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시 /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 / 부모 산맥 백두대간, 창바이 산맥, 마천령산맥 / 지질 / 산 형태 성층 화산 / 최종 분화 1903년 또는 1925년
백두산(白頭山)은 조중 국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국 국경)에 있는 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중국조선어: 장백산, 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통용 병음: Chángbái shān)이라 불린다. 한민족에게는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 왔으며, 환웅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제사를 열었다는 태백산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높이는 2,744m(9003ft)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머리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들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인 천지(天池)가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고,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이 태어난 성지(聖地) 또는 성소(聖所), 성역(聖域)등으로, 여겨서 신성시되고 있다. 또한, 백두산은 남만주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산맥의 주봉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24년 3월 27일 백두산을 비롯한 18개 후보지를 창바이산으로 세계지질공원으로 새롭게 인증했다.
명칭
백두산은 과거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장백산 등으로도 불렸는데, 1280년대에 쓰여진 《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고려 성종 10년(991년)조[6]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는데,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는 명칭도 간간히 나타난다. 196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 변계 조약과 그 의정서에서도 이 산을 백두산(중국어 간체자: 白头山)이라고 칭하였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중국조선어: 장백산, 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병음: Chángbái shān),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果勒敏珊延阿林, 만주어: 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ᡳᠨ Golmin Šanggiyan Alin) 또는 골민 샨얀 알린(만주어: ᡤᠣᠯᠮᡳᠨ ᡧᠠᠨ᠋ᠶᠠᠨ ᠠᠯᡳᠨ Golmin Šanyan Alin)이라고 부른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조선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에게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써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리었다. 현대에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의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의역한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요, 금나라 시기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이 주장한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지리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이 화산분출로 인한 화산재는 멀리 일본의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산의 정상은 매년 2cm씩 솟아오르는데, 이는 산의 중앙부 천지를 둘러싼 칼데라 환의 2,500m 아래 마그마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최고봉인 장군봉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고, 경사는 1,800m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천지(天池)
최고점 / 고도 2,189 m (7,182 ft)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쑹화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그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km2,둘레 14.4 km,평균 깊이 213.43m,최대 수심은 384m로, 63빌딩(274m), 에펠탑(330m), 도쿄 타워(333m) 등은 모두 잠겨 버릴 정도이며, 동방명주탑(467.9m)의 경우 4분의 3, 미국 노스다코타주에 위치한 KVLY 텔레비전 송신철탑(628.8m), 폴란드 콘스탄티누프에 위치해 있던 바르샤바 라디오 송신철탑(646m)은 전체 높이의 60%, 토론토 CN 타워(553.3), 스카이트리(634m), 롯데월드타워(555m), 상하이 타워(632m), 타이페이 101(509,2m)의 경우 전체 높이의 3분의 2까지, 부르즈 할리파(828m)의 경우 3분의 1까지 잠겨버릴 정도의 깊이다.
수량(水量)은 19억 5,500만 m³로서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지리
위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시 /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질
산 형태 순상 화산
천지(중국어: 天池 톈치 영어: Heaven Lake)는 백두산 정상에 있는 화산호로, 쑹화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타문(他們, 만주어: ᡨᠠᠮᡠᠨ Tamun)이라고도 한다.
천지의 수면은 해발 2,257 m,면적은 9.165 km2,둘레 14.4 km,평균 깊이 213.43 m,최대 수심은 384 m이며, 수량(水量)은 19억 5500만 m³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흑수(黑水)라는 별칭이 있다.
지리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 km, 깊이 850 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천지는 둘레가 14 km이고, 평균 깊이 213 m, 최대 수심은 384 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천지는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44 m)을 비롯해 망천후(2,712 m)·백운봉(2,691 m)·청석봉(2,662 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천지의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해 흘러내려 간다. 이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 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진다.
생태
생물학자 김리태에 따르면, 1960년 7월 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자들이 천지에 산천어(표준어: 곤들매기)와 붕어를 천지에 풀어넣어 정착시켰다.또한, 2014년부터 천지에 빙어를 서식시키는 사업을 하여 2018년 성공했다고 로동신문이 보도하였다.
천지에서 호수 괴물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으나 입증된 적은 없다.
국경
조중 변계 조약
천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원래 백두산은 전부 중국의 영토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62년에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천지의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강의 발원이 된다.
백두산은 쑹화강 외에도 백두산 산정(山頂) 남쪽에서 압록강이, 무두봉(無頭峰, 높이 1,930m)의 북쪽 기슭에서 두만강의 발원이 된다. 세 강의 발원지
백두산 16봉
단위는 해발 고도(m)이다.
