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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의 정치적 전기 4부작. 저자는 스탈린주의적 해석이나 슬라보예 지젝이나 일부 자율주의자들의 새로운 해석에서 벗어나,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사료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의 깊게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진짜 레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첫번째 책에서는 레닌의 어린 시절부터 1905년 혁명 이후 반동기를 거쳐 볼셰비키가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1914년까지를 다룬다. 나로드니키인 레닌의 형이 차르 암살 시도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건이 끼친 영향과 레닌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하는 과정,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을 건설하기 위해 쏟은 노력,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노동운동의 성장과 1905년 혁명, 그 이후의 반동기를 거쳐 다시 운동이 성장하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레닌이 한 기여를 재미있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첫번째 책에서는 레닌의 어린 시절부터 1905년 혁명 이후 반동기를 거쳐 볼셰비키가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1914년까지를 다룬다. 나로드니키인 레닌의 형이 차르 암살 시도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건이 끼친 영향과 레닌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하는 과정,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을 건설하기 위해 쏟은 노력,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노동운동의 성장과 1905년 혁명, 그 이후의 반동기를 거쳐 다시 운동이 성장하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레닌이 한 기여를 재미있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목차
한국어판에 부치는 지은이 머리말
01 나로드(민중)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나로드니키/마르크스주의를 ‘각색’하는 나로드니키/나로드니키의 영웅주의/‘제믈랴 이 볼랴’와 갈라서는 플레하노프/노동계급을 향해/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플레하노프/여전히 나로드주의 쪽으로 쏠려 있는 플레하노프/노동해방단의 ‘영향력’/공통점과 차이점/1장을 마무리하며
02 마르크스주의 학습 서클에서 산업투쟁으로
선동을 향해/시험에 떨어진 플레하노프/공장 선동가 레닌/승리 속의 패배/막대 구부리기
03 당 건설을 향해
투쟁을 일반화하는 것이 필요하다/어떻게 ‘불꽃(Iskra)’이 꺼질 뻔했는가?/예외적 몰두
04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조합 의식과 사회주의 의식의 차이/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매우 중앙집권적인 직업혁명가 조직의 필요성/조직 수단 〈이스크라〉/미래의 무장봉기 지도자들을 조직하는 신문/당의 구조/관료적 형식주의와 규약 만능주의에 대한 레닌의 혐오/‘영웅’과 ‘대중’/혁명운동의 고양
05 1903년 당대회 ─ 볼셰비즘의 탄생
대회를 준비하며/1903년 당대회/동지에 대한 레닌의 태도/분열의 광기/앞질러 살펴보기/멘셰비키와 분열하기를 거부하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운동의 후퇴/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다/조직 문제가 우선이었다
06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투쟁
본색을 드러내는 자유주의/결론
07 1905년 혁명
경찰 노동조합 운동의 등장/피의 일요일/레닌과 가퐁/노동조합과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종파주의 태도에 반대하는 투쟁
08 “당 문호를 개방하라”
레닌과 볼셰비키 위원/당의 문호를 개방하기/당원은 계속 늘고/결론
09 무장봉기에 대한 레닌의 견해
봉기는 기예다/알맞은 시기에 봉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레닌의 뛰어난 창조적 상상력/결론
10 임시혁명정부 논쟁
혁명정부의 성격에 대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견해/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는 동의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트로츠키
11 반란을 일으킨 무지크
무대에 등장하는 농민/마르크스주의와 농민/가퐁한테서 배우는 레닌/토지국유화에 대해/무지한 무지크한테서 배우는 레닌/볼셰비키, 멘셰비키, 농민/토지국유화 : 사회주의로 가는 첫걸음?/프롤레타리아 대 농민/너무 틀렸기도 하고 너무 옳기도 했다
12 예행총연습
대중의 주도력을 강조한 레닌/대중한테서 배우다/1905년 ― 볼셰비키의 학교
13 암울한 반동의 승리
혁명은 아직도 전진하고 있다/그릇된 전망/반동의 승리/노동운동의 붕괴/견디기 힘든 망명 생활/러시아와 연락이 제대로 안 된다/후퇴하는 법을 가르치는 레닌/두마 선거에 대한 태도
14 전략과 전술
클라우제비츠한테서 배우는 레닌/마르크스주의 ― 과학이자 기예/‘핵심 고리 쥐기’/직관과 용기/꿈과 현실/전략과 전술의 학교인 당/전쟁의 기예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견해
15 멘셰비키와 반쯤 통합하다
상황과 전망
16 레닌이 초좌파주의자들을 당에서 축출하다
보그다노프를 축출하다/보그다노프에게 대항하려고 사용한 철학적 회초리/보그다노프 추종자들과 싸움을 계속하다
17 멘셰비키와 최종 분열하다
멘셰비키의 우경화/노동회의/‘자금 징발’ 문제/분열, 분열, 분열/레닌이 플레하노프에게 화해를 제안하다/레닌이 화해파들에 맞서 싸우다/화해파들에 대한 레닌의 승리
18 떠오르는 혁명 물결
경제 호황/학생 소요/노동자들이 깨어나다/볼셰비키가 의회의 지위를 이용하다/떠오르는 볼셰비키의 깃발/선거와 대중행동/볼셰비키가 노동조합에 뿌리내리다/사회보험
19 〈프라우다〉
합법 신문/진정한 노동자 신문/조직자 〈프라우다〉
20 볼셰비키당이 대중 정당이 되다
볼셰비즘의 ‘불안정성’과 안정성/전위 페테르부르크/전쟁 전야의 혁명적 파고
후주
찾아보기
01 나로드(민중)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나로드니키/마르크스주의를 ‘각색’하는 나로드니키/나로드니키의 영웅주의/‘제믈랴 이 볼랴’와 갈라서는 플레하노프/노동계급을 향해/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플레하노프/여전히 나로드주의 쪽으로 쏠려 있는 플레하노프/노동해방단의 ‘영향력’/공통점과 차이점/1장을 마무리하며
02 마르크스주의 학습 서클에서 산업투쟁으로
선동을 향해/시험에 떨어진 플레하노프/공장 선동가 레닌/승리 속의 패배/막대 구부리기
03 당 건설을 향해
투쟁을 일반화하는 것이 필요하다/어떻게 ‘불꽃(Iskra)’이 꺼질 뻔했는가?/예외적 몰두
