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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가와 요코가 말하는
나를 만든 책, 내가 만든 이야기”
ㆍ 왜 읽나요? ㆍ 이야기가 내게 무슨 소용이죠? ㆍ 소설은 어떻게 쓰나요?
이야기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가장 섬세한 대답
‘이야기’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오가와 요코 에세이집. “첫 문장만 나오면 그다음은 술술 풀릴 텐데.” 글쓰기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첫 문장은 어떻게 찾아오는 걸까? 첫 문장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여기, 글을 쓸 때 언어는 오히려 제일 나중에 찾아온다며 첫 문장이 발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세심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세계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 오가와 요코의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오가와 요코는 어떤 것이 모티프가 되겠다고 직감하면 자료를 수집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선은 장소에 대한 영상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키워드들을 연결하는 다리를 마치 무지개처럼 놓으면 캐릭터의 목소리 톤과 행동거지, 인물들 간의 관계가 눈에 보일 듯 그려진다고. 자신의 출세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중심으로 ‘나는 이런 식으로 써요’라고 창작 과정을 디테일하게 조곤조곤 이야기하기에 글쓰기 팁을 강변하는 작법서보다 도리어 곱씹어보고 적용해볼 만한 꺼리가 많다.
총 3부로 이뤄진 책의 2부가 창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1부에서는 책과 이야기가 개개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 일상에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3부에서는 ‘첫 독서’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오롯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첫 문장’을 만난 독자로서의 체험을 엿볼 수 있다. 읽을 때나 쓸 때나 나에게 유의미한 ‘첫 문장’을 만나고 싶다면 작가로서 그리고 독자로서의 체험담을 은근하게 풀어놓는 오가와 요코의 말에 귀 기울여보기 바란다.
나를 만든 책, 내가 만든 이야기”
ㆍ 왜 읽나요? ㆍ 이야기가 내게 무슨 소용이죠? ㆍ 소설은 어떻게 쓰나요?
이야기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가장 섬세한 대답
‘이야기’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오가와 요코 에세이집. “첫 문장만 나오면 그다음은 술술 풀릴 텐데.” 글쓰기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첫 문장은 어떻게 찾아오는 걸까? 첫 문장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여기, 글을 쓸 때 언어는 오히려 제일 나중에 찾아온다며 첫 문장이 발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세심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세계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 오가와 요코의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오가와 요코는 어떤 것이 모티프가 되겠다고 직감하면 자료를 수집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선은 장소에 대한 영상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키워드들을 연결하는 다리를 마치 무지개처럼 놓으면 캐릭터의 목소리 톤과 행동거지, 인물들 간의 관계가 눈에 보일 듯 그려진다고. 자신의 출세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중심으로 ‘나는 이런 식으로 써요’라고 창작 과정을 디테일하게 조곤조곤 이야기하기에 글쓰기 팁을 강변하는 작법서보다 도리어 곱씹어보고 적용해볼 만한 꺼리가 많다.
총 3부로 이뤄진 책의 2부가 창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1부에서는 책과 이야기가 개개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 일상에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3부에서는 ‘첫 독서’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오롯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첫 문장’을 만난 독자로서의 체험을 엿볼 수 있다. 읽을 때나 쓸 때나 나에게 유의미한 ‘첫 문장’을 만나고 싶다면 작가로서 그리고 독자로서의 체험담을 은근하게 풀어놓는 오가와 요코의 말에 귀 기울여보기 바란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이야기의 역할
어떤 만남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시작
누구나 사는 동안 이야기를 짓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죽음이 삶이 되는 마음의 작용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슬픔으로 빚어내는 이야기의 고귀함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작가는 소설 뒤를 쫓아간다
2부 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문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언어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한 줄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그리운 마음으로 폐허에 서서
작가는 스토리를 짓지 않고 포착한다
소설은 과거를 재현한다
모든 것을 관찰한다
3부 이야기와 나
첫 독서의 감촉
나를 구원해준 이야기
세계를 형성하는 큰 흐름을 배우다
선택받지 않았어도 모두, 특별한 사람
전체의 일부이자 유일한 존재
처음 실감한 죽음
고독은 사람을 성장케 한다
모호함 속에 있는 진실
책으로 같은 생각을 공유하다
옮긴이의 말
이 책에 등장하는 책
1부 이야기의 역할
어떤 만남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시작
누구나 사는 동안 이야기를 짓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죽음이 삶이 되는 마음의 작용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슬픔으로 빚어내는 이야기의 고귀함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작가는 소설 뒤를 쫓아간다
