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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09년 3월,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테리 이글턴, 장-뤽 낭시, 안토니오 네그리 같은 사유의 거장들이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버크벡 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주최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주최 측에서는 애초에 200명 정도의 청중을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 1000명이 넘는 청중이 참석하여 공산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뜨거운 화두임을 증명하였다.
프리즘총서 39권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콘퍼런스 발표자들이 낭독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열기를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악마화하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급진적 철학과 급진적 정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행에는 사회주의를, 빈자에게는 자본주의를 선물하는 시대에 이 책은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프리즘총서 39권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콘퍼런스 발표자들이 낭독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열기를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악마화하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급진적 철학과 급진적 정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행에는 사회주의를, 빈자에게는 자본주의를 선물하는 시대에 이 책은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공산주의라는 이념 ― 슬라보예 지젝, 코스타스 두지나스 4
1장 공산주의라는 이념 ― 알랭 바디우 15
2장 현재에 현존하기. 공산주의 가설: 철학을 위한 가능한 가설, 정치를 위한 불가능한 이름? ― 쥐디트 발소 39
3장 좌익 가설: 테러 시대의 공산주의 ― 브루노 보스틸스 69
4장 두 번째는 희극으로… 역사적 화용론과 때맞지 않는 현재 ― 수전 벅모스 125
5장 아디키아: 공산주의와 권리들에 대하여 ― 코스타스 두지나스 149
6장 공산주의: 리어인가 곤잘로인가? ― 테리 이글턴 185
7장 ‘지성의 공산주의, 의지의 공산주의’ ― 피터 홀워드 205
8장 공산주의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 ― 마이클 하트 239
9장 공산주의, 단어 ― 장-뤽 낭시 263
10장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사유들 ― 안토니오 네그리 289
11장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 ― 자크 랑시에르 307
12장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를 끝냈는가? 오늘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8가지 논평 ― 알레산드로 루소 327
13장 추상화의 정치: 공산주의와 철학 ― 알베르토 토스카노 353
14장 약한 공산주의? ― 잔니 바티모 371
15장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 ― 슬라보예 지젝 377
부록 논쟁 중인 우리의 장래: 현대 중국에서의 지적 정치 ― 왕후이 407
찾아보기 433
지은이 소개 443
옮긴이 소개 447
1장 공산주의라는 이념 ― 알랭 바디우 15
2장 현재에 현존하기. 공산주의 가설: 철학을 위한 가능한 가설, 정치를 위한 불가능한 이름? ― 쥐디트 발소 39
3장 좌익 가설: 테러 시대의 공산주의 ― 브루노 보스틸스 69
4장 두 번째는 희극으로… 역사적 화용론과 때맞지 않는 현재 ― 수전 벅모스 125
5장 아디키아: 공산주의와 권리들에 대하여 ― 코스타스 두지나스 149
6장 공산주의: 리어인가 곤잘로인가? ― 테리 이글턴 185
7장 ‘지성의 공산주의, 의지의 공산주의’ ― 피터 홀워드 205
8장 공산주의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 ― 마이클 하트 239
9장 공산주의, 단어 ― 장-뤽 낭시 263
10장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사유들 ― 안토니오 네그리 289
11장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 ― 자크 랑시에르 307
12장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를 끝냈는가? 오늘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8가지 논평 ― 알레산드로 루소 327
13장 추상화의 정치: 공산주의와 철학 ― 알베르토 토스카노 353
14장 약한 공산주의? ― 잔니 바티모 371
15장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 ― 슬라보예 지젝 377
부록 논쟁 중인 우리의 장래: 현대 중국에서의 지적 정치 ― 왕후이 407
찾아보기 433
지은이 소개 443
옮긴이 소개 447
책 속으로
좌파의 긴 밤이 끝나 가려 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패배, 단죄와 절망, ‘역사의 종언’의 승리를 외치는 자들, 미국 헤게모니의 일극적 세계, 이 모든 것이 급속히 낡은 뉴스가 되고 있다. 유럽에서 2000년에 위르겐 하버마스와 울리히 벡은 유럽연합과 그 공통통화에 열광했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오늘날 현실은 얼마나 다른가! 유럽연합은 더 이상 모델이 아니라 ‘재정건전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례 없는 긴축 조치와 실업과 빈곤을 노동인민에게 떠넘기는 광신적인 우파 정부와 무기력한 사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기능부전에 빠진 조직일 뿐이다.