백운봉(白云峰) 2,691m
관일봉(觀日峰) 2,670m
천문봉(天文峰: 응취봉,鷹嘴峰) 2,670m
옥주봉(玉柱峰: 청석봉,青石峰) 2,664m
화개봉(華蓋峰: 황암봉,黄岩峰) 2,640m
천활봉(天豁峰) 2,620m
자하봉(紫霞峰) 2,618m
고준봉(孤隼峰) 2,611m
녹명봉(鹿鳴峰: 지반봉,芝盤峰) 2,603m
용문봉(龍門峰) 2,595m
금병봉(錦屏峰) 2,590m
직녀봉(織女峰) 2,558m
제운봉(梯云峰) 2,543m
철벽봉(鐵壁峰) 2,560m
와호봉(卧虎峰) 2,566m
관면봉(冠冕峰: 옥설봉,玉雪峰) 2,525m
기후 / 천지
냉대 기후의 백두산 지역은 산지 기후의 특징을 지녀 월평균 기온이 연간 34℃ 사이의 편차로 크게 변한다. 강수량은 연 1,400mm에 이르는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은 춥고 매우 길며,여름은 온난 습윤하다.
백두산의 기후변화는 매우 고질적이다. 산 정상의 연평균 기온은 -8.3℃이다. 여름은 18℃ 정도이지만, 엄동기는 -47.5℃까지 내려갈 때가 있다. 백두산 정상부 일원 비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저기온은 -54.7℃이며, 앞으로 공식적 관측기록이 있다면 이보다는 기온이 더 낮은 날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월의 평균기온은 -24℃, 7월의 평균기온은 10℃이며,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초순까지 연중 8개월은 영하까지 내려가서 입산이 통제된다. 산 정상의 평균풍속은 초속 11.7m, 12월에는 평균 초속 17.6m의 강풍이 분다.
평균 습도는 74%, 연강수량은 1,400mm 정도로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해양과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형이 높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리며, 쌓인 눈은 이듬해 6~7월 달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한다.
동식물
동물
백두산고지에는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최근 중국 CCTV의 영상을 통하여포유류로는 검은담비, 큰곰, 반달가슴곰, 백두산사슴, 사향노루, 사슴, 산양, 스라소니, 수달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호랑이, 표범, 늑대 등 대형 맹수 대부분은 백두산에서도 멸종되었다. 조류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과 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멧닭, 올빼미, 원앙, 청둥오리 등이 있다. 어류로는 천지에 방류한 천지산천어가 있으며, 그 외에 북살무사·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다.
식물 분포
백두산의 식물
백두산은 식물이 다양한 식물이 분포한다. 과거 제3기(第三纪)의 식물에서부터 한국은 물론 시베리아, 일본, 유럽의 식물종도 있으며, 심지어 중국 남방의 아열대 식물종까지 발견된다.
해발 고도가 높고 지리적 위치가 독특하여 하곡(河谷)에서부터 주봉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온대, 냉대, 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식물이 집합해 있으며,지리학적으로 고산 수직 자연대(高山垂直自然帶)의 분포에 속한다.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입기 전의 식물종들이 자란다.
지질 환경 변천사
백두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약 200 ~ 300만년 전 제4기 분출로 백두산의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300여 년 동안 3차례의 분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화산암-현무암 대지, 경사진 현무암 고원 등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화산 분출 전후의 백두산이 빽빽한 삼림이었음을 증명한다. 여러 광물질이 함유된 화산재는 비옥한 토양을 형성하여 동식물 번식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세기와 10세기에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946년 백두산 분화는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발해 멸망은 926년으로 20년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10세기 중반에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멀리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날아갔다. 당시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100 ~ 150 km3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분출량(0.11 km3)의 1천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사서(史書)의 기록 등에 따르면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 등에 백두산이 화산재나 화산가스를 내뿜었거나 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종 2년(1420년) 5월, 천지의 물이 끓더니 붉게 변했다. 소떼가 크게 울부짖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 검은 공기는 인근지역으로 가득 퍼졌다."
"현종 9년(1668년) 4월, 한양과 함경도 등 일대에 동시에 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숙종 28년(1702년) 6월, 한낮에 함경도 지역 일대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린내가 나는 황적색 불꽃이 날아왔다. … 같은날 인근 지역 현성에서는 연기가 가득한 안개가 갑자기 북서쪽 지역에서 몰려들어 … 사방에 생선 썩는 냄새가 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눈송이 같이 날라 다니던 재는 1촌(약 3cm) 두께로 쌓였고, 재는 마치 나뭇조각 같았다."
이후 백두산은 1925년 마지막으로 분화한 후 90여년 넘게 화산활동을 멈추었다
다음은 백두산의 주요 분화 목록이다.
