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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예술의 ‘터’에서 만나는 역사와 인물
서울 도심의 길을 걸으면 수많은 표지석을 만난다. 표지석은 늘 같은 자리에서, 그 터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준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표지석은 무릎 높이 정도의 돌에 새긴 형태, 안내판 형태 등이 있다. 표지석을 찾으려고 둘러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게 된다. 표지석이 있는 곳에는 역사 속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터’라고 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장소지만,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사건과 인물, 공간에 관한 역사는 기억에서 사라져도 표지석은 남아 있다. 이것이 우리가 표지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인 장소에 설치한 표지석 가운데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답사하며 그 시대 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는 1900년대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공간을 설명한다. 과거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터는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책과 신문을 만들던 터, 예술가의 집 터, 극장 터, 근대 교육의 터 28곳에서 일어난 역사와 인물, 사건을 소개한다.
서울 도심의 길을 걸으면 수많은 표지석을 만난다. 표지석은 늘 같은 자리에서, 그 터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준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표지석은 무릎 높이 정도의 돌에 새긴 형태, 안내판 형태 등이 있다. 표지석을 찾으려고 둘러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게 된다. 표지석이 있는 곳에는 역사 속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터’라고 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장소지만,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사건과 인물, 공간에 관한 역사는 기억에서 사라져도 표지석은 남아 있다. 이것이 우리가 표지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인 장소에 설치한 표지석 가운데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답사하며 그 시대 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는 1900년대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공간을 설명한다. 과거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터는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책과 신문을 만들던 터, 예술가의 집 터, 극장 터, 근대 교육의 터 28곳에서 일어난 역사와 인물, 사건을 소개한다.
목차
1장 책 터
회동서관 터
세창서관 터
한성도서주식회사 터
신문관·조선광문회 터
한남서림 터
2장 신문 터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조선일보 창간사옥 터
황성신문사 터
3장 문인 터
김수영 생가 터
박인환 집 터
전영택 집 터
이상 집 터
심훈 생가 터
현진건 집 터
김정희 선생 집 터
4장 극장·문화 터
동양극장 터
우미관 터
국도극장 터
조선극장 터
협률사·원각사 터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
5장 학교·교육 터
관립교동소학교 터
서울대학교 터
수진측량학교 터
관립법어학교 터
배재학당 터·남궁억 집 터
육군무관학교 터
회동서관 터
세창서관 터
한성도서주식회사 터
신문관·조선광문회 터
한남서림 터
2장 신문 터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조선일보 창간사옥 터
황성신문사 터
3장 문인 터
김수영 생가 터
박인환 집 터
전영택 집 터
이상 집 터
심훈 생가 터
현진건 집 터
김정희 선생 집 터
4장 극장·문화 터
동양극장 터
우미관 터
국도극장 터
조선극장 터
협률사·원각사 터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
5장 학교·교육 터
관립교동소학교 터
서울대학교 터
수진측량학교 터
관립법어학교 터
배재학당 터·남궁억 집 터
육군무관학교 터
책 속으로
‘문화는 인지(人智), 인지는 학문에서, 학문은 문자에서, 문자는 서책에서’라는 모토를 앞세웠던 회동서관은 일제가 출판법을 만들어 위인전과 역사서를 압수·판매 금지하는 시기에도, 무장한 헌병이 서점 앞을 지키는 상황에서도 출판과 서적 판매를 계속했다. 근대 문화를 수용하려는 사람들은 회동서관을 대한제국 시기 최대의 서점으로 만들었다.
---「회동서관 터」중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온 신태삼은 동아일보사와 제휴를 맺고 신문사의 활판 시설을 이용해서 대량으로 인쇄했다. 인쇄는 대량으로 했지만, 유통망이 갖춰지지 않아서 책을 짊어지고 장터를 찾아다니며 팔았다. 안성장터에 책을 팔러 갔을 때, 우체국에서 우편환을 찾아오는 상인을 보고 책을 우편으로 판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판매하고 우체국에서 돈을 받는 대체구좌를 만들고 신문에 광고를 했다. 책 마지막 장에는 세창서관에서 간행한 책과 대체구좌 광고를 실었다. 그것이 ‘경성진체 17번’이다.
---「세창서관 터」중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창간해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진단학보]다. [진단학보] 창간호가 나온 것은 1934년 11월이다. 1934년 5월 서울 소공동의 다방에서 40대를 바라보는 한국인 학자 20여 명이 모여서 〈한국과 그 인근 지역의 문화연구〉를 목적으로 학술단체를 발기하는 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탄생한 모임이 ‘진단학회’다. 진단학회는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대학 동창과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인맥이 모여서 만들었다.
