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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철이었는가, 유성룡이었는가?
4백년 묵은 기억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
“몇 년 전, 나는 어떤 역사학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역사대중화를 이끈다는 유명한 사람, 이덕일이었다. 막상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논쟁은 2합(合)을 넘기지 못했다. 생산적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논쟁은 종결되었다. 논쟁의 성과나 가치에 대한 순진한 기대도 그때 접었다.”
그러나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은 이 스쳐지나간 논쟁에서 소중한 역사학의 논제를 건져 낸다. 기축옥사의 어떤 기억을 둘러싼 변주.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에 벌어진 조선시대 가장 큰 옥사 중의 하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이발이라는 사람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고 말았다. 여든이 넘은 노인과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지나치게 혹독한 국문이라는 여론의 지탄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추국청의 책임자인 위관 역시 지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사건 당시 위관이 정철인가? 유성룡인가? 이 책은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2009년 논쟁 당시,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그 사건이 1590년(선조 23) 정철이 위관이었을 때라 주장하였고, 이 책의 저자인 오항녕은 1591년(선조 24) 유성룡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덕일의 반론과 오항녕의 재반론으로 이어진 논쟁 이후, 저자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덕일이 내세운 주장의 연원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400년이 넘은 이력을 가진 주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묘하게 기억이 뒤틀려온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4백년 묵은 기억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
“몇 년 전, 나는 어떤 역사학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역사대중화를 이끈다는 유명한 사람, 이덕일이었다. 막상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논쟁은 2합(合)을 넘기지 못했다. 생산적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논쟁은 종결되었다. 논쟁의 성과나 가치에 대한 순진한 기대도 그때 접었다.”
그러나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은 이 스쳐지나간 논쟁에서 소중한 역사학의 논제를 건져 낸다. 기축옥사의 어떤 기억을 둘러싼 변주.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에 벌어진 조선시대 가장 큰 옥사 중의 하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이발이라는 사람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고 말았다. 여든이 넘은 노인과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지나치게 혹독한 국문이라는 여론의 지탄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추국청의 책임자인 위관 역시 지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사건 당시 위관이 정철인가? 유성룡인가? 이 책은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2009년 논쟁 당시,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그 사건이 1590년(선조 23) 정철이 위관이었을 때라 주장하였고, 이 책의 저자인 오항녕은 1591년(선조 24) 유성룡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덕일의 반론과 오항녕의 재반론으로 이어진 논쟁 이후, 저자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덕일이 내세운 주장의 연원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400년이 넘은 이력을 가진 주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묘하게 기억이 뒤틀려온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목차
프롤로그
1장 400년 엇갈린 기억
2장 서애와 송강의 일생
3장 선조 23년? 24년?
4장 추국청이라는 공간
에필로그
주
찾아보기
1장 400년 엇갈린 기억
2장 서애와 송강의 일생
3장 선조 23년? 24년?
4장 추국청이라는 공간
에필로그
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안방준은 송강이 옥사를 처리할 때 과실이 있었고, 또 남들이 자신에게 혐의를 둘까 지레 위축되어 원칙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미온적으로 처리하여 오히려 선조에게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말을 들었던 점까지 둘 다 드러내고자 했다. (중략) ‘다음대로 결정한다’는 선조의 말은, 이발이 귀양 가다가 다시 압송되었을 때 송강이 “경연관 중에서 정여립 같은 자가 나온 것도 이미 불행한 일이온데, 어찌 정여립이 둘씩이나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이발에게는 반역의 혐의가 없다고 말한 데 대한 선조의 힐난이었다. 정여립도 홍문관 수찬으로 경연관을 지냈고, 이발 역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경연관을 지냈기 때문에 송강이 이렇게 말한 것인데, 선조는 송강이 사안을 축소한다고 본 것이다. 안방준은 이런 송강의 태도를 심수경만 못하다고 판단했다. 심수경은 좌의정이던 송강 대신 우의정으로 위관을 맡았다.
