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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

동방박사님 2022. 3. 1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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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서재필·이승만·김구 등…… 군주정을 버린 조선의 선비들

『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는 2년 간 서울에 있는 스물 한 명의 동상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와 정치, 문화를 다시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수차례 동상을 방문하고, 동상에 새겨져 있는 해당 인물의 업적을 통해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 인물은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는지를 꼼꼼히 추적했다. 그리고 동상을 만든 조각가, 서예가, 작가 등 당대의 예술가들이 어떤 계기로 동상 제작에 참여하게 됐는지를 살피면서 동상과의 관계를 따졌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스물 한 명의 인물들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각 동상이 위치한 장소를 지역별로 나누어 장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일정 구역에 따라 동상을 직접 찾아가볼 수도 있도록 했으며, 맨 앞에는 해당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술한 소개 부분을 삽입하여 기본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동상의 외형적 묘사뿐 아니라 동상 제작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들 또한 함께 녹여내어,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동상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자가 직접 찍은 동상들과 주변 조형물의 사진들은 마음 놓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는 코로나 시대에 큰 위안을 가져다 줄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_ 조선의 선비들 공화정을 외치다

제1장 광진·노원 권역
능동 어린이대공원 방정환 선생 동상 -백성이 아닌 국민이 된 어린이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고당 조만식 동상 -3대 세습 복벽주의와 맞선 독립운동가
육군사관학교 안중근 장군 동상 및 국방부 청사 앞 흉상 -대한민국 장군이 된 대한의군 중장

제2장 남산 권역
남산공원 안의사 광장 안중근 동상 -동양 평화를 위해 총을 든 선비
숭의여대 운동장 안중근 의사 동상 -민주공화국의 씨앗이 된 안중근
장충동 남산공원 유관순 열사 동상 -조선 독립의 횃불을 든 소녀
장충동 한국자유총연맹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상 -황제정을 버린 무기수 이승만
회현동 백범광장공원 김구 동상 -과거시험에 낙방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제3장 명동·서울역 권역
명동 나석주 열사 동상 -식민지 수탈의 본산 동양척식회사에 울린 총성
명동 YWCA 빌딩 앞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4조 원 명동 땅을 독립운동에 바친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 동상 -올림픽을 제패한 영원한 한국인 마라토너
봉래동 구 서울역 앞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사이토 조선총독 척살을 시도한 64세 노인

제4장 종로 광화문 권역
신문로 1가 한글회관 주시경 선생 흉상 -백성의 글 훈민정음을 국민의 글 한글로 바꾼 스승
광화문 교보빌딩 앞 소설가 염상섭 동상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 자연주의 작가
홍파동 홍난파 가옥 앞 작곡가 홍난파 흉상 -식민지 조선인의 마음을 울린 근대음악의 선구자
정동 이화여고 유관순 동상 -저항의 아이콘이 된 한국의 잔 다르크

제5장 종각·대학로 권역
종로 수송공원 옥파 이종일 동상 -3·1 독립선언서 인쇄의 주역
종로 탑골공원 내 의암 손병희 선생 상 -3·1 독립만세운동의 총감독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김상옥 열사 상 -일본 경찰과 벌인 1대 1,000의 싸움

제6장 서대문·성북·용산 권역
서대문독립공원 송재 서재필 동상 -공화주의자가 된 조선의 선비
성북동 만해산책공원 만해 한용운 동상 -3·1 독립만세운동의 조율자
효창동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제국주의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을 떨게 한 기개

제7장 서초·영등포 권역
양재동 시민의숲 매헌 윤봉길 의사 동상 -독립투사가 된 유학자 농민운동가
매헌초등학교 및 양재시민의숲 역 윤봉길 흉상 -한·중·일 3국을 뒤흔든 윤봉길의 폭탄
문래공원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 -대한민국 건국의 위인과 그들을 서훈한 박정희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우남 이승만 상 -민주공화국 초대 국회의장과 대통령이 된 조선의 선비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상도
 
강원 양구 출생, 서울시립대와 동국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평화방송에 입사해 노무현·이명박 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5년을 비롯해 국회·국방부·행정안전부·국토교통부를 출입했고 정치부장·보도국장·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 오늘’ CP 및 앵커를 역임했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회 이사·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이사·한국가톨릭매스컴상 심사위원·서울시립대언론인회 회장을 지냈다. 국방과 역사, AI시대 디지털 저널리즘에 ...
 

책 속으로

3·1 운동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다. 3·1 운동 후 선각자들이 꿈꾼 나라는 왕이 없는 나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의 나라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조선에서는 나라를 되찾아 군주정을 회복하자는 복벽주의(復?主義), 황제였던 고종을 내세워 독립을 쟁취하고 황실을 복권하자는 보황주의(保皇主義) 독립운동이 활발했다. 한동안 큰 세력을 형성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3·1 운동을 계기로 사실상 사라졌다. 서재필, 이승만, 김구, 조만식 등 많은 선각자들이 주장한 공화정은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출범하면서 실현됐다.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지만 72년이 지난 현재도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반면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한반도 북쪽에 탄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체제가 이어지면서 사실상 군주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나라로 바뀌었다. 3·1 운동과 독립운동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복벽주의가 되살아난 셈이다.
--- p.8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어린이에 대한 기초조건〉을 발표하면서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다 같이 내일을 살리기 위하여 이 몇 가지를 실행합시다”라고 발표했다. 이 선언은 국제연맹이 발표한 국제아동권리선언보다 1년 빠른 세계 최초의 아동권리선언이었다. 방정환이 일제 식민지 시절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방정환이 처음 창안해서 사용한 ‘어린이’라는 말은 젊은이, 늙은이와 대칭되는 표현으로, 어린 사람이라는 뜻과 함께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는 느낌을 담았다.
1946년, 해방 후 첫 어린이날 행사에서 4명의 남녀 어린이가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낭독했다. 이들은 선서문을 통해 새날 새 조선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 p.28

