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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 따라 걷기 (책을 만들던 곳, 책를 팔던 곳, 가르치던 곳)

동방박사님 2022. 3. 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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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적인 장소, 그 터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는 표지석

서울 도심의 길을 걸으면 수많은 표지석을 만난다. 무릎 높이의 표지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신경 쓰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는 표지석은 늘 같은 자리에서, 그 터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터에 흘러간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 사라진 사건과 사람들, 공간에 대한 역사와 이야기가 표지석에 남아 있다.

이 책은 서울에 있는 수많은 표지석 중 1900년대 책, 교육과 관련된 표지석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표지석은 장소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만 전달해서 표지석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표지석을 통해 장소가 변해온 역사뿐만 아니라 1900년대 책과 교육의 이야기와 장소에 대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목차

1장 책을 만들던 곳

보성사 터
신문관·조선광문회 터
조선어학회 터
한성도서주식회사 터
황성신문 터

2 책을 팔던 곳

회동서관 터
한남서림 터
세창서관 터
남만서점 터
마리서사 터·박인환선생 집 터

3 가르치던 곳

서울중고등학교 터
정신여학교 터
서북학회 터
보구여관 터
제중원 터
훈련원 터
 

저자 소개

저 : 정도환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다니며 표지석과 그곳의 현재 모습을 촬영하고 자료를 모아서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만든다. 서울 중구 문화원에서 진행하는 향토 사학, 마을 강사 양성 과정 교육을 받은 후에 역사적인 공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표지석과 미래유산을 주제로 사진을 찍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교육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에 연구자로 ...
 

책 속으로

이곳을 ‘보성사 터’라고 하는 이유는 이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보성사에서 일어난 사건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1910년에 설립한 인쇄소 보성사가 있었던 자리다. 보성사는 교회서적과 학교 교과서를 인쇄하던 곳이다. 보성사는 1919년 2월, 극비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며 그날의 이야기를 알면 이곳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보성사 터」중에서

조선광문회 취지에 따라 고문헌을 수집, 새로 편찬, 간행, 보급하는 목적에 따라 가장 활발하게 책을 간행한 곳이 두 번째 사옥(현재 SKT타워 부근)이다. 표지석에는 ‘신문관, 조선광문회 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신문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 곳이다. 최남선은 신문관과 조선광문회 두 곳에서 책과 잡지를 만들었다. 신문관이 먼저 생기고 4년 쯤 지나서 조선광문회를 창립했다. 두 곳 모두 책을 만드는 곳인데 왜 두 곳을 분리해서 운영했을까?
---「신문관, 조선광문회 터」중에서

경성역 창고에 방치되었던 원고는 1947년에 〈조선말 큰사전〉 1권으로 나왔다. 주시경을 비롯해서 우리말 사전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1949년에 2권을 만들었고 3권부터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꿔서 간행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글학회 회관 건물이 전소되어 사전 간행을 중단했다가 1957년 〈큰사전〉 4,5,6권까지 완간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에 얽힌 이야기는 2018년에 영화 〈말모이〉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에 전국에서 보내온 사투리 엽서를 분류하고 공청회를 열어서 의견을 모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조선어학회 터」중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창간해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진단학보〉다. 〈진단학보〉 창간호가 나온 것은 1934년 11월이다. 1934년 5월 서울 소공동의 다방에서 40대를 바라보는 한국인 학자 20여 명이 모여서 〈한국과 그 인근 지역의 문화연구〉를 목적으로 학술단체를 발기하는 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탄생한 모임이 ‘진단학회’다.
---「한성도서주식회사 터」중에서

회동서관은 갑오개혁 이후에 문을 연 대표적인 근대 서점이다. 1897년 고제홍이 자본금 15만 원으로 청계천 광교 남쪽(서울시 남대문로 1가 14번지)에 ‘고제홍서사’를 설립했다. 고제홍의 부친은 포목상을 운영했는데, 상점을 물려받으면서 서적상으로 업종을 바꿨다. 1907년에 고제홍의 아들 고유상이 가업을 이어받아 회동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회동서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서적상 경영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 네 살 때다.
---「회동서관 터」중에서