안방준의 편찬 원칙 및 태도는 서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는 왜적과 화친을 주장했다고 서애를 비난하는 주장에 대해, 그런 주장은 서애가 영의정으로 논의를 주관했던 것을 두고 편파적으로 헐뜯는 데 불과하다고 반론하면서도 위관이었을 때 이발의 노모 죽음을 방관한 것은 실수라고 지적했다. - 본문 180~181쪽 중에서
이렇듯 반역 사건을 다루는 조선 형정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추국청은 위관부터 당상관, 낭청으로 구성된 하나의 제도이자 조직이었다. 그 조직은 조사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처결을 논의한다. 추국 자체의 일반 절차는 고변→심문→진술→형신(刑訊, 신문)→재심문→자백→결안(結案, 진술서)→조율(照律, 관련 법규 적용)→처형으로 이루어지지만, 추국청 심문 문서를 포함한 추국 상황을 수시로 국왕에게 보고한다. 보고하는 자리에서 사안의 처리, 이를테면 ‘아무개는 혐의가 없는 듯하니 석방하자’라든지, ‘아무개는 누구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다시 심문하자’는 등의 논의 속에서 추국이 진행되었다.
특히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다. 국왕의 친국이거나 위관이 있는 추국청에서 이루어졌고, 적어도 삼성추국으로 이루어졌다. 친국은 국왕이 위관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통상의 정국(庭鞫, 궐정 추국)과 차이가 있다. 삼성추국은 규모가 조금 작다. 그리고 의금부는 주관 관청이므로 자연히 포함되었다. 사건의 중요도나 죄의 경중에 따라 추국의 방법과 형식이 결정되었는데, 장소와 참여 관원, 좌차(座次)에 따라 추국청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친림추국(친국) ] 궐정 추국(정국, 추국) ] 삼성추국 ] 의금부 추국(나국)
기축옥사는 처음에 친국으로 시작하여 정국, 삼성추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 쉽게 말해 기축옥사는 전 과정에 걸쳐 정승과 양사가 참여하였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가며 이루어진 옥사였다. 송강이 술김에 서애에게 ‘왜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살리지 못하고 죽게 두었느냐’고 했다지만, 그 일은 서애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서, 서애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추국청의 조건 때문이기도 했다. 북인 일각에서 송강이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하지만, 이렇게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은 누구 혼자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 본문 241~242쪽 중에서
안방준의 편찬 원칙 및 태도는 서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는 왜적과 화친을 주장했다고 서애를 비난하는 주장에 대해, 그런 주장은 서애가 영의정으로 논의를 주관했던 것을 두고 편파적으로 헐뜯는 데 불과하다고 반론하면서도 위관이었을 때 이발의 노모 죽음을 방관한 것은 실수라고 지적했다. - 본문 180~181쪽 중에서
이렇듯 반역 사건을 다루는 조선 형정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추국청은 위관부터 당상관, 낭청으로 구성된 하나의 제도이자 조직이었다. 그 조직은 조사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처결을 논의한다. 추국 자체의 일반 절차는 고변→심문→진술→형신(刑訊, 신문)→재심문→자백→결안(結案, 진술서)→조율(照律, 관련 법규 적용)→처형으로 이루어지지만, 추국청 심문 문서를 포함한 추국 상황을 수시로 국왕에게 보고한다. 보고하는 자리에서 사안의 처리, 이를테면 ‘아무개는 혐의가 없는 듯하니 석방하자’라든지, ‘아무개는 누구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다시 심문하자’는 등의 논의 속에서 추국이 진행되었다.
