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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이후,
우리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발리바르와 함께
영원한 시작의 철학자 마르크스를 읽다
“이 책이 목표하는 것은 우리가 왜 21세기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철학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들과 철학에 대해 제시하는 개념들을 통해 마르크스를 과거의 기념비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현재성을 지니는 저자로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 재구성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정세적 변화를 날카롭게 분석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작 『마르크스의 철학』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년 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다. 이번 한국어판은 1993년의 『마르크스의 철학』 초판을 개정, 증보한 완전한 의미의 재판(2014)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재판 서문인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의 철학들로? 『마르크스의 철학』 출간 20년 후]와 재판 후기인 [철학적 인간학인가 관계의 존재론인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추가된 이 판본은 독자들이 『마르크스의 철학』 본문의 논의를 최근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조정했다. 특히 재판 후기는 『마르크스의 철학』 2장의 핵심인 마르크스의 철학에 ‘관개체성의 철학’ 내지는 ‘관계의 존재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촉발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애초 프랑스의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가 대중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입문 총서’의 하나로 『마르크스의 철학』을 기획한 취지를 살려, 새 한국어판 역시 일반 대중이 마르크스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대한 한국어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들고자 했다. 책의 주요한 분석 대상인 ‘주체화’ ‘물신숭배’ ‘관개체성’ 등의 개념에 관한 설명은 물론 국내 마르크스 철학의 최근 연구 동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상세한 옮긴이 주석은 마르크스의 철학이 놓여 있는 다양한 지평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루는 주제와 직결되는 발리바르의 논문 네 편([오히려 인식하라]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을 부록으로 구성해, 독자들이 본문의 논의를 심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소 까다롭고 난해할 수 있는 발리바르의 책과 논문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면서도 밀도 있는 논점들을 제시한 해제(진태원)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 활발한 독해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발리바르와 함께
영원한 시작의 철학자 마르크스를 읽다
“이 책이 목표하는 것은 우리가 왜 21세기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철학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들과 철학에 대해 제시하는 개념들을 통해 마르크스를 과거의 기념비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현재성을 지니는 저자로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 재구성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정세적 변화를 날카롭게 분석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작 『마르크스의 철학』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년 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다. 이번 한국어판은 1993년의 『마르크스의 철학』 초판을 개정, 증보한 완전한 의미의 재판(2014)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재판 서문인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의 철학들로? 『마르크스의 철학』 출간 20년 후]와 재판 후기인 [철학적 인간학인가 관계의 존재론인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추가된 이 판본은 독자들이 『마르크스의 철학』 본문의 논의를 최근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조정했다. 특히 재판 후기는 『마르크스의 철학』 2장의 핵심인 마르크스의 철학에 ‘관개체성의 철학’ 내지는 ‘관계의 존재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촉발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애초 프랑스의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가 대중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입문 총서’의 하나로 『마르크스의 철학』을 기획한 취지를 살려, 새 한국어판 역시 일반 대중이 마르크스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대한 한국어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들고자 했다. 책의 주요한 분석 대상인 ‘주체화’ ‘물신숭배’ ‘관개체성’ 등의 개념에 관한 설명은 물론 국내 마르크스 철학의 최근 연구 동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상세한 옮긴이 주석은 마르크스의 철학이 놓여 있는 다양한 지평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루는 주제와 직결되는 발리바르의 논문 네 편([오히려 인식하라]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을 부록으로 구성해, 독자들이 본문의 논의를 심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소 까다롭고 난해할 수 있는 발리바르의 책과 논문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면서도 밀도 있는 논점들을 제시한 해제(진태원)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 활발한 독해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해제 에티엔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
:하나의 과잉결정에서 다른 과잉결정으로 _ 진태원 6
옮긴이 일러두기 :새로운 번역본 출간에 부쳐 27
재판 일러두기 31
재판 서문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의 철학들로?