04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조합 의식과 사회주의 의식의 차이/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매우 중앙집권적인 직업혁명가 조직의 필요성/조직 수단 〈이스크라〉/미래의 무장봉기 지도자들을 조직하는 신문/당의 구조/관료적 형식주의와 규약 만능주의에 대한 레닌의 혐오/‘영웅’과 ‘대중’/혁명운동의 고양
05 1903년 당대회 ─ 볼셰비즘의 탄생
대회를 준비하며/1903년 당대회/동지에 대한 레닌의 태도/분열의 광기/앞질러 살펴보기/멘셰비키와 분열하기를 거부하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운동의 후퇴/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다/조직 문제가 우선이었다
06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투쟁
본색을 드러내는 자유주의/결론
07 1905년 혁명
경찰 노동조합 운동의 등장/피의 일요일/레닌과 가퐁/노동조합과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종파주의 태도에 반대하는 투쟁
08 “당 문호를 개방하라”
레닌과 볼셰비키 위원/당의 문호를 개방하기/당원은 계속 늘고/결론
09 무장봉기에 대한 레닌의 견해
봉기는 기예다/알맞은 시기에 봉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레닌의 뛰어난 창조적 상상력/결론
10 임시혁명정부 논쟁
혁명정부의 성격에 대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견해/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는 동의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트로츠키
11 반란을 일으킨 무지크
무대에 등장하는 농민/마르크스주의와 농민/가퐁한테서 배우는 레닌/토지국유화에 대해/무지한 무지크한테서 배우는 레닌/볼셰비키, 멘셰비키, 농민/토지국유화 : 사회주의로 가는 첫걸음?/프롤레타리아 대 농민/너무 틀렸기도 하고 너무 옳기도 했다
12 예행총연습
대중의 주도력을 강조한 레닌/대중한테서 배우다/1905년 ― 볼셰비키의 학교
13 암울한 반동의 승리
혁명은 아직도 전진하고 있다/그릇된 전망/반동의 승리/노동운동의 붕괴/견디기 힘든 망명 생활/러시아와 연락이 제대로 안 된다/후퇴하는 법을 가르치는 레닌/두마 선거에 대한 태도
14 전략과 전술
클라우제비츠한테서 배우는 레닌/마르크스주의 ― 과학이자 기예/‘핵심 고리 쥐기’/직관과 용기/꿈과 현실/전략과 전술의 학교인 당/전쟁의 기예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견해
15 멘셰비키와 반쯤 통합하다
상황과 전망
16 레닌이 초좌파주의자들을 당에서 축출하다
보그다노프를 축출하다/보그다노프에게 대항하려고 사용한 철학적 회초리/보그다노프 추종자들과 싸움을 계속하다
17 멘셰비키와 최종 분열하다
멘셰비키의 우경화/노동회의/‘자금 징발’ 문제/분열, 분열, 분열/레닌이 플레하노프에게 화해를 제안하다/레닌이 화해파들에 맞서 싸우다/화해파들에 대한 레닌의 승리
18 떠오르는 혁명 물결
경제 호황/학생 소요/노동자들이 깨어나다/볼셰비키가 의회의 지위를 이용하다/떠오르는 볼셰비키의 깃발/선거와 대중행동/볼셰비키가 노동조합에 뿌리내리다/사회보험
19 〈프라우다〉
합법 신문/진정한 노동자 신문/조직자 〈프라우다〉
20 볼셰비키당이 대중 정당이 되다
볼셰비즘의 ‘불안정성’과 안정성/전위 페테르부르크/전쟁 전야의 혁명적 파고
후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레닌의 독특한 특징인 ‘막대 구부리기’에 대해서
1894~1896년의 시기는 레닌이 노동자들의 지도자로 발전하는 데서 중요한 시기였다. 크룹스카야의 말을 인용해 보자.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기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사실 이렇다 할 활동도 별로 없었지만, 레닌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영웅적 행동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가진 최상의 염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고 우리 지도를 따르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점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노동 대중의 지도자로 틀이 잡힌 시기는 분명히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한 시기였다.
그 무렵 공장 선동이 일면적이었는데도, 레닌은 항상 이 시기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단계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장 선동에 내재한 진보적 구실과 위험을 모두 기꺼이 인정했다. 그는 1900년 11월 9일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경제주의적 경향은 항상 오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 경향은 너무나 미숙한 경향이었습니다. 한편, 경제주의 경향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조차 ‘경제’ 선동은 지나치게 강조됐습니다(지금도 여전히 도처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경향은 1880년대와 1890년대 초 러시아에 존재하던 우리 운동의 조건에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당하고 불가피한 동반자였습니다. 당시 상황은 너무나 끔찍해서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발버둥 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협소함이 필요하고 정당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이런 경향이 이론으로까지 부풀려지고 베른슈타인주의와 묶이면서 모든 사정이 급격하게 변했습니다. …… ‘경제’ 선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대중’ 운동에 영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한 방향으로 막대기를 완전히 구부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구부리는 것은 레닌이 평생 동안 간직한 특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혁명 지도자로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도 이미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레닌은 투쟁의 모든 단계에서, 발전하는 사슬 가운데 핵심 고리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그 다음에 그는 다른 모든 고리가 종속돼야 하는 이 핵심 고리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그런 다음 그는 흔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무 지나쳤어. 막대기를 너무 많이 구부렸던 거야.” 하지만 이 말은 그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때그때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모든 힘을 하나의 과제로 집중해야 했다.
