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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영혼, 이중하는 살아있다 (2022)

동방박사님 2024. 5. 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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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간도

이중하 선생은 1846년에 태어나 1882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안변 부사로 재직하던 1885년 토문 감계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제1차)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1887년에 재개된(제2차) 조선 측 협상대표를 지냈다. 그는 불리한 국제정치 상황과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속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국익을 지켜낸 외교관이었으며 뛰어난 협상가였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서 청나라와 마찰이 빈번했다.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청나라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함으로써 그곳에 사는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국경회담을 요청했다.

이중하 선생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선택한 길은 백성들을 살렸고 하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대업을 이루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용기 있게 나서 역사의 운명을 바꿔놓았으니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한 인물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것은 애국심과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 외교관인 이중하 선생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라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한 국가의 영토를 지키고 민족을 살린 이중하 선생은 서양의 개입에 의해 중화적 세계관에서 탈피, 아시아 세계관이 성립되는 시기에 외교적 결단성으로 관료의 정체성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하 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간도 땅을,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것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당시 일본이 간도를 차지하고 청국에게 팔아넘긴 간도야말로 이 땅의 후손들은 훗날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목차

prologue 4

1. 분쟁의 시작·백두산정계비 16
2. 어명-이중하의 등장 27
3. 삼전도 비문 앞에서 32
4. 과공비례-과잉 충성 38
5. 남한산성에 올라 43
6. 수어장대-무망루 47
7. 현절사-충신들 앞에서 51
8. 안변 부사-이중하 62
9. 이중하는 살아있다 78
10. 백두산정계비 84
11. 탄천 서쪽 마을 수서동 88
12. 대원군의 선택-길 93
13. 명과 후금의 중립 외교 98
14. 독선과 아집 사이에서-광해군 104
15. 임오군란-대원군 집정 107
16. 갑신정변-3일천하 117
17. 군란의 격화 121
18. 대원군의 섭정 128
19. 토문 감계사 이중하 131
20. 제1차 회담 143
21. 장계-조회 150
22. 공동 감계 보고서 163
23. 청국의 자문-조회 171
24. 제2차 회담 182
25. 피를 말리는 싸움 197
26. 장계-제2차 감계 보고 209
27. 발령-조정으로 올라간 이중하 215
28. 전등이 켜지는 날-경복궁 225
29. 삼정문란-암행어사 237
30. 상소-강위를 추천하다 251
31. 동학농민군-청주 병영에서 256
32. 대구부 관찰사-이중하 267
33. 임오 유월 일기-신사 유람단 277
34. 비운의 영친왕 290
35.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295
36. 을미의병 302
37. 아관파천 307
38. 갑오경장 315
39. 국시 유세단 322
40. 을사늑약-십일야방성대곡-장지연 330
41.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 338
42. 통곡-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가 된 이유 343
43. 이중하의 죽음-유언 356
44. 송덕비-이중하 364
 
저자 소개
저 : 정권수
 
저자 정권수 목사는 대한민국 국가 유공자로 자는 곤지, 호는 향사, 본관은 봉화, 삼봉 정도전의 19대 후손으로 본적 서울, 강원 고성에서 1946년(병술년) 8월 18일 출생했다. 1968년 월남전에 주월태권도교관단 교관으로 참전하여 참전기장, 종군기장, 월남공로 표창(방증록 월남군 제18사단장) 대한민국 무공포(훈)장(제1593호 대통령 박정희)을 받았다. 1972년 바르셀로나 대학교 서반아과에서 수학하고...

책 속으로

이중하는(1846~1917) 경기도 양평 창대리에서 출생했다. 본관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5대손이다. 자는 후경, 호는 규경, 현감 이인식의 아들이다. 그는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에 올라 안번 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로서 청국측 대표 덕목, 가원계, 진영 등과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를 심사하였다. 국경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 데다 청국 측이 강압적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했다. 1886년 덕원 항감리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하였는데 청국 측이 조선 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충청도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 협판, 의정부 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 선무사, 영월 영천 안핵사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해 말 김홍집 내각의 내무 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지방제도가 개편되자 대구부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 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이중하는 민심을 얻어 무사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의 요구로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 투표로 11명의 대신 후보자를 선출할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 협판 칙임 2등이 되어 문헌비고 찬집 당상을 맡았다. 그 뒤 평안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합박론을 주장하자 민영소, 김종한 등과 국시유세단을 조직하여 그해 12월 5일, 원각사에서 임시 국민대회 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1910년 규장각 제학으로 한일 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 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한일 합방이 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아들과 같이 양평으로 낙향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않다가 1917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으며 국가 이익을 위해서 목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강직한 성격을 가진 분이었다.