2부 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문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언어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한 줄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그리운 마음으로 폐허에 서서
작가는 스토리를 짓지 않고 포착한다
소설은 과거를 재현한다
모든 것을 관찰한다
3부 이야기와 나
첫 독서의 감촉
나를 구원해준 이야기
세계를 형성하는 큰 흐름을 배우다
선택받지 않았어도 모두, 특별한 사람
전체의 일부이자 유일한 존재
처음 실감한 죽음
고독은 사람을 성장케 한다
모호함 속에 있는 진실
책으로 같은 생각을 공유하다
옮긴이의 말
이 책에 등장하는 책
책 속으로
최종적으로 제가 출판을 결심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 책을 읽고 있는 지구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상상하곤 합니다. 조그만 상자 모양 종이 다발을 손에 들고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 또는 드러누워 있을 뿐, 간혹 종이 한 장이 넘겨지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저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는 광경.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기다려봐야, 새로운 제품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 인간들은 이렇듯 소소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싶군요.
책을 읽을 때 극적으로 요동치는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효과를 숫자로 나타낼 수도 없죠. 이 책에서 저는, 그렇기에 책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중요한 증명이기도 하다고 거푸 얘기합니다.
--- pp.6-7,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예를 들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황당한 현실에 부딪쳤을 때, 사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이리저리 바꿔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또 현실을 기억할 때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하는 등,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게 변형해서 기억합니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기 안에 쌓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p.26,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이쪽으로 가자, 이렇게 세계를 넓혀가자.’
그렇게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이끌어주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한 작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한계가 뻔하니까, 작가가 앞서서 등장인물을 휙휙 끌어당기면서 쓰는 소설은, 저는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생각을 넘어서는, 예상할 수 없는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소설은 쓰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때로, 소설을 쓰면서도 지금 쓰고 있는 내가 가장 뒤를 쫓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도, 제 앞에 박사와 가사 도우미와 루트가 있어요. 완전수와 우애수도 제 앞에 있고요. 이미 있는 것을 뒤에서 열심히 쫓아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저의 발자취가 소설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60,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정말 슬플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하죠. 그러니 소설 안에 ‘슬프다’ 하고 쓰고 나면, 진정한 슬픔을 다 그릴 수 없어요. 언어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마음이 그 너머로 날아가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실은 슬프지 않은 거예요. 슬프다고 느낄 때의 사람 마음속이 어떤지는, 사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그릇을 사용해서 언어로 표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20자 이내로 대답해보세요.’
그런 질문이 있고, 스무 글자의 대답이 떠오른다면, 그 소설은 소설로 쓰일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주제만 확실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하는 생각은 환상이에요. 주제는 소설을 읽는 사람 각자가 느끼거나, 평론가들이 논하는 것이지, 쓰는 사람 본인이 플래카드에 써서 드높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pp.81-82,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무슨 사건이 생긴다. 그걸 표현한다. 종이에 재현한다. 이것이 언어의 역할입니다. 처음에 언어가 있고, 거기에 맞춰 사건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어요. 따라서 저는 과거를 보는 것이 소설을 쓰는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때, 저는 때로 인류, 인간의 저 끄트머리에서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인간이 산을 오르고 있다 치면, 선두에 서서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가라는 역할을 하는 인간은 제일 끝에서 걷고 있다는 말이에요.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흘린 것, 잃어버린 것,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잃어버린 사람조차 자기가 그런 걸 갖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그것이 이 세상에 확실하게 존재했다는 표시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남기는 것이죠. 그런 것 같아요.
--- pp.93-94,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저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나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특별하다는 점에 의문을 품은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났는데, 인간이 특별한 진짜 의미를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배웠다고 봐요.