투쟁의 다양한 측면들은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에 모든 구체적 상황에서 항상 핵심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의 토대를 놓아야 했을 때 핵심 고리는 학습의 필요성이었다. 그때 레닌은 학습의 핵심 구실을 강조했다. 다음 단계로 들어가서 서클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생겼을 때, 레닌은 산업 선동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다시금 투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경제주의’를 날려 버려야 했을 때, 레닌은 모든 힘을 다해 그 일을 해 냈다. 항상 그는 그때그때의 과제를 아주 명확하게 밝힌 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에만 몰두한 채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맹렬하게 집중타를 퍼부으면서 필요한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 후에 다시 균형을 찾아서 막대기를 똑바로 세우고는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그것을 구부렸다. 이런 방법이 그때그때의 곤란을 극복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전술·조직 문제에 관해 레닌의 저작을 인용하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레닌의 경우만큼 적절하게 인용하기 힘든 경우도 없다. 만약 어떠한 전술·조직 문제에 관해 레닌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당시 운동이 직면한 구체적 문제를 매우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레닌의 초기 발전에서부터 명백히 드러나는 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의 형식이 항상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었다. 레닌은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조직 체계를 채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계급투쟁이 새로 발전할 때마다 당의 조직 구조를 변경할 태세가 돼 있었다. 레닌은 조직이 정치에 종속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이 정치에 독자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조직과 정치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특정 상황에서는 조직이 우선권을 가질 수도 있다.
레닌의 성격에 대해
아마 레닌보다 집중력 있고 단호하고 끈질긴 혁명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레닌의 저작에서 가장 흔히 반복되는 단어가 대체로 “가차없는”, “화해할 수 없는”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이 있었다. 루나차르스키가 ≪혁명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레닌의 성격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 반쯤은 스스로 만들어 낸 특징인데 ― 그의 의지였다. 가장 긴급한 과제, 그러나 그의 강력한 지성이 쫓아갈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하지는 않으며 모든 개별 문제를 전 세계적인 거대한 정치 사슬 속의 한 고리로 배치하는 그런 과제에 집중할 수 있는 극도로 확고하며 극도로 힘 있는 의지 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러시아어로 자유와 의지는 똑같은 단어다.
레닌의 생활 방식은 규율과 꼼꼼함과 묵묵한 자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고리키는 레닌이 “자발적인 금욕주의자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잡하고 힘든 일로 분주했으며, 자신을 돌보는 데는 정말로 무능했다”고 썼다. 레닌은 편지에서 한 번도 자신의 주위 환경에 대해 쓴 적이 없었다. 감옥에서든, 시베리아에서든, 제네바·파리·런던에서든, 그는 완전히 일에 파묻혀 있었다. 시베리아 시절에 가족들이 레닌이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써 보냈다. “볼로댜는 생활의 평범한 측면에 대해서는 쓸 능력이 전혀 없어요.”
1927년에 포트레소프는 레닌에게 적대적인 회고록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그럼에도 …… 그 일을 가장 많이 접했던 우리는 모두 …… 레닌의 지식과 두뇌와 활동 능력 때문에 그를 존중했지만, 대의에 대한 커다란 헌신과 가장 내키지 않는 임무라도 항상 책임지고 맡아서 반드시 최상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데 기꺼이 투신하는 태도 때문에도 그를 존중했다.”
트로츠키는, 언젠가 베라 자술리치가 레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게오르기[플레하노프 ― 지은이]는 사냥개요. 그는 잠시 물건을 물었다가 곧 그것을 떨어뜨린다오. 반면에 당신은 불독이오. 죽을 때까지 물고 안 놓지요.” 나중에 자술리치는 트로츠키에게 그 대화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 말이 레닌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죽을 때까지 물고 안 놓는다.’ 레닌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이 말을 되뇌었다니까요.”
국제사회주의사무국원이 악셀로드(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건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중에 멘셰비키가 된다)와 나눈 다음 대화는 아주 시사적이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원 : 이 모든 분열과 분쟁, 추문이 한 사람의 작품이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하지만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유능하고 가공스러울 수가 있소?
악셀로드 : 왜냐하면 하루 24시간 내내 혁명에 흥미를 느끼고, 혁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잠잘 때조차 혁명에 관한 꿈만 꾸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한번 그 친구를 다뤄 보구려.
다음은 레닌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독일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한 말이다.
혁명은 힘의 집중과 증대를 요구합니다. 대중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혁명은 단눈치오의 소설에 등장하는 퇴폐적인 남녀 주인공들에게나 정상적인, 부어라 마셔라 하며 법석대는 상태를 너그럽게 봐 주지 않습니다. 성적 방종은 부르주아적 부패 현상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떠오르는 계급입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마약이나 자극제 같은 흥분이 필요 없습니다. 알코올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과장된 성적 흥분도 필요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의 온갖 수치와 오물과 야만을 잊어서도 안 되고 잊지도 않을 것입니다. 계급의 상황과 공산주의의 이상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강력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명확성, 명확성, 또 명확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힘의 약화도, 힘의 낭비도, 힘의 파괴도 안 됩니다. 자제와 자기 규율은 야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지요.
동지에 대한 레닌의 태도
모든 것을 혁명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대신 노장 혁명가들에게 예절 바른 지지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바람은 레닌한테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개척자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특히 베라 자술리치한테 애정을 가졌고, 크룹스카야도 그랬다. “내가 뮌헨에 도착한 날 밤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기다렸다가 베라 이바노브나를 만나 봐요. 수정같이 맑은 사람이라오.’ 정말 레닌의 얘기는 사실이었다.”
