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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바시〉, CBS 〈잘잘법〉, 〈삼프로 TV〉
기독교 교양학자 김학철 교수의 사회?정치?문화적 성서 독법
우리의 신앙 실존을 새롭게 하는 성서 읽기!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신약학자이자 기독교 교양학자인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는 이 책에서 ‘손으로 성서 읽기’를 제안한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접어두고,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한 단어 단어에 손끝을 대고 진지하게” 듣자는 것이다. 헤롯과 아켈라오의 폭정부터 유대의 지도자가 가져올 로마 종말에 관한 신탁, 핏물 가득한 유대-로마 전쟁의 참상, 바울이 아테네 아고라에서 선보인 치열한 수사학적 논증까지,
그리스-로마 세계와 유대 세계가 부딪치던 당시의 주요한 사건과 그 현장을 두루 소개하며 성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것은 ‘학문적 신학’과 ‘신앙’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몸짓이자, 경직된 믿음과 낭만적 신앙을 넘어 ‘서로 사귐과 머묾’의 관계로 들어가자고 초대하는 손짓이기도 하다.
목차
머리말
1. 신약을 읽기 전에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정경, 외경, 위경
성서의 권위
2. 언어와 지리
사울과 바울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전하는 십자가
아시아와 소아시아
아라비아로 갔다가
말씨와 맘씨
3. 성서와 로마의 통치 체제
황제의 친구와 예수의 친구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
엄격한 분과 나귀 새끼를 탄 사람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로마 시민의 살맛, 다른 이들의 죽을 맛
4. 종교와 문화
마태복음서와 유대교
1세기 유대교 갱신 운동
동방박사 이야기의 문화?종교적 정황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
5. 예수
예수의 족보
‘예수’라는 이름
임마누엘
희망의 이름
사람의 아들
예수의 치유
6. 예수의 사람들
예수의 스승 혹은 체제 기만의 피해자
예수, 그다음 예수
품, 그리고 머묾
7. 교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목사가 할 일과 집사가 할 일?
‘너희 몸이 성전인 것’과 주초
두세 사람이라도
8. 믿음과 기도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과부, 성가신 기도의 성공자인가?
9. 이해와 오해
예수와 바알세불
네가 말한다
분노인가 사랑인가
‘아빠(Abba)’는 아빠인가?
경배와 의심
맺는말: 진리의 성령을 초대하며
저자 소개
저 : 김학철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고전으로 읽는 성서-마태복음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 외 다수가 있으며, 신약학 및 기독교 교양학을 주제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 대학에서 기독교 교양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한국신약학회 편집위원장, 한국기독교교양학회 연구진흥위원장이기도 하다.
책 속으로
지질학을 연구한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강의하면 모든 학생은 그 학자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받아 적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경우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수십 년간 신학을 연구한 노(老)학자가 대학 1학년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 곧바로 손을 드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몇 개의 성서 구절을 그 자리에서 암송하고는 노교수의 견해가 ‘성서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비판한다.
신학의 학문성이 통속적 고정관념에 의해 짓눌리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학문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학문적 권위가 왜 기존의 ‘성서적 견해’를 확인해주는 선에서 자신의 사회적 발언을 멈추려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p.14
바울은 토론하고 논증하고 설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성적 동의를 구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 p.29
성서의 권위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고백이 내적인 자발성에서 비롯될 때, 또 성서의 문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시비(是非)를 가려줄 때, 그 말씀에 따라 살면서 기쁨을 느끼게 될 때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 p.46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때에 지중해 세계는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정치 형태 속에 놓여 있었다. 로마는 하나의 작은 도시국가로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특유의 통치 모델을 심화하였다.
곧, 로마제국은 황제 한 명이 엄청난 제국의 인민들을 수월히 통치하고,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광활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치리하기 위해 이른바 ‘후원자 체제(patronage)’ 모델로 이해될 수 있는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 p.76
세금 문제 및 세상 정부와 관련하여 주요 본문으로 해석되어온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어떤 교리적 세부 지침을 주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시대의 청중에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한다.
새로운 정황 속에 놓인 신앙인들은 ‘가이사의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지를 그들의 믿음과 신앙적 지혜를 통해 사람들 앞에서 대답해야 한다.