『마르크스의 철학』 출간 20년 후 38
1장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인가
마르크스의 철학인가? 59
2장 세계를 변화시키자
: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 85
3장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 권력과 주체화/복종 139
4장 시간과 진보
: 또다시 역사철학인가? 205
5장 과학과 혁명 259
재판 후기 :철학적 인간학인가 관계의 존재론인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77
문헌 안내
1.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 344
2. 일반 저작들 346
3. 각 장의 이해를 위한 참고문헌 보충 348
부록 1 오히려 인식하라 357
부록 2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365
부록 3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397
부록 4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 437
옮긴이 후기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 에티엔 발리바르를 위하여 469
책 속으로
사실 거대한 주기의 종말 이후 마르크스주의적 철학도 사회운동의 세계관도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저자에게서 만들어진 독트린이나 체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부정적 결론은 철학에서 마르크스가 점하는 중요성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기는커녕, 이 중요성에 훨씬 더 거대한 차원을 부여해준다. 환상[망상 또는 착각]과 협잡에서 자유로워진 우리는 오히려 이론적 소우주를 얻게 된 것이다.
--- p. 62
특정한 철학의 형태와 단절한 뒤,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통일된 체계라는 방향이 아니라 독트린들의 (최소한 잠재적인) 다원성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독트린들의 다원성은 마르크스의 독자들과 후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일하게,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단일한 형태의 담론이라는 방향이 아니라 철학에 미달하는 것과 철학을 초과하는 것 사이의 영원한 진동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 p.63
마르크스의 철학이 지니는 이런 모순들, 이런 진동들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르크스의 약점이 전혀 아니다. 이 모순들과 진동들은 철학적 활동의 본질 자체, 즉 그 내용, 스타일, 방법 또는 그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능들을 질문하게 만든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실제로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도 아마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르크스 이후에 철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64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유물론의 기초,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유물론의 기초이다. 위계의 단순한 전도, 한나 아렌트와 다른 이들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이론적 노동자주의’, 다시 말해 (포이에시스가 물질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에서 도출되는) 프락시스에 대한 포이에시스의 우위라는 기초가 아니라,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의 동일화라는 혁명적 테제-이 혁명적 테제에 따르면 프락시스는 끊임없이 포이에시스를 관통하며, 포이에시스는 끊임없이 프락시스를 관통한다-라는 기초. 물질적 변형이 아닌, 그리고 역사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기입되지 않는 그런 현실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변형이 아닌, 다시 말해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변의 ‘본질’을 보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존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노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p.12
국가 혹은 시장. 하지만 이 두 가지 이론 사이의 차이는 결국 앞서 설명했던 모든 것을 요약해주는 다음과 같은 거대한 대립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이데올로기론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이론(이 국가의 이론이라는 표현으로 국가에 내재하는 지배 양식을 지시하도록 하자)인 반면, 물신숭배론은 근본적으로 시장의 이론(시장의 이론이라는 표현으로 주체화/복종 양식 혹은 사회에 대한 시장으로의 조직화에 내재해 있으며 또한 상품의 역량을 통한 그 지배에 내재해 있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 구성 양식을 지시하도록 하자)이다. 이런 차이는 마르크스가 이 두 가지 이론을 정교하게 구성해냈던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파리와 런던, 즉 정치[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수도와 경제[시장과 물신숭배]의 수도)를 통해서도, 그리고 그 당시 마르크스가 혁명적 투쟁의 조건과 목적을 통해 스스로 갖게 되었던 관념의 차이를 통해서도 아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p.189
그 어떤 이론가도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자마자 자기 자신을 개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이론가도 그럴 수 있는 힘, 의지 혹은 ‘시간’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개조를 행하는 것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반작용’, 경제주의의 진정한 통념(다시 말해 경제의 경향들이 자신의 반대물, 즉 프롤레타리아의 것을 포함해 이데올로기들, ‘세계관들’이라는 반대물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이 바로 1880년대 말 엥겔스의 연구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사실, 100년이 지나 다시 한 번 역사의 나쁜 방향[즉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반격]과 마주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다. --- p.249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의 반反유토피아적 이중 운동, 즉 ‘프락시스’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운동과 ‘변증법’이 지시하는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그의 질문을 한층 더 부각할 것이다. 이는 내가 현재의 행위t라고 불렀던 것, 즉 프락시스, 그리고 내가 ‘현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이론적 인식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것, 즉 변증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반역[혁명]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것 또는 과학을 반역[혁명]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했던 변증법은 이제 이 과학과 반역[혁명] 둘 사이의 결합에 관한 무한히 열려진 질문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를 더욱 소박한 프로그램으로 이끌고 가지 않고, 오히려 마르크스에게 철학과 정치 사이를 이어주는, 철학과 정치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그런 ‘가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부여한다.