베라 자술리치의 영웅적 과거는 레닌의 심금을 울렸다. 1878년 1월 29세의 젊은 여성이던 베라 자술리치는 정치수에 대한 굴욕적 대우에 항의해 페테르부르크 헌병대장 트레포프 장군을 저격했다. 자술리치에 대한 재판에서 경찰이 저?른 가혹 행위가 폭로됐다. 배심원들은 폭로된 사실에 너무나 충격을 받고 피고 베라 자술리치한테서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무죄를 선고했다. 법정 밖에서 경찰이 자술리치를 체포하려 들자 군중이 그를 구해 주어 탈출을 도왔다. 외국에서 자술리치는 칼 마르크스와 긴밀하게 접촉했다. 레닌은 자술리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스크라〉 편집국에서 자술리치를 쫓아내는 것이 당사자한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충격일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라 이바노브나는 러시아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1899년에 그는 러시아에 몰래 갔는데, 활동을 위해서 갔던 것은 아니고 ‘무지크의 얼굴을 뜯어보고 그의 코가 어떤 모양으로 자랐는지 봐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스크라〉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이것이 러시아에서 하는 활동의 일부라고 느꼈고 그래서 그것에 무섭게 매달렸다. 그에게 〈이스크라〉를 떠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러시아와 떨어져 고립되고 다시 한 번 망명자 생활이라는 죽음의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해 마침내 바닥에 가라앉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2차 당대회에서 〈이스크라〉 편집국 구성 문제가 제기되자 베라 이바노브나가 반발했던 것이다. 그한테 그것은 자기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레닌은 지적으로 너무나 정직했고 너무나 대의에 헌신했으므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조직에 필요한 바를 희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자술리치는 떠나야 했다. 운동이 요구하는 바를 부차적인 고려 사항에 종속시키려 한 사람들은 뒷날 혁명가가 아니라 중재파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레닌의 독수리 눈에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묘사한 사건에서 레닌은 동지들한테 무정하고 냉담하고 야박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사실 레닌은 동지들한테 아주 푸근하고 관대했고, 그들이 요구하는 바에 친절과 관심을 보였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갈라설 때조차, 그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마르토프에 대한 태도를 하나의 보기로 들 수 있다.
마르토프와 갈라서는 것은 그로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함께 했던 활동, 옛 〈이스크라〉에서 활동했던 기간이 그들을 친밀하게 묶어 놓았다. 당시 감수성이 매우 강했던 마르토프는 일리치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세련되게 발전시키는 날카로운 감각이 있었다. 마르토프와 갈라선 뒤로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멘셰비키와 격렬하게 싸웠지만, 마르토프가 어렴풋하게나마 올바른 노선을 취할 때마다 과거에 마르토프한테 취했던 태도가 되살아났다. 예컨대, 1910년에 파리에서 마르토프와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소치알 데모크라트≫ 편집부에서 같이 일했던 것이 그러한 경우였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즐거운 말투로 마르토프가 올바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단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뒷날 러시아에 돌아와서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7월 봉기(1917년)에서 마르토프의 태도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볼셰비키한테 어떤 이익이 돼서 그랬다기보다는 마르토프가 혁명가의 의무를 다하는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1919년에서 1920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레닌은 마르토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들을 보냈다.
어떤 개인적 요소도 개인들에 대한 레닌의 정치적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일리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원칙에 관한 논쟁과 개인적 싸움을 구별할 수 있고 대의의 이익을 모든 것보다 앞세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반대파가 그를 공격하면, 일리치는 흥분해서 반격에 나섰고 자기 견해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들이 떠오르고 반대파와 협력할 수 있을 때는, 어제의 반대파에게 동지로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억지로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바로 여기에 일리치의 커다란 힘이 있었다. 원칙 문제들을 빈틈없이 다루었는데도, 그는 개인들에 관한 한 위대한 낙관주의자였다. 그는 곧잘 잘못을 저질렀지만, 대체로 이러한 낙관주의는 대의에 매우 이로운 것이었다.
일리치는 어떤 사람의 정치적 태도를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동시에 그가 다른 분야에서 기여한 바를 존중할 수 있었다.
1905년에 플레하노프의 정치적 파산에 대해 논평하는 편지에서, 레닌은 “그 노인이 안 됐습니다. …… 사랑스러운 두뇌였는데” 하고 썼다. 2년 뒤에 1905년 혁명 당시 플레하노프가 제시한 정책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글에서 레닌은 플레하노프가 초기에 중요한 이론적 기여를 했음을 애써 칭찬했다.
그리고 1913년 5월 25일이 지나고 얼마 뒤 〈프라우다〉 편집부에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과거를 무시하고 이렇게 쓸 수 있었다. “플레하노프는 지금 소중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계급 운동의 적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레하노프가 전쟁을 지지하고 자기 신문 〈예진스트보(일치단결)〉에서 레닌을 독일이 고용한 첩자라고 비난하려 애쓴 1917년 이후에조차, 레닌은 플레하노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여한 바를 계속 칭찬했다.
레닌은 동지들이 스스로 지식을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도록 매우 따뜻하고 재치 있게 도와주었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험이 없는 필자들에 대한 레닌의 태도가 기억난다. 그들의 글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동안 레닌은 핵심 주제와 기본 내용을 즉시 파악해 글을 다듬으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것을 매우 신중하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잡히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의 글쓰기를 돕는 일을 능숙하게 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기사 쓰기를 바라지만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리치는 그와 토론을 시작해서 자신의 생각들을 얘기하고 앞날이 밝은 그 필자가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일리치는 그에게 주제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기사를 쓰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필자는 자신이 일리치와 사전에 벌인 토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됐고 자신이 맡은 기사를 쓰는 동안 실제로는 일리치가 쓰는 표현과 문구 들을 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닌한테 약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과 너무 쉽게 친해진다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언제나 사람들한테 열정을 품는 시기를 거쳤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가치 있는 요소를 찾아냈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에 사귈 때 레닌은 새로운 협력자와 언제나 기꺼이 “사랑에 빠졌”지만, 좀 더 오래 사귀고 나면 레닌은 거의 언제나 그에게서 약점을 찾아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그가 자기편에 서는가 반대편에 서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때그때 근본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애정에서 변덕스러움은 없었다. 레닌의 글에서 사람들에 대한 논평이 놀랄 만큼 상반되는 것을 자주 발견하는 이유는, 투쟁에서 필요한 바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 레닌의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반대파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기여한 바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만든 레닌의 커다란 자제력, 관대한 정신과 푸근한 인정 때문에 그는 자신의 협력자들한테서 믿음과 사랑을 얻었다.
레닌이 동지들한테 취했던 태도에 대한 여담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제 1903년 대회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
혁명의 지도부가 대중의 일부가 되지 않고 작업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식당에서 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에게 배우고 대중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알 수 있을까? 대중을 가르치려면 지도부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레닌은 평생 동안 그렇게 생각했고 실천했다.
당은 계급의 선진 부문보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앞서 나가도 안 된다. 당은 계급의 선두에 서야 하고 계급에 뿌리박아야 한다.