부자로 태어나거나 왕자에게 선택받아서 특별한 게 아니죠. 자기만의 비밀 정원을 가질 수 있고, 자기가 자기이도록 지탱해주는 장소를 만들 수 있고, 그 장소를 가슴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특별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나도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책은 나도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고, 그걸 열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쉽게 말해서, 이 책과의 만남은 제가 자아를 의식하게 된 큰 체험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p.129,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저는 이 두 권의 책을 읽고서 정반대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브르 곤충기》에서는, 제가 거대하고 위대한 전체의 작은 일부라는 생각. 한편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서는 나는 다른 누가 아니며 특별한 한 사람이라는 생각. 이 둘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게 필요하고 또 공존해야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저는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면서, 자기가 모든 것이 아니라 몸을 맡기기에 충분한 전체의 일부라고 느낌으로써 안심할 수 있었고, 타인을 용서하고, 불운을 받아들이고, 우연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독서를 통해 한 관문을 행복하게 통과했습니다.
--- p.135,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읽는 이를 곧장 그곳으로 데려가는 장소의 설정에서 시작해 비로소 이야기가 확대되는 오가와 요코의 작품을 읽으면서 괴테가 말한 ‘자유로운 경지’가 어쩌면 ‘텅 빔’이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뜻으로 읽힌 것은, 이 강연집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에서 누누이 강조되듯, 다소곳이 두 손을 허공으로 내밀고 이미 있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찾아와주기를 겸허히 기다리는 그녀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까마득히 먼 옛날에 이미 거기에 새겨놓은 이야기가 그녀의 두 손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녀는 한없이 ‘텅 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
‘만약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 책을 읽고 있는 지구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상상하곤 합니다. 조그만 상자 모양 종이 다발을 손에 들고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 또는 드러누워 있을 뿐, 간혹 종이 한 장이 넘겨지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저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는 광경.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기다려봐야, 새로운 제품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 인간들은 이렇듯 소소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싶군요.
책을 읽을 때 극적으로 요동치는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효과를 숫자로 나타낼 수도 없죠. 이 책에서 저는, 그렇기에 책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중요한 증명이기도 하다고 거푸 얘기합니다.
--- pp.6-7,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예를 들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황당한 현실에 부딪쳤을 때, 사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이리저리 바꿔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또 현실을 기억할 때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하는 등,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게 변형해서 기억합니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기 안에 쌓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p.26,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이쪽으로 가자, 이렇게 세계를 넓혀가자.’
그렇게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이끌어주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한 작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한계가 뻔하니까, 작가가 앞서서 등장인물을 휙휙 끌어당기면서 쓰는 소설은, 저는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생각을 넘어서는, 예상할 수 없는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소설은 쓰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때로, 소설을 쓰면서도 지금 쓰고 있는 내가 가장 뒤를 쫓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도, 제 앞에 박사와 가사 도우미와 루트가 있어요. 완전수와 우애수도 제 앞에 있고요. 이미 있는 것을 뒤에서 열심히 쫓아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저의 발자취가 소설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60,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정말 슬플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하죠. 그러니 소설 안에 ‘슬프다’ 하고 쓰고 나면, 진정한 슬픔을 다 그릴 수 없어요. 언어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마음이 그 너머로 날아가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실은 슬프지 않은 거예요. 슬프다고 느낄 때의 사람 마음속이 어떤지는, 사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그릇을 사용해서 언어로 표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20자 이내로 대답해보세요.’
그런 질문이 있고, 스무 글자의 대답이 떠오른다면, 그 소설은 소설로 쓰일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주제만 확실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하는 생각은 환상이에요. 주제는 소설을 읽는 사람 각자가 느끼거나, 평론가들이 논하는 것이지, 쓰는 사람 본인이 플래카드에 써서 드높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pp.81-82,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무슨 사건이 생긴다. 그걸 표현한다. 종이에 재현한다. 이것이 언어의 역할입니다. 처음에 언어가 있고, 거기에 맞춰 사건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어요. 따라서 저는 과거를 보는 것이 소설을 쓰는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때, 저는 때로 인류, 인간의 저 끄트머리에서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인간이 산을 오르고 있다 치면, 선두에 서서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가라는 역할을 하는 인간은 제일 끝에서 걷고 있다는 말이에요.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흘린 것, 잃어버린 것,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잃어버린 사람조차 자기가 그런 걸 갖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그것이 이 세상에 확실하게 존재했다는 표시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남기는 것이죠. 그런 것 같아요.
