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동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2.한국철학사상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동방박사님 2021. 12. 22.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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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이를 초월한 두 영혼의 아름다운 만남
한 마디로 너무나 좋은 책이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편지 모음. 조선조의 걸출한 인물이며,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의 주역들이 주고 받은 편지가 이렇게 읽기 쉬운 책으로 나오니 무척 반갑다. 이들의 편지는 철학이나 국문학 관계자들의 연구 논문에서나 인용될 뿐,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간된 적은 없었다. <퇴계집>과 <고봉집>이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 시리즈에 끼어있긴 하지만, 번역이 예스러워 일반인이 읽기에는 불편하고, 또 편지만이 아닌 다른 글까지 모두 포함된 문집이라 역시 무겁다. 하지만 이 책은 보기 쉽고 읽기 쉬운, 그러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은 가작이다.

책을 펼치니 화면이 단정하고 편안하다. 맨 앞으로 가서 목차를 살핀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 중에서 일상적인 얘기를 담은 편지들이 1부를 이루고 학문적인 쟁점을 다룬 것은 2부에 실었다. 분량은 1부가 2/3, 2부가 1/3이다. 목차만 살펴도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는지 보인다.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 쯤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에 있던 58세의 이황과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한 32살의 청년 기대승이 이처럼 나이와 공간적 한계를 넘어 13년간이나 깊은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롭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한시의 한 구절 같은 목차의 소제목들을 지나 본문으로 접어든다. 깔끔한 편집에 군데군데 붉은 색 잉크가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각주를 표시한 숫자와 본문 끝에 찍은 도장이 붉은 색이다. 사진에 조예가 깊은 편집자가 특별히 붉은 색 잉크를 써서 화면에 포인트를 주었다한다. 매력적이다.

드디어 첫 번째 편지, 편지의 제목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라 하였다. 본문 끝에 퇴계의 도장이 찍혀있으니 퇴계의 편지다. 기대승이 과거에 급제한 그 해 겨울에 보낸 편지다. 자기보다 나이가 26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이토록 겸손하고 삼가하는 문장을 쓴 퇴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장에서 고귀한 품격이 느껴진다. 게다가 번역 또한 참으로 빼어나다. 번역자가 얼마나 깊은 애정과 존경을 담아 번역했는지 독자에게까지 전해지는 그러한 번역이다. 방정하되 부드럽고 유장하되 흐트러짐이 없다.

1부는 5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연대순에 따랐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의 감회에서부터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처세의 어려움, 시에 대한 감상, 관직과 벼슬에 대한 생각, 질병과 운명, 귀향과 죽음 등 온갖 주제에 대해 서로의 심중을 털어놓는다. <깊은 물과 높은 골짜기에 임한듯> 조심하는가 하면 <이별의 정이 꿈결인 듯 되살아나>아쉬워한다. 2부는 학문을 논한 편지들로서 그 유명한 사단칠정에 대한 논변이나, 태극의 개념, 상례와 제례, 기타 왕실의 전례 등을 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갈명을 실었다. 책 뒤에는 연표와 두 사람에 대한 소개도 들어있다.

이 책은 파묻혀있던 옛 문헌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어 출간 의의가 크고, 내용이 담고 있는 뜻이 높아 배울 바가 많다. 더불어 인간의 만남이란 살과 살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의 만남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어 또한 값지다. 인터넷 서점 편집자는 매일 수십 권의 책에 치어살지만 이런 책을 만나는 보람에 피곤을 잊는다.

* <다른이미지>를 누르면 책 안을 볼 수 있습니다. 화질이 조금 떨어지는데 실제의 편집상태나 인쇄 상태는 훌륭합니다.

