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소련사의 대가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혁명』 혁명 100주년 기념판 출간
러시아혁명의 시작은 언제이며, 그 끝은 언제인가? 이 혁명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사건인가, 러시아를 역사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파국의 전조인가.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국가가 소멸한 오늘, 우리는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던 1917년 2월,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불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리고,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2월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발생한다(10월 혁명). 도시에 온통 붉은 깃발이 출렁이는 가운데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다. 그러나 변화의 기운과 그것이 초래하는 혼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와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볼셰비키 사이의 내전(1918~1920)이 발생한 것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지난 10년간의 경제 후퇴를 만회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지만, 1920년 말이 되자 급속한 공업화·농업집단화·문화혁명 및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격변을 초래한다. 1917년에 시작된 러시아혁명은 1937~1938년에 스탈린이 혁명가와 정치·행정·군사 엘리트를 상대로 대숙청을 벌인 뒤에야 마침내 그 불길이 사그라진다.
현대 러시아사와 소련사의 거목이자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모로 불리는 쉴라 피츠패트릭은 이 책 『러시아혁명』(초판 1982, 제4판 2017)에서 혁명의 거대한 과정과 그것이 남긴 유산들, 특히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의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화합하고 반목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이번 4판은 1991년 소비에트연맹의 붕괴 이후 공개된 ‘러시아 문서보관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서양 학계의 연구를 총망라한 저작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1917년 혁명·산업화와 근대화·계급론에 관한 논의는 물론 혁명기 프롤레타리아트 인민의 생활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혁명과 혁명 이후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러시아혁명의 시작은 언제이며, 그 끝은 언제인가? 이 혁명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사건인가, 러시아를 역사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파국의 전조인가.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국가가 소멸한 오늘, 우리는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던 1917년 2월,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불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리고,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2월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발생한다(10월 혁명). 도시에 온통 붉은 깃발이 출렁이는 가운데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다. 그러나 변화의 기운과 그것이 초래하는 혼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와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볼셰비키 사이의 내전(1918~1920)이 발생한 것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지난 10년간의 경제 후퇴를 만회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지만, 1920년 말이 되자 급속한 공업화·농업집단화·문화혁명 및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격변을 초래한다. 1917년에 시작된 러시아혁명은 1937~1938년에 스탈린이 혁명가와 정치·행정·군사 엘리트를 상대로 대숙청을 벌인 뒤에야 마침내 그 불길이 사그라진다.
현대 러시아사와 소련사의 거목이자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모로 불리는 쉴라 피츠패트릭은 이 책 『러시아혁명』(초판 1982, 제4판 2017)에서 혁명의 거대한 과정과 그것이 남긴 유산들, 특히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의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화합하고 반목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이번 4판은 1991년 소비에트연맹의 붕괴 이후 공개된 ‘러시아 문서보관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서양 학계의 연구를 총망라한 저작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1917년 혁명·산업화와 근대화·계급론에 관한 논의는 물론 혁명기 프롤레타리아트 인민의 생활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혁명과 혁명 이후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목차
서문 9
01 배경
사회 41
혁명 전통 54
1905년 혁명과 그 여파, 1차 세계대전 68
02 1917년: 2월과 10월 혁명
2월 혁명과 ‘이중권력’ 91
볼셰비키 101
민중 혁명 106
여름의 정치 위기 112
10월 혁명 119
03 내전
내전, 붉은 군대, 체카 139
전시 공산주의 149
신세계의 전망 158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164
04 네프와 혁명의 미래
후퇴의 규율 181
관료제 문제 190
지도부 내의 투쟁 197
일국 사회주의 건설 205
05 스탈린 혁명
스탈린 대 우파 227
공업화 추진 236
집단화 245
문화혁명 254
06 혁명의 종료
‘완수된 혁명’ 271
‘배반당한 혁명’ 280
테러 290
감사의 말 307
옮긴이의 말 308
주 314
정선 참고문헌 336
찾아보기 349
01 배경
사회 41
혁명 전통 54
1905년 혁명과 그 여파, 1차 세계대전 68
02 1917년: 2월과 10월 혁명
2월 혁명과 ‘이중권력’ 91
볼셰비키 101
민중 혁명 106
여름의 정치 위기 112
10월 혁명 119
03 내전
내전, 붉은 군대, 체카 139
전시 공산주의 149
신세계의 전망 158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164
04 네프와 혁명의 미래
후퇴의 규율 181
관료제 문제 190
지도부 내의 투쟁 197
일국 사회주의 건설 205
05 스탈린 혁명
스탈린 대 우파 227
공업화 추진 236
집단화 245
문화혁명 254
06 혁명의 종료
‘완수된 혁명’ 271
‘배반당한 혁명’ 280
테러 290
감사의 말 307
옮긴이의 말 308
주 314
정선 참고문헌 336
찾아보기 349
책 속으로
러시아제국은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는데, 그 영토는 서쪽으로는 폴란드까지 동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뻗었고, 북극해에도 미쳤으며, 남쪽으로는 흑해와 오스만제국, 아프가니스탄 국경까지 달했다. 제국의 중심부인 유럽 지역 러시아(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인 일부 지역까지 포함)는 1897년에 인구가 9,200만 명에 달했고, 같은 해의 조사에 따르면 제국의 총 인구는 1억 2,600만 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럽 지역 러시아 및 상대적으로 발전된 제국의 서부 지역마저도 대부분 농촌이거나 도시화가 안 된 채로 있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도시 대공업단지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근래에 들어서야 급격하게 확장한 결과였다. _1장 배경, 41~42쪽
인텔리겐치아 사상은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대한 거부에 러시아 농민계급의 이상화를 뒤섞은 인민주의의 경향을 지녔다. 인민주의자는 자본주의가 농민을 농토에서 뿌리 뽑는다고, 그래서 그들을 토지 없이 착취당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어 도시로 쫓아낸다고 봤다. 이것이 유럽의 전통적 농촌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설명이다. 인민주의자는 러시아 농민들의 전통적 마을 조직인 코뮌, 즉 미르를 자본주의의 파괴에서 구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르를 원시 공산주의가 남긴 평등주의적 기구라 믿었으며, 러시아가 서유럽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미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_1장 배경, 55~56쪽