특히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다. 국왕의 친국이거나 위관이 있는 추국청에서 이루어졌고, 적어도 삼성추국으로 이루어졌다. 친국은 국왕이 위관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통상의 정국(庭鞫, 궐정 추국)과 차이가 있다. 삼성추국은 규모가 조금 작다. 그리고 의금부는 주관 관청이므로 자연히 포함되었다. 사건의 중요도나 죄의 경중에 따라 추국의 방법과 형식이 결정되었는데, 장소와 참여 관원, 좌차(座次)에 따라 추국청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친림추국(친국) ] 궐정 추국(정국, 추국) ] 삼성추국 ] 의금부 추국(나국)
기축옥사는 처음에 친국으로 시작하여 정국, 삼성추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 쉽게 말해 기축옥사는 전 과정에 걸쳐 정승과 양사가 참여하였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가며 이루어진 옥사였다. 송강이 술김에 서애에게 ‘왜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살리지 못하고 죽게 두었느냐’고 했다지만, 그 일은 서애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서, 서애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추국청의 조건 때문이기도 했다. 북인 일각에서 송강이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하지만, 이렇게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은 누구 혼자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 본문 241~242쪽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철이었는가, 유성룡이었는가?
4백년 묵은 기억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
“몇 년 전, 나는 어떤 역사학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역사대중화를 이끈다는 유명한 사람, 이덕일이었다. 막상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논쟁은 2합(合)을 넘기지 못했다. 생산적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논쟁은 종결되었다. 논쟁의 성과나 가치에 대한 순진한 기대도 그때 접었다.”
그러나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은 이 스쳐지나간 논쟁에서 소중한 역사학의 논제를 건져 낸다. 기축옥사의 어떤 기억을 둘러싼 변주.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에 벌어진 조선시대 가장 큰 옥사 중의 하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이발이라는 사람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고 말았다. 여든이 넘은 노인과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지나치게 혹독한 국문이라는 여론의 지탄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추국청의 책임자인 위관 역시 지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사건 당시 위관이 정철인가? 유성룡인가? 이 책은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2009년 논쟁 당시,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그 사건이 1590년(선조 23) 정철이 위관이었을 때라 주장하였고, 이 책의 저자인 오항녕은 1591년(선조 24) 유성룡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덕일의 반론과 오항녕의 재반론으로 이어진 논쟁 이후, 저자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덕일이 내세운 주장의 연원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400년이 넘은 이력을 가진 주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묘하게 기억이 뒤틀려온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기축옥사에 대한 400년의 엇갈린 기억,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기축옥사! 게다가 장원급제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겨 한국 문학사에서 우뚝 선 문장가이면서, 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주력하였던 청백리 송강 정철.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난국을 수습하였으며 그 7년의 경험을 『징비록』이라는 책으로 남겨 후세를 경계한 경세가였던 서애 유성룡. 선조 연간의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두 분이 사건의 당사자로서 함께 겪어야 했으나,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엉키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엉킨 기억의 당사자가 되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사태에 대한 탐구이다.
이 엇갈린 기억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저자는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등의 연대기 자료는 물론 관련 인물들의 문집을 세세히 검토했다. 『기축록』 등 기축옥사에 대한 야사도 빼놓지 않았다. 나아가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도 추적하였다. 가까이는 지금부터 100년 전 매천 황현의 기억에서, 300년 전의 이현일, 박광일 그리고 400년 전 안방준의 기억과 기록까지. 이 기억의 변주는 몇 굽이를 돈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선조 후반까지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주장(이하 ‘정철 위관설’)은 제기되지 않았다. 광해군 초반에 ‘정철 위관설’이 처음 제기되었다가 반박을 받고 잠복했다. 인조반정 이후 이발, 정철 등의 복권으로 정리되는 듯하다가 숙종 초반 예송논쟁 이후 다시 제기된다. 이 역시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으로 다시 ‘유성룡 위관설’로 바뀌었다가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진출하면서 다시 ‘정철 위관설’이 고개를 들었다. 장희빈이 쫓겨나면서 ‘정철 위관설’은 단지 일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이덕일의 입을 빌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유성룡 위관설’과 ‘정철 위관설’의 실제와 이 책의 결론은?
기억의 차이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역사학의 아포리아다. 그러나 역사학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과거를 찾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게 역사학이란 “해당 사건에 대한 증언, 관찰, 의견, 정황을 다시 따져보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와 추론을 제시하는 힘겹지만 재미있고, 지루하지만 고무적인 결과를 남겨주는 매력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한 과정”이며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유성룡 위관설’과 ‘정철 위관설’의 결론 및 의미는 이렇다.