적은 수입으로 어렵게 운영하던 한남서림을 1932년에 조선의 재벌로 불리던 전형필이 인수했다. 당시 전형필은 한학의 대가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고미술품 감정가로 활동한 오세창의 제자였다. 전형필이 휘문고보에 다닐 때, 미술을 가르치던 춘곡 고희동(전형필의 스승, 한국인최초의 서양화가)에게 오세창을 소개 받았다. 그로부터 몇 해 뒤에 전형필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에 고미술품을 감정하던 오세창의 문하를 들나들면서부터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남서림 터」중에서

표지 왼쪽 아래에는 세창서관(世昌書館)에서 만들었다는 표시를 동그라미 모양으로 넣었다. 동그라미에 책 번호를 적어넣고 주소를 표시한 것은 세창서관의 트레이드 마크다. 신소설의 표지도 이와 유사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영화와 잡지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표지 삽화에 배경과 사건을 강조하고 주인공을 작게 그리는 풍으로 바뀌었다. 초기에 인물만 크게 그려넣던 삽화와 달라진 부분이다. 딱지본 소설이 유행하기 전에는 책에 계몽과 개화사상을 담았지만, 딱지본이 유행하면서 일탈적인 사건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바뀌었고 통속성을 부각한 딱지본은 문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창서관 터」중에서

박인환이 모더니즘을 추구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마리서사 이름을 지은 배경에는 세계적인 모더니스트 문학가와 예술가가 여럿 등장한다. 마리서사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박인환만 알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마리서사가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모태가 된 장소였다는 것이다. 김수영, 김경린, 김광균, 김기림, 정지용 등 당시에 활동하던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마리서사를 즐겨 찾았다.
---「마리서사 터·박인환선생 집 터」중에서

서울중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경희궁이 있었다. 경희궁이 없어진 뒤에 서울중고등학교가 생긴 게 아니라 처음부터 궁궐 안에 학교를 지었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안에 학교가 있으면 “교육 환경이 좋다”, “아이 키우기 좋다”라고 홍보한다. 그런데 궁궐 안에 학교가 있다는 건 상상이 안 된다.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안에는 학교가 없어서 경희궁 안에 학교가 생긴 이유가 궁금하다.
---「서울중고등학교 터」중에서

정동여학당은 현재 예원학교와 덕수궁 중명전 자리에 문을 열었다. 중명전을 짓기로 하면서 1895년에 종로구 연지동으로 이전했고 ‘사립연동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06년 7월에 진학신, 김운곡 등이 여자교육과 사회문명을 개진할 목적으로 여자교육회를 조직했다. 이 학회의 부속학교로 1906년에 양규의숙, 1907년에 신학원을 설립했다. 당시에 여자학교는 대부분 기독교 여자선교사가 설립했다. 개화운동과 더불어 민족의식에서 비롯되어 조선에서 관직을 지낸 인물과 민간인이 출자한 학교도 설립되었다.
---「정신여학교 터」중에서

서북학회회관은 당시 청나라 기술자들이 지었다. 한옥을 짓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목수였고 벽돌로 건물을 짓는 공법을 몰랐기 때문에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에 지은 대부분의 벽돌 건물은 청나라와 일본에서 온 기술자가 만들었다. 이 시기에 일제는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었고 대부분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반면, 서북학회회관은 청나라 기술자가 지었다. 일본인 기술자가 짓지 않고 청나라 기술자가 지은 이유는 구국항일단체였던 서북학회에서 일본인의 도움 없이 건물을 짓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서북학회 터」중에서

보구여관이 생긴 후에 여자 환자는 보구여관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보구여관이 처음 문을 열고 10개월 동안 메타 하워드 여의사는 1,100여 명을 치료하였고, 다음해에는 1,400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로제타 셔우드의 아들인 셔우드 홀은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 메타 하워드가 보구여관에서 진료하면서 사라(일명 봉선 어머니)가 간호원 겸 조수 역할을 하며 도왔다고 했다. 하지만 보구여관을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서 하워드 여의사는 중도농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진료에 매달렸다.
---「보구여관 터」중에서