--- p.4
정치는 스스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정치는 역사와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이 여전히 진실이라 하더라도, 정치는 계급투쟁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은 더는 정치의 매체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관념(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관념)은 이제 종결되었다. 오늘날 이 관념의 냉소적 이면은 과거의 범죄 행위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사과와 유감의 관행이다. 아프리카 출신의 미등록 이주자 친구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금 잘 대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일 가서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말이다.”
--- p.56
공산주의 가설이 시대를 넘어서 번쩍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적인 규제적 이념과 같이 영원히 반짝거리는 것으로 남지 않으려면, 공산주의는 또한 현재의 상태를 철폐하는 현실 운동으로 현재화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공산주의는 정치적 주체성의 구체적 신체, 육체, 사고 속에 다시 기입되어야 한다. 비록 이러한 주체화의 행위가 구현되기 위해 전통적인 당 형태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말이다.
--- p.113
기존의 공산주의 가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자본의 구성(자본주의적인 생산의 조건과 생산물뿐만 아니라)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의 기술적 구성이 변했다. 사람들은 작업장의 안팎에서 어떻게 생산하는가? (…) 그리고 젠더와 인종이라는 선에 따라서, 또 국지적이고 지역적이며 전지구적인 맥락들 속에서 사람들을 분리하는 노동과 권력의 분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노동의 현재 구성을 연구하는 것에 덧붙여서, 노동이 그것 아래에서 생산하는 소유의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 p.4
정치는 스스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정치는 역사와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이 여전히 진실이라 하더라도, 정치는 계급투쟁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은 더는 정치의 매체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관념(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관념)은 이제 종결되었다. 오늘날 이 관념의 냉소적 이면은 과거의 범죄 행위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사과와 유감의 관행이다. 아프리카 출신의 미등록 이주자 친구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금 잘 대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일 가서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말이다.”
--- p.56
공산주의 가설이 시대를 넘어서 번쩍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적인 규제적 이념과 같이 영원히 반짝거리는 것으로 남지 않으려면, 공산주의는 또한 현재의 상태를 철폐하는 현실 운동으로 현재화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공산주의는 정치적 주체성의 구체적 신체, 육체, 사고 속에 다시 기입되어야 한다. 비록 이러한 주체화의 행위가 구현되기 위해 전통적인 당 형태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말이다.
--- p.113
기존의 공산주의 가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자본의 구성(자본주의적인 생산의 조건과 생산물뿐만 아니라)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의 기술적 구성이 변했다. 사람들은 작업장의 안팎에서 어떻게 생산하는가? (…) 그리고 젠더와 인종이라는 선에 따라서, 또 국지적이고 지역적이며 전지구적인 맥락들 속에서 사람들을 분리하는 노동과 권력의 분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노동의 현재 구성을 연구하는 것에 덧붙여서, 노동이 그것 아래에서 생산하는 소유의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 p.241
출판사 리뷰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낭시, 네그리,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이 외친 “해방의 공산주의”
2009년, 버크벡 대학교 인문학연구소의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를 새롭게 상상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를 조직했다. 후기 자본주의를 넘어설 정치적 기획의 필요성에 공감하듯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테리 이글턴 같은 사유의 거장들이 런던 콘퍼런스로 모여들었다. 주최 측은 애초에 200명 정도의 청중을 예상했으나 최종적으로는 9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가득 찼고, 또 다른 300명을 위해 영상을 중계할 수 있는 방을 예약해야 했다. 대규모의 참가자는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콘퍼런스 내내 참가자들은 분파주의를 넘어선 토의를 나눴고,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은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던 서로의 사유를 횡단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는 흥미로운 지적 만남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그린비 프리즘총서 39권인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콘퍼런스 발표자들이 낭독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열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무엇이 이 콘퍼런스를 그토록 성공적으로 만들었을까?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악마화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급진적 철학과 급진적 정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될 때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독주는 끝났다. 광신적인 우파 정부는 실업과 빈곤을 노동인민에게 떠넘기고 있고,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기능부전에 빠진 조직이 되었다. 은행에는 사회주의를, 빈자에게는 자본주의를 선물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이 책은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를 회복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국가와 당의 실패,