--- p. 62
특정한 철학의 형태와 단절한 뒤,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통일된 체계라는 방향이 아니라 독트린들의 (최소한 잠재적인) 다원성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독트린들의 다원성은 마르크스의 독자들과 후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일하게,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단일한 형태의 담론이라는 방향이 아니라 철학에 미달하는 것과 철학을 초과하는 것 사이의 영원한 진동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 p.63
마르크스의 철학이 지니는 이런 모순들, 이런 진동들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르크스의 약점이 전혀 아니다. 이 모순들과 진동들은 철학적 활동의 본질 자체, 즉 그 내용, 스타일, 방법 또는 그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능들을 질문하게 만든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실제로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도 아마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르크스 이후에 철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64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유물론의 기초,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유물론의 기초이다. 위계의 단순한 전도, 한나 아렌트와 다른 이들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이론적 노동자주의’, 다시 말해 (포이에시스가 물질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에서 도출되는) 프락시스에 대한 포이에시스의 우위라는 기초가 아니라,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의 동일화라는 혁명적 테제-이 혁명적 테제에 따르면 프락시스는 끊임없이 포이에시스를 관통하며, 포이에시스는 끊임없이 프락시스를 관통한다-라는 기초. 물질적 변형이 아닌, 그리고 역사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기입되지 않는 그런 현실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변형이 아닌, 다시 말해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변의 ‘본질’을 보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존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노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p.12
국가 혹은 시장. 하지만 이 두 가지 이론 사이의 차이는 결국 앞서 설명했던 모든 것을 요약해주는 다음과 같은 거대한 대립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이데올로기론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이론(이 국가의 이론이라는 표현으로 국가에 내재하는 지배 양식을 지시하도록 하자)인 반면, 물신숭배론은 근본적으로 시장의 이론(시장의 이론이라는 표현으로 주체화/복종 양식 혹은 사회에 대한 시장으로의 조직화에 내재해 있으며 또한 상품의 역량을 통한 그 지배에 내재해 있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 구성 양식을 지시하도록 하자)이다. 이런 차이는 마르크스가 이 두 가지 이론을 정교하게 구성해냈던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파리와 런던, 즉 정치[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수도와 경제[시장과 물신숭배]의 수도)를 통해서도, 그리고 그 당시 마르크스가 혁명적 투쟁의 조건과 목적을 통해 스스로 갖게 되었던 관념의 차이를 통해서도 아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p.189
그 어떤 이론가도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자마자 자기 자신을 개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이론가도 그럴 수 있는 힘, 의지 혹은 ‘시간’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개조를 행하는 것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반작용’, 경제주의의 진정한 통념(다시 말해 경제의 경향들이 자신의 반대물, 즉 프롤레타리아의 것을 포함해 이데올로기들, ‘세계관들’이라는 반대물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이 바로 1880년대 말 엥겔스의 연구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사실, 100년이 지나 다시 한 번 역사의 나쁜 방향[즉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반격]과 마주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다. --- p.249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의 반反유토피아적 이중 운동, 즉 ‘프락시스’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운동과 ‘변증법’이 지시하는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그의 질문을 한층 더 부각할 것이다. 이는 내가 현재의 행위t라고 불렀던 것, 즉 프락시스, 그리고 내가 ‘현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이론적 인식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것, 즉 변증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반역[혁명]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것 또는 과학을 반역[혁명]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했던 변증법은 이제 이 과학과 반역[혁명] 둘 사이의 결합에 관한 무한히 열려진 질문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를 더욱 소박한 프로그램으로 이끌고 가지 않고, 오히려 마르크스에게 철학과 정치 사이를 이어주는, 철학과 정치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그런 ‘가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부여한다.