사람들이 전쟁에 더 환멸을 느끼고 도시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늦봄이 되자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이 산처럼 쌓였다. 7월에 발생한 거리 시위(7월 사태)에서 시위대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요구하는 깃발을 들었는데, 이는 임시정부의 권력을 빼앗자는 의미였다. 역설적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거부했다. 정부에 헌신하기로 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인 결정이다. 사실 시위는 정부를 겨냥한 만큼이나 소비에트 지도부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권력이 주어지거든 권력을 잡아, 이 개새끼들아!” 한 시위자는 사회주의자 정치인에게 주먹을 흔들면서 이렇게 고함쳤다. 그러나 이는 ‘이중권력’에 서약한 사람들에게는 그 답을 들을 수 없는 호소(아니면 아마 위협?)였다. _2장 1917: 2월과 10월 혁명, 101쪽
일부 역사가들은 볼셰비키의 일당 통치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우연의 결과로 등장했다고 주장해왔다. 즉 볼셰비키는 홀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의도가 레닌의 의도라면 논거는 모호해 보인다. 레닌은 당내의 다른 지도자들의 반대를 짓눌러버렸다. 9월과 10월에 레닌은 확실히 다당제 소비에트보다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원했던 것 같다. 레닌은 소비에트를 위장막으로 쓰기를 원하지 않았고, 쿠데타라는 명확한 방식으로 볼셰비키를 무대에 올리는 편을 선호했다. _2장 1917: 2월과 10월 혁명, 126쪽
볼셰비키가 내전에서는 승리로, 경제에서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던 1920년이 되자 도취감과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나타났다. 혁명과 내전의 불길 속에서 옛 세계가 사라지면서 많은 볼셰비키는 새로운 세계가 불사조처럼 잿더미 속에서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다. 아마 이 희망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무정부주의 이념에 더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표현됐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아마도 몇 주나 몇 달 안으로 완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희망의 귀결은 주요 경제 정책인 국유화로 확실히 표명됐다. _3장 내전, 151쪽
볼셰비키는 스스로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볼셰비키당 독재에 더 가까웠다. 처음부터 다른 정당이 활동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백군을 지지했지만 불법화되지 않은 당이나 반란을 준비했던 당(사혁당 좌파의 경우)은 내전 내내 체포에 시달리거나 위협당했으며, 1920년대 초에 자진해서 사멸했다. 그러나 정부의 형태라는 측면에서는 독재 체제가 훨씬 덜 명확했다. 볼셰비키는 애초에 당 조직을 잠재적 정부 기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 조직은 정부와 분리되고 행정 기능을 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볼셰비키가 다당제 정치 체제에서 여당이 되었다면 취했을 법한 태도와 흡사했다. _3장 내전, 166쪽
레닌은 공산주의적 가치가 옛 관료제에 잠식당할 위험을 봤음에도, 관료제와 함께 일하는 대안밖에 없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옛 관료제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단지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맡으려 하지 않는 정부 재정·철도 행정·도량형·지리 측량과 같은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략) 당이 충분한 수의 공산주의 전문가들을 길러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동시에 부르주아 전문가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_4장 네프와 혁명의 미래, 192~193쪽
다수의 공산당 평당원(특히 청년들)과 동조자들은 혁명이 교착에 빠졌다고 믿으며 환멸을 느꼈다. (공산당원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와 소비에트 관리의 특권, 급증하는 네프맨의 이익, 높은 실업률, 기회 및 생활수준의 불평등이 고착되는 상황에 분개했다. 당의 선전선동가들은 성난 당원들이 쏟아내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라는 질문에 자주 대답해야 했다. 당내에서는 젊은 소비에트공화국이 마침내 조용한 항구에 정박하게 됐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불안, 불만, 간신히 가라앉은 호전성이 팽배해졌다. 특히 젊은 당원들은 영웅적인 옛 내전 시절을 그리워했다. _4장 네프와 혁명의 미래, 217쪽
금속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안보 및 국방과도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나 스탈린이 관심을 갖는 한 금속은 안보나 국방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강철(러시아어 сталь)을 가명으로 정한 볼셰비키 혁명가였다. 1930년대 초의 강철과 선철 생산 숭배는 심지어 이 무렵 등장한 스탈린 숭배마저 초월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금속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지만 석탄·전력·철도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기에 연료·전력 부족과 철도 붕괴가 종종 금속 공장을 정지시켰다. 1930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를 이끈 고참 볼셰비크 글레브 크르지자노프스키의 시각에서 볼 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금속 생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금속 공장들이 원자재의 철도 수송과 연료·물·전력 공급에 의존한다는 사실마저 잊곤 했다. _5장 스탈린 혁명, 238~239쪽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에 공산당원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전 때 그랬던 것처럼 계급의 적을 상대로 한 투쟁이었다. 집단화 운동기에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박멸’은 공산주의 활동의 요체였다. 개인 기업가(네프맨)는 도시 경제를 재조직하면서 제거해야 할 계급의 적이었다. 동 시기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계급과 계급의 대결’이라는 호전적인 새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네프 기간 내내 횡행했던 유화적인 접근법을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문화 영역과 지적 영역에서도 실시됐는데, 이들 영역에서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계급의 적이었다. 옛 인텔리겐치아, 부르주아적 문화 가치, 엘리트주의, 특권, 일상적 관료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은 당대인들이 ‘문화혁명’이라 이름 붙인 현상을 만들어냈다. 문화혁명의 목적은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 확립이다. 이는 실질적 측면에서 당이 문화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젊은 공산당원·노동자 무리가 행정직·전문직 엘리트가 되는 길을 여는 것이다. _5장 스탈린 혁명, 254쪽
모든 공산당원 행정가들을 고발하는 서류가 해가 갈수록 증가했다. 이는 스탈린 혁명의 대중주의적 요소 중 하나로, 일반 시민은 지역 관리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도록 권고받았다. 고발된 관리는 조사를 받고 종종 해임됐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고발은 정의 추구가 아니라 악의 때문에 작성되었다. 1930년대에 성난 콜호즈 노동자들이 콜호즈 의장과 다른 농촌 관리를 고발하는 엄청난 양의 고발장을 쓰게 된 것은 고발장에 인용된 특정한 불쾌한 행위보다는 오히려 널리 퍼져 있던 불만의 감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 참여가 없었다면 대숙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_6장 혁명의 종료, 299쪽
러시아혁명의 유산은 무엇이었나? 1991년 말 전까지는 소비에트 체제 자체가 유산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붉은 깃발과 ‘레닌은 살아 있다! 레닌은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선포하는 현수막이 마지막까지 펄럭였다. 집권 공산당은 혁명의 유산이었다. 집단농장도 마찬가지였다. 5개년과 7개년 계획, 소비재의 만성 부족, 문화적 고립, 굴라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으로 갈라진 세계, 소비에트연맹이 ‘인류 진보 세력의 지도자’였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체제와 사회는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았지만, 혁명은 소련 민족 전통의 쐐기돌, 애국주의의 중심,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워야 하고 소련 공공 예술이 축하해야 하는 주제로 남아 있었다. _6장 혁명의 종료, 302쪽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혁명은 우아하게 역사로 침몰할 시기를 놓쳤다. 혁명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트로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1990년대 초의 몇 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혁명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시기 전체를 잊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그러나 잊기는 쉽지 않고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의외로 바람직하지 않다. 좋든 싫든 러시아혁명은 20세기를 형성한 경험 중 하나이며, 러시아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러시아혁명은 여전히 역사책 안에 있다. _6장 혁명의 종료, 303~304쪽