3·1 운동 때에는 서울과 천안, 제주 등에서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했고 해주와 진주에서는 기생이 시위대 전면에서 일본 경찰과 일전을 벌였다. 이런 여성들의 적극적인 모습은 과거 남녀차별 및 신분 구분이 뚜렷했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이처럼 여성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3·1 운동에 당당하게 나섰다. 이는 여성들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탄생에 당당한 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선두에 유관순이 있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시위,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행한 옥중투쟁과 순국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창이었다.
--- p.105

손기정에게 청동 투구는 돌아왔지만 국적과 이름은 돌아올 수 없었다. IOC 금메달리스트 역사에 남아 있는 손기정의 국적과 이름은 여전히 ‘일본 국적(JPN) 기테이 손’이다. 손기정의 동료인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도 ‘일본 국적(JPN) 쇼류 난’이다. 과거에 있는 공식 기록을 바꿀 수 없다는 IOC의 방침이 바뀌지 않는 한 손기정은 ‘기테이 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손기정 동상을 보면 한편으로 아쉽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청동 투구를 들었지만 손기정은 웃고 있지 않다. 동상에서 우승자의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IOC의 방침이 무엇이든 손기정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기쁨과 자부심을 줬던 조선인 마라토너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손기정은 환한 얼굴로 이 땅에서 우승의 기쁨을 누려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 p.189

그러나 말년의 오점에도 불구하고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였다. 그가 남긴 ‘고향의 봄’,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봉선화’, ‘금강에 살으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주옥같은 동요와 가요는 조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봉선화는 어린 소녀들이 손톱에 물들이는 소박한 꽃이지만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봉선화’라는 노래가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 것이다.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는 부를 만한 노래가 없던 조선에서 일상적인 노래가 됐다. 만주나 중국, 일본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들으며 자연스레 고향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었다. 과거 각종 남북행사가 끝날 즈음 참석자들이 손을 잡고 ‘고향의 봄’을 부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홍난파가 만든 곡은 국민의 노래, 민족의 노래로 남았다.
--- p.240

손병희는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와 보문관을 설립했고, 1910년에는 천도교 직영 인쇄소 창신사를 설립해 〈천도교도회월회보〉를 발행했다. 1911년 창신사와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사를 합병했고 회사 이름은 ‘보성사’로 정했다. 천도교의 소유가 된 보성사 사장이 이종일이었다. 이종일은 보성사를 인쇄소 겸 천도교의 비밀 독립기지로 활용했다. 한때 보성사에는 일본식 장총 10여 정과 실탄 200발이 은닉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가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동상에서 남쪽으로 1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보성사 터 안내 동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종일은 동판에 보성사 사장으로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한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 p.261

서재필은 조선이 독립국이지만 청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독립국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보고, 종주국을 주장하는 청나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조선을 노리는 일본과 러시아 및 서구 열강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서재필은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했다. 상징적 차원에서 과거 중국 사신이 머물던 장소였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바꾸어서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했고,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 개선문을 본뜬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건립 비용은 모금으로 충당했다.
--- p.318

국회 로텐더홀 이승만 동상은 설치 전부터 “국회의사당과 독재자 이승만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가 끊이지 않았다. 동상이 건립되기 6개월 전인 1999년 12월 1일 국회 〈의회지도자 이승만 상 건립의 건 심사보고〉 회의록에는 격렬한 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수인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개헌안을 부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이라고 하는 반의회주의의 작태를 자행했다”며, “이승만은 결코 의회주의의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본회의 표결 결과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재석 181명 중 찬성 127명, 반대 34명, 기권 20명으로 ‘의회지도자 상(像) 건립안’은 70%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2000년 5월 15일 동상 제막식에서 박준규 국회의장은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 그리고 그의 업적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했다.
--- p.424
 

출판사 리뷰

서울 시내 동상 27곳을 찾아……
근현대사의 균형감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를


서재필부터 시작하여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스물 한 명의 실존 인물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보아 선비로 불렸을 사람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군주정을 버리고 공화정 탄생에 기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또한 인간인지라 개인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흠이 있거나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민주공화국의 탄생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공로자들이다.

저자 이상도는 3·1 운동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라고 보고 있으며, 그 핵심은 공화정 정신에 있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1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북한 김일성과 맞선 조만식 선생 등을 내세웠다. 공화정을 만들기 위해 피를 뿌린 선각자들의 정신이 3·1 운동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저자는 현재의 남북한 상황을 든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남과 북에는 공화정을 표방하는 각각의 정부가 세워졌지만, 72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남쪽에는 공화정 정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북쪽은 사실상 왕이 통치하는 복벽주의 정부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는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을 기점으로, 그 당시 인물들과 그 정신을 물려받은 지금의 국민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볼 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부정적으로 볼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전제군주론에 입각하여 다시 왕을 세우려고 했던 보황주의保皇主義와 복벽주의復?主義에 갇혀 있던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서 민주공화정 국가를 세우게 된 여러 위인들의 업적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가 우리가 만든 민주공화정에 대한 자부심을 되살리고 역사의 균형감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