모든 진지한 혁명 활동이 성공하려면 혁명가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용감한 선진 계급의 전위로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사상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전위는 자신이 이끄는 대중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고 정말로 전체 대중을 앞으로 이끌고 나아갈 수 있을 때만 전위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미 얘기했듯이 혁명정당은 노동계급 의식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당은 의식을 최대한 높이 끌어올려서 이러한 불균등성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평균 수준이나 심지어 가장 낮은 수준의 계급의식에 적응하는 것은 기회주의의 본질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선진 부문과 조직적으로 분리되고 고립되는 것은 종파주의로 가는 길이다. 당면 상황에서 선진 부문의 의식을 최대한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정당의 임무다.
대중에게 배우려면 당은 또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엄격한 자기비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이 자신의 잘못을 대하는 태도는 그 당이 얼마나 진지한지, 실천에서 자기 계급과 노동 대중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진지한 당이라는 증거이고, 당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고 자기 계급과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
선진 계급으로 구성된 투쟁하는 정당은 잘못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오히려 당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 즉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서 1905년 1월 21일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차르와 그의 주구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비밀 활동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당과 당내의 다양한 견해 그리고 당의 강령과 정책에 관해 남김없이 알게 하고, 당대회에 참여한 이런저런 대표가 대회에서 말한 내용도 알게 하려고 애쓴다.
직접적인 혁명의 투쟁 시기에는 공개 논쟁이 훨씬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레닌은 1906년 4월 25일과 26일에 뿌린 유인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같은 혁명 시기에 당의 이론적 오류와 빗나간 전술은 모두 경험을 통해 가차 없이 비판받고, 경험 자체가 노동계급을 유례없이 빨리 계몽하고 교육시킨다. 그런 시기에 모든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는 이론과 전술 문제를 둘러싼 당내 사상투쟁이 되도록 공개적으로 폭넓고 자유롭게 전개되게 하고, 사상투쟁이 사회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된 혁명 행동을 해치거나 막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레닌은 논쟁을 당내 서클들에 한정해서는 안 되며, 공개로 진행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우리 당이 앓고 있는 중병은 대중정당이 겪는 성장통이다. 왜냐하면 숨어 있는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다양한 경향들이 공개적으로 투쟁하지 않는, 당의 지도자나 당 조직이 추구하는 노선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 대중정당이나 계급정당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조직을 건설할 수 없다.
또한,
당 강령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비판은 당의 모임뿐 아니라 공개 집회에서도 아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플레하노프가 이 주제에 대해 RSDLP 2차 대회에서 한 얘기를 떠올려 보라). 그러한 비판이나 그러한 ‘선동’(비판은 선동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당내 민주주의와 당이 계급에 뿌리내리기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 올바른 계급 정책과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당이 없으면, 건강한 당내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탄탄한 노동계급 토대가 없으면 당내 민주주의와 규율 얘기는 모두 의미 없는 장광설일 뿐이다.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나 지속적인 자기비판이 없다면, 올바른 계급 정책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의 중요성에 대한, 그리고 규율 개념을 노동계급 당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 견해를 이미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그것을 행동의 통일, 토론과 비판의 자유라고 규정한다. 그러한 규율만이 선진 계급의 민주주의 정당에 어울리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토론과 비판의 자유 없는 행동 통일은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투쟁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중앙집권주의와 규율은 투쟁을 지도하는 데 필요하다. 단단한 조직적 응집력은 당이 행동하고 주도권을 쥐고 대중행동을 지도할 수 있게 한다. 자신감이 없는 당은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신속하게 행동하고 당원들의 활동을 지도할 수 있는 강력한 당 지도부가 없으면 혁명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정당은 단호한 권력투쟁을 지도하는 중앙집권주의 조직이다. 그런 당은 행동에서 철의 규율이 필요하다.
1894~1896년의 시기는 레닌이 노동자들의 지도자로 발전하는 데서 중요한 시기였다. 크룹스카야의 말을 인용해 보자.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기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사실 이렇다 할 활동도 별로 없었지만, 레닌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영웅적 행동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가진 최상의 염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고 우리 지도를 따르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점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노동 대중의 지도자로 틀이 잡힌 시기는 분명히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한 시기였다.
그 무렵 공장 선동이 일면적이었는데도, 레닌은 항상 이 시기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단계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장 선동에 내재한 진보적 구실과 위험을 모두 기꺼이 인정했다. 그는 1900년 11월 9일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경제주의적 경향은 항상 오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 경향은 너무나 미숙한 경향이었습니다. 한편, 경제주의 경향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조차 ‘경제’ 선동은 지나치게 강조됐습니다(지금도 여전히 도처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경향은 1880년대와 1890년대 초 러시아에 존재하던 우리 운동의 조건에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당하고 불가피한 동반자였습니다. 당시 상황은 너무나 끔찍해서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발버둥 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협소함이 필요하고 정당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이런 경향이 이론으로까지 부풀려지고 베른슈타인주의와 묶이면서 모든 사정이 급격하게 변했습니다. …… ‘경제’ 선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대중’ 운동에 영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한 방향으로 막대기를 완전히 구부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구부리는 것은 레닌이 평생 동안 간직한 특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혁명 지도자로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도 이미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레닌은 투쟁의 모든 단계에서, 발전하는 사슬 가운데 핵심 고리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그 다음에 그는 다른 모든 고리가 종속돼야 하는 이 핵심 고리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그런 다음 그는 흔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무 지나쳤어. 막대기를 너무 많이 구부렸던 거야.” 하지만 이 말은 그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때그때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모든 힘을 하나의 과제로 집중해야 했다.