900년대 939년946년947년
1000년대 1014년1016년1017년1018년1019년
1100년대 1124년1199년
1200년대 1200년1201년1265년
1300년대 1373년
1400년대 1401년1403년1405년1406년
1500년대 1573년1597년
1600년대 1654년1668년1673년
1700년대 1702년
1800년대 1898년
1900년대 1903년1925년
백두산 부근의 국경과 영토 분쟁
조중 변계 조약 및 백두산정계비
1712년(숙종 38년)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경계비인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졌다.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 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이었다.
백두산은 현재 천지를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두 나라는 1962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金日成)이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동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반면, 중화민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간도협약 당시 국경으로 삼은 석을수보다 남쪽에 있는 홍단수를 두만강 상류의 국경으로 보았으나, 현재는 간도 협약에 따른 석을수를 국경으로 보아 천지와 장군봉(將軍峰) 등을 전부 중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백두산 가운데 중국 영토에 포함된 지역이 백두산의 중국명인 '창바이산(長白山)'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목록에 등재됐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24년 3월 27일 백두산을 비롯한 18개 후보지를 창바이산으로 세계지질공원으로 새롭게 인증했다. 유네스코는 창바이산에 대해 "화산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화산활동의 야외교실 같은 곳"이라고 평가하고, "정상에 있으며,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높은 화산호인 천지는 절경을 선사한다"라고 소개를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지난 2020년 자신들 영토에 속하는 백두산 지역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해달라고 유네스코에 신청한 바 있다.
관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거의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을 통해 백두산을 오른다.
백두산에는 많은 자연 온천이 있고, 두갈래의 형제폭포와 중국 쪽의 비룡폭포 등 여러 개의 폭포가 있다.
사진
케른
온천
시내
1776년경에 발간된 광역도의 백두산 일대 지도
천지
분화 가능성과 위험성
2005년 이후 천지의 지하 2~5 km 하부에 화산지진이 증가하고 있는데, 2003년 이후 활발한 지진현상과 함께 천지 주변의 외륜산 일부 암벽에서 균열과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지 주변 온천수의 수온이 최대 83도까지 높아졌고 화산활동 직전에 나타나는 헬륨과 수소 등 마그마성 가스성분이 증가하였으며, 백두산 천지 칼데라 주변의 암석 틈새를 따라 화산가스가 새어나와 주변 일부 초목이 고사되기도 했다.
천지의 10~12 km 지하에 규장질(알칼리유문암-조면암) 마그마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규장질 마그마는 상대적으로 높은 점성으로 인하여 엄청난 양의 용존 고압가스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이 마그마가 지표로 상승하여 임계조건을 넘으면, 일시에 고압의 화산가스가 팽창해 강렬한 화산쇄설물(화산재 및 부석)의 대폭발을 수반하여 분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천지 지하에서 발생하는 잦은 화산성 지진으로 천지에 담겨 있는 20억t의 물이 지하 암반 틈새를 따라 지하 마그마하고 만나는 경우 더 큰 화산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폭발의 규모는 10세기의 대폭발보다는 훨씬 작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산 대폭발 정도 규모의 분화는 지구 전체 규모에서도 수천 년에 한 번쯤 일어나는 매우 드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진과 함께 천지에서 20억톤의 물이 쏟아져 나오면, 천지의 물이 한꺼번에 쑹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흘러가 대규모 홍수 피해가 예상됨과 동시에, 북한하고 중국 일대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분출되는 화산재는 대한민국과 일본, 러시아, 대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산정계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하여 세워진 경계비이다.
정계비의 위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장군봉(將軍峰, 2,750m)과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사이 대략 중간지점인 해발 2,150m 고지(高地)로,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이 비는 만주사변이 발발하기 두어 달 전인 1931년 7월에 사라졌는데, 일본군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비의 원래 위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세운 표지석과 비의 설치 당시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쌓았던 돌무더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정계비의 내용
비면에 대청(大淸)이라고 크게 우횡서로 쓰고, 그 밑에 그보다 작은 글씨로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고 세로로 각서하였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이다.