인텔리겐치아 사상은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대한 거부에 러시아 농민계급의 이상화를 뒤섞은 인민주의의 경향을 지녔다. 인민주의자는 자본주의가 농민을 농토에서 뿌리 뽑는다고, 그래서 그들을 토지 없이 착취당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어 도시로 쫓아낸다고 봤다. 이것이 유럽의 전통적 농촌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설명이다. 인민주의자는 러시아 농민들의 전통적 마을 조직인 코뮌, 즉 미르를 자본주의의 파괴에서 구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르를 원시 공산주의가 남긴 평등주의적 기구라 믿었으며, 러시아가 서유럽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미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_1장 배경, 55~56쪽
사람들이 전쟁에 더 환멸을 느끼고 도시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늦봄이 되자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이 산처럼 쌓였다. 7월에 발생한 거리 시위(7월 사태)에서 시위대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요구하는 깃발을 들었는데, 이는 임시정부의 권력을 빼앗자는 의미였다. 역설적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거부했다. 정부에 헌신하기로 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인 결정이다. 사실 시위는 정부를 겨냥한 만큼이나 소비에트 지도부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권력이 주어지거든 권력을 잡아, 이 개새끼들아!” 한 시위자는 사회주의자 정치인에게 주먹을 흔들면서 이렇게 고함쳤다. 그러나 이는 ‘이중권력’에 서약한 사람들에게는 그 답을 들을 수 없는 호소(아니면 아마 위협?)였다. _2장 1917: 2월과 10월 혁명, 101쪽
일부 역사가들은 볼셰비키의 일당 통치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우연의 결과로 등장했다고 주장해왔다. 즉 볼셰비키는 홀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의도가 레닌의 의도라면 논거는 모호해 보인다. 레닌은 당내의 다른 지도자들의 반대를 짓눌러버렸다. 9월과 10월에 레닌은 확실히 다당제 소비에트보다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원했던 것 같다. 레닌은 소비에트를 위장막으로 쓰기를 원하지 않았고, 쿠데타라는 명확한 방식으로 볼셰비키를 무대에 올리는 편을 선호했다. _2장 1917: 2월과 10월 혁명, 126쪽
볼셰비키가 내전에서는 승리로, 경제에서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던 1920년이 되자 도취감과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나타났다. 혁명과 내전의 불길 속에서 옛 세계가 사라지면서 많은 볼셰비키는 새로운 세계가 불사조처럼 잿더미 속에서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다. 아마 이 희망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무정부주의 이념에 더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표현됐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아마도 몇 주나 몇 달 안으로 완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희망의 귀결은 주요 경제 정책인 국유화로 확실히 표명됐다. _3장 내전, 151쪽
볼셰비키는 스스로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볼셰비키당 독재에 더 가까웠다. 처음부터 다른 정당이 활동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백군을 지지했지만 불법화되지 않은 당이나 반란을 준비했던 당(사혁당 좌파의 경우)은 내전 내내 체포에 시달리거나 위협당했으며, 1920년대 초에 자진해서 사멸했다. 그러나 정부의 형태라는 측면에서는 독재 체제가 훨씬 덜 명확했다. 볼셰비키는 애초에 당 조직을 잠재적 정부 기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 조직은 정부와 분리되고 행정 기능을 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볼셰비키가 다당제 정치 체제에서 여당이 되었다면 취했을 법한 태도와 흡사했다. _3장 내전, 166쪽
레닌은 공산주의적 가치가 옛 관료제에 잠식당할 위험을 봤음에도, 관료제와 함께 일하는 대안밖에 없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옛 관료제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단지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맡으려 하지 않는 정부 재정·철도 행정·도량형·지리 측량과 같은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략) 당이 충분한 수의 공산주의 전문가들을 길러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동시에 부르주아 전문가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_4장 네프와 혁명의 미래, 192~193쪽
다수의 공산당 평당원(특히 청년들)과 동조자들은 혁명이 교착에 빠졌다고 믿으며 환멸을 느꼈다. (공산당원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와 소비에트 관리의 특권, 급증하는 네프맨의 이익, 높은 실업률, 기회 및 생활수준의 불평등이 고착되는 상황에 분개했다. 당의 선전선동가들은 성난 당원들이 쏟아내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라는 질문에 자주 대답해야 했다. 당내에서는 젊은 소비에트공화국이 마침내 조용한 항구에 정박하게 됐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불안, 불만, 간신히 가라앉은 호전성이 팽배해졌다. 특히 젊은 당원들은 영웅적인 옛 내전 시절을 그리워했다. _4장 네프와 혁명의 미래, 217쪽
금속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안보 및 국방과도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나 스탈린이 관심을 갖는 한 금속은 안보나 국방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강철(러시아어 сталь)을 가명으로 정한 볼셰비키 혁명가였다. 1930년대 초의 강철과 선철 생산 숭배는 심지어 이 무렵 등장한 스탈린 숭배마저 초월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금속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지만 석탄·전력·철도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기에 연료·전력 부족과 철도 붕괴가 종종 금속 공장을 정지시켰다. 1930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를 이끈 고참 볼셰비크 글레브 크르지자노프스키의 시각에서 볼 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금속 생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금속 공장들이 원자재의 철도 수송과 연료·물·전력 공급에 의존한다는 사실마저 잊곤 했다. _5장 스탈린 혁명, 238~239쪽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에 공산당원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전 때 그랬던 것처럼 계급의 적을 상대로 한 투쟁이었다. 집단화 운동기에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박멸’은 공산주의 활동의 요체였다. 개인 기업가(네프맨)는 도시 경제를 재조직하면서 제거해야 할 계급의 적이었다. 동 시기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계급과 계급의 대결’이라는 호전적인 새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네프 기간 내내 횡행했던 유화적인 접근법을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문화 영역과 지적 영역에서도 실시됐는데, 이들 영역에서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계급의 적이었다. 옛 인텔리겐치아, 부르주아적 문화 가치, 엘리트주의, 특권, 일상적 관료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은 당대인들이 ‘문화혁명’이라 이름 붙인 현상을 만들어냈다. 문화혁명의 목적은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 확립이다. 이는 실질적 측면에서 당이 문화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젊은 공산당원·노동자 무리가 행정직·전문직 엘리트가 되는 길을 여는 것이다. _5장 스탈린 혁명, 254쪽