---「한성도서주식회사 터」중에서
조선광문회는 고전과 국학 도서를 수집하여 근대 인쇄술로 책을 만들었다.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전을 새로 편찬하여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고서(古書)는 방치되거나 소실되었다. 가치 있는 문헌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 개항 후에 우리나라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은 우리나라 사람이 하찮게 취급하는 책을 헐값에 사들였다. 가치 있는 책은 빼앗아가거나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신문관·조선광문회 터」중에서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인 곳이 바로 한남서림이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를 거세게 탄압하던 시기에, 한남서림에 앉아 있던 전형필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던 골동품 상인이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전형필은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골동품 상인은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훈민정음을 가진 사람이 일천 원을 받겠다고 해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남서림 터」중에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에 [The Korea Daily News] 제호로 영문판 4면, [대한매일신보] 제호로 한글판 2면, 총 6면으로 발행했다. 1905년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 2개의 신문으로 나눠서 발행했다. 민족주의 성향의 [제국신문]과 우리 자본으로 설립한 [황성신문]과 달리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검열에서 자유로웠다. 그 이유는 영국인 베델이 신문사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중에서
[동아일보]가 민족지로서 계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에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표어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부르는 농촌 계몽 운동을 동아일보에서 주도했다. 브나로드 운동을 처음 기사로 쓴 것은 1928년 4월이다. 당시에 문맹 퇴치 운동을 제창하며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일본은 반일감정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게 했다.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중에서
[황성신문]은 [경성신문]과 [대한황셩신문]을 계승하여 국한문으로 발행했다. 일반 대중이나 부녀자보다 전통적인 지배층이었던 유생들을 먼저 계몽하는 게 사회가 더 빨리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인식해서다. 유학자 계층을 계몽하기 위해 1904년까지 강역, 제도, 실학 등 전통학문에 새로운 문화를 더해서 개화사상을 이해시키는 기사를 주로 실었다.
---「황성신문 터」중에서
‘묘정의 노래’로 등단한 김수영은 1949년에 김경린, 박인환, 임호권 등과 함께 쓴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모더니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에 모더니즘이 급속도로 유입되었다. 근대화 초기에는 낙관적인 전망이 대두한다. 동시에 근대화의 모순으로 드러나는 병폐에 저항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것이 근대화의 양면적인 특징이다.
---「김수영 생가 터」중에서
박인환은 오장환이 경영한 남만서점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장정의 책을 접했다. 마리서사를 열면서 남만서점처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남만서점을 드나들던 소년 박인환이 시인이 되고 나서 1945년에 마리서사 문을 열었다. 종각역과 종로3가역 사이, 종로 거리 한가운데 마리서사가 있었다. ‘종로3가 2번지’ 지번이 기록되어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박인환 집 터」중에서
통인동에서 살았던 이상에게 영향을 준 것은 또 있다. 이상은 유년기에 통인동 집 근처인 경복궁에서 조선총독부를 짓는 공사 소음을 듣고 자랐다. 지금은 공사 소음을 법으로 규제해서 소음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식민지를 통치할 총독부를 짓는 동안 오히려 소음을 더 냈을 것이다. 이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총독부 공사장을 지나다니며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다.
---「이상 집 터」중에서
심훈이 태어난 곳에는 현재 흑석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심훈 생가 터 표지석은 흑석동 성당 안에 있다. 흑석동에는 심훈 생가 터 표지석과 효사정에 심훈문학공원이 있다. 심훈을 기리는 곳은 또 있다. 충남 당진에 심훈문학관이 있다. 이곳에서 심훈 문화제를 열고 심훈문학상을 시상한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공원에는 심훈문학기념비가 있다. 소설[상록수]는 경기도 안산을 배경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내용이다.
---「심훈 생가 터」중에서
현진건은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를 쓰는 동안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20년 겨울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1922년 9월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육당 최남선이 설립한 동명사에서 일했다. 그는 동명사에서 최남선의 『조선통속역사강화』와 문일평의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 등을 함께 만들었다. 동명사에서 일한 경험은 현진건이 민족의식과 역사지향적인 작품을 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진건 집 터」중에서
영화 〈말모이〉와 〈군함도〉에도 등장인물 대사 가운데 동양극장이 나온다. 〈말모이〉에서는 공청회 장소를 묻는 일본 경찰에게 ‘동양극장’이라고 알려준다. 〈군함도〉에는 악극단장인 주인공이 일본인 관료에게 “동양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양극장 터」중에서
박태원이 소설을 쓰던 1930년대에 우미관은 종로의 랜드마크였다. 『천변풍경』에서 우미관을 찾아가는 사람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현판을 들여다보고 건너편 화신상회를 바라보다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다시 우미관이라는 데가 어디냐고 묻는다. 젊은이는 “이리루 곧장 내려가다 바른편으로 꺾으슈.”라고 대답한다.