설치 배경과 과정
백두산 정계(定界)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 때이다. 강희제는 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677년 음력 12월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다.이후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비공식적으로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영고탑 회귀설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의 불안감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받아들이게 된다.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혜산진에서 맞이하였으며,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 홍치중은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첫번째 수원(水源)에서 안쪽으로 20리 가량을 옮겨 세웠다.[9]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청의 다른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설치의 의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이 국경을 명확히 비(碑)로 명문화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의 천지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청나라는 이 비의 설치로 1689년에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을 안정시키고,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비의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에 대하여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게 되었다.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19세기 후반,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즉,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이므로 이른바 간도 일대가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설치 당시의 토문강에 대한 조선의 인식
숙종 시기의 이조참의 이광좌에 따르면 "황지의 이른바 토문강이란 화어(華音 : 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합니다."라고 하였다.[14] 또한 정계비를 설립한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差官接待事宜別單(차관접대사의별단)'에도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같은 저술서를 보아도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계(査界) 당시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 천지(天池)의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비 수립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조선의 경계에 대해 묻자 역관 김지남이 '천지 이남은 조선의 경내'라고 답한 데 대해 목극등이 이를 크게 다투거나 힐책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접반사 박권이 기뻐하며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즉 당시 조선에서는 천지(天池)의 이남,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서 이를 조선의 경내로 하는 데 합의한 것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설치 이후의 사정 변화
틈관동 / 간도 문서
정계비의 해석은 비가 설치된 후 170여 년이 지난 고종 집권기인 1880년대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 간도에는 세도정치의 수탈과 학정(虐政), 대흉년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간도 일대가 청의 봉금 지역이어서 1677년 이후 약 200년 동안 만주족이 아니면 청나라 사람들조차 거주가 금지되어 청나라 주민의 수가 매우 적었고, 아편 전쟁 ·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데에서 기인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외만주(연해주 등)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에 '봉금령'을 폐지하고 지린의 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즉,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간도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청나라가 쇠퇴한 1880년대 이후 조선은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토문 혹은 두만의 의미를 둘러싼 최근의 연구
최근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토문(土門)'의 어원은 여진어로 구멍·동굴·샘·협곡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 즉 토문강이라고 불리는 강은 특정된 하나의 강이 아니라 이런 특징을 가지는 하천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와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의 토문강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해석
황제가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土門江)은 장백산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 두 강사이의 지방(地方)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극등(穆克登)을 그곳에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케 하였다. 10월, 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지금까지 바쳐오던 공물(貢物) 가운데 백금(白金) 1천냥과 홍표피(紅豹皮) 142장을 면제하도록 하고, 조선국 사행(使行)이 머무는 연도의 관사(館舍)를 수리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
이 해에 예부(禮部)에서 복준하기를, 조선과 봉천부의 금부·복주·해주·개주 등은 서로 가까이 있는 지방이므로 성경장군(盛京將軍)과 봉천부윤(奉天府尹)에게 명하여 연해의 거민들을 잘 단속하여 조선에 가서 근해 어업이나 벌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혹은 다른 지방의 어채인(漁採人)이 조선에 이르면 역시 모두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하였다.
'삼번의 난 등으로 청나라는 망하고, 만주족이 중국 대륙에서 쫓겨나 만주로 되돌아올 때에는 몽골에 막혀 조선의 경내(境內)를 침범할 것'이라는 일방적 주장으로, 조선 숙종 때에 유행: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이 중국의 정세에 무지했음을 보임.
숙종실록, 숙종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2월 24일 2번째(기사) · 숙종 32년(1706 병술 / 청 강희(康熙) 45년) 1월 12일 2번째(기사) 등
동문휘고 원편 권 48, 강계 5~6쪽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 목극등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12월 7일 3번째기사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5일 2번째기사 "총관 목극등이 '그대가 능히 두 나라의 경계를 밝게 아는가?'하므로 답하기를, '비록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장백산 산마루에 대지(大池, 백두산 천지)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니, 대지(천지)의 남쪽이 곧 우리 나라의 경계이며, 지난해에 황제(皇帝)께서 불러 물으셨을 때에도 또한 이것으로 우러러 답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빙거(憑據)할 만한 문서(文書)가 있는가?'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나라를 세운 이래로 지금까지 유전(流傳)해 왔으니 어찌 문서가 필요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15일 1번째기사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백두산)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105쪽
비변사담록 64책 숙종 38년 2월 30일
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편 "토문은 두만강이고, 음이 비슷해 잘못되었다."
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두만이 곧 토문이다."
비변사담록 64책, 숙종 38년 3월 24일.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5일 2번째기사.