모든 공산당원 행정가들을 고발하는 서류가 해가 갈수록 증가했다. 이는 스탈린 혁명의 대중주의적 요소 중 하나로, 일반 시민은 지역 관리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도록 권고받았다. 고발된 관리는 조사를 받고 종종 해임됐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고발은 정의 추구가 아니라 악의 때문에 작성되었다. 1930년대에 성난 콜호즈 노동자들이 콜호즈 의장과 다른 농촌 관리를 고발하는 엄청난 양의 고발장을 쓰게 된 것은 고발장에 인용된 특정한 불쾌한 행위보다는 오히려 널리 퍼져 있던 불만의 감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 참여가 없었다면 대숙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_6장 혁명의 종료, 299쪽
러시아혁명의 유산은 무엇이었나? 1991년 말 전까지는 소비에트 체제 자체가 유산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붉은 깃발과 ‘레닌은 살아 있다! 레닌은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선포하는 현수막이 마지막까지 펄럭였다. 집권 공산당은 혁명의 유산이었다. 집단농장도 마찬가지였다. 5개년과 7개년 계획, 소비재의 만성 부족, 문화적 고립, 굴라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으로 갈라진 세계, 소비에트연맹이 ‘인류 진보 세력의 지도자’였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체제와 사회는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았지만, 혁명은 소련 민족 전통의 쐐기돌, 애국주의의 중심,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워야 하고 소련 공공 예술이 축하해야 하는 주제로 남아 있었다. _6장 혁명의 종료, 302쪽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혁명은 우아하게 역사로 침몰할 시기를 놓쳤다. 혁명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트로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1990년대 초의 몇 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혁명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시기 전체를 잊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그러나 잊기는 쉽지 않고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의외로 바람직하지 않다. 좋든 싫든 러시아혁명은 20세기를 형성한 경험 중 하나이며, 러시아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러시아혁명은 여전히 역사책 안에 있다. _6장 혁명의 종료, 303~304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피츠패트릭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다. 이 시기의 쟁점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사회적 지지에 관한 것이었다. 피츠패트릭은 어떤 정치 체제든 어느 정도의 지지 없이는 오래 통치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있었다는 피츠패트릭의 주장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기반이 됐다.
피츠패트릭이 창조한 개념은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됐다. 피츠패트릭 이후에 소련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누구라도 피츠패트릭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셈이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혁명의 쟁점 1. 네프의 성격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의 기간을 정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쟁점들이 있다. 그 첫째는 1920년대에 추진된 신경제정책(네프)의 성격이다. 1920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행정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 계속된 전쟁으로 자원과 산업 시설이 황폐해졌고, 가뭄이 겹치며 농업 생산도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간에 도합 200만 명의 엘리트 계층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국가 경제와 행정을 이끌 인력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침내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17년의 영웅이자 볼셰비키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이들의 이반은 당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결별을 상징하는 듯했다. 볼셰비키는 네프를 도입하며 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체제는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문을 허락했다. 도시에서 사적 거래와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으며 농촌에서는 농민들에게 소자본가적 농업 경영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한 농민이 생산한 식량의 징발을 중지하고 현물세를 도입했다. 국가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대신 일정량만 가져가고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피츠패트릭은 이 시기를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단계로 정의하며 혁명의 기간을 확장시킨다. 체제 외부에서 보기에 네프는 명백히 훌륭한 발전이자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변화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평당원들 사이에서는 당이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잃고 분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축적은 부르주아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공업화를 추진하려면 소비에트 체제도 자본을 축적해야 했기 때문에 네프 시기는 1917년 혁명과 이후를 잇는 필연적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혁명의 쟁점 2. 스탈린 혁명의 성격
두 번째 쟁점은 1920년대 후반에 네프를 끝내버린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지닌 성격이다. 피츠패트릭은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쟁점은 1917년과 1929년이 닮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후자가 전자에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였는지 여부이다. 1927년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를 상대로 투쟁하면서 정치가 불안해졌고, 이 위기는 1928년 초 몇 달 동안 스탈린이 농민계급과 대립하고 옛 ‘부르주아’ 전문가를 배신자로 고발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스탈린이 추진한 급격한 공업화, 그리고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네프를 철회하고 새로 채택한 제1차 5개년 계획에 국가의 거의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10년 전 전시 때처럼 필수품의 보급이 되살아나고, 국가는 도시의 경제·분배·거래를 다시 장악했다. 네프맨들은 체제와 언론의 공격을 받고 투기 혐의로 처벌되거나 알아서 도피해야 했다.
피츠패트릭은 특히 이 시기에 농촌에서 전개된 집단화를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한다. 체제는 집단화를 통해 증가한 생산력을 근대화·공업화에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작물의 40퍼센트를 국가에 조달해야 했던 농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체제에 저항했다. 그리고 체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많은 수의 농민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도시로 떠난 농민의 숫자는 1931년 한해에만 250만 명,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를 거치면서 소비에트 신체제가 공고화된다. 스탈린 혁명으로 국가의 통제가 도시 경제 전체에 직접적으로 확산됐고, 농업 분야에 대한 국가의 착취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이것은 경찰력을 크게 키우고 굴라그(교정 노동 수용소)를 만들어서 인민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소련의 특징이 될 “닫힌 국경·포위 심성·문화적 고립”이 확립된 것이다.
혁명의 쟁점 3. 대숙청의 성격
마지막 쟁점은 1937~1938년의 대숙청을 러시아혁명의 일부로 간주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피츠패트릭은 대숙청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혁명이 끝났다고 말한다. 대숙청은 혁명에 남아 있던 것들, 이를 테면 이상주의, 변모를 향한 열정, 혁명적 어휘, 그리고 혁명가까지 불태워버린 혁명적 열병의 마지막 발작이었다는 설명이다.