공산주의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바디우는 ‘이념’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로 콘퍼런스의 포문을 연다. 이념은 우리의 이성적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규제인가? 혹은 국가의 행위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강령인가? 이념은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것들을 진리의 생성 속에서 역사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개인들이 합체되는 것을 지지하고, 그들이 주체화 가능한 신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함으로써 국가적 제약들 너머로 갈 수 있도록 해준다. 사회주의 국가와 당이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실재적 지지를 제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 가설은 해방의 가설에 토대를 둘 때에만 가능하지만, 랑시에르는 공산주의와 해방 사이에 역사적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해방은 ‘아무나’의 힘이 모일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에는 정반대의 전제, 즉 불평등의 전제가 스며들어 있다. 지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교육학적-진보주의적 가설이 그것이다. 이 가설은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경험은 공산주의자의 지식을 자격 박탈하고, 공산주의자의 지식은 노동자의 경험을 박탈하는 이중구속으로 귀결되었다. 랑시에르는 공산주의가 새로운 대안의 이름이 되려면, 공산주의적 이념이 이런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대담하게도 20세기 혁명적 시대의 ‘토대 위에 더 많은 것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내려’가서 다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주체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개념을 요구한다. 그것은 ‘족쇄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고전적 이미지와 대조적인,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체, 모든 실체적 내용이 박탈된 텅 빈 데카르트적 주체이다.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가 조작되고, 살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다. 새로운 해방 정치는 더 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일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학자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정치적 이념이다
1990년대는 좌파에게 삼중의 실패가 닥친 시기였다.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쇠퇴했다.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멸하고 그들 경제는 세계 산업 안으로 통합되었다. 제3세계 해방운동 역시 침체를 겪었다. 이러한 사태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첫발을 디딘 하나의 시대, 곧 당-국가라는 정치적 조직 형태로 특징지을 수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이는 급진적 해방의 정치의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가?
오히려 최근 20년간의 수많은 징표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마침내 실현된 자연적 사회질서로 간주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이 1990년대의 유토피아는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즉, 정치적 영역에서 이 유토피아의 죽음을 알린 것이 2001년 9.11테러라면, 2008년 금융위기는 경제적 죽음을 상징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관건은 새로운 전략들의 출현을 위해 힘쓰는 가운데 해방의 정치에서 기초가 되는 사항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것이다.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세계적 명사들이 모여 개최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의 괄목할 만한 성공은 해방의 기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또 쇄신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단순히 스탈린주의적 형태의 당-국가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회민주주의 자체의 근본적 개조를 꾀하지 않는, 이른바 민주적 좌파의 단순한 체제 개혁 전체도 거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990년대의 실패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측면보다 바로 이 민주적 좌파의 결정적 실패라는 측면이 더 컸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급진적 해방 기획의 지평을 가리키기에 적절한가? 참가자들은 각각의 이론적 입장들이 지닌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충실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요컨대 공산주의는 우리의 탐색을 이끄는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좌파 자신의 이름을 달고 저질러진 것을 포함한 20세기 정치의 파국들을 고발하는 수단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콘퍼런스를 시작하면서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에게 적합한 유일한 정치적 이념인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이 외친 “해방의 공산주의”
2009년, 버크벡 대학교 인문학연구소의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를 새롭게 상상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를 조직했다. 후기 자본주의를 넘어설 정치적 기획의 필요성에 공감하듯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테리 이글턴 같은 사유의 거장들이 런던 콘퍼런스로 모여들었다. 주최 측은 애초에 200명 정도의 청중을 예상했으나 최종적으로는 9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가득 찼고, 또 다른 300명을 위해 영상을 중계할 수 있는 방을 예약해야 했다. 대규모의 참가자는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콘퍼런스 내내 참가자들은 분파주의를 넘어선 토의를 나눴고,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은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던 서로의 사유를 횡단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는 흥미로운 지적 만남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그린비 프리즘총서 39권인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콘퍼런스 발표자들이 낭독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열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무엇이 이 콘퍼런스를 그토록 성공적으로 만들었을까?