조병현·이범관·홍영희, 〈지적학 측면에서 본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연구〉, 한국지적한회지 제23권 제1호 2007.6: 20쪽
이광원, 〈조선 초 기록 중 '두만' 및 토문의 개념과 국경인식〉, 문화역사지리 제19권 제2호(2007) 45~57쪽. 반면에 투먼(豆滿)은 여진어로 만(萬), 즉 많고 풍부함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한다. 이는 토문강은 여럿일 수 있지만, 두만강은 하나뿐임을 의미한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경계로 하는 국경선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 수립으로부터 1964년 ‘중·조 국경의정서’의 체결까지 한중 국경사 연구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사료를 종합적으로 이용하고 또 삼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참고함과 동시에 필자의 실지답사 성과를 결합하여, 한중 국경사의 의문점과 난점에 대해 연구 수준을 한 단계 진전시킨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제1편 1712년 백두산정계 연구
백두산정계비 위치 재탐구
머리말
1. 「북정록」·「백두산기」를 통해본 정계비 위치
2. 「백산도」·「통문관지」를 통해본 정계비 위치
3. 「동문휘고」에 기록된 정계비 동쪽의 퇴책(堆柵)
4. 소백산 지리형세 분석
5. 맺는말
목극등 입비의 성격
1. 한중 양국 학자들의 서로 다른 주장
2. 목극등의 국경조사 및 조선 접반사의 사명
3. 조선에서 땅을 얻었다는 범위
4. 정계의 의의와 영향
5. 맺는말
백두산정계와 두만강 수원
머리말
1. 두만강 수원을 잇는 퇴책의 방향
2. 두만강 발원지와 설책한 물줄기
3. 조선 고지도에 나타난 두만강 수원과 퇴책
4. 백두산정계의 결정 요소 및 정계의 영향
5. 맺는말
제2편 한중국경사의 의문점과 난점에 대한 탐구
조청 국경의 역사적 유적-흑석구의 토석퇴
머리말
1. 백두산정계의 1차 사료를 통해본 흑석구
2. 1885·1887년 공동감계와 흑석구
3. 흑석구와 동남안의 토석퇴 길이
4. 맺는말
두만강 정원(正源)의 형성 요소
머리말
1. 목극등이 정한 두만강 수원
2. 1885·1887년 공동감계와 두만강 수원
3. 지리학적 요소로 본 두만강 수원
4. 맺는말
1885·1887년 공동감계에 대한 재평가
머리말
1. 제1차 감계와 총서(總署)의 주문(奏文)
2. 제2차 감계와 총서의 주문
3. ‘십자비(十字碑)’ 수립을 둘러싼 양측의 교섭
4. 감계 담판이 실패한 원인 분석
5. 맺는말
두만강변 ‘십자비’ 설립 여부에 대한 고증
머리말
1. 중국측 수립 계획과 조선의 반대
2. ‘훼비설(毁碑說)’의 유래와 원인
3. 맺는말
제3편 ‘간도문제’ 연구
1905~1909년 일본의 간도 영토귀속문제 조사의 내막
머리말
1. 간도의 가정(假定) 범위 설정과 백두산 실지답사
2. 나카이 기타로와 나이토 고난의 간도문제에 대한 문헌연구
3. 외무성의 담판책략과 ‘간도협약’의 체결
4. 맺는말
중일 양국의 ‘간도문제’와 동삼성 ‘5안(案)’에 대한 담판
머리말
1. 일본의 ‘간도문제’ 도발과 담판책략의 형성
2. ‘우적동사건’과 동삼성 ‘6안(案)’에 대한 1~7차 회담
3. 중국측의 헤이그 중재 요구 및 일본의 반대
4. 잡거지 조선인 재판권 문제에 대한 일본의 양보
5. 현안에 대한 타협과 조약문의 최종 결정
6. 맺는말
1907~1909년 일본의 ‘간도’ 지리범위 확정
머리말
1. ‘간도’ 명칭의 유래와 일본의 개입
2. 파출소의 ‘간도’ 가정(假定) 범위 설정과 확장정책
3. 외무성의 간도범위 축소와 ‘조선인잡거구역도(圖)’
4. 맺는말
제4편 백두산 답사기
중국·북한 국경 답사기-백두산 토퇴군(群)의 새로운 발견
1. 정계비와 흑석구의 소사(小史)
2. 임간통시도 근처의 흑석구를 답사하다
3. 흑석구의 토퇴를 발견하다
4. 동붕수·두만강 발원지와 흑석구 하류
5. 흑석구 하류에 대한 답사 및 ‘도화선’ 남쪽에서 토퇴군을 발견하다
6. ‘도화선’ 남쪽의 토퇴군에 대한 자세한 고찰
7. 흑석구가 사라지는 모습을 찾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조선족 동포 연구자인 중국사회과학원의 이화자 박사가 백두산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백두산 지역 국경선의 형성은 1712년(강희 51, 숙종 38) 백두산정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 강희제가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압록강·두만강 수원을 조사함과 동시에 백두산 천지 동남쪽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으며, 비문에는 “서쪽으로 압록이고(西爲鴨綠), 동쪽으로 토문이며(東爲土門), 분수령 상에 돌을 새겨 기재한다(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고 하였다. 이로써 조선·청 양국이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함을 재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 지역 경계를 처음 확정하였다. 이것이 백두산 육지 국경선의 최초 형태였다. 그 이후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 북부지역 민들이 대규모로 두만강 이북에 넘어가 땅을 개간하고 정착하게 되면서, 조·청 간에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조선은 토문(송화강 상류를 가리킴)이 두만과 다르다는 이른바 ‘2강설’을 제기하여 간도(오늘날 중국 길림성 연변)지역이 조선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885·1887년 조청 양국이 두 차례 공동감계(勘界)를 실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다만 두만강 상류 홍토산수(紅土山水)·석을수(石乙水) 합류처 이상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여 더 이상의 담판은 실패하였다. 