1928~1932년에 추진된 제1차 5개년 계획(이름과 달리 4년 만에 완수되었다)이 거대한 공장과 철도, 수력발전 댐 등의 상징물을 남기고 완수되자 혁명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에서 사회주의혁명은 계급 적대와 착취가 소멸되고 마침내 국가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한다.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하려던 체제는 ‘국가의 사멸’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상의 차이점을 도입한다. “알고 보니 국가의 사멸은 공산주의하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적대적 자본주의·국민국가들 틈에 낀 소련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에 체제는 그동안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옛 엘리트 전문가를 체제가 스스로 길러낸 ‘간부와 전문가’로 대체했다. 또한 체제의 사회적 기반을 혁명적 노동계급에서 소비에트가 양성한 인텔리겐치아로 옮겨놓았다.
비밀경찰을 동원한 대숙청의 칼날은 옛 인텔리겐치아·부농·네프맨 같은 ‘체제의 적’에게로 향했고, 나아가 정부·당·산업·군부·경찰 같은 모든 정부 부서의 최고위 공산당 관리들과 1917년 혁명을 함께 이끌었던 고참 혁명가까지 ‘인민의 적’으로 고발됐다.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은 130만 명,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은 68만 명에 달한다. 스탈린은 남아 있던 혁명의 불씨들을 모조리 태워버림으로써 드디어 혁명을 끝내고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혁명을, 그리고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
『러시아혁명』은 사라진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 그리고 혁명에 투신하고 국가에 복무했던 당시의 수많은 인민대중에게 바치는 추도사이다. 러시아혁명이 발생한 지 한 세기가, 그리고 혁명의 결과물이었던 소비에트연맹이 소멸한 지 어느덧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사이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상징에서 몰락한 한 체제에 관한 기억으로 전락했다. 특히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혁명을 평가절하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러시아가 전 세계를 지도하는 나라라는 사실에 품었던 자신감이다. 그러나 쉴라 피츠패트릭은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혁명을 완전히 잊기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단언한다.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러시아혁명과 혁명의 사회주의적 목표가 자본주의적 산업국가의 대안으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이 책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책들이 ‘러시아혁명’의 의미와 영향을 쉬지 않고 곱씹을 것이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 그 영향이 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현재 상황과 과거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역시 그렇다. (중략) 러시아혁명은 그 의의에 관심을 두는 한 의미를 확정하기엔 여전히 너무 이르고, 러시아혁명을 계속 진지하게 다루는 이상 근대 유럽사 및 세계사의 분수령으로 항상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혁명을 이야기하려 하고, 당시 혁명에 직접 투신했던 이들이 본 쟁점을 명확히 하려 한다. 러시아혁명의 의미는 프랑스혁명의 의미처럼 끝없이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_서문 중에서
[책의 내용]
1917년 이전의 러시아
20세기 초 러시아는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지만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에 비하면 대체로 후진적인 나라로 취급받았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봉건제에서 뒤늦게 벗어났고 산업화도 뒤쳐져 있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1905년까지 어떠한 합법 정당도, 선거로 선출된 의회도 부재했으며, 차르의 전제정이 여전히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러시아의 농민들은 농노의 신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미르라는 이름의 농촌 공동체에 소속된 채로 농노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근근이 꾸려가고 있었다. 농노였을 때 자기 땅에서 일하면서 지주의 땅에서도 일했다면, 이제는 지주 땅에서 일하는 대신 그만큼을 지주에게 돈으로 지불할 따름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도 서구식의 입헌군주제와 산업화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05년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두마(전국 규모의 의회) 설립을 승인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해외투자·은행 및 신용구조 근대화·토착 기업 발전 등 경제 변화가 완만하게 이어졌다.
20세기 초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는 인구 구성상의 변화를 촉발한다. 가난한 농촌보다 성장하는 도시에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수년 동안 농민 900만 명이 태어난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농업 이외의 직종에 종사했다. 그리고 바로 이 농촌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호전성이 다가올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동한다.
차르의 통치에 대한 농민계급의 불만이 증가하고, 대외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라스푸틴에 의한 국정 농단 등의 실책이 겹쳐지면서 마침내 혁명의 파도가 러시아제국을 덮치고 만다.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1917년 2월, 민중이 봉기하고 엘리트가 체제에 보내던 지지를 철회하면서 전제정이 붕괴했다. 이때 자유주의 정치인, 유산계급과 전문직계급, 그리고 장교들은 엘리트 혁명의 기치 아래로, 사회주의 정치인, 도시의 노동계급, 병사와 수병 등은 대중 혁명의 기치 아래로 모였다. 제국을 쓰러트린 두 세력은 각각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이끌 것이며, 두 기관의 ‘이중권력’ 상태는 러시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만에 2월의 희망과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중권력’은 권력의 공백을 가리기 위한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시기에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700만 명의 러시아 병사들은 임시정부 또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하루빨리 전쟁을 그치고 자신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조직된 수많은 노동자 조직은 ‘노동자 경영’을 요구하며 급진화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발화한 7월 사태와 그 대응으로 발생한 8월의 우익 쿠데타를 거치면서 볼셰비키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급등했다.
볼셰비키의 힘은 엄격한 당 조직과 규율이 아니라, 그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가장 왼쪽에서 서서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우파 세력과의 연립을 거부하고 비타협적 급진주의를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마침내 10월 24일 볼셰비키는 무장봉기했고, 다음날 저녁 임시정부 각료들이 머물고 있던 겨울궁전을 함락시키면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혁명의 구호가 현실화된다. 10월 26일 볼셰비키당 대변인이 전원 볼셰비키당원으로 채워진 새로운 정부(인민위원회의)의 각료 명단을 읽었는데, 정부 수반은 레닌이고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장관)이었다.
적백내전 1918~1920
10월의 권력 장악은 볼셰비키 혁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일주일 동안의 시가전 끝에 모스크바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변경에서는 옛 차르의 군대가 볼셰비키와 싸우려고 소집됐고, 일부는 영원히 추방된 것처럼 보였던 군주제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혁명은 러시아에 자유민주주의 대신 무정부 상태와 내전을 불러왔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대항한 백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와 함께 싸운 옛 동맹군을 포함한 수많은 외세의 지원을 받았다. 볼셰비키는 이 전쟁을 계급 전쟁으로 인식했다. 국내에서는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으로, 국제적으로는 국제 자본주의를 상대로 한 국제 혁명으로 본 것이다.
1920년에 붉은 군대의 승리로 종료된 내전은 볼셰비키와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신적으로는 외국 및 자본주의에 대한 영구적 공포라는 내상을, 정치적·경제적으로는 산업 시설과 경제가 황폐해지고 일시적으로 노동계급이 해체되는 외상을 남겼다.