---「우미관 터」중에서
1936년에 새로 지은 황금좌 건물에서 1999년까지 국도극장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국도극장은 대리석으로 지은 르네상스식 궁전풍 극장으로 1999년 철거하기 전까지 황금좌 건물 외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국도극장은 건축학적으로 1930년대 서구식 극장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되었다. 역사적, 문화적, 건축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영화관 건물이지만 현재는 호텔로 재건축되었다.
---「국도극장 터」중에서
토키영화 설비를 가장 빠르게 들여온 조선극장은 1년 남짓 토키영화의 전당으로 불렸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했다. 당시에 극장 건물은 동경건물주식회사가 소유했는데 여기서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 인정한다며 극장 사용을 중지했다. 그러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의 토키설비를 단성사로 옮겨서 설치했다.
---「조선극장 터」중에서
인터넷에서 ‘원각사’ 또는 ‘협률사’로 검색하면 1911년에 만든 『한국병합기념첩』에 수록되었던 사진 한 장이 나온다. 사진에는 언덕 위에 원뿔 모양으로 지붕을 올린 둥근 건물이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서 협률사인지, 원각사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에는 건물로 올라가는 언덕길과 양옆에 건물이 있다.
---「협률사·원각사 터」중에서
은성주점의 옛 모습을 박인환문학관에 재현해놓았다. 하지만 그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찾기는 어렵다. 2012년에 열린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명동이야기’에 1948년 경 대폿집 은성 앞에서 촬영한 사진을 전시했다. 소설가 이봉구와 이온녀, 신태양 사장, 화가 백영수, 네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서 천막이 약간 보일 뿐 은성주점의 모습은 알아보기 어렵다.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인 서울대학교가 설립된 것은 광복 이후 1946년이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이다. 서울대학교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다. 하지만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목적은 우리나라 사람의 고등교육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대학교 터」중에서
고종이 폐위된 후에 유길준은 근대화된 측량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 1908년 5월에 수진궁을 빌려 수진측량학교를 설립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에는 수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 중에는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많았다. 수진측량학교도 이 시기에 설립했다. 1908년부터 측량학교와 강습소가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수진측량학교 터」중에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교사를 짓기로 하고 주변에 한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전망이 좋은 언덕에 1층 규모의 벽돌 건물을 지었다. 1888년에 지은 1층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 요시자와 토모타로가 설계하고 우리나라 건축기사 심의석이 건축에 참여했다. 심의석은 대한제국기에 근대 건축 양식을 접한 건축기사다. 벽돌구조의 배재학당 교사는 그가 처음으로 벽돌 건축 경험을 쌓은 건축물이다.
---「배재학당 터·남궁억 집 터」중에서
조선은 근대식 군대 양성이 절실했고 군사를 이끌 장교를 교육하기 위해 중앙군과 지방군을 개편했다. 조선 후기에 도성 안을 지키는 임무는 중앙군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맡았던 것을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후에 중앙군 편제를 무위영, 장어영, 교련병대로 바꿨다. 1895년에 육군편제강령을 선포하고 중앙군에 친위대, 시위대, 육군무관학교를 두었다.
---「회동서관 터」중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온 신태삼은 동아일보사와 제휴를 맺고 신문사의 활판 시설을 이용해서 대량으로 인쇄했다. 인쇄는 대량으로 했지만, 유통망이 갖춰지지 않아서 책을 짊어지고 장터를 찾아다니며 팔았다. 안성장터에 책을 팔러 갔을 때, 우체국에서 우편환을 찾아오는 상인을 보고 책을 우편으로 판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판매하고 우체국에서 돈을 받는 대체구좌를 만들고 신문에 광고를 했다. 책 마지막 장에는 세창서관에서 간행한 책과 대체구좌 광고를 실었다. 그것이 ‘경성진체 17번’이다.