이중하는 두 차례 토문감계사로 협상에 나서 청국과의 회담에서 끝까지 간도를 지켰다. 토문감계사란 조선 농민의 간도 이주가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단속과 관할 문제가 토문의 위치를 둘러싼 국경문제로 비화되자 조선과 청국간의 국경회담, 감계담판에 회담 대표로 우리 조정이 파견한 일종의 외교관 벼슬 이름이다. 1882년에 청은 이 지역 조선인들을 모두 청의 국적에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고시하였다. 청의 구민이 되거나 나가라는 압박에 한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두만강 대안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이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때 일부 조선인들이 직접 백두산 올라 정계비의 내용을 확인한 후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개의 것으로 정계비의 문구대로 조선과 청의 경계는 토문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두만강과 토문강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를 저지해 달라고 조선 조정에 청원했다. 현지 농민의 호소를 받아들인 조선 정부는 1883년 서북 경략사 어윤중을 파견하고 현지 사정에 밝은 김우식에게 정계비와 함께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에 기초하여 조선은 중국의 요구에 간도 지역에서 조선의 퇴거를 거부했다. 토문강 이남의 땅은 조선의 땅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9. 이중하는 살아있다」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간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2013. 10. 외교통상부는 이중하 선생을 조선 후기 최고의 외교관으로 선정 발표했다. 이중하 선생(1846~1917)은 조선 후기에 청나라와 국경회담을 진행했던 대한민국 외교를 빛낸 인물이다. 이중하 선생은 1846년에 태어나 1882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안변 부사로 재직하던 1885년 토문 감계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제1차)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1887년에 재개된(제2차) 조선 측 협상대표를 지냈다. 그는 불리한 국제정치 상황과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속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국익을 지켜낸 외교관이었으며 뛰어난 협상가였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서 청나라와 마찰이 빈번했다.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청나라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함으로써 그곳에 사는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국경회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정세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원세개가 마치 총독처럼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러니 조선 정부의 뜻대로 국경 회담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청나라는 이 기회에 두만강 국경선을 분명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

회담에서 이중하 선생은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되어 있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을 주장했고 청나라 대표는 두만강 상류 물줄기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서두수 국경론을 제기하여 합의점에 달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이중하 선생은 청나라 대표의 생각의 틀을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 청나라 대표는 완전히 조선 측 주장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논리의 맹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이중하 선생은 백두산정계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비면에 봉지글자는 즉 강희 성조(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성지입니다. 훤히 빛나는 새김이 옛날(천고)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정계비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수사학에서 강조하는 생각의 틀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접근하자면 청국 대표는 먼저 강이 있고서 뒤에 비석이 있었던 것이라는 말로 산천을 국경으로 삼는 국경 획정의 일반론을 통해 이중하 선생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중하 선생은 청국 대표의 논리체계를 청나라 황제에 대한 봉권적 충성심의 기준으로 공략했다. 정계비에 새겨진 봉지라는 글씨 하나 때문에 정계비는 단순한 비석에서 황제의 의사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고 이후 청국 대표는 정계비의 내용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순간 이미 논쟁의 중심에 이중하 선생이 서게 되었고 비록 결론이 내려지지는 못했지만 회담은 이중하 선생의 리더십에 따라 자행되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강토는 축소할 수 없다