이것은 이후 일본이 이 조청 간의 국경 분쟁을 이용하여 ‘간도문제’를 도발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20세기 들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두만강 이북 간도 지역의 영토가 어디에 속하는지 미정임을 주장하고 또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두만강 이북 용정(龍井)촌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1907년). 중국과 일본 양국은 2년 간의 외교교섭과 담판을 통하여 1909년에 간도협약과 ‘만주 5안(案) 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 양국이 두만강을 경계로 함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간도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특권과 동삼성 5안(탄광채굴권·철도부설권)의 이권을 챙기게 되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한·중 두 당사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체결한 것이었으며, 정식 국경조약도 아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북한 양국은 역사적으로 남겨진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교담판을 진행하였으며, 1962년에 ‘중·조 국경조약’을 체결하고 1964년에 ‘중·조 국경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국제법상 압록강·두만강과 백두산 천지를 경계로 함을 확정하였다. 그간 한국과 중국 학계의 국경사 연구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1712년 백두산정계의 성격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조·청 양국의 정계(定界)라고 보지만, 일부 중국학자들은 청나라의 일방적인 국경조사라고 보고 있다. 또한 정계비 위치에 대하여, 일부 중국학자들은 처음에 소백산에 세워졌던 것을 조선인에 의해 천지 근처로 옮겨졌다고 보는 ‘이비설(移碑說)’을 주장한다.
반면 한국학계의 백두산정계에 대한 연구는 정계비 위치에 대한 의문이 전혀 없으며, 처음부터 천지 동남쪽에 세워졌다고 본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토문·두만 2강설이다. 즉 목극등의 정계 결과 두만강을 경계로 정한 것이 아니라 송화강 상류를 경계로 정했으며, 이것이 비문에 이른바 ‘동위토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2강설은 두만강 이북 간도가 조선에 속한다는 증거로 이용되었다. 저자는 또한 1885·1887년 공동감계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게 이뤄졌고 감계 담판의 경과, 양측의 서로 다른 감계 주장 및 감계 성과에 대한 연구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계 담판이 실패하게 된 원인과 책임, 감계 결과가 그 전의 백두산정계 및 그 후의 중일 ‘간도문제’ 담판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들은 부족하다. 1907~1909년 중일간의 ‘간도문제’에 대한 연구들도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결론이 서로 다르다. 중국학자들의 경우 중국측이 약한 관계로 중국에 속해 있던 간도 영유권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가로 만주 ‘5안(案)’의 이권을 일본에 양보했다고 본다. 한국학자들의 경우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탈취한 후 만주 5안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조선에 속했던 간도 영유권을 중국에 양보했다고 본다. 반면 일본학자의 경우 중일 담판 결과 ‘윈·윈’의 결과를 얻었다고 본다.
이러한 국경사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이 책에서 문헌연구와 실지답사를 결합하여 백두산정계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2010년부터 백두산 지역에 대한 답사를 진행하였으며, 천지 동남쪽 약 4㎞에 있는 정계비터를 답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북한 양쪽에 걸쳐 있는 흑석구를 답사하여 동남안에 있는 토퇴·석퇴 유적을 확인하였으며, ‘도화선(圖和線, 도문-화룡)’ 도로 양쪽에 있는 토퇴군(群)을 새로 발견하였다. 저자는 백두산정계를 재탐구하여 목극등의 입비처, 비석의 성격 및 설책(設柵)한 두만강 수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특히 『백산도(白山圖)』를 통하여, 목극등의 입비처가 천지 동남쪽 약 4㎞에 있으며, 이른바 비석이 이동됐다는 ‘이비설’이 성립되지 않음을 논증하였다. 또 목극등 입비의 성격이 청나라 자체 내 국경조사가 아니라, 조공책봉 관계 속의 정계였음을 밝혔다. 입비처로부터 두만강 수원에 이르는 토석퇴·목책에 대해 알아본 결과 끝부분에 설치되었던 목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 부식되어 두만강 상류 경계가 모호해졌음도 밝혔다.