--- 허순용(sellavy@yes24.com)

목차

1 부
일상의 편지들


1558~1561
영혼의 교류가 시작되다

1-1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1-2 시대를 위해 더욱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1-3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
1-4 면신례의 고초 속에서
1-5 선생님을 깊이 그리워하며
1-6 벼슬과 학문 사이에서
1-7 그대와 같은 어진 벗이 학업을 이루기를
1-8 뼈 없는 벌레처럼 물렁한 사람이 될까 두려워
1-9 자기의 병을 알고 고치고자 한다면

(하략)

1562~1565
처세의 어려움을 나누며

1-16 사단칠정 논변의 어려움
1-17 우리에 갇힌 원숭이와 조롱에 갇힌 새처럼
1-18 진실한 공부를 방해하는 세 가지
1-19 승정원의 승지가 되어
1-20 처세의 마땅함에 대해
1-21 사직하고 물러나는 일의 어려움
1-22 처신하는 방법이 달라
1-23 만장 절벽에 마주 서서, 화살처럼 곧게
1-24 둘째 아이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1-25 몸을 마치는 날까지의 근심

(하략)

1566~1567
서울과 의주 사이에서

1-33 인심도심에 대한 설
1-34 두 가지 관직에서는 물러났으나
1-35 사단칠정 후설과 총설을 드리며
1-36 여러 번 관직을 옮기며
1-37 사단칠정 총설과 후설의 안목이 두루 바르니
1-38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
1-39 잠시의 틈조차 내지 못하며
1-40 도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1-41 제 이름을 빌어 나도는 책을 없애 주시길
1-42 환후가 여전하시다니

(하략)

1568~1569
병과 귀향의 와중에

1-53 두 가지 고민과 두 가지 근심
1-54 아직까지 강릉에 가지 못하여
1-55 분부하신 일은 알아보고 추진하겠습니다
1-56 성학십도를 보냅니다
1-57 성학십도가 매우 정밀하고 정확하니
1-58 그대의 가르침을 받으니
1-59 어제 선생님을 뵙고서 인사드리니
1-60 고증이 소홀했던 부분들을 깨우쳐 주시니
1-61 바르게 지키며 질박한 것을 높게 여겨
1-62 앞 시대의 전적을 널리 참고하여
1-63 조정암이 임금께 아뢴 글의 초본을 보내니
1-64 오늘을 정암의 시대와 비교해 보니
1-65 성학십도와 차계는 어제 저녁에 바쳤습니다
1-66 임금의 친부모에 대한 호칭을 논하다
1-67 서명도를 고치다 1
1-68 서명도를 고치다 2
1-69 서명도를 고치다 3
1-70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
1-71 참으로 복잡한 내막이 있는데
1-72 굳이 오실 것 없습니다
1-73 과회공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1-74 찾아뵈려고
1-75 벼슬을 떠나는 도리 1
1-76 벼슬을 떠나는 도리 2
1-77 벼슬을 떠나는 도리 3
1-78 봄 얼음을 밟는 것 같이 두려운 마음으로

(하략)

1570
마지막 해의 편지

1-101 세상에 드러나는가의 여부
1-102 글은 더욱 맛나고, 가난은 더욱 즐거우니
1-103 술을 굳게 다스리지 못하면
1-104 마음의 중심이 불안하여 생긴 허물
1-105 공경과 방자함을 같이 행하는 도가 어디 있습니까
1-106 호남과 영남으로 더욱 멀어지니
1-107 주신 말씀 제 병에 맞는 약 아닌 것 없으니
1-108 한가한 가운데 ?감춘부?를 읽으니
1-109 늙은이의 어둡고 막힌 생각 씻어 주시기를
1-110 사물의 이치에 이르는 길
1-111 벼슬 없는 신세
1-112 고친 심통성정도에 대한 기명언의 논의에 답함
1-113 제 몸 보존하겠다는 생각 접은 지 오래
1-114 제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2 부
학문을 논한 편지들


사단칠정을 논한 편지들

2-1 그대의 논박을 듣고서
2-2 퇴계에게 올린 사단칠정설
2-3 사단칠정이 이기로 나뉜다고 한 논설
2-4 고봉이 퇴계에게 답해 사단칠정을 논한 글
2-5 논의의 시말을 드러내고자
2-6 제1서를 고친 글
2-7 퇴계가 답한 제2서
2-8 후론에 대해

(하략)