첫째, 이런 기억의 혼란 또는 변주는 무엇보다 기록의 부재에 기인한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기축옥사에 대한 사건 진술, 심문, 판결 등이 적힌 추안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라진 기억, 변형된 기억이 생겨났다.
둘째, ‘기억 투쟁’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상이한 기억은 멀리는 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들이나 손자 같은 후손들이 각자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었다, 유성룡이 아니었다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누군들 자기 조상이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편하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그런 태도가 기억의 왜곡을 온존시켰을 수도 있다.
셋째, 『선조실록』,『광해군일기』를 검토하면 이발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신묘년(선조 24)으로, 위관은 유성룡이나 이양원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확히 말하면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따르면, ‘정철 위관설’은 부정된다.
넷째, 『선조실록』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를 통해 검토한 결과, 적어도 선조 27년경에는 ‘정철 위관설’이 나타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까지도 그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철 위관설’은 어떤 곡절을 거쳐 숙종 초반 예송 논쟁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다섯째, 누구도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모반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발 형제, 최영경 등의 죽음은 억울하다, 지나쳤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공통분모이다.
여섯째, 위관이 유성룡(이양원)이었는지 정철이었는지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있는데 이 점이 앞의 다섯 가지 정리보다 훨씬 중요한 대목이다. 바로 추국청이라는 공간, 추국청이라는 제도이다. 추국청은 위관 - 추국청 당상 - 낭청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최종 결정은 국왕이 내리는 반역사건 등 조선의 주요 범죄를 다루는 제도였다.
추국정이라는 공간과 ‘당쟁론’ 비판
기축옥사 당시(또는 내내) 유성룡과 정철은 의정(議政), 곧 정승이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심수경도 우의정으로 위관을 맡았으며, 이산해 역시 영의정이었고, 이양원도 우의정으로 위관이었거나 추국에 깊이 간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축옥사 초반에는 선조가 직접 친국을 했다. 더구나 이 사람들 대부분 기축옥사를 다스린 뒤 상을 받았다.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어떤 당색 일각에서는 누군가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했지만, 남인, 북인, 서인 등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에서는 누구 혼자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하여,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인간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형벌 제도가 한몫을 담당했다.
결국 위관이 정철이든 유성룡이든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라는 질문은 제도로서의 추국청의 존재를 도외시한 질문이다. 저자는 그 배후에 역사적 사건을 ‘콩쥐-팥쥐’ 쯤으로 여기는 단순하면서도 게으른 관점, 즉 ‘당쟁론’이 숨어 있다고 단언한다.
기축옥사를 접근할 때 여전히 쉽게 당쟁론에 빠져 서인-동인의 감정싸움에 편승한 권력욕이 빚어낸 사태의 하나로 설명한다고 저자는 지적하며, 당쟁론은 “결국,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 우연 중 하나만 가져와서, 마치 그것이 그 사태의 원인인 듯 이해하는 안이한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란 바로 권력욕, 묵은 감정, 원한 등과 같은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 당쟁론자들이 역사를 설명하면서 사안이나 인물을 쉽게 재단하고 비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의지나 욕망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보면 결과에 대해서도 도덕적 잣대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기실 당쟁론에서 보여주는 의지라는 것도 선의는 없고 악의적으로 채색되거나 각색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 양 당대 사람들의 의도를 추측하는 역사서술은 올바른 역사 탐구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한국 정치사에 대한 당쟁론적 접근의 한계를 식민사관이라는 평면적, 감정적 비난과는 다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듯하지만 매우 불완전한 논리이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의 산물이라는 인식 자체가 안이한 것이다. 식민사관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왜곡된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당쟁론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당쟁론은 있어왔다.