--- p.274~275
출판사 리뷰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이후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
2018넌 한국에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돌아온’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르크스의 철학』 재판의 한국어판 부제인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에 반해”가 주지하듯, 오늘날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 혹은 발리바르를 통해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인 함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혹은 전혀 유효하지 않아 보이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도, 사회운동의 세계관도, 마르크스에게서 만들어진 독트린이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의 저자인 발리바르 역시 정치경제학 비판 및 사회주의혁명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주제를 접고 유럽 공동체 구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관국민적 시민성 등을 모색하는 작업에 집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발리바르의 작업들의 전면에서는 사라졌지만, 항상 작업의 주요 준거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가령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마르크스주의가 폭력 문제와 맺고 있는 ‘역설적인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의 착취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현대 정치의 조건과 쟁점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와 폭력이라는 대립물들의 결합이 함축하는 정치의 비극적 차원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분석이다. 이 실패는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 및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발리바르가 공산주의라는 주제를 여전히 붙들며 예측 불가능하게 생성되고 있는 공산주의(들)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말하자면, 이렇듯 발리바르가 점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 즉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몰두하는 주제들에는 너무 적은 논의를 할당하는 이 위치야말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방증해준다. 과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다시 혹은 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위한 방편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이 제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와 함께하는, 그리고 동시에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사유의 필요성이다. 곧, 철학자들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활용은 철학자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성을 의식하도록 하는 자기-비판적인 차원을 영원히 지녀야만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지니는 모순과 진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모순과 진동은 마르크스의 약점이 아니라, 철학적 활동의 본질 자체, 즉 그 내용, 스타일, 방법 또는 그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능들을 질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마르크스 이후에 철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시대에 실제로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마르크스를 읽는 몇 가지 단서: 반철학, 비철학, 단절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주요한 난점 혹은 모순은 마르크스의 철학이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즉 비철학이자 반철학으로 제시되었다는 데 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해 이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일관된 전체를 갖지 않았다는 점을 뜻한다. 특정한 철학의 형태와 단절한 뒤,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통일된 체계라는 방향이 아니라 독트린들의 다원성이라는 방향으로, 철학에 미달하는 것과 철학을 초과하는 것 사이의 영원히 진동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물론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철학의 이런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철학에 대한 관념 또는 철학을 하는 방법을 변화시키도록 강제할 뿐만 아니라, 철학의 실천 자체를 변형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위와 같은 조건들이 우리가 마르크스의 철학들을 찾아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우리가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하나의 ‘열린 전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철학적 저작들’과 ‘역사학적 저작들’, 그리고 ‘경제학적 저작들’ 사이를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구분은 오히려 마르크스가 철학적 전통 전체와 맺어왔던 비판적 관계를,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 철학적 전통 전체에 생산했던 혁명적 효과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은 철학적 작업이 배어 있는 저작인 동시에 철학적 전통이 철학을 고립시키고 한정 지었던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을 활용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 누구보다도 ‘정세’의 철학자였다는 점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정세의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에게 몇 가지 주요한 ‘단절’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단절은 마르크스의 철학 자체와 분리 불가능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말했던 “개념에 대한 끈질긴 탐구”도, 탐구 결과의 엄밀함도 배제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런 태도는 결론의 안정성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발리바르가 마르크스를 언제나 새로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한 재출발의 철학자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사유의 내용은 그 사유가 이동한 궤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로서는 마르크스의 사유가 그 단절과 분기를 통해 변화했던 흔적들을 다시 추적해보아야만 한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 내에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주제를 도입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절단 내에 두 차례의 ‘단절’이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단절’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와 1871년 파리 코뮌의 비극적 경험으로,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정정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발리바르의 기본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마르크스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 중 하나는 책의 2장인 [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이하 [테제])에 대한 심층적이고도 독창적인 독해를 시도한다. 특히 발리바르는 새로 추가한 [재판 후기]에서 이 [테제]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계론적 존재론 또는 관개체성에 입각한 철학적 인간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를 파르메니데스의 비의적 경구나 스피노자의 이른바 ‘평행론’ 명제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아포리즘과 비견될 만한 서양철학사의 기념비적 텍스트로 격상시킨다.
