면, 바로 멈춰서게 됩니다. 그러니 물러섬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끝까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성스러운 자리」중에서
자유분방함을 동물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발전하려는 욕망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인간적인 삶,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기류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류는 이상하게도 불교나 도교를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공이나 허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상을 짓지 말라」중에서
소유적 태도로 접할 수 있는 세계란 얕고 좁은 세계에 불과합니다. 정해진 마음만 없어지면, 상만 없어지면, 소유적 태도만 없애면 세계의 진실을 직접 대면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훨씬 깊고 넓게 만날 수 있지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붓다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자기가 정해진 틀만큼만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붓다에 가까울까요.
---「무소유」중에서
성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행복이나 자유 등의 아름다운 보편 개념을 사용해야 더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잘 압니다. (중략) 대부분이 속세의 삶을 가볍게 무시해야 수준 높은 삶을 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중략) 불교를 잘못 공부하면 성공도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고 진짜 가치 있는 것은 청정하고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불교에서는 격이 있는 성공, 격이 있는 돈, 격이 있는 명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부정」중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사이에는 큰 골이 있습니다. 둘은 아주 다른 영역입니다. 공을 이해하는 일과 공의 논리대로 사는 것 사이에도 큰 골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이 주문이 나오기 전까지가 공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면, 이 주문은 반야바라밀다를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려는 의지를 천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이해하는 일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 사이에 있는 큰 골을 메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건너는 주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당신 인생의 고삐는 무엇입니까?”
오랜 철학이 복잡다단한 시대에 던지는 질문
혹시 당신, 지금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나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고, 앞으로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시대의 흐름에 몸을 채 못 가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파도가 높을수록 자세를 낮추고 정신을 또렷이 차려야 하는 법. 모든 게 뒤바뀌고 엎어지는 시기일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다. 격변의 흐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하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은, 멀리서 보면 인생의 여정에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다. 하루하루의 족적이 모여 인생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나의 오늘 하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 책, 《건너가는 자》는 반야심경의 철학으로 아득한 시간을 건너 오늘의 당신에게 질문한다. 지금 당신, 제대로 나아가고 있냐고, 혹은 어디로 나아가는지 정확히 알고 발을 옮기는 중이냐고. 잘하다가도 때로 시대의 풍파에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건너감의 지혜’라고 한다.
철학으로의 반야심경이 말해주는 삶의 태도
‘건너감의 지혜’
불교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공(空)’이다. 그런데 통념과 달리 ‘공’은 심오하고 초월적이며 영원불변한 이치를 뜻하지 않는다. 그저 철학적인 관점으로 ‘이 세상에 본래 그러한 것, 고정되고 불변한 것은 없다’라는 말의 기호일 뿐이다.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도 없는 세상이기에, 확실하고 또렷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곧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말에는 이러한 관점이 숨어 있고,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지혜가 바로 ‘건너감의 지혜’이다. 건너감의 지혜는 여섯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 타인에게 베푸는 지혜.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되레 내가 크고 넓어짐을 알고 베푸는 것
둘째, 스스로 다짐을 지키는 지혜. 자신이 정한 규칙을 멈추지 않고 부단히 반복해내는 것
셋째, 번뇌를 묵묵히 견디는 지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때 가해지는 비난과 오욕을 견디는 것
넷째, 물러섬 없이 나아가는 지혜. 용맹정진의 태도로 물러섬 없이 끝까지 나아가는 것
다섯째,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지혜. 자신을 믿고 배려하며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대하는 것
여섯째, 다섯 지혜를 실천해내는 지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다섯 지혜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
건너감의 지혜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세상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고, 익숙한 이곳을 떠나 미지의 저곳으로 먼저 발을 내딛는 한 걸음이다. 그런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세상을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하며 멈추지 않고 계속 내딛는 한 걸음, 즉 앎 이전의 실천이다.
더욱 빠르게 변해서 더욱 고통스러운 시대에
마음의 닻이 되어주는 지혜의 정수
최진석 교수가 거듭 강조하는 내용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건너가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건너가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반야심경은 답한다. 그 무엇은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용이 정해져 있다면 모두가 똑같은 노선과 내용을 습득해야 한다. 고정된 어떠한 배움을 상정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고정되고 불변한 것은 없으니, 건너감의 지혜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형식만 존재하니, 그 내용은 자신에게서 채우면 된다.