투쟁의 다양한 측면들은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에 모든 구체적 상황에서 항상 핵심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의 토대를 놓아야 했을 때 핵심 고리는 학습의 필요성이었다. 그때 레닌은 학습의 핵심 구실을 강조했다. 다음 단계로 들어가서 서클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생겼을 때, 레닌은 산업 선동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다시금 투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경제주의’를 날려 버려야 했을 때, 레닌은 모든 힘을 다해 그 일을 해 냈다. 항상 그는 그때그때의 과제를 아주 명확하게 밝힌 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에만 몰두한 채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맹렬하게 집중타를 퍼부으면서 필요한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 후에 다시 균형을 찾아서 막대기를 똑바로 세우고는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그것을 구부렸다. 이런 방법이 그때그때의 곤란을 극복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전술·조직 문제에 관해 레닌의 저작을 인용하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레닌의 경우만큼 적절하게 인용하기 힘든 경우도 없다. 만약 어떠한 전술·조직 문제에 관해 레닌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당시 운동이 직면한 구체적 문제를 매우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레닌의 초기 발전에서부터 명백히 드러나는 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의 형식이 항상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었다. 레닌은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조직 체계를 채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계급투쟁이 새로 발전할 때마다 당의 조직 구조를 변경할 태세가 돼 있었다. 레닌은 조직이 정치에 종속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이 정치에 독자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조직과 정치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특정 상황에서는 조직이 우선권을 가질 수도 있다.
레닌의 성격에 대해
아마 레닌보다 집중력 있고 단호하고 끈질긴 혁명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레닌의 저작에서 가장 흔히 반복되는 단어가 대체로 “가차없는”, “화해할 수 없는”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이 있었다. 루나차르스키가 ≪혁명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레닌의 성격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 반쯤은 스스로 만들어 낸 특징인데 ― 그의 의지였다. 가장 긴급한 과제, 그러나 그의 강력한 지성이 쫓아갈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하지는 않으며 모든 개별 문제를 전 세계적인 거대한 정치 사슬 속의 한 고리로 배치하는 그런 과제에 집중할 수 있는 극도로 확고하며 극도로 힘 있는 의지 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러시아어로 자유와 의지는 똑같은 단어다.
레닌의 생활 방식은 규율과 꼼꼼함과 묵묵한 자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고리키는 레닌이 “자발적인 금욕주의자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잡하고 힘든 일로 분주했으며, 자신을 돌보는 데는 정말로 무능했다”고 썼다. 레닌은 편지에서 한 번도 자신의 주위 환경에 대해 쓴 적이 없었다. 감옥에서든, 시베리아에서든, 제네바·파리·런던에서든, 그는 완전히 일에 파묻혀 있었다. 시베리아 시절에 가족들이 레닌이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써 보냈다. “볼로댜는 생활의 평범한 측면에 대해서는 쓸 능력이 전혀 없어요.”
1927년에 포트레소프는 레닌에게 적대적인 회고록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그럼에도 …… 그 일을 가장 많이 접했던 우리는 모두 …… 레닌의 지식과 두뇌와 활동 능력 때문에 그를 존중했지만, 대의에 대한 커다란 헌신과 가장 내키지 않는 임무라도 항상 책임지고 맡아서 반드시 최상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데 기꺼이 투신하는 태도 때문에도 그를 존중했다.”
트로츠키는, 언젠가 베라 자술리치가 레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게오르기[플레하노프 ― 지은이]는 사냥개요. 그는 잠시 물건을 물었다가 곧 그것을 떨어뜨린다오. 반면에 당신은 불독이오. 죽을 때까지 물고 안 놓지요.” 나중에 자술리치는 트로츠키에게 그 대화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 말이 레닌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죽을 때까지 물고 안 놓는다.’ 레닌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이 말을 되뇌었다니까요.”
국제사회주의사무국원이 악셀로드(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건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중에 멘셰비키가 된다)와 나눈 다음 대화는 아주 시사적이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원 : 이 모든 분열과 분쟁, 추문이 한 사람의 작품이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하지만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유능하고 가공스러울 수가 있소?
악셀로드 : 왜냐하면 하루 24시간 내내 혁명에 흥미를 느끼고, 혁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잠잘 때조차 혁명에 관한 꿈만 꾸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한번 그 친구를 다뤄 보구려.
다음은 레닌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독일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한 말이다.
혁명은 힘의 집중과 증대를 요구합니다. 대중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혁명은 단눈치오의 소설에 등장하는 퇴폐적인 남녀 주인공들에게나 정상적인, 부어라 마셔라 하며 법석대는 상태를 너그럽게 봐 주지 않습니다. 성적 방종은 부르주아적 부패 현상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떠오르는 계급입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마약이나 자극제 같은 흥분이 필요 없습니다. 알코올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과장된 성적 흥분도 필요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의 온갖 수치와 오물과 야만을 잊어서도 안 되고 잊지도 않을 것입니다. 계급의 상황과 공산주의의 이상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강력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명확성, 명확성, 또 명확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힘의 약화도, 힘의 낭비도, 힘의 파괴도 안 됩니다. 자제와 자기 규율은 야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지요.
동지에 대한 레닌의 태도
모든 것을 혁명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대신 노장 혁명가들에게 예절 바른 지지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바람은 레닌한테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개척자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특히 베라 자술리치한테 애정을 가졌고, 크룹스카야도 그랬다. “내가 뮌헨에 도착한 날 밤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기다렸다가 베라 이바노브나를 만나 봐요. 수정같이 맑은 사람이라오.’ 정말 레닌의 얘기는 사실이었다.”
베라 자술리치의 영웅적 과거는 레닌의 심금을 울렸다. 1878년 1월 29세의 젊은 여성이던 베라 자술리치는 정치수에 대한 굴욕적 대우에 항의해 페테르부르크 헌병대장 트레포프 장군을 저격했다. 자술리치에 대한 재판에서 경찰이 저?른 가혹 행위가 폭로됐다. 배심원들은 폭로된 사실에 너무나 충격을 받고 피고 베라 자술리치한테서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무죄를 선고했다. 법정 밖에서 경찰이 자술리치를 체포하려 들자 군중이 그를 구해 주어 탈출을 도왔다. 외국에서 자술리치는 칼 마르크스와 긴밀하게 접촉했다. 레닌은 자술리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스크라〉 편집국에서 자술리치를 쫓아내는 것이 당사자한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충격일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라 이바노브나는 러시아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1899년에 그는 러시아에 몰래 갔는데, 활동을 위해서 갔던 것은 아니고 ‘무지크의 얼굴을 뜯어보고 그의 코가 어떤 모양으로 자랐는지 봐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스크라〉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이것이 러시아에서 하는 활동의 일부라고 느꼈고 그래서 그것에 무섭게 매달렸다. 그에게 〈이스크라〉를 떠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러시아와 떨어져 고립되고 다시 한 번 망명자 생활이라는 죽음의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해 마침내 바닥에 가라앉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2차 당대회에서 〈이스크라〉 편집국 구성 문제가 제기되자 베라 이바노브나가 반발했던 것이다. 그한테 그것은 자기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레닌은 지적으로 너무나 정직했고 너무나 대의에 헌신했으므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조직에 필요한 바를 희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자술리치는 떠나야 했다. 운동이 요구하는 바를 부차적인 고려 사항에 종속시키려 한 사람들은 뒷날 혁명가가 아니라 중재파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레닌의 독수리 눈에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묘사한 사건에서 레닌은 동지들한테 무정하고 냉담하고 야박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사실 레닌은 동지들한테 아주 푸근하고 관대했고, 그들이 요구하는 바에 친절과 관심을 보였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갈라설 때조차, 그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마르토프에 대한 태도를 하나의 보기로 들 수 있다.