내전의 경험은 볼셰비키로 하여금 정치문화를 군사화하게 만들었으며, 강제력·행정명령 통치·중앙화된 행정·약식재판 등의 도구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내전 발발 직전에 조직된 ‘반혁명·사보타주·투기에 맞선 투쟁을 위한 전러시아비상위원회(체카)’는 내전을 거치면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적’, 구체제나 임시정부의 관리, 반대 정당원 등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집단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기능을 떠맡게 됐다.
신경제정책 시기 1921~1928
내전이 끝날 무렵에는 자유거래가 거의 사라지고 경제는 사실상 화폐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내전 당시 도시에서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물물교환이 거래의 기본 형태가 됐고, 화폐는 그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1920년에 이르면 노동자의 임금이 현물(식량과 물품)로 지급되기도 했고, 화폐가 아니라 상품을 기반으로 정부 예산을 짜려는 시도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산업 분야에서 성과급제를 유지했지만, 노동자들은 이 지불 방식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며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산업화를 위한 자본이 필요했던 볼셰비키는 경제 회복을 위해 1921년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한다. 이제 체제는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분을 허락했다. 산업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와 개발도 허가되었으며, 정부 지출을 대폭 줄이고 세입을 늘렸다. 이로써 인민은 예전에는 무료였던 교육과 의료에 다시 비용을 지불하게 됐다. 신경제정책은 체제가 경제·사회·문화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고 공산주의가 사회 전체에 가하던 강제를 회유로 대체한 것이었다. 레닌은 이 정책을 “새로운 혁명적 공격을 가하기 전에 볼셰비키에게 힘을 모으고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제공해주는 전략적 후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완화가 정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볼셰비키의 반대파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정당 우파 수천 명이 체포 및 추방되고, 이때부터 집권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이 불법화됐다.
제1차 5개년 계획 1929~1932
레닌 사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일련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개시한다. 그 첫째는 신경제정책을 폐기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한 것이다. 5개년 계획은 네프라는 혁명적이지 못한 타협을 거부하고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소련 인민은 애국적 연대를 강요당했고, 공업화를 위한 ‘총력전’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새 정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 평단원 사이에 만연한 옛 특권계급 출신 전문가에 대한 적대감을 활용했다. 부농과 부르주아지 기술자·행정가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은 외세의 침공이라는 공포와 합쳐지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강화했다.
1929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채택하면서 공업화는 소비에트 체제의 최우선 목표가 됐다. 볼셰비키에게 중앙 계획과 경제 통제라는 원칙은 대단히 중요했다. 1929년의 제1차 5개년 계획 도입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놓인 시금석이었으며, 확실히 이 시기에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제도적 기반이 닦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공업 생산량의 즉각적인 증대를 강조했지만,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 그 자체였다. 따라서 제1차 5개년 계획은 이후 추진될 경제 계획을 위한 투자였다고 볼 수 있다.
방대한 투자는 소련의 경제 지도를 완전히 다시 그려냈다. 이제 소비에트연맹은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짓고 더 많이 생산해야만 했다. 소련의 공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커야 했다. 그들은 경제 발전에서 서양을 따라잡는 데 그치지 않고 추월해야 했다. 소련 곳곳에 들어선 거대한 공장과 산업단지를 본 언론과 외국인은 새로운 소비에트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후진 러시아는 곧 ‘소비에트 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궤도에 올랐다.”
혁명의 종료 1938
1934년 초에 이르면 도시 경제는 작은 협동조합 부문만 제외하고 완전히 국유화됐고, 농업은 거의 대부분 집단화됐다. 혁명이 생산양식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급속한 공업화·근대화가 만들어낸 공장 굴뚝과 트랙터들은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농업집단화는 국가의 곡물 조달 능력을 향상시켰다. 이제 소련에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었다. 혁명을 그치고, 계급전쟁을 끝내고, 혁명의 남은 불씨를 모조리 태워버린 뒤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1936년 후반기에 엘리트 계층에 대한, 특히 산업 엘리트에 대한 광범위한 체포가 시작됐다. 정부, 당, 산업, 군부, 마지막에는 경찰에 이르기까지 관료제의 모든 부서에서 최고위 공산당 관리들이 ‘인민의 적’으로 고발되고 체포됐다. 일부는 총살됐고, 다른 사람들은 굴라그로 사라졌다. 옛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도 숙청을 당했다.
1937~1938년에 진행된 ‘대숙청’이라는 마지막 발작을 끝으로 소련은 혁명 이후의 정상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정을 회복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곧바로 독일 침공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피츠패트릭이 창조한 개념은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됐다. 피츠패트릭 이후에 소련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누구라도 피츠패트릭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셈이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혁명의 쟁점 1. 네프의 성격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의 기간을 정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쟁점들이 있다. 그 첫째는 1920년대에 추진된 신경제정책(네프)의 성격이다. 1920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행정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 계속된 전쟁으로 자원과 산업 시설이 황폐해졌고, 가뭄이 겹치며 농업 생산도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간에 도합 200만 명의 엘리트 계층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국가 경제와 행정을 이끌 인력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침내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17년의 영웅이자 볼셰비키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이들의 이반은 당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결별을 상징하는 듯했다. 볼셰비키는 네프를 도입하며 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체제는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문을 허락했다. 도시에서 사적 거래와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으며 농촌에서는 농민들에게 소자본가적 농업 경영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한 농민이 생산한 식량의 징발을 중지하고 현물세를 도입했다. 국가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대신 일정량만 가져가고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피츠패트릭은 이 시기를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단계로 정의하며 혁명의 기간을 확장시킨다. 체제 외부에서 보기에 네프는 명백히 훌륭한 발전이자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변화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평당원들 사이에서는 당이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잃고 분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축적은 부르주아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공업화를 추진하려면 소비에트 체제도 자본을 축적해야 했기 때문에 네프 시기는 1917년 혁명과 이후를 잇는 필연적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혁명의 쟁점 2. 스탈린 혁명의 성격
두 번째 쟁점은 1920년대 후반에 네프를 끝내버린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지닌 성격이다. 피츠패트릭은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쟁점은 1917년과 1929년이 닮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후자가 전자에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였는지 여부이다. 1927년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를 상대로 투쟁하면서 정치가 불안해졌고, 이 위기는 1928년 초 몇 달 동안 스탈린이 농민계급과 대립하고 옛 ‘부르주아’ 전문가를 배신자로 고발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스탈린이 추진한 급격한 공업화, 그리고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네프를 철회하고 새로 채택한 제1차 5개년 계획에 국가의 거의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10년 전 전시 때처럼 필수품의 보급이 되살아나고, 국가는 도시의 경제·분배·거래를 다시 장악했다. 네프맨들은 체제와 언론의 공격을 받고 투기 혐의로 처벌되거나 알아서 도피해야 했다.