또한 발리바르가 [재판 후기]에서 [테제]를 재해석하는 방식 자체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발리바르는 텍스트가 지닌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미들 및 그 갈등의 양상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발굴해내는데, 이는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적 독해를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해석들이 [테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열한 번째 테제(“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를 중심으로 삼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 규정하는 여섯 번째 테제에 초점을 둔다. 이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관점에서 여섯 번째 테제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철학적 담론을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대체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는 알튀세르의 해석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
[테제]에 대한 재독해와 함께 물신숭배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확장은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선사한다. 발리바르는 3장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권력과 주체화/복종]에서 물신숭배 개념이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이론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철학』 한국어판은 프랑스어 원서가 갖지 못한 독자적인 이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총 4편의 글로 이루어진 ‘부록’이 그 역할을 한다. ‘부록’ 중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글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의 글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물신숭배 이론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함의를 훨씬 더 풍부하고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이 글들은 1993년 『마르크스의 철학』 초판이 나온 이래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에서 물신숭배 이론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한국 독자들을 위해 3편의 글을 체계적으로 번역, 배열해 소개했다. 이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발리바르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인지, 또한 어떤 알튀세리앵인지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신숭배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흔히 알튀세르와의 단절의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데올로기에 관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과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물신숭배론과 이데올로기 개념이 모두 ‘주체화/복종’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화/복종’의 문제가 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예속적 주체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을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의 개조이자 발전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의 역사성들
4장 [시간과 진보: 또 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는 세 가지의 인과성 도식, 즉 ‘역사의 나쁜 방향’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두 가지 사회성의 대립’ ‘독특한 대안적 발전의 경로들’이 제시된다. 발리바르는 이 세 가지 도식을 통해 마르크스의 저작들 안에서 역사적 인과성의 다양한 측면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런 작업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발리바르의 인과성 도식은 알튀세르가 초기의 과잉결정 개념에서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까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선형적/진화론적 목적론에서 벗어나 그 구체적 조건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해명하려고 했던 것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부록의 마지막 글인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에서는 ‘연장된 사회 전쟁’이라는 정치적 시나리오와 ‘총체적 포섭/복종’이라는 허무주의적 시나리오를 동시에 읽어내려는 노력 또한 돋보인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발리바르의 새로운 정세에 입각해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면밀히 독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혹은 새로운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훨씬 더 불명확하지만 훨씬 더 풍부한 마르크스”를 위하여
『마르크스의 철학』 재판에 추가된 서문과 후기 그리고 한국어판에 실린 4편의 논문을 총괄해볼 때, 독자들은 발리바르의 작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한 발리바르와 함께 오늘날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 ‘과잉결정’ 개념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중심주의에서 벗어나되, 어떻게 여전히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견지할 수 있을지에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 환경운동의 접합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가부장제적인 여성 지배의 문제,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주의 문제,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의 계급적 착취 및 지배 구조를 과잉결정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시도였다.
반면 발리바르의 작업의 핵심은 위와 같은 과잉결정 개념을 오히려 역의 방향에서 이해하려는 데 있다. 즉 어떻게 계급적 착취 및 지배가 여성 지배, 인종 차별, 환경 등의 문제를 어떻게 과잉결정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발리바르 작업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에 대한 지배 내지는 혐오의 문제에서 항상 자본주의적 불평등 구조가 드러나는 방식(노동과 고용에서의 차별), 인종차별과 민족차별의 문제가 세계 경제 내부의 위계화된 노동 질서로 드러나는 방식 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듯 발리바르와 함께 과잉결정 자체를 새롭게 이해해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착취와 지배의 문제는 더 이상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다른 문제들과 쟁점들 내에서만, 또 그것들과 결부될 경우에만 유효하다. “따라서 동시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마라크스주의자, 동시에 민주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환경운동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인권의 정치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쟁점을 해멸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그는 우리에게 “훨씬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 제시했던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런 마르크스”를 보여준다.