마르토프와 갈라서는 것은 그로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함께 했던 활동, 옛 〈이스크라〉에서 활동했던 기간이 그들을 친밀하게 묶어 놓았다. 당시 감수성이 매우 강했던 마르토프는 일리치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세련되게 발전시키는 날카로운 감각이 있었다. 마르토프와 갈라선 뒤로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멘셰비키와 격렬하게 싸웠지만, 마르토프가 어렴풋하게나마 올바른 노선을 취할 때마다 과거에 마르토프한테 취했던 태도가 되살아났다. 예컨대, 1910년에 파리에서 마르토프와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소치알 데모크라트≫ 편집부에서 같이 일했던 것이 그러한 경우였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즐거운 말투로 마르토프가 올바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단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뒷날 러시아에 돌아와서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7월 봉기(1917년)에서 마르토프의 태도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볼셰비키한테 어떤 이익이 돼서 그랬다기보다는 마르토프가 혁명가의 의무를 다하는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1919년에서 1920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레닌은 마르토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들을 보냈다.
어떤 개인적 요소도 개인들에 대한 레닌의 정치적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일리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원칙에 관한 논쟁과 개인적 싸움을 구별할 수 있고 대의의 이익을 모든 것보다 앞세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반대파가 그를 공격하면, 일리치는 흥분해서 반격에 나섰고 자기 견해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들이 떠오르고 반대파와 협력할 수 있을 때는, 어제의 반대파에게 동지로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억지로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바로 여기에 일리치의 커다란 힘이 있었다. 원칙 문제들을 빈틈없이 다루었는데도, 그는 개인들에 관한 한 위대한 낙관주의자였다. 그는 곧잘 잘못을 저질렀지만, 대체로 이러한 낙관주의는 대의에 매우 이로운 것이었다.
일리치는 어떤 사람의 정치적 태도를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동시에 그가 다른 분야에서 기여한 바를 존중할 수 있었다.
1905년에 플레하노프의 정치적 파산에 대해 논평하는 편지에서, 레닌은 “그 노인이 안 됐습니다. …… 사랑스러운 두뇌였는데” 하고 썼다. 2년 뒤에 1905년 혁명 당시 플레하노프가 제시한 정책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글에서 레닌은 플레하노프가 초기에 중요한 이론적 기여를 했음을 애써 칭찬했다.
그리고 1913년 5월 25일이 지나고 얼마 뒤 〈프라우다〉 편집부에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과거를 무시하고 이렇게 쓸 수 있었다. “플레하노프는 지금 소중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계급 운동의 적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레하노프가 전쟁을 지지하고 자기 신문 〈예진스트보(일치단결)〉에서 레닌을 독일이 고용한 첩자라고 비난하려 애쓴 1917년 이후에조차, 레닌은 플레하노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여한 바를 계속 칭찬했다.
레닌은 동지들이 스스로 지식을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도록 매우 따뜻하고 재치 있게 도와주었다. 크룹스카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험이 없는 필자들에 대한 레닌의 태도가 기억난다. 그들의 글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동안 레닌은 핵심 주제와 기본 내용을 즉시 파악해 글을 다듬으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것을 매우 신중하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잡히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의 글쓰기를 돕는 일을 능숙하게 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기사 쓰기를 바라지만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리치는 그와 토론을 시작해서 자신의 생각들을 얘기하고 앞날이 밝은 그 필자가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일리치는 그에게 주제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기사를 쓰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필자는 자신이 일리치와 사전에 벌인 토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됐고 자신이 맡은 기사를 쓰는 동안 실제로는 일리치가 쓰는 표현과 문구 들을 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닌한테 약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과 너무 쉽게 친해진다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언제나 사람들한테 열정을 품는 시기를 거쳤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가치 있는 요소를 찾아냈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에 사귈 때 레닌은 새로운 협력자와 언제나 기꺼이 “사랑에 빠졌”지만, 좀 더 오래 사귀고 나면 레닌은 거의 언제나 그에게서 약점을 찾아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그가 자기편에 서는가 반대편에 서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때그때 근본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애정에서 변덕스러움은 없었다. 레닌의 글에서 사람들에 대한 논평이 놀랄 만큼 상반되는 것을 자주 발견하는 이유는, 투쟁에서 필요한 바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 레닌의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반대파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기여한 바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만든 레닌의 커다란 자제력, 관대한 정신과 푸근한 인정 때문에 그는 자신의 협력자들한테서 믿음과 사랑을 얻었다.
레닌이 동지들한테 취했던 태도에 대한 여담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제 1903년 대회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
혁명의 지도부가 대중의 일부가 되지 않고 작업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식당에서 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에게 배우고 대중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알 수 있을까? 대중을 가르치려면 지도부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레닌은 평생 동안 그렇게 생각했고 실천했다.
당은 계급의 선진 부문보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앞서 나가도 안 된다. 당은 계급의 선두에 서야 하고 계급에 뿌리박아야 한다.