--- p.88
그는 자기가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까지 살해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헤롯 자신의 목숨과 지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헤롯을 알고 있던 한 로마인은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보다 차라리 헤롯의 돼지로 태어나는 것이 더 낫다”라고 조소하기도 하였다.
헤롯은 극심한 공포 속에서 죽었는데, 그는 자신이 죽을 때 아무도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묘안을 짜내기도 하였다.
곧 자신의 임종 즈음하여 유대의 유력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그들도 함께 죽여 예루살렘이 울음으로 가득 차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 p.109
물론 기독교는 유대교와 같지 않다. 기독교의 성공적인 이방 선교는 유대교와는 다른 무엇으로 자신을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 기초가 되었고, 예수 전승과 이야기는 랍비 유대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도록 신앙인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를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은 무조건적인 증오와 반대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누군가를 증오함으로써, 무엇에 반대함으로써 성립되는 반(反)테제 종교로 성장하지 않았다.
--- p.121~122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의 사역 배후에 활동하는 하나님에게 독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도록 한다. 독자들은 인간에게 언약의 은혜를 베풀고, 인간의 죄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의 목표를 위하여 신실하게 역사를 몰아가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족보는 말한다.
다윗 왕을 자랑치 말라. 그는 연약한 하나의 인간일 뿐 그를 세우고, 또 거두어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남자들의 역사를 보며 교만치 말라. 하나님이 쓰시는 여인들을 통해 너희의 삶을 이어졌다.
우월한 혈통에 우쭐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신 이방 여자 여리고 기생의 자손이다
. 엘리트임을 선전하지 말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떠돌이 과부가 없었으면, 너희의 생도 없었다. 정결을 떠들지 말라. 너희는 ‘우리야의 아내’를 빌려 낳은 사람들이다.
인간 사이의 예(禮)를 운운치 말라. 시아버지를 꼬드긴 며느리를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달성하신다.
예수의 족보는 세상의 질서와 선입관을 흔들며 이 땅에 침노하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p.151~152
마태는 황제의 정의, 승리, 희망에 대한 선전을 주화에서, 비문에서, 황제 제의에서, 갖가지 공식적인 모임에서 보았다. 그러고는 분명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 황제의 정의는 부정의 위에 세워진 정의이고, 그의 승리는 다른 이들의 처참한 패배가 있고서야 가능한 승리였다.
그의 희망은 다른 이들의 절망 위에 세워진 것이다. 마태는 황제 대신 예수의 정의, 승리, 희망을 선언한다.
그 정의는 약자를 향함으로써 부정의를 몰아내는 정의이며, 그의 승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전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통치는 타민족의 통치를 거부하는 ‘이방인’들에게도 희망이 된다.
--- p.166~167
예수가 그의 사람들을 부를 때, 예수는 그에 관한 역사적 정보를 얻는 데 만족한 이들을 보고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피뿐 아니라 그의 눈과 귀, 그리고 피부를 우리에게 내어주고 싶어 했다.
자신의 눈을 가진, 자신의 귀를 가진, 자신의 영혼을 가진 예수, 그다음 예수로.
--- p.19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신약성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망을 가지라고 권하지 이전의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본향 회귀 본능을 모른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역사의 저 너머에서 지금 달려오고 있다.
--- p.205~206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두세 사람이 모인 적은 무리라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구절로 오해된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에서 이 구절은 단 두 사람만이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하여 마음을 모으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마태공동체의 현실을 드러내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신앙과 이적이 불 일듯 일어나는 그때라도 신앙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본문들은 서로를 향한 비판과 비난이 격심했던 마태공동체의 정황을 반영한다.