--- pp.93-94,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저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나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특별하다는 점에 의문을 품은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났는데, 인간이 특별한 진짜 의미를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배웠다고 봐요.
부자로 태어나거나 왕자에게 선택받아서 특별한 게 아니죠. 자기만의 비밀 정원을 가질 수 있고, 자기가 자기이도록 지탱해주는 장소를 만들 수 있고, 그 장소를 가슴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특별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나도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책은 나도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고, 그걸 열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쉽게 말해서, 이 책과의 만남은 제가 자아를 의식하게 된 큰 체험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p.129,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저는 이 두 권의 책을 읽고서 정반대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브르 곤충기》에서는, 제가 거대하고 위대한 전체의 작은 일부라는 생각. 한편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서는 나는 다른 누가 아니며 특별한 한 사람이라는 생각. 이 둘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게 필요하고 또 공존해야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저는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면서, 자기가 모든 것이 아니라 몸을 맡기기에 충분한 전체의 일부라고 느낌으로써 안심할 수 있었고, 타인을 용서하고, 불운을 받아들이고, 우연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독서를 통해 한 관문을 행복하게 통과했습니다.
--- p.135,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읽는 이를 곧장 그곳으로 데려가는 장소의 설정에서 시작해 비로소 이야기가 확대되는 오가와 요코의 작품을 읽으면서 괴테가 말한 ‘자유로운 경지’가 어쩌면 ‘텅 빔’이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뜻으로 읽힌 것은, 이 강연집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에서 누누이 강조되듯, 다소곳이 두 손을 허공으로 내밀고 이미 있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찾아와주기를 겸허히 기다리는 그녀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까마득히 먼 옛날에 이미 거기에 새겨놓은 이야기가 그녀의 두 손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녀는 한없이 ‘텅 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
--- p.156, 「옮긴이의 글」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나는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좋겠다”
내가 써내려가는 서사, 나를 구원하는 이야기
‘소설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만 쓰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선망하면 선망할수록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오가와 요코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문예과에 진학했지만, 좋아하는 소설가들을 떠올리면 자기 앞에 높다란 장벽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뷔를 하고 작품을 한 편 한 편 더해가면서 그 생각이 바뀌어갔다고 한다. ‘이야기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과 인생 속에도 얼마든지 있는 게 아닐까,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야기를 짓고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백 퍼센트 객관적인 세계란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과 인생을 납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활용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현실에 부딪힐 때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이리저리 바꿔서 받아들이고,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해서 기억한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기 안에 쌓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가와 요코의 이 말은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정의하고 마음을 다잡는 말이기도 하지만, 읽고 쓰는 사람을 에둘러 응원하는 말로도 읽힌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우리 모두는 쓰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쓰고 싶은 마음 앞에서 망설이지 말라고.
“언어는 나중에 찾아온다”
착상부터 스토리텔링까지,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
단정함과 겸손함. 오가와 요코 에세이의 특징이다. 강연을 기반으로 했기에 이번 책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시종일관 낮은 자세로 자신의 창작 과정을 친절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를테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창작 과정은 이렇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서정적인 측면을 본 이후 ‘아, 수학도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착상 이후에는 자료 조사 차원에서 수학자를 다룬 전기와 수학 관련 도서를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애수’의 존재를 발견했고, 등장인물이 이 우애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오가와 요코는 그 순간 이야기가 향해야 할 방향이 단숨에 명확해지고, 소설 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제가 무슨 재주를 피웠다면, 수학자와 아이를 이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도, 여러 수학자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이를 좋아한 수학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아서였지, 수학자와 아이가 최선의 조합이라고 제가 창의적으로 생각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 대목도 주목해볼 만하다. 오가와 요코는 앞서 말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첫 문장’이 찾아오고, 소설이 최종적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나중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어화 이전에 영상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선명하고 중층적인 영상”이 떠오른 이후에야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은 어째서 오가와 요코의 많은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는지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이렇게 써야 한다, 저렇게 쓰면 더 좋다, 하는 식의 글쓰기 도서는 많다. 플롯, 스토리, 캐릭터, 문장 등 글의 세세한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하는 책도 많다. 하지만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사례로 들어 ‘작가의 머릿속’을 훤히 보여주는 책은 없다.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아직 키보드는 치고 있지 않은 고요한 시간, 오가와 요코의 사근사근한 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글쓰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먼지만큼 작지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
책으로 배운 ‘나에서 벗어나 나로 서기’
“제가 출판을 결심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의 무게중심은 ‘쓰기’보다 ‘읽기’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 1부에서 개개인의 삶에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독서의 유용성을 말했다면, 3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독서 이력을 하나씩 들춰 보고 돌아보면서 어떤 책이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한다.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두 도서는 『파브르 곤충기』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파브르 곤충기』를 읽으면서는 드넓고 위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작디작은 일부라는 생각을 하고,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통해서는 자신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나에게서 벗어나 나로 서기’라고 할 만하다.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이 두 가지를 오가와 요코는 책에서 배웠고, 독자에게도 책을 통해 자신을 단단하게 세워가고 넓혀가기를 권한다.