1887년 재개된 국경 회담(제2차)에 있어서 주변 여권은 이중하 선생에게 불리했다. 무엇보다 이중하 선생은 이전의 논지였던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은 더 이상 국경으로 주장할 수 없었다. 고종이 청나라로부터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하 선생은 회담에서 두만강 지류인 홍토수를 국경으로 삼겠다는 논지를 폈고 청국 대표는 홍단수를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두만강 상류의 물줄기는 북쪽으로부터 홍토수, 석을수, 홍단수, 서두수가 있는데 과거 1차 회담에서는 이중하 선생은 두만강 아닌 송화강 물 물기를 주장했고 청나라 대표가 서두수를 주장한 것을 비교할 때 외면상으로 양국은 견해 차이를 많이 좁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협상이 결렬된 것은 외교적 실패로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이 과정을 생각의 틀로 풀이할 때 이중하 선생의 협상 리더십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청나라 대표는 백두산정계비에 명기된 토문강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이중하 선생에게 이제 거꾸로 조선 국왕에 대한 충성의 과정에서 두만강 국경 인정을 강요했다.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뒷일을 도모함을 구하지 않으면 마땅히 국가에는 끝없는 환란이 있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우환이 있다는 말로써 양보를 종용하는 청나라 대표에게 이중하 선생은 국경문제에 임하는 신하의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약소국가의 협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청나라 대표의 틀(Frame of Mind)을 완전히 깨어 버렸다.

먼저 이중하 선생은 단호한 주장으로 국경 획정은 회담의 대상이 아님을 천명했다. “3백 년 간 원래 정한 경계는 본래부터 전과 같은데 어찌 한 마디로 분별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청나라 대표가 이중하 선생을 윽박지르며 타협을 종용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강토는 축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국경 회담에 임하는 신하의 입장을 피력했다. 여기에 청국 대표의 생각이 흔들렸다. 영토 문제 있어서 양보한다는 것은 신하된 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는 기초 마련

이제 이중하 선생의 마음을 안 청나라 대표는 모두 상대방의 주장에 양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회담 성과를 논하기 전에 이중하 선생의 이런 결사적인 노력은 조선인들이 터를 잡고 북간도 지역에 일정 기간 청국 관원들이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이중하 선생의 관력에서 토문 감계사와 아산 청진 영접관 지방의 선무사와 안핵사에 임용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토문 감계사와 아산 청진 영접관은 청국 관원을 상대하는 직책이 없으므로 외교관의 자질이 없으면 수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당시 조선과 청군간의 외교관계가 대한제국 이후 근대적 외교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사대관계에 따른 황제국과 제후국의 외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중하 선생에게서 근대적인 외교관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중하 선생이 청국 관원을 상대하는 모습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여 상대를 설득하려는 것을 볼 수 있기에 그가 청국을 상대하는 외교 담당자로 임명된 이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간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대한제국 병합이 이루어지자 이중하 선생은 일제에 대항하며 대한제국을 지켰다. 대부분의 대한제국의 황족과 관료들이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따라 친일 혹은 협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에 반해 이중하는 단번에 일제의 회유를 거절했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로서 한일합방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반대한 그는 아들(범세)과 함께 고향인 양평으로 낙향하여 1917년 72세의 나이로 졸서하였다. 이중하 선생은 죽었지만 지금 그는 살아있다. 그의 무덤 상석에는, 유한정헌대부 장예원 경원경완산 이공중하 지묘 배정부인 창령 조씨 부좌라고 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유한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 범세의 무덤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유한의 한은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중하 선생은 자신의 무덤에 대한제국의 관료였다는 것과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새기게 한 것이다. 일제시기 대한제국의 관료는 물론 지방 유림들의 무덤에서도 유한이라는 글씨는 보기 어렵다. 이중하 선생이 일제 통치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중하 선생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선택한 길은 백성들을 살렸고 하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대업을 이루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용기 있게 나서 역사의 운명을 바꿔놓았으니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한 인물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것은 애국심과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 외교관인 이중하 선생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라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한 국가의 영토를 지키고 민족을 살린 이중하 선생은 서양의 개입에 의해 중화적 세계관에서 탈피, 아시아 세계관이 성립되는 시기에 외교적 결단성으로 관료의 정체성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하 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간도 땅을,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것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당시 일본이 간도를 차지하고 청국에게 팔아넘긴 간도야말로 이 땅의 후손들은 훗날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