---「세창서관 터」중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창간해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진단학보]다. [진단학보] 창간호가 나온 것은 1934년 11월이다. 1934년 5월 서울 소공동의 다방에서 40대를 바라보는 한국인 학자 20여 명이 모여서 〈한국과 그 인근 지역의 문화연구〉를 목적으로 학술단체를 발기하는 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탄생한 모임이 ‘진단학회’다. 진단학회는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대학 동창과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인맥이 모여서 만들었다.
---「한성도서주식회사 터」중에서
조선광문회는 고전과 국학 도서를 수집하여 근대 인쇄술로 책을 만들었다.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전을 새로 편찬하여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고서(古書)는 방치되거나 소실되었다. 가치 있는 문헌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 개항 후에 우리나라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은 우리나라 사람이 하찮게 취급하는 책을 헐값에 사들였다. 가치 있는 책은 빼앗아가거나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신문관·조선광문회 터」중에서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인 곳이 바로 한남서림이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를 거세게 탄압하던 시기에, 한남서림에 앉아 있던 전형필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던 골동품 상인이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전형필은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골동품 상인은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훈민정음을 가진 사람이 일천 원을 받겠다고 해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남서림 터」중에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에 [The Korea Daily News] 제호로 영문판 4면, [대한매일신보] 제호로 한글판 2면, 총 6면으로 발행했다. 1905년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 2개의 신문으로 나눠서 발행했다. 민족주의 성향의 [제국신문]과 우리 자본으로 설립한 [황성신문]과 달리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검열에서 자유로웠다. 그 이유는 영국인 베델이 신문사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중에서
[동아일보]가 민족지로서 계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에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표어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부르는 농촌 계몽 운동을 동아일보에서 주도했다. 브나로드 운동을 처음 기사로 쓴 것은 1928년 4월이다. 당시에 문맹 퇴치 운동을 제창하며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일본은 반일감정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게 했다.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중에서
[황성신문]은 [경성신문]과 [대한황셩신문]을 계승하여 국한문으로 발행했다. 일반 대중이나 부녀자보다 전통적인 지배층이었던 유생들을 먼저 계몽하는 게 사회가 더 빨리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인식해서다. 유학자 계층을 계몽하기 위해 1904년까지 강역, 제도, 실학 등 전통학문에 새로운 문화를 더해서 개화사상을 이해시키는 기사를 주로 실었다.
---「황성신문 터」중에서
‘묘정의 노래’로 등단한 김수영은 1949년에 김경린, 박인환, 임호권 등과 함께 쓴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모더니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에 모더니즘이 급속도로 유입되었다. 근대화 초기에는 낙관적인 전망이 대두한다. 동시에 근대화의 모순으로 드러나는 병폐에 저항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것이 근대화의 양면적인 특징이다.
---「김수영 생가 터」중에서
박인환은 오장환이 경영한 남만서점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장정의 책을 접했다. 마리서사를 열면서 남만서점처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남만서점을 드나들던 소년 박인환이 시인이 되고 나서 1945년에 마리서사 문을 열었다. 종각역과 종로3가역 사이, 종로 거리 한가운데 마리서사가 있었다. ‘종로3가 2번지’ 지번이 기록되어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박인환 집 터」중에서
통인동에서 살았던 이상에게 영향을 준 것은 또 있다. 이상은 유년기에 통인동 집 근처인 경복궁에서 조선총독부를 짓는 공사 소음을 듣고 자랐다. 지금은 공사 소음을 법으로 규제해서 소음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식민지를 통치할 총독부를 짓는 동안 오히려 소음을 더 냈을 것이다. 이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총독부 공사장을 지나다니며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다.
---「이상 집 터」중에서
심훈이 태어난 곳에는 현재 흑석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심훈 생가 터 표지석은 흑석동 성당 안에 있다. 흑석동에는 심훈 생가 터 표지석과 효사정에 심훈문학공원이 있다. 심훈을 기리는 곳은 또 있다. 충남 당진에 심훈문학관이 있다. 이곳에서 심훈 문화제를 열고 심훈문학상을 시상한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공원에는 심훈문학기념비가 있다. 소설[상록수]는 경기도 안산을 배경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내용이다.