피츠패트릭은 특히 이 시기에 농촌에서 전개된 집단화를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한다. 체제는 집단화를 통해 증가한 생산력을 근대화·공업화에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작물의 40퍼센트를 국가에 조달해야 했던 농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체제에 저항했다. 그리고 체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많은 수의 농민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도시로 떠난 농민의 숫자는 1931년 한해에만 250만 명,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를 거치면서 소비에트 신체제가 공고화된다. 스탈린 혁명으로 국가의 통제가 도시 경제 전체에 직접적으로 확산됐고, 농업 분야에 대한 국가의 착취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이것은 경찰력을 크게 키우고 굴라그(교정 노동 수용소)를 만들어서 인민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소련의 특징이 될 “닫힌 국경·포위 심성·문화적 고립”이 확립된 것이다.
혁명의 쟁점 3. 대숙청의 성격
마지막 쟁점은 1937~1938년의 대숙청을 러시아혁명의 일부로 간주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피츠패트릭은 대숙청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혁명이 끝났다고 말한다. 대숙청은 혁명에 남아 있던 것들, 이를 테면 이상주의, 변모를 향한 열정, 혁명적 어휘, 그리고 혁명가까지 불태워버린 혁명적 열병의 마지막 발작이었다는 설명이다.
1928~1932년에 추진된 제1차 5개년 계획(이름과 달리 4년 만에 완수되었다)이 거대한 공장과 철도, 수력발전 댐 등의 상징물을 남기고 완수되자 혁명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에서 사회주의혁명은 계급 적대와 착취가 소멸되고 마침내 국가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한다.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하려던 체제는 ‘국가의 사멸’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상의 차이점을 도입한다. “알고 보니 국가의 사멸은 공산주의하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적대적 자본주의·국민국가들 틈에 낀 소련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에 체제는 그동안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옛 엘리트 전문가를 체제가 스스로 길러낸 ‘간부와 전문가’로 대체했다. 또한 체제의 사회적 기반을 혁명적 노동계급에서 소비에트가 양성한 인텔리겐치아로 옮겨놓았다.
비밀경찰을 동원한 대숙청의 칼날은 옛 인텔리겐치아·부농·네프맨 같은 ‘체제의 적’에게로 향했고, 나아가 정부·당·산업·군부·경찰 같은 모든 정부 부서의 최고위 공산당 관리들과 1917년 혁명을 함께 이끌었던 고참 혁명가까지 ‘인민의 적’으로 고발됐다.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은 130만 명,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은 68만 명에 달한다. 스탈린은 남아 있던 혁명의 불씨들을 모조리 태워버림으로써 드디어 혁명을 끝내고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혁명을, 그리고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
『러시아혁명』은 사라진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 그리고 혁명에 투신하고 국가에 복무했던 당시의 수많은 인민대중에게 바치는 추도사이다. 러시아혁명이 발생한 지 한 세기가, 그리고 혁명의 결과물이었던 소비에트연맹이 소멸한 지 어느덧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사이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상징에서 몰락한 한 체제에 관한 기억으로 전락했다. 특히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혁명을 평가절하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러시아가 전 세계를 지도하는 나라라는 사실에 품었던 자신감이다. 그러나 쉴라 피츠패트릭은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혁명을 완전히 잊기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단언한다.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러시아혁명과 혁명의 사회주의적 목표가 자본주의적 산업국가의 대안으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이 책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책들이 ‘러시아혁명’의 의미와 영향을 쉬지 않고 곱씹을 것이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 그 영향이 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현재 상황과 과거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역시 그렇다. (중략) 러시아혁명은 그 의의에 관심을 두는 한 의미를 확정하기엔 여전히 너무 이르고, 러시아혁명을 계속 진지하게 다루는 이상 근대 유럽사 및 세계사의 분수령으로 항상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혁명을 이야기하려 하고, 당시 혁명에 직접 투신했던 이들이 본 쟁점을 명확히 하려 한다. 러시아혁명의 의미는 프랑스혁명의 의미처럼 끝없이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_서문 중에서
[책의 내용]
1917년 이전의 러시아
20세기 초 러시아는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지만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에 비하면 대체로 후진적인 나라로 취급받았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봉건제에서 뒤늦게 벗어났고 산업화도 뒤쳐져 있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1905년까지 어떠한 합법 정당도, 선거로 선출된 의회도 부재했으며, 차르의 전제정이 여전히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러시아의 농민들은 농노의 신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미르라는 이름의 농촌 공동체에 소속된 채로 농노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근근이 꾸려가고 있었다. 농노였을 때 자기 땅에서 일하면서 지주의 땅에서도 일했다면, 이제는 지주 땅에서 일하는 대신 그만큼을 지주에게 돈으로 지불할 따름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도 서구식의 입헌군주제와 산업화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05년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두마(전국 규모의 의회) 설립을 승인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해외투자·은행 및 신용구조 근대화·토착 기업 발전 등 경제 변화가 완만하게 이어졌다.
20세기 초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는 인구 구성상의 변화를 촉발한다. 가난한 농촌보다 성장하는 도시에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수년 동안 농민 900만 명이 태어난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농업 이외의 직종에 종사했다. 그리고 바로 이 농촌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호전성이 다가올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동한다.
차르의 통치에 대한 농민계급의 불만이 증가하고, 대외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라스푸틴에 의한 국정 농단 등의 실책이 겹쳐지면서 마침내 혁명의 파도가 러시아제국을 덮치고 만다.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1917년 2월, 민중이 봉기하고 엘리트가 체제에 보내던 지지를 철회하면서 전제정이 붕괴했다. 이때 자유주의 정치인, 유산계급과 전문직계급, 그리고 장교들은 엘리트 혁명의 기치 아래로, 사회주의 정치인, 도시의 노동계급, 병사와 수병 등은 대중 혁명의 기치 아래로 모였다. 제국을 쓰러트린 두 세력은 각각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이끌 것이며, 두 기관의 ‘이중권력’ 상태는 러시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만에 2월의 희망과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중권력’은 권력의 공백을 가리기 위한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시기에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700만 명의 러시아 병사들은 임시정부 또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하루빨리 전쟁을 그치고 자신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조직된 수많은 노동자 조직은 ‘노동자 경영’을 요구하며 급진화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발화한 7월 사태와 그 대응으로 발생한 8월의 우익 쿠데타를 거치면서 볼셰비키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급등했다.