태극을 논한 편지들
3-1 일재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들
3-2 태극을 논한 편지들을 보여준 데 대한 답서
3-3 편지 끝에 태극에 대한 편지를 논한 글에 대해

상례나 제례의 격식을 논한 편지들

4-1 악수에 대한 설과 맏며느리가 제사를 주재하는 문제
4-2 주제설
4-3 별지 : 체천의 예에 대하여
4-4 악수설
4-5 상례와 격식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국가나 왕실의 전례를 논한 편지들

5-1 조정의 의례 제도에 관한 몇 가지 논의
5-2 형제가 대를 이었을 때 서로 복을 입는 것과
후부인이 복을 입는 데 대한 논의
5-3 칭위에 대하여
5-4 문소전과 덕흥군의 가묘에 관한 논의
5-5 문소전과 덕흥군의 가묘에 대한 논의에 답하며
5-6 전전에 위패를 모시는 규칙에 대해 1
5-7 전전에 위패를 모시는 규칙에 대해 2
5-8 전전에 위패를 모시는 규칙에 대해 3

(하략)

묘갈명을 논한 편지들

6-1 묘갈문을 삼가 올립니다
6-2 별지 : 갈문에 대한 몇 가지 품목들에 대해
6-3 갈문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6-4 갈문에 대한 사사로운 몇 가지 생각을 다시 보냅니다
6-5 다시 고치며 선생님의 결정을 기다립니다

일러두기
옮긴이의 글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주고받은 13년 동안의 일들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에 대한 짧은 소개
 

저자 소개 

저 : 퇴계 이황 (退溪 李滉 (1501-1570))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

저 : 김영두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 전기 도통론의 전개와 문묘종사」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 분야는 조선 중기 사상사이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조선 중기 성리학을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조선 전기 도통론道統論의 전개와 문묘종사文廟從祀」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제44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수상)와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가 있다.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조선시대 사람들의 글을 풀어쓰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책 속으로

명언에게 답합니다.1-18 퇴계가 고봉에게

구경서具景瑞1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전해 준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이 잘 갖추어져 있어, 먼 곳에 막혀있어 답답했던 마음이 얼음 녹고 안개 걷히는 것보다 더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산간 벽지에 살고 있어서 서울 소식을 듣는 경우가 드물어, 그사이 고향에 내려갔다가 병으로 사직한 것과 명을 받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일 같은 곡절을 모두 알지 못했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따라서 한번 시험하려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벼슬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고, 오늘날의 사람이 옛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경력을 쌓으면 더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늙고 미천한 저는 병으로 인해 한가히 지내고 있으니, 임금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다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책이 지금까지 해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봄 소명을 받았을 때 사직을 청한 뒤로는 감히 다시 사직을 청하지 못했으니, 스스로의 마음만 불안할 뿐 아니라, 듣자니 여론도 사직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여론이 매우 당연하지만 지난날에 사직으로 인해 낭패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 움츠리고 조심되어 감히 사직의 뜻을 밝히지 못하고,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의리에도 맞지 않고 염치도 모르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지난 겨울 자중子中이 제게 왔을 때, 그대가 제 편지에 답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이미 말했습니다. 말재주만으로 경쟁하다시피 하는 것은 참으로 무익하고, 진실한 공부는 매번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다가 말다가 하는 잘못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기질과 습관의 치우침, 물욕의 가림, 세상사의 구속,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산중이라서 물욕의 가림과 세상사의 구속은 적지만, 치우친 기질과 습관은 바로잡기 어려워, 뜰 앞을 서성이면서 매번 강직한 친구의 도움 받기를 생각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대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큰 보물을 얻은 것 같아, 펴서 읽어 보고는 깊이 감복한 나머지, 늙고 혼미하다는 이유로 감히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도 지난날 스스로 방종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에 와서 사람들이 그대의 풍모를 상상하고 흠모하기를 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부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다 하여, 마음속으로 너무 근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내 주신 별지는 저의 어리석음을 많이 깨우쳐 주니, 천하의 서적을 다 읽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우 다행입니다.
경서가 돌아가는 길에 이 글을 부칩니다. 이만 줄이오니 살펴 주시기를 빕니다. 삼가 절하며