내가 써내려가는 서사, 나를 구원하는 이야기
‘소설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만 쓰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선망하면 선망할수록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오가와 요코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문예과에 진학했지만, 좋아하는 소설가들을 떠올리면 자기 앞에 높다란 장벽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뷔를 하고 작품을 한 편 한 편 더해가면서 그 생각이 바뀌어갔다고 한다. ‘이야기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과 인생 속에도 얼마든지 있는 게 아닐까,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야기를 짓고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백 퍼센트 객관적인 세계란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과 인생을 납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활용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현실에 부딪힐 때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이리저리 바꿔서 받아들이고,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해서 기억한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기 안에 쌓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가와 요코의 이 말은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정의하고 마음을 다잡는 말이기도 하지만, 읽고 쓰는 사람을 에둘러 응원하는 말로도 읽힌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우리 모두는 쓰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쓰고 싶은 마음 앞에서 망설이지 말라고.
“언어는 나중에 찾아온다”
착상부터 스토리텔링까지,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
단정함과 겸손함. 오가와 요코 에세이의 특징이다. 강연을 기반으로 했기에 이번 책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시종일관 낮은 자세로 자신의 창작 과정을 친절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를테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창작 과정은 이렇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서정적인 측면을 본 이후 ‘아, 수학도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착상 이후에는 자료 조사 차원에서 수학자를 다룬 전기와 수학 관련 도서를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애수’의 존재를 발견했고, 등장인물이 이 우애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오가와 요코는 그 순간 이야기가 향해야 할 방향이 단숨에 명확해지고, 소설 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제가 무슨 재주를 피웠다면, 수학자와 아이를 이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도, 여러 수학자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이를 좋아한 수학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아서였지, 수학자와 아이가 최선의 조합이라고 제가 창의적으로 생각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 대목도 주목해볼 만하다. 오가와 요코는 앞서 말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첫 문장’이 찾아오고, 소설이 최종적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나중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어화 이전에 영상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선명하고 중층적인 영상”이 떠오른 이후에야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은 어째서 오가와 요코의 많은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는지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이렇게 써야 한다, 저렇게 쓰면 더 좋다, 하는 식의 글쓰기 도서는 많다. 플롯, 스토리, 캐릭터, 문장 등 글의 세세한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하는 책도 많다. 하지만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사례로 들어 ‘작가의 머릿속’을 훤히 보여주는 책은 없다.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아직 키보드는 치고 있지 않은 고요한 시간, 오가와 요코의 사근사근한 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글쓰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먼지만큼 작지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
책으로 배운 ‘나에서 벗어나 나로 서기’
“제가 출판을 결심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의 무게중심은 ‘쓰기’보다 ‘읽기’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 1부에서 개개인의 삶에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독서의 유용성을 말했다면, 3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독서 이력을 하나씩 들춰 보고 돌아보면서 어떤 책이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한다.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두 도서는 『파브르 곤충기』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파브르 곤충기』를 읽으면서는 드넓고 위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작디작은 일부라는 생각을 하고,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통해서는 자신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나에게서 벗어나 나로 서기’라고 할 만하다.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이 두 가지를 오가와 요코는 책에서 배웠고, 독자에게도 책을 통해 자신을 단단하게 세워가고 넓혀가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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