---「심훈 생가 터」중에서
현진건은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를 쓰는 동안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20년 겨울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1922년 9월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육당 최남선이 설립한 동명사에서 일했다. 그는 동명사에서 최남선의 『조선통속역사강화』와 문일평의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 등을 함께 만들었다. 동명사에서 일한 경험은 현진건이 민족의식과 역사지향적인 작품을 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진건 집 터」중에서
영화 〈말모이〉와 〈군함도〉에도 등장인물 대사 가운데 동양극장이 나온다. 〈말모이〉에서는 공청회 장소를 묻는 일본 경찰에게 ‘동양극장’이라고 알려준다. 〈군함도〉에는 악극단장인 주인공이 일본인 관료에게 “동양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양극장 터」중에서
박태원이 소설을 쓰던 1930년대에 우미관은 종로의 랜드마크였다. 『천변풍경』에서 우미관을 찾아가는 사람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현판을 들여다보고 건너편 화신상회를 바라보다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다시 우미관이라는 데가 어디냐고 묻는다. 젊은이는 “이리루 곧장 내려가다 바른편으로 꺾으슈.”라고 대답한다.
---「우미관 터」중에서
1936년에 새로 지은 황금좌 건물에서 1999년까지 국도극장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국도극장은 대리석으로 지은 르네상스식 궁전풍 극장으로 1999년 철거하기 전까지 황금좌 건물 외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국도극장은 건축학적으로 1930년대 서구식 극장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되었다. 역사적, 문화적, 건축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영화관 건물이지만 현재는 호텔로 재건축되었다.
---「국도극장 터」중에서
토키영화 설비를 가장 빠르게 들여온 조선극장은 1년 남짓 토키영화의 전당으로 불렸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했다. 당시에 극장 건물은 동경건물주식회사가 소유했는데 여기서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 인정한다며 극장 사용을 중지했다. 그러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의 토키설비를 단성사로 옮겨서 설치했다.
---「조선극장 터」중에서
인터넷에서 ‘원각사’ 또는 ‘협률사’로 검색하면 1911년에 만든 『한국병합기념첩』에 수록되었던 사진 한 장이 나온다. 사진에는 언덕 위에 원뿔 모양으로 지붕을 올린 둥근 건물이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서 협률사인지, 원각사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에는 건물로 올라가는 언덕길과 양옆에 건물이 있다.
---「협률사·원각사 터」중에서
은성주점의 옛 모습을 박인환문학관에 재현해놓았다. 하지만 그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찾기는 어렵다. 2012년에 열린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명동이야기’에 1948년 경 대폿집 은성 앞에서 촬영한 사진을 전시했다. 소설가 이봉구와 이온녀, 신태양 사장, 화가 백영수, 네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서 천막이 약간 보일 뿐 은성주점의 모습은 알아보기 어렵다.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인 서울대학교가 설립된 것은 광복 이후 1946년이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이다. 서울대학교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다. 하지만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목적은 우리나라 사람의 고등교육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대학교 터」중에서
고종이 폐위된 후에 유길준은 근대화된 측량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 1908년 5월에 수진궁을 빌려 수진측량학교를 설립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에는 수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 중에는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많았다. 수진측량학교도 이 시기에 설립했다. 1908년부터 측량학교와 강습소가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수진측량학교 터」중에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교사를 짓기로 하고 주변에 한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전망이 좋은 언덕에 1층 규모의 벽돌 건물을 지었다. 1888년에 지은 1층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 요시자와 토모타로가 설계하고 우리나라 건축기사 심의석이 건축에 참여했다. 심의석은 대한제국기에 근대 건축 양식을 접한 건축기사다. 벽돌구조의 배재학당 교사는 그가 처음으로 벽돌 건축 경험을 쌓은 건축물이다.
---「배재학당 터·남궁억 집 터」중에서
조선은 근대식 군대 양성이 절실했고 군사를 이끌 장교를 교육하기 위해 중앙군과 지방군을 개편했다. 조선 후기에 도성 안을 지키는 임무는 중앙군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맡았던 것을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후에 중앙군 편제를 무위영, 장어영, 교련병대로 바꿨다. 1895년에 육군편제강령을 선포하고 중앙군에 친위대, 시위대, 육군무관학교를 두었다.
---「육군무관학교 터」중에서
출판사 리뷰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 속 인물을 만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은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 클래식 자동차에 올라탄다. 주인공은 파티에 초대되어 1920년대 작가와 예술가를 만난다. 표지석을 따라 역사의 현장을 걸으면, 우리도 이 영화처럼 역사 속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역사적인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그 시대 인물과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은 뜻깊은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느낀다. 이 책은 문화, 예술, 교육의 거점에 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 인물에 관한 기록을 재구성하여 한국인이 지나온 근대 역사를 스토리텔링했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가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다니는 서울의 거리에서 역사 지식을 얻을 수 있게 구성했다. 늘 지나다니는 길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역사적인 인물이 살았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은 ‘역사 도시 서울’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과거에 이곳에서 책과 신문을 만들고 팔았으며 문인, 예술가가 활동했던 공간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과 문헌 자료에 기초하여 스토리텔링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다. 수학여행에서 직접 보았던 유물과 유적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표지석을 설치한 공간도 마찬가지다. 표지석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과 공간, 사건 등을 알면 서울의 역사는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이것이 『표지석 따라 걷기』가 추구하는 공간의 역사이자 공간 인문학이다.