2018넌 한국에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돌아온’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르크스의 철학』 재판의 한국어판 부제인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에 반해”가 주지하듯, 오늘날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 혹은 발리바르를 통해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인 함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혹은 전혀 유효하지 않아 보이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도, 사회운동의 세계관도, 마르크스에게서 만들어진 독트린이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의 저자인 발리바르 역시 정치경제학 비판 및 사회주의혁명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주제를 접고 유럽 공동체 구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관국민적 시민성 등을 모색하는 작업에 집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발리바르의 작업들의 전면에서는 사라졌지만, 항상 작업의 주요 준거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가령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마르크스주의가 폭력 문제와 맺고 있는 ‘역설적인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의 착취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현대 정치의 조건과 쟁점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와 폭력이라는 대립물들의 결합이 함축하는 정치의 비극적 차원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분석이다. 이 실패는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 및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발리바르가 공산주의라는 주제를 여전히 붙들며 예측 불가능하게 생성되고 있는 공산주의(들)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말하자면, 이렇듯 발리바르가 점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 즉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몰두하는 주제들에는 너무 적은 논의를 할당하는 이 위치야말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방증해준다. 과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다시 혹은 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위한 방편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이 제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와 함께하는, 그리고 동시에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사유의 필요성이다. 곧, 철학자들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활용은 철학자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성을 의식하도록 하는 자기-비판적인 차원을 영원히 지녀야만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지니는 모순과 진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모순과 진동은 마르크스의 약점이 아니라, 철학적 활동의 본질 자체, 즉 그 내용, 스타일, 방법 또는 그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능들을 질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마르크스 이후에 철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시대에 실제로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마르크스를 읽는 몇 가지 단서: 반철학, 비철학, 단절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주요한 난점 혹은 모순은 마르크스의 철학이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즉 비철학이자 반철학으로 제시되었다는 데 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해 이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일관된 전체를 갖지 않았다는 점을 뜻한다. 특정한 철학의 형태와 단절한 뒤, 마르크스의 이론적 활동은 그를 통일된 체계라는 방향이 아니라 독트린들의 다원성이라는 방향으로, 철학에 미달하는 것과 철학을 초과하는 것 사이의 영원히 진동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물론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철학의 이런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철학에 대한 관념 또는 철학을 하는 방법을 변화시키도록 강제할 뿐만 아니라, 철학의 실천 자체를 변형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위와 같은 조건들이 우리가 마르크스의 철학들을 찾아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우리가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하나의 ‘열린 전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철학적 저작들’과 ‘역사학적 저작들’, 그리고 ‘경제학적 저작들’ 사이를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구분은 오히려 마르크스가 철학적 전통 전체와 맺어왔던 비판적 관계를,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 철학적 전통 전체에 생산했던 혁명적 효과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은 철학적 작업이 배어 있는 저작인 동시에 철학적 전통이 철학을 고립시키고 한정 지었던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을 활용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 누구보다도 ‘정세’의 철학자였다는 점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정세의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에게 몇 가지 주요한 ‘단절’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단절은 마르크스의 철학 자체와 분리 불가능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말했던 “개념에 대한 끈질긴 탐구”도, 탐구 결과의 엄밀함도 배제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런 태도는 결론의 안정성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발리바르가 마르크스를 언제나 새로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한 재출발의 철학자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사유의 내용은 그 사유가 이동한 궤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로서는 마르크스의 사유가 그 단절과 분기를 통해 변화했던 흔적들을 다시 추적해보아야만 한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 내에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주제를 도입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절단 내에 두 차례의 ‘단절’이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단절’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와 1871년 파리 코뮌의 비극적 경험으로,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정정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발리바르의 기본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마르크스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 중 하나는 책의 2장인 [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이하 [테제])에 대한 심층적이고도 독창적인 독해를 시도한다. 특히 발리바르는 새로 추가한 [재판 후기]에서 이 [테제]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계론적 존재론 또는 관개체성에 입각한 철학적 인간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를 파르메니데스의 비의적 경구나 스피노자의 이른바 ‘평행론’ 명제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아포리즘과 비견될 만한 서양철학사의 기념비적 텍스트로 격상시킨다.