고종은 근대식 의료기관을 만들려고 했던 터라 알렌이 제안한 서양식 근대 병원에 관심을 보였다. 알렌은 의료 기술, 도구, 의료인까지 모두 제공한다고 했다. 고종은 갑신정변을 주도하여 역적이 된홍영식의 집(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을 알렌에게 내주었다. 알렌은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진찰실, 입원실, 대기실, 수술실, 약국 등을 마련했다.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廣惠院)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고종은 광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지 불과 12일 만에 ‘제중원(濟衆院) ’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중원 터」중에서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흥인지문 일대에 옷을 만드는 곳과 파는 가게가 왜 집중해 있을까? 이곳이 어떻게 패션의 메카가 되었을까? 이 질문의 해답도 훈련원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동대문 주변에 패션산업은 역사가 매우 길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훈련원이 있었다. 흥인지문의 서쪽, 청계천 남쪽부터 현재의 장충단 공원, 세운스퀘어 일대까지 훈련원과 부속 건물이 있었다. 군영이 있는 곳에는 군사와 그의 가족이 모여 살았다. 훈련원이 있는 흥인지문 도성 근처에도 많은 군사 가족이 살았다.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초기에 군사들의 대우는 좋았다.
---「훈련원 터」중에서
 

출판사 리뷰

종로, 청계천, 을지로, 태평로를 걸으며 만나는 근현대사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런 글을 만난다. “물길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맑아진다. 오늘 우리 걷자, 이 길 따라.” “오늘은 잠시 걸어야겠어. 모두 잊고 나의 길을 가겠어.” 캘리그래퍼 공병각 님의 글이다. 보통의 활자체로 읽으면 감흥이 덜하다. 청계천 벽에 쓴 힘 있는 글자체로 보면 더 걷고 싶어진다. 레베카 솔닛은 두 발로 지나간 곳에 장소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생각과 책을 만들어냈다고 하면서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주는 것이 ‘이야기’라고 했다.

서울 도심에서 길을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인도 가장자리에 표지석이 있다. 그 표지석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터가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전하지만 관심있게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표지석에 쓰인 글, 표지석이 있는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 공간의 역사에 관해서 알게 된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와 다르게 역사 속 인물이 살았던 장소와 사건이 일어난 곳을 직접 다녀오면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이 더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책과 교육의 현장에서 그곳의 역사를 만난다

1900년대 초에 책을 만들고, 팔고, 가르치던 열여섯 곳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표지석에 적힌 몇 줄의 글을 바탕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그 터에서 일어난 사건과 인물을 설명한다. 그 터의 현재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넣었고,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에 기초해서 그 터를 대표하는 그림을 넣었다. 표지석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인 공간을 경험하는 데서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표지석에는 공간이 전하는 인문학이자 인류학, 역사학이 들어있다. 표지석을 통해서 공간을 바라보면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를 직접 찾아다닌 경험 덕분에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표지석이 있는 현재의 사진을 보면 한 번쯤 혹은 자주 지나갔던 곳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책에서 설명한 표지석이 있는 공간을 직접 찾아가 보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그 터에서 그날, 그 사람을 느낀다

서울 중구, 종로구 일대에는 유난히 표지석이 많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은이는 사진 강의를 하면서 자주 가는 출사지에서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표지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표지석을 유심히 보게 된 후에는 표지석 주변의 모습을 촬영했고, 표지석에 적힌 사건과 인물을 찾아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그 터의 역사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역사 속 인물이 살았던 장소와 사건이 일어난 곳을 직접 다녀오면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표지석을 통해서 공간을 바라보면 역사와 인물, 사건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간이 전하는 인문학이자 인류학, 역사학이다. 표지석은 현재와 과거의 특정 시점을 이어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반드시 알아야 할,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전한다.

그 시대의 책과 교육으로 우리 문화를 살펴본다

이 책은 서울에 있는 많은 표지석 가운데 1900년대 책, 교육과 관련된 표지석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표지석은 장소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만 전달하기에 표지석에 쓰이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 책에는 책을 만들던 곳, 책을 팔던 곳, 가르치던 곳으로 나눠서 1900년대의 책과 교육의 이야기와 장소에 대한 의미와 공간,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문화를 소개한다. 역사 스토리텔링이 여러 분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의 모두 왕과 권력자다.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만 책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왕이 문화를 만든 적은 없다. 문화는 다수의 사람이 만들고 그 문화를 전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책이다. 1900년대에 문화를 유통하는 주요 매체는 책과 신문이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가 책을 매개로 유통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표지석 따라 걷기』는 1900년대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적인 결과물 즉, 한 시대의 ‘문화’를 표지석을 통해서 통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