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악마화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급진적 철학과 급진적 정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될 때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독주는 끝났다. 광신적인 우파 정부는 실업과 빈곤을 노동인민에게 떠넘기고 있고,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기능부전에 빠진 조직이 되었다. 은행에는 사회주의를, 빈자에게는 자본주의를 선물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이 책은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를 회복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국가와 당의 실패,
공산주의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바디우는 ‘이념’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로 콘퍼런스의 포문을 연다. 이념은 우리의 이성적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규제인가? 혹은 국가의 행위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강령인가? 이념은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것들을 진리의 생성 속에서 역사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개인들이 합체되는 것을 지지하고, 그들이 주체화 가능한 신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함으로써 국가적 제약들 너머로 갈 수 있도록 해준다. 사회주의 국가와 당이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실재적 지지를 제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 가설은 해방의 가설에 토대를 둘 때에만 가능하지만, 랑시에르는 공산주의와 해방 사이에 역사적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해방은 ‘아무나’의 힘이 모일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에는 정반대의 전제, 즉 불평등의 전제가 스며들어 있다. 지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교육학적-진보주의적 가설이 그것이다. 이 가설은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경험은 공산주의자의 지식을 자격 박탈하고, 공산주의자의 지식은 노동자의 경험을 박탈하는 이중구속으로 귀결되었다. 랑시에르는 공산주의가 새로운 대안의 이름이 되려면, 공산주의적 이념이 이런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대담하게도 20세기 혁명적 시대의 ‘토대 위에 더 많은 것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내려’가서 다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주체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개념을 요구한다. 그것은 ‘족쇄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고전적 이미지와 대조적인,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체, 모든 실체적 내용이 박탈된 텅 빈 데카르트적 주체이다.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가 조작되고, 살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다. 새로운 해방 정치는 더 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일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학자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정치적 이념이다
1990년대는 좌파에게 삼중의 실패가 닥친 시기였다.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쇠퇴했다.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멸하고 그들 경제는 세계 산업 안으로 통합되었다. 제3세계 해방운동 역시 침체를 겪었다. 이러한 사태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첫발을 디딘 하나의 시대, 곧 당-국가라는 정치적 조직 형태로 특징지을 수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이는 급진적 해방의 정치의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가?
오히려 최근 20년간의 수많은 징표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마침내 실현된 자연적 사회질서로 간주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이 1990년대의 유토피아는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즉, 정치적 영역에서 이 유토피아의 죽음을 알린 것이 2001년 9.11테러라면, 2008년 금융위기는 경제적 죽음을 상징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관건은 새로운 전략들의 출현을 위해 힘쓰는 가운데 해방의 정치에서 기초가 되는 사항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것이다.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세계적 명사들이 모여 개최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의 괄목할 만한 성공은 해방의 기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또 쇄신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단순히 스탈린주의적 형태의 당-국가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회민주주의 자체의 근본적 개조를 꾀하지 않는, 이른바 민주적 좌파의 단순한 체제 개혁 전체도 거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990년대의 실패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측면보다 바로 이 민주적 좌파의 결정적 실패라는 측면이 더 컸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급진적 해방 기획의 지평을 가리키기에 적절한가? 참가자들은 각각의 이론적 입장들이 지닌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충실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요컨대 공산주의는 우리의 탐색을 이끄는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좌파 자신의 이름을 달고 저질러진 것을 포함한 20세기 정치의 파국들을 고발하는 수단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콘퍼런스를 시작하면서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에게 적합한 유일한 정치적 이념인 것이다.
'29.이데올로기 연구 (독서>책소개) > 5.마르크스주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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