또한 발리바르가 [재판 후기]에서 [테제]를 재해석하는 방식 자체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발리바르는 텍스트가 지닌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미들 및 그 갈등의 양상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발굴해내는데, 이는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적 독해를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해석들이 [테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열한 번째 테제(“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를 중심으로 삼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 규정하는 여섯 번째 테제에 초점을 둔다. 이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관점에서 여섯 번째 테제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철학적 담론을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대체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는 알튀세르의 해석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
[테제]에 대한 재독해와 함께 물신숭배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확장은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선사한다. 발리바르는 3장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권력과 주체화/복종]에서 물신숭배 개념이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이론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철학』 한국어판은 프랑스어 원서가 갖지 못한 독자적인 이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총 4편의 글로 이루어진 ‘부록’이 그 역할을 한다. ‘부록’ 중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글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의 글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물신숭배 이론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함의를 훨씬 더 풍부하고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이 글들은 1993년 『마르크스의 철학』 초판이 나온 이래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에서 물신숭배 이론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한국 독자들을 위해 3편의 글을 체계적으로 번역, 배열해 소개했다. 이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발리바르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인지, 또한 어떤 알튀세리앵인지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신숭배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흔히 알튀세르와의 단절의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데올로기에 관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과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물신숭배론과 이데올로기 개념이 모두 ‘주체화/복종’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화/복종’의 문제가 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예속적 주체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을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의 개조이자 발전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의 역사성들
4장 [시간과 진보: 또 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는 세 가지의 인과성 도식, 즉 ‘역사의 나쁜 방향’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두 가지 사회성의 대립’ ‘독특한 대안적 발전의 경로들’이 제시된다. 발리바르는 이 세 가지 도식을 통해 마르크스의 저작들 안에서 역사적 인과성의 다양한 측면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런 작업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발리바르의 인과성 도식은 알튀세르가 초기의 과잉결정 개념에서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까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선형적/진화론적 목적론에서 벗어나 그 구체적 조건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해명하려고 했던 것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부록의 마지막 글인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에서는 ‘연장된 사회 전쟁’이라는 정치적 시나리오와 ‘총체적 포섭/복종’이라는 허무주의적 시나리오를 동시에 읽어내려는 노력 또한 돋보인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발리바르의 새로운 정세에 입각해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면밀히 독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혹은 새로운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훨씬 더 불명확하지만 훨씬 더 풍부한 마르크스”를 위하여
『마르크스의 철학』 재판에 추가된 서문과 후기 그리고 한국어판에 실린 4편의 논문을 총괄해볼 때, 독자들은 발리바르의 작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한 발리바르와 함께 오늘날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 ‘과잉결정’ 개념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중심주의에서 벗어나되, 어떻게 여전히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견지할 수 있을지에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 환경운동의 접합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가부장제적인 여성 지배의 문제,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주의 문제,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의 계급적 착취 및 지배 구조를 과잉결정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시도였다.
반면 발리바르의 작업의 핵심은 위와 같은 과잉결정 개념을 오히려 역의 방향에서 이해하려는 데 있다. 즉 어떻게 계급적 착취 및 지배가 여성 지배, 인종 차별, 환경 등의 문제를 어떻게 과잉결정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발리바르 작업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에 대한 지배 내지는 혐오의 문제에서 항상 자본주의적 불평등 구조가 드러나는 방식(노동과 고용에서의 차별), 인종차별과 민족차별의 문제가 세계 경제 내부의 위계화된 노동 질서로 드러나는 방식 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듯 발리바르와 함께 과잉결정 자체를 새롭게 이해해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착취와 지배의 문제는 더 이상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다른 문제들과 쟁점들 내에서만, 또 그것들과 결부될 경우에만 유효하다. “따라서 동시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마라크스주의자, 동시에 민주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환경운동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 동시에 인권의 정치가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쟁점을 해멸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그는 우리에게 “훨씬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 제시했던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런 마르크스”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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