불교를 비롯해 스토아학파, 니체, 쇼펜하우어 등 동서양 철학을 막론하고 삶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세상을 고통스러운 곳으로 보아온 관점이 오늘날 대단히 유난스럽거나 새로운 시선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이 유독 지금, 오늘날에 더욱 크게 공명하는 듯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분명 지금이 여느 때보다 커다란 변화의 시기이기에 그럴 것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시대이기에 그럴 것이다.
오래도록 변치 않고 전해지는 인류의 지혜인 동시에, 유독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건너가는 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작품이다. 언제고 고통이 치밀어 오를 때면, 항상 마음의 닻이 되어주는 지혜의 정수를 맛보라.
오랜 철학이 복잡다단한 시대에 던지는 질문
혹시 당신, 지금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나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고, 앞으로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시대의 흐름에 몸을 채 못 가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파도가 높을수록 자세를 낮추고 정신을 또렷이 차려야 하는 법. 모든 게 뒤바뀌고 엎어지는 시기일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다. 격변의 흐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하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은, 멀리서 보면 인생의 여정에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다. 하루하루의 족적이 모여 인생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나의 오늘 하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 책, 《건너가는 자》는 반야심경의 철학으로 아득한 시간을 건너 오늘의 당신에게 질문한다. 지금 당신, 제대로 나아가고 있냐고, 혹은 어디로 나아가는지 정확히 알고 발을 옮기는 중이냐고. 잘하다가도 때로 시대의 풍파에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건너감의 지혜’라고 한다.
철학으로의 반야심경이 말해주는 삶의 태도
‘건너감의 지혜’
불교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공(空)’이다. 그런데 통념과 달리 ‘공’은 심오하고 초월적이며 영원불변한 이치를 뜻하지 않는다. 그저 철학적인 관점으로 ‘이 세상에 본래 그러한 것, 고정되고 불변한 것은 없다’라는 말의 기호일 뿐이다.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도 없는 세상이기에, 확실하고 또렷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곧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말에는 이러한 관점이 숨어 있고,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지혜가 바로 ‘건너감의 지혜’이다. 건너감의 지혜는 여섯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 타인에게 베푸는 지혜.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되레 내가 크고 넓어짐을 알고 베푸는 것
둘째, 스스로 다짐을 지키는 지혜. 자신이 정한 규칙을 멈추지 않고 부단히 반복해내는 것
셋째, 번뇌를 묵묵히 견디는 지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때 가해지는 비난과 오욕을 견디는 것
넷째, 물러섬 없이 나아가는 지혜. 용맹정진의 태도로 물러섬 없이 끝까지 나아가는 것
다섯째,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지혜. 자신을 믿고 배려하며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대하는 것
여섯째, 다섯 지혜를 실천해내는 지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다섯 지혜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
건너감의 지혜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세상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고, 익숙한 이곳을 떠나 미지의 저곳으로 먼저 발을 내딛는 한 걸음이다. 그런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세상을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하며 멈추지 않고 계속 내딛는 한 걸음, 즉 앎 이전의 실천이다.
더욱 빠르게 변해서 더욱 고통스러운 시대에
마음의 닻이 되어주는 지혜의 정수
최진석 교수가 거듭 강조하는 내용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건너가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건너가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반야심경은 답한다. 그 무엇은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용이 정해져 있다면 모두가 똑같은 노선과 내용을 습득해야 한다. 고정된 어떠한 배움을 상정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고정되고 불변한 것은 없으니, 건너감의 지혜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형식만 존재하니, 그 내용은 자신에게서 채우면 된다.
불교를 비롯해 스토아학파, 니체, 쇼펜하우어 등 동서양 철학을 막론하고 삶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세상을 고통스러운 곳으로 보아온 관점이 오늘날 대단히 유난스럽거나 새로운 시선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이 유독 지금, 오늘날에 더욱 크게 공명하는 듯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분명 지금이 여느 때보다 커다란 변화의 시기이기에 그럴 것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시대이기에 그럴 것이다.
오래도록 변치 않고 전해지는 인류의 지혜인 동시에, 유독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건너가는 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작품이다. 언제고 고통이 치밀어 오를 때면, 항상 마음의 닻이 되어주는 지혜의 정수를 맛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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