이 책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 수립으로부터 1964년 ‘중·조 국경의정서’의 체결까지 한중 국경사 연구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사료를 종합적으로 이용하고 또 삼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참고함과 동시에 필자의 실지답사 성과를 결합하여, 한중 국경사의 의문점과 난점에 대해 연구 수준을 한 단계 진전시킨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65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일본 홋카이도에서 중국 동북부까지 백두산 화산재에 얽힌 비밀...
일본, 한국, 중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백두산 화산 분출물에 대한 분석하고,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을 중심에 놓고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가는 책이다. 과학 교사 출신으로 캐나다와 일본에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일본 히로사키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0세기 백두산 화산재를 연구한 저자. 세계 학계에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 멸망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한 마치다 히로시의 연구에서부터 시작해, 발해 멸망과 백두산 대폭발을 둘러싸고 지질학계(화산학계)와 역사학계가 벌인 논쟁의 역사를 치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사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기원 후 900년대 언젠가 폭발해 중국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화산재와 화산 이류, 기타 화산 쇄설물로 뒤덮었을 백두산 대폭발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도, 한반도에도, 일본에도 없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의 지층 속에, 일본 동북부 지방의 지층 속에 화산재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역사 기록과 지질학적 기록의 갭은 어디서 온 것일까?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은 역사학적 기록과 지질학적 기록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일본, 한국, 중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백두산 화산 분출물에 대한 분석에서 발해 멸망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역사학적 연구 성과를 오가며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을 중심에 놓고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나간다.
목차
서론 백두산이라는 꿈을 좇아
제1부
지구 최대의 화산 폭발
제1장 백두산-도마코마이 화산재
제2장 백두산과 발해왕국
제3장 백두산 분화의 연대
제2부
백두산의 생성과 성장
제4장 10세기 백두산의 거대 분화
제5장 하얀 머리의 산
제6장 백두산 화산재의 지문
제3부
인류의 문명과 화산 분화
제7장 동아시아의 광역 테프라와 고대 문명
제8장 백두산의 미래
제9장 필드 노트
출판사 리뷰
최근 화산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아이슬란드 에이야 파야트라요크틀 화산의 분화로 화산재가 유럽을 뒤덮고, 미국 옐로스톤 국립 공원과 한반도 백두산의 화산 분화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화산학자들을 통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뿜어낸 화산재는 금융 위기 이후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아이슬란드는 물론이고 유럽의 항공망과 경제를 마비시키고 있다. 화산재뿐만 아니라 금년 초 아이티와 칠레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나 백두산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들은 인류가 새롭게 시작되는 대규모 지각 변동의 시대에 직면한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유사 이래화산 폭발이 인류 문명에 개입한 사례는 여럿 있다. 저 유명한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을 필두로, 일본의 기카이 칼데라 분화는 일본의 조몬 문화를 휩쓸어 버렸고, 18세기 말에 화산재를 분출한 라키 화산은 유럽 지역의 대규모 흉작을 유발해 프랑스 혁명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간접적 동인이 된 바 있다. 또 19세기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크라카토아 화산 폭발은 무시무시한 쓰나미와 함께 근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인류가 역사 기록을 남긴 이래 최대급의 화산 분화 중 하나로 평가되는 10세기 백두산 분화는 인류 문명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러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듯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에 대한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기원 후 900년대 언젠가 폭발해 중국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화산재와 화산 이류, 기타 화산 쇄설물로 뒤덮었을 백두산 대폭발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도, 한반도에도, 일본에도 없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의 지층 속에, 일본 동북부 지방의 지층 속에 화산재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역사 기록과 지질학적 기록의 갭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소원주의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은 역사학적 기록과 지질학적 기록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일본, 한국, 중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백두산 화산 분출물에 대한 분석에서 발해 멸망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역사학적 연구 성과를 오가며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을 중심에 놓고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나간다.
해동성국 발해는 백두산 때문에 멸망했는가?