모든 진지한 혁명 활동이 성공하려면 혁명가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용감한 선진 계급의 전위로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사상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전위는 자신이 이끄는 대중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고 정말로 전체 대중을 앞으로 이끌고 나아갈 수 있을 때만 전위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미 얘기했듯이 혁명정당은 노동계급 의식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당은 의식을 최대한 높이 끌어올려서 이러한 불균등성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평균 수준이나 심지어 가장 낮은 수준의 계급의식에 적응하는 것은 기회주의의 본질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선진 부문과 조직적으로 분리되고 고립되는 것은 종파주의로 가는 길이다. 당면 상황에서 선진 부문의 의식을 최대한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정당의 임무다.
대중에게 배우려면 당은 또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엄격한 자기비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이 자신의 잘못을 대하는 태도는 그 당이 얼마나 진지한지, 실천에서 자기 계급과 노동 대중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진지한 당이라는 증거이고, 당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고 자기 계급과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
선진 계급으로 구성된 투쟁하는 정당은 잘못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오히려 당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 즉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서 1905년 1월 21일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차르와 그의 주구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비밀 활동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당과 당내의 다양한 견해 그리고 당의 강령과 정책에 관해 남김없이 알게 하고, 당대회에 참여한 이런저런 대표가 대회에서 말한 내용도 알게 하려고 애쓴다.
직접적인 혁명의 투쟁 시기에는 공개 논쟁이 훨씬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레닌은 1906년 4월 25일과 26일에 뿌린 유인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같은 혁명 시기에 당의 이론적 오류와 빗나간 전술은 모두 경험을 통해 가차 없이 비판받고, 경험 자체가 노동계급을 유례없이 빨리 계몽하고 교육시킨다. 그런 시기에 모든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는 이론과 전술 문제를 둘러싼 당내 사상투쟁이 되도록 공개적으로 폭넓고 자유롭게 전개되게 하고, 사상투쟁이 사회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된 혁명 행동을 해치거나 막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레닌은 논쟁을 당내 서클들에 한정해서는 안 되며, 공개로 진행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우리 당이 앓고 있는 중병은 대중정당이 겪는 성장통이다. 왜냐하면 숨어 있는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다양한 경향들이 공개적으로 투쟁하지 않는, 당의 지도자나 당 조직이 추구하는 노선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 대중정당이나 계급정당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조직을 건설할 수 없다.
또한,
당 강령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비판은 당의 모임뿐 아니라 공개 집회에서도 아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플레하노프가 이 주제에 대해 RSDLP 2차 대회에서 한 얘기를 떠올려 보라). 그러한 비판이나 그러한 ‘선동’(비판은 선동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당내 민주주의와 당이 계급에 뿌리내리기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 올바른 계급 정책과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당이 없으면, 건강한 당내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탄탄한 노동계급 토대가 없으면 당내 민주주의와 규율 얘기는 모두 의미 없는 장광설일 뿐이다.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나 지속적인 자기비판이 없다면, 올바른 계급 정책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의 중요성에 대한, 그리고 규율 개념을 노동계급 당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 견해를 이미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그것을 행동의 통일, 토론과 비판의 자유라고 규정한다. 그러한 규율만이 선진 계급의 민주주의 정당에 어울리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토론과 비판의 자유 없는 행동 통일은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투쟁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중앙집권주의와 규율은 투쟁을 지도하는 데 필요하다. 단단한 조직적 응집력은 당이 행동하고 주도권을 쥐고 대중행동을 지도할 수 있게 한다. 자신감이 없는 당은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신속하게 행동하고 당원들의 활동을 지도할 수 있는 강력한 당 지도부가 없으면 혁명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정당은 단호한 권력투쟁을 지도하는 중앙집권주의 조직이다. 그런 당은 행동에서 철의 규율이 필요하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레닌 평전』 4부작은 2000년에 작고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본명은 이가엘 글룩스타인)가 쓴 레닌의 정치적 전기다. 이 책에 나오는 레닌의 모습은 옛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해석과도 다르고 최근 슬라보예 지젝이나 일부 자율주의자들이 새롭게 해석하는 레닌의 모습과도 다르다. 전자가 레닌을 당대 현실을 초월한 성인(聖人)처럼 묘사하고 그의 말과 글을 종교 경전이나 교리처럼 떠받든다면, 후자의 해석은 나름대로 색다르고 독특하지만 대부분 아전인수에 가까운 듯하다.
그와 달리 이 책은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사료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의 깊게 분석한 바탕 위에서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같은 사회사적 연구 성과도 흡수해서 레닌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래서 레닌의 오류와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그의 정치적 장점과 위대성을 인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 평전 1 : 당 건설을 향해』는 레닌의 어린 시절부터 1905년 혁명 이후 반동기를 거쳐 볼셰비키가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1914년까지를 다룬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과 노동자, 볼셰비키, 레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나로드니키인 레닌의 형이 차르 암살 시도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건이 끼친 영향과 레닌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하는 과정,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을 건설하기 위해 쏟은 노력,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노동운동의 성장과 1905년 혁명, 그 이후의 반동기를 거쳐 다시 운동이 성장하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레닌이 한 기여를 재미있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단호하지만 인간적이고, 당의 지도자였지만 소수파로 전락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굉장히 뛰어나지만 실수도 자주 저지르는 미화되지 않은 레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달리 이 책은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사료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의 깊게 분석한 바탕 위에서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같은 사회사적 연구 성과도 흡수해서 레닌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래서 레닌의 오류와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그의 정치적 장점과 위대성을 인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 평전 1 : 당 건설을 향해』는 레닌의 어린 시절부터 1905년 혁명 이후 반동기를 거쳐 볼셰비키가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1914년까지를 다룬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과 노동자, 볼셰비키, 레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나로드니키인 레닌의 형이 차르 암살 시도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건이 끼친 영향과 레닌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하는 과정,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을 건설하기 위해 쏟은 노력,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노동운동의 성장과 1905년 혁명, 그 이후의 반동기를 거쳐 다시 운동이 성장하면서 볼셰비키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레닌이 한 기여를 재미있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단호하지만 인간적이고, 당의 지도자였지만 소수파로 전락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굉장히 뛰어나지만 실수도 자주 저지르는 미화되지 않은 레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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