그렇다면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어떤 사유 또는 접근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쟁론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인 시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론은 역사학자의 단순함과 게으름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을 때,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풀지 그런대로 양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풀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 책이 서로 다른 기억을 함께 양해하며 풀 수 있으리라는, 서로 둘러 앉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썼다고 소회한다.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까? 감히 역사 공부가 상처와 갈등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갈등을 부추기고 상처를 내는 역사 공부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춘추필법이 아니라고 나를 탓한다면, 달게 받겠다.”
4백년 묵은 기억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
“몇 년 전, 나는 어떤 역사학자와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역사대중화를 이끈다는 유명한 사람, 이덕일이었다. 막상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논쟁은 2합(合)을 넘기지 못했다. 생산적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논쟁은 종결되었다. 논쟁의 성과나 가치에 대한 순진한 기대도 그때 접었다.”
그러나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은 이 스쳐지나간 논쟁에서 소중한 역사학의 논제를 건져 낸다. 기축옥사의 어떤 기억을 둘러싼 변주.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에 벌어진 조선시대 가장 큰 옥사 중의 하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이발이라는 사람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고 말았다. 여든이 넘은 노인과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지나치게 혹독한 국문이라는 여론의 지탄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추국청의 책임자인 위관 역시 지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사건 당시 위관이 정철인가? 유성룡인가? 이 책은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2009년 논쟁 당시,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그 사건이 1590년(선조 23) 정철이 위관이었을 때라 주장하였고, 이 책의 저자인 오항녕은 1591년(선조 24) 유성룡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덕일의 반론과 오항녕의 재반론으로 이어진 논쟁 이후, 저자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덕일이 내세운 주장의 연원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400년이 넘은 이력을 가진 주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묘하게 기억이 뒤틀려온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기축옥사에 대한 400년의 엇갈린 기억, 그 추적 과정에 대한 기록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기축옥사! 게다가 장원급제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겨 한국 문학사에서 우뚝 선 문장가이면서, 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주력하였던 청백리 송강 정철.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난국을 수습하였으며 그 7년의 경험을 『징비록』이라는 책으로 남겨 후세를 경계한 경세가였던 서애 유성룡. 선조 연간의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두 분이 사건의 당사자로서 함께 겪어야 했으나,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엉키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엉킨 기억의 당사자가 되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사태에 대한 탐구이다.
이 엇갈린 기억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저자는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등의 연대기 자료는 물론 관련 인물들의 문집을 세세히 검토했다. 『기축록』 등 기축옥사에 대한 야사도 빼놓지 않았다. 나아가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도 추적하였다. 가까이는 지금부터 100년 전 매천 황현의 기억에서, 300년 전의 이현일, 박광일 그리고 400년 전 안방준의 기억과 기록까지. 이 기억의 변주는 몇 굽이를 돈다.
사건 발생에서부터 선조 후반까지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주장(이하 ‘정철 위관설’)은 제기되지 않았다. 광해군 초반에 ‘정철 위관설’이 처음 제기되었다가 반박을 받고 잠복했다. 인조반정 이후 이발, 정철 등의 복권으로 정리되는 듯하다가 숙종 초반 예송논쟁 이후 다시 제기된다. 이 역시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으로 다시 ‘유성룡 위관설’로 바뀌었다가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진출하면서 다시 ‘정철 위관설’이 고개를 들었다. 장희빈이 쫓겨나면서 ‘정철 위관설’은 단지 일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이덕일의 입을 빌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유성룡 위관설’과 ‘정철 위관설’의 실제와 이 책의 결론은?
기억의 차이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역사학의 아포리아다. 그러나 역사학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과거를 찾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게 역사학이란 “해당 사건에 대한 증언, 관찰, 의견, 정황을 다시 따져보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와 추론을 제시하는 힘겹지만 재미있고, 지루하지만 고무적인 결과를 남겨주는 매력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한 과정”이며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유성룡 위관설’과 ‘정철 위관설’의 결론 및 의미는 이렇다.
첫째, 이런 기억의 혼란 또는 변주는 무엇보다 기록의 부재에 기인한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기축옥사에 대한 사건 진술, 심문, 판결 등이 적힌 추안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라진 기억, 변형된 기억이 생겨났다.