최근 휴화산이었던 백두산의 화산 활동이 여러 가지 형태로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면서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10세기 대폭발과 발해 멸망의 관련성에 대한 이야기도 언론은 물론이고 온라인상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926년 직전에 백두산이 대규모 분화를 했고, 이때 발생한 화산재와 화산 이류, 그리고 기타 화산 쇄설물들이 발해의 동쪽 영토를 휩쓸고 파괴해 발해의 국력을 극단적으로 약화시켰고, 이 때문에 발해는 거란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계의 공식 입장은 백두산과 발해 멸망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발해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공식적인 사서인 『요사(遼史)』 등에 926년 발해 멸망 이전에 백두산 분화에 대한 기록이 없고, 동시대의 다른 기록에서도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10세기에 분출된 백두산 화산재에 대한 지질학적 분석 결과(테프라 연대학) 백두산 분화는 926년 이후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지질학자들과 재야 사학자들은 테프라 연대학에 따른 분화 연도 추정의 오차 범위가 크기 때문에 다른 증거가 발견되면 백두산 분화 연대가 926년 이전으로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해동성국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강성한 나라였던 발해가 단 한 번의 전투만 치루고 며칠 만에 거란에 멸망해 버리고 만 것을 설명하려면 백두산 분화 같은 대규모 환경 격변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백두산 인근의 옛 신라도 지역(발해가 신라와 교역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인 천진, 김택, 무수단 같은 북한 내 지역과 중국 영토 내의 훈춘(발해 5경 중 동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같은 지역을 지질학자와 고고학자가 함께 조사하면 발해 멸망과 백두산 분화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주장한다.
과학 교사 출신으로 캐나다와 일본에서 지질학을 공부한 저자는 일본 히로사키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0세기 백두산 화산재를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10세기 백두산 대폭발 시 일본까지 날아가 퇴적되었던 백두산-도마코마이 화산재를 발견해 세계 학계에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 멸망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한 마치다 히로시의 연구에서부터 시작해, 발해 멸망과 백두산 대폭발을 둘러싸고 지질학계(화산학계)와 역사학계가 벌인 논쟁의 역사를 치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발해 멸망과 백두산 대폭발의 연관성을 밝혀내기 위해 탄화목을 뒤지고, 중국에서 일본까지 수많은 지층을 파헤치며 치열하게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분화 연도를 추적해 나가는 지질학자들과 생물학자들과 생태학자들 같은 과학자들의 모습이 책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침내 일본과 중국의 과학자들은 백두산의 화산 쇄설물과 탄화목을 조사해 결국 926년 이전, 즉 발해 멸망 이전인 9세기에 백두산이 분화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발견해 낸다. 저자는 백두산 화산재를 둘러싼 연구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 낸다. 그러나 실증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이 없다는 약점을 파고드는 역사학자들의 반격은 그치지 않는다. 또한 21세기 들어 세계 지질학계에서 백두산 화산재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지층만이 아니라 호수나 동해 해저에 쌓여 있는 백두산 화산재 퇴적물(연호)에 대한 연구가 진적되면서 백두산 분화의 연도가 926년 이후인 930년경으로 좁혀지기 시작하면서 백두산 분화와 발해 멸망의 관련성을 지지하는 쪽의 세는 오히려 기울기 시작한다.
저자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자연 과학계와 인문학계의 논쟁사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면서 인문학계와 자연 과학계의 성과를 한데 아우를 수 있는 방향으로 이 문제를 발전시켜 나간다. 발해와 백두산의 연관성을 단발성 분화 사건과 발해라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의 한 정권이 붕괴한 사건의 인과 연쇄라는 좁은 틀에서 바라보지 말고, 발해로 대표되었던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 문명의 장기적 붕괴와 단절과 백두산 대폭발의 관계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문명과 화산, 화산과 문명
저자는 발해 이후 여진족이 후금을 세울 때까지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 본격적인 국가 체제나 사회 조직이 형성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것에 주목한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발해의 강역에서 철수했고, 수많은 발해 부흥 운동이 일어났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거란에 진압되거나 고려 땅으로 망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은 발해의 강역, 즉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이 새로운 국가 체제 또는 거대 사회 조직 또는 문명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처럼 넓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백두산 분화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옥토와 도시와 마을이 순식간에 화산재로 뒤덮여 부석(浮石, 화산 분출물의 일종) 사막으로 변해 버렸는데 거기에 어디 왕후장상이 거들먹거릴 수 있고, 장삼이사가 농사를 있겠는가? 발해라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 문명의 한 지역 정권이 붕괴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지역 문명 전체의 붕괴로 논의를 옮겨 시야를 넓히면 역사학계도 10세기 백두산 분화의 지질학적 사실을 받아들여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지질학계 역시 역사학계와의 의미 없는 연도 맞추기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의 바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과 북한과 중국과 일본의 자연과학계와 인문학계가 국경과 민족과 이데올로기와 분과 학문의 갭을 뛰어넘어 백두산에 대한 진정한 연구를 진행해 역사적.과학적.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지질학과 화산학이라는 전문 영역 속에 녹아 있는 통섭의 꿈과 학문에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을 이렇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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