볼셰비키의 힘은 엄격한 당 조직과 규율이 아니라, 그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가장 왼쪽에서 서서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우파 세력과의 연립을 거부하고 비타협적 급진주의를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마침내 10월 24일 볼셰비키는 무장봉기했고, 다음날 저녁 임시정부 각료들이 머물고 있던 겨울궁전을 함락시키면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혁명의 구호가 현실화된다. 10월 26일 볼셰비키당 대변인이 전원 볼셰비키당원으로 채워진 새로운 정부(인민위원회의)의 각료 명단을 읽었는데, 정부 수반은 레닌이고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장관)이었다.
적백내전 1918~1920
10월의 권력 장악은 볼셰비키 혁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일주일 동안의 시가전 끝에 모스크바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변경에서는 옛 차르의 군대가 볼셰비키와 싸우려고 소집됐고, 일부는 영원히 추방된 것처럼 보였던 군주제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혁명은 러시아에 자유민주주의 대신 무정부 상태와 내전을 불러왔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대항한 백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와 함께 싸운 옛 동맹군을 포함한 수많은 외세의 지원을 받았다. 볼셰비키는 이 전쟁을 계급 전쟁으로 인식했다. 국내에서는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으로, 국제적으로는 국제 자본주의를 상대로 한 국제 혁명으로 본 것이다.
1920년에 붉은 군대의 승리로 종료된 내전은 볼셰비키와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신적으로는 외국 및 자본주의에 대한 영구적 공포라는 내상을, 정치적·경제적으로는 산업 시설과 경제가 황폐해지고 일시적으로 노동계급이 해체되는 외상을 남겼다.
내전의 경험은 볼셰비키로 하여금 정치문화를 군사화하게 만들었으며, 강제력·행정명령 통치·중앙화된 행정·약식재판 등의 도구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내전 발발 직전에 조직된 ‘반혁명·사보타주·투기에 맞선 투쟁을 위한 전러시아비상위원회(체카)’는 내전을 거치면서 부르주아지 ‘계급의 적’, 구체제나 임시정부의 관리, 반대 정당원 등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집단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기능을 떠맡게 됐다.
신경제정책 시기 1921~1928
내전이 끝날 무렵에는 자유거래가 거의 사라지고 경제는 사실상 화폐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내전 당시 도시에서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물물교환이 거래의 기본 형태가 됐고, 화폐는 그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1920년에 이르면 노동자의 임금이 현물(식량과 물품)로 지급되기도 했고, 화폐가 아니라 상품을 기반으로 정부 예산을 짜려는 시도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산업 분야에서 성과급제를 유지했지만, 노동자들은 이 지불 방식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며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산업화를 위한 자본이 필요했던 볼셰비키는 경제 회복을 위해 1921년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한다. 이제 체제는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분을 허락했다. 산업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와 개발도 허가되었으며, 정부 지출을 대폭 줄이고 세입을 늘렸다. 이로써 인민은 예전에는 무료였던 교육과 의료에 다시 비용을 지불하게 됐다. 신경제정책은 체제가 경제·사회·문화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고 공산주의가 사회 전체에 가하던 강제를 회유로 대체한 것이었다. 레닌은 이 정책을 “새로운 혁명적 공격을 가하기 전에 볼셰비키에게 힘을 모으고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제공해주는 전략적 후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완화가 정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볼셰비키의 반대파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정당 우파 수천 명이 체포 및 추방되고, 이때부터 집권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이 불법화됐다.
제1차 5개년 계획 1929~1932
레닌 사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일련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개시한다. 그 첫째는 신경제정책을 폐기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한 것이다. 5개년 계획은 네프라는 혁명적이지 못한 타협을 거부하고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소련 인민은 애국적 연대를 강요당했고, 공업화를 위한 ‘총력전’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새 정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 평단원 사이에 만연한 옛 특권계급 출신 전문가에 대한 적대감을 활용했다. 부농과 부르주아지 기술자·행정가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은 외세의 침공이라는 공포와 합쳐지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강화했다.
1929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채택하면서 공업화는 소비에트 체제의 최우선 목표가 됐다. 볼셰비키에게 중앙 계획과 경제 통제라는 원칙은 대단히 중요했다. 1929년의 제1차 5개년 계획 도입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놓인 시금석이었으며, 확실히 이 시기에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제도적 기반이 닦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공업 생산량의 즉각적인 증대를 강조했지만,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 그 자체였다. 따라서 제1차 5개년 계획은 이후 추진될 경제 계획을 위한 투자였다고 볼 수 있다.
방대한 투자는 소련의 경제 지도를 완전히 다시 그려냈다. 이제 소비에트연맹은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짓고 더 많이 생산해야만 했다. 소련의 공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커야 했다. 그들은 경제 발전에서 서양을 따라잡는 데 그치지 않고 추월해야 했다. 소련 곳곳에 들어선 거대한 공장과 산업단지를 본 언론과 외국인은 새로운 소비에트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후진 러시아는 곧 ‘소비에트 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궤도에 올랐다.”
혁명의 종료 1938
1934년 초에 이르면 도시 경제는 작은 협동조합 부문만 제외하고 완전히 국유화됐고, 농업은 거의 대부분 집단화됐다. 혁명이 생산양식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급속한 공업화·근대화가 만들어낸 공장 굴뚝과 트랙터들은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농업집단화는 국가의 곡물 조달 능력을 향상시켰다. 이제 소련에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었다. 혁명을 그치고, 계급전쟁을 끝내고, 혁명의 남은 불씨를 모조리 태워버린 뒤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1936년 후반기에 엘리트 계층에 대한, 특히 산업 엘리트에 대한 광범위한 체포가 시작됐다. 정부, 당, 산업, 군부, 마지막에는 경찰에 이르기까지 관료제의 모든 부서에서 최고위 공산당 관리들이 ‘인민의 적’으로 고발되고 체포됐다. 일부는 총살됐고, 다른 사람들은 굴라그로 사라졌다. 옛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도 숙청을 당했다.
1937~1938년에 진행된 ‘대숙청’이라는 마지막 발작을 끝으로 소련은 혁명 이후의 정상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정을 회복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곧바로 독일 침공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29.이데올로기 연구 (독서>책소개) > 2.러시아혁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 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 분석 (0) | 2022.02.25 |
---|---|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 (0) | 2022.02.25 |
스탈린 :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0) | 2022.02.22 |
돌아온 희생자들 : 스탈린 사후, 굴라크 생존자들의 증언 (0) | 2022.02.22 |
속삭이는 사회 : 스탈린시대의 보통사람들, 내면,기억 (0) | 2022.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