둘째, ‘기억 투쟁’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상이한 기억은 멀리는 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들이나 손자 같은 후손들이 각자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었다, 유성룡이 아니었다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누군들 자기 조상이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편하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그런 태도가 기억의 왜곡을 온존시켰을 수도 있다.
셋째, 『선조실록』,『광해군일기』를 검토하면 이발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신묘년(선조 24)으로, 위관은 유성룡이나 이양원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확히 말하면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따르면, ‘정철 위관설’은 부정된다.
넷째, 『선조실록』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를 통해 검토한 결과, 적어도 선조 27년경에는 ‘정철 위관설’이 나타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까지도 그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철 위관설’은 어떤 곡절을 거쳐 숙종 초반 예송 논쟁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다섯째, 누구도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모반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발 형제, 최영경 등의 죽음은 억울하다, 지나쳤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공통분모이다.
여섯째, 위관이 유성룡(이양원)이었는지 정철이었는지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있는데 이 점이 앞의 다섯 가지 정리보다 훨씬 중요한 대목이다. 바로 추국청이라는 공간, 추국청이라는 제도이다. 추국청은 위관 - 추국청 당상 - 낭청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최종 결정은 국왕이 내리는 반역사건 등 조선의 주요 범죄를 다루는 제도였다.
추국정이라는 공간과 ‘당쟁론’ 비판
기축옥사 당시(또는 내내) 유성룡과 정철은 의정(議政), 곧 정승이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심수경도 우의정으로 위관을 맡았으며, 이산해 역시 영의정이었고, 이양원도 우의정으로 위관이었거나 추국에 깊이 간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축옥사 초반에는 선조가 직접 친국을 했다. 더구나 이 사람들 대부분 기축옥사를 다스린 뒤 상을 받았다.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어떤 당색 일각에서는 누군가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했지만, 남인, 북인, 서인 등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에서는 누구 혼자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하여,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인간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형벌 제도가 한몫을 담당했다.
결국 위관이 정철이든 유성룡이든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라는 질문은 제도로서의 추국청의 존재를 도외시한 질문이다. 저자는 그 배후에 역사적 사건을 ‘콩쥐-팥쥐’ 쯤으로 여기는 단순하면서도 게으른 관점, 즉 ‘당쟁론’이 숨어 있다고 단언한다.
기축옥사를 접근할 때 여전히 쉽게 당쟁론에 빠져 서인-동인의 감정싸움에 편승한 권력욕이 빚어낸 사태의 하나로 설명한다고 저자는 지적하며, 당쟁론은 “결국,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 우연 중 하나만 가져와서, 마치 그것이 그 사태의 원인인 듯 이해하는 안이한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란 바로 권력욕, 묵은 감정, 원한 등과 같은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 당쟁론자들이 역사를 설명하면서 사안이나 인물을 쉽게 재단하고 비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의지나 욕망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보면 결과에 대해서도 도덕적 잣대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기실 당쟁론에서 보여주는 의지라는 것도 선의는 없고 악의적으로 채색되거나 각색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 양 당대 사람들의 의도를 추측하는 역사서술은 올바른 역사 탐구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한국 정치사에 대한 당쟁론적 접근의 한계를 식민사관이라는 평면적, 감정적 비난과는 다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듯하지만 매우 불완전한 논리이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의 산물이라는 인식 자체가 안이한 것이다. 식민사관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왜곡된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당쟁론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당쟁론은 있어왔다.
그렇다면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어떤 사유 또는 접근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쟁론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인 시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론은 역사학자의 단순함과 게으름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을 때,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풀지 그런대로 양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풀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 책이 서로 다른 기억을 함께 양해하며 풀 수 있으리라는, 서로 둘러 앉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썼다고 소회한다.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까? 감히 역사 공부가 상처와 갈등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갈등을 부추기고 상처를 내는 역사 공부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춘추필법이 아니라고 나를 탓한다면, 달게 받겠다.”
'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 > 4.조선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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