답합니다.
계해 2월 24일, 황이 머리 숙입니다.
--- pp. 101 ~ 103
제가 세상을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본다고 하는 말을 들으셨다는데, 저는 그런 마음이 없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때에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해 남들의 험담을 불러 일으켰으니, 참으로 아프게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치우친 성품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을 삼가는 데 모자라고 몸을 단속하는 데 소홀한 병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평소에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라 늘 경계하고 반성했음에도 그런 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뿌리가 깊고 두텁지 못한 까닭에, 일이 있을 때마다 드러나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록 뿌리가 얕지만 그 위에 노력을 더한다면 아마 조금은 나아질 것입니다.

술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근래에 병이 잦았기 때문에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을 기르고 덕德을 기르는 데 모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굳게 절제하여 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p. 317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서 잘못 천거했다고 다투어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잘못 천거했다는 뉘우침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 같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평생 뛰어난 재주를 마구 써 버리고 방탕한 습관에 묶이며, 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놀이와 방종에 빠져서, 마침내 성현의 세계와 수만리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의 공격이 진실로 사람을 제대로 안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비록 잘못 천거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해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 p. 306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 p.34
저는 늘 말하기를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 p. 29

출판사 리뷰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가 시작되다
26살 차이, 13년 동안의 편지

지금으로 비유하면, 적어도 사회면 톱기사 감이다. “서울대 총장, 고등고시 합격자와 편지로 열띤 토론을 주고받다.” 1558년 조선 명종 13년, 퇴계의 당시 지위는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되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반면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로, 지금으로 친다면 겨우 고등고시 합격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이로 보아도,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에 불과했다. 무려 26살 차이다. 그러나 청년 고봉은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당시의 대학자이자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퇴계를 찾아가, 평소 자신이 가진 철학적 소신들을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했다. 고봉의 이런 파격적 행동은 오로지 열정과 패기만으로 세속적 편견을 뛰어넘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더 놀라운 건 퇴계의 대응 방식이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한마디로 도저히 맞대응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건만, 퇴계는 청년 고봉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어 주었다. 청년 고봉의 두려움 없는 열정을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급제를 달성하고 귀향하는 고봉에게 처음으로 먼저 편지를 띄웠다. 마치 첫 만남 이후 퇴계는 고봉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 듯하다. 나이나 직위나 경륜으로 볼 때, 도저히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은 이렇게 시작하여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13년 동안에 걸쳐 끝없는 애정과 상호 존중의 자세로 편지를 나누었다. 우리 역사상 이들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편지로 우정과 학문을 나눈 사실을 다시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지식인들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했고, 사제간의 닫힌 관계를 확장했던 것이다.

일상의 편지로 철학을 논하다
‘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

그들은 당시 가장 일상적인 소통 수단이었던 편지를 통해, 삶의 사소한 문제부터 가장 첨예한 철학적 논쟁까지 모두 나눴다. ‘자기완성’이라는 숙제는 끝없는 것이고, 대학자나 청년 학자에게 모두 절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모든 세속적 통념을 초탈하면서, 편지로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그들은 세속에서 관리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모순을 서로 이해했고, 학자와 관리의 길을 함께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로 공감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고뇌는 오늘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방기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언제 편지로 철학을 나눈 적이 있으며, 시도해 보려고 했는가?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47논쟁)은 조선조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유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적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 세대가 수려하게 풀어낸, 우리 고전의 새로운 번역
잊혀진 우리 철학자들의 편지를 온전한 한글로 다시 읽다

퇴계와 고봉, 그들은 우리들 삶의 또 다른 거울이고, 그들의 편지는 우리들이 까맣게 잊어 버린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편지는 지금까지 거의 접근 불가능의 지역에 방치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한 젊은 학자의 섬세한 언어를 통해, 그들의 편지를 온전한 한글로 배달하고자 한다. 이제 한글 세대가 새롭게 읽고 우리말로 다시 잘 풀어낸, 우리의 고전을 만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