--- p.219
출판사 리뷰
〈세바시〉, CBS 〈잘잘법〉, 〈삼프로 TV〉
기독교 교양학자 김학철 교수가 안내하는 ‘천천히, 정확하게’ 성서 읽기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신약학자이자 기독교 교양학자인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는 이 책에서 ‘손으로 성서 읽기’를 제안한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접어두고,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한 단어 단어에 손끝을 대고 진지하게” 듣자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 책에서 당대의 종교와 문화, 사회정치적 배경을 참조하면서, 성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짚어보고, 해당 본문을 오늘의 정황과 연관지어 살피기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헤롯과 아켈라오의 폭정부터 유대의 지도자가 가져올 로마 종말에 관한 신탁, 핏물 가득한 유대-로마 전쟁의 참상, 바울이 아테네 아고라에서 선보인 치열한 수사학적 논증까지,
그리스-로마 세계와 유대 세계가 부딪치던 당시의 주요한 사건과 그 현장을 두루 소개하며, 성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것은 ‘학문적 신학’과 ‘신앙’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몸짓이자
, 경직된 믿음과 낭만적 신앙을 넘어 ‘서로 사귐과 머묾’의 관계로 들어가자고 초대하는 손짓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을 때 보이는 것들
책의 내용은 성서학과 신약성서의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우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가치를 조명하는 데서 출발해(1장), 성서의 언어?지리에 대한 몇 가지 오해의 사례를 짚어내고(2장),
“로마의 통치 체제, 특별히 정치 군사적 상황에서 신약성서를 조망”한다(3장) 1세기 유대교 갱신 운동과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메시아 신탁을 보여주는가 하면(4장),
예수의 족보와 이름을 살펴보면서 그간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보완하기도 한다(5장).
예수가 만났던 사람들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장에서는 예수가 그의 사람들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6장),
예수 운동의 결과 탄생한 초대교회의 현실을 살펴본다(7장).
우리나라 개신교를 특징짓는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8장),
그리고 예수를 오해한 신약성서 속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9장).
이를 통해 독자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을 행한 과부의 부르짖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논쟁을 통해 설득을 꾀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정말 실패였는지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며 그가 회심 후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명상에 잠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경 외의 ‘외경’, ‘위경’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
성서의 문자적 무오성을 포기하면 과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믿음, 성서의 권위도 훼손되는지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줄 수 없었던 까닭,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말이 알려주는 것, 열 므나 비유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과 이 비유의 의미 등, 배경을 알 때 비로소 새롭게 열리는 의미도 발견하게 된다.
성서를 사회?정치?문화적으로 읽는다는 것
이 책은 무엇보다도 사회?정치?문화적 배경 위에서 성서를 읽는 법을 보여준다.
기존 해석을 전복하며 참신한 해석을 선보이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고, 해당 본문이 그렇게 쓰인 까닭을 성서학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찾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보니 때론 설교며 성서 공부 모임에서 종종 벌어지곤 하는 오독,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낭만적 이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가 보인 눈물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보이는 슬픔의 눈물로 이해하곤 하는데,
저자는 “예수가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겼다”(요한복음 11:33)는 구절에 쓰인 단어의 의미와 용례를 분석하면서 그 눈물이 사랑의 눈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 권세를 바로 목전에 두고도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통곡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의 눈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가 흘린 눈물이 ‘사랑의 눈물’이 아니라고 섭섭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의 사랑은 그가 흘린 피와 물이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260쪽)
논문에서나 볼 법한 분석적이고 복잡한 논의를 펴는 것도 아니다. 총독 빌라도를 다루는 글에서 로마의 후원자 체제를 소개하는 대목이 그러하듯 전문적인 내용이 다뤄지기도 하지만, 길지 않은 글에 핵심적인 사항들을 간추려 소개하기 때문에 누구든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다루는 성서 본문 역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부분 친근한 구절들인데, 통상적인 설교에서는 듣기 어려웠던 해석을 들으며 시야가 트이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의 신앙 실존을 새롭게 하는 성서 읽기
책의 맨 앞에는 렘브란트의 유화 넉 점이 실려 있는데, 모두 ‘성서’와 ‘손’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아마도 바울과 베드로로 보이는 두 노인이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열띤 논쟁을 하고 있고, 두 번째 그림에서는 한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성서를 짚어가면서 읽고 있다.
세 번째 그림에서는 고심하면서 복음서를 쓰고 있는 마태의 모습이, 마지막 그림에는 손으로 성서를 가리키는 설교자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 나타난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성서를 진지하게 대하는 이 인물들의 모습은 나름의 ‘손으로 성서 읽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애써 감동적이거나 ‘은혜로운’ 해석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손으로 성서 읽기’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할 것인데, 진리의 영인 성령은 ‘열광, 뜨거움’이 아니라 ‘날카로운 사리분별, 곧 진리에 대한 깨우침’을 통해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분이기 때문(276쪽)이다.
‘천천히 정확하게’ 성서를 읽겠다는 자못 건조한 독법을 보여주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새해 성서 읽기를 시작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교양으로서 성서를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2225584>
'46.기독교신학 (연구>책소개) > 8.목회신학(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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