표지석을 설치한 역사적인 장소를 출판, 신문, 작가, 문화, 교육으로 분류하여 그 당시에 장소가 가진 의미, 인물의 삶에 미친 영향,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현재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등을 조명한다. 표지석이 있는 장소가 나오는 소설과 영화 등도 소개한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가다』는 길에서 만나는 역사 이야기이며 동시에 도보 여행 가이드다. 근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 표지석이 설치된 거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돌에 새긴 역사의 공간을 가다
표지석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인 공간을 직접 경험하면 이 책의 가치는 배가 된다. 표지석에는 공간이 전하는 인문학이자 인류학, 역사학이 들어있다. 표지석을 통해서 공간을 바라보면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를 직접 다녀온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새롭게 만든다. 표지석이 있는 현재 사진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지석을 설치한 공간의 역사를 소개하고 그 터의 현재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터를 대표하는 그림을 넣었다.
언론, 문화, 교육의 터에서 현재 우리 문화를 돌아본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는 문화, 예술, 교육의 거점(표지석이 있는 장소)에 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 인물을 정리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이며, 근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교육에 관한 기록이다. 책과 신문을 만들고 근대 교육과 문화가 시작된 역사적인 공간을 조명한다. 표지석으로 남은 문화, 예술의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사진을 촬영하고 자료를 조사하여 그 터를 대표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표지석이 설치된 장소와 의미를 생생하게 설명하여 역사적인 공간의 지식을 전한다.
돌에 새긴 ‘고도(古都) 서울의 역사’
‘서울’은 시대에 따라 한양, 한성, 경성으로 불렀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기관이 서울에 모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 고도(古都) 서울은 시대별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의 표지석은 그 터, 그 사람, 그 시대를 후대에 전한다.
서울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변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서울의 역사를 간직하기 위해 서울시와 정부에서 보존·전시하는 유물과 유적이 많다. 하지만 개발과 경제 논리를 앞세워 덮어버린 역사는 훨씬 더 많다. 동양극장과 국도극장은 1990년대에도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제 기능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난 뒤에 그곳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역사적 자료를 고증하여 표지석을 세웠다. 서울의 표지석은 유럽의 고도 못지않게 서울이 역사를 간직한 도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울 거리에서 만나는 근대 서울의 표지석을 통해서 기억해야 하는 장소와 인물, 공간의 역사를 살펴본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에는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를 만든 출판사와 서점, 신문사, 극장, 문인과 교육의 터를 담았다. 표지석이 설치된 그 터에서 그 시대를 더 깊이 이해하기 바란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은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 클래식 자동차에 올라탄다. 주인공은 파티에 초대되어 1920년대 작가와 예술가를 만난다. 표지석을 따라 역사의 현장을 걸으면, 우리도 이 영화처럼 역사 속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역사적인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그 시대 인물과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은 뜻깊은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느낀다. 이 책은 문화, 예술, 교육의 거점에 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 인물에 관한 기록을 재구성하여 한국인이 지나온 근대 역사를 스토리텔링했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가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다니는 서울의 거리에서 역사 지식을 얻을 수 있게 구성했다. 늘 지나다니는 길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역사적인 인물이 살았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은 ‘역사 도시 서울’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과거에 이곳에서 책과 신문을 만들고 팔았으며 문인, 예술가가 활동했던 공간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과 문헌 자료에 기초하여 스토리텔링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다. 수학여행에서 직접 보았던 유물과 유적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표지석을 설치한 공간도 마찬가지다. 표지석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과 공간, 사건 등을 알면 서울의 역사는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이것이 『표지석 따라 걷기』가 추구하는 공간의 역사이자 공간 인문학이다.
표지석을 설치한 역사적인 장소를 출판, 신문, 작가, 문화, 교육으로 분류하여 그 당시에 장소가 가진 의미, 인물의 삶에 미친 영향,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현재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등을 조명한다. 표지석이 있는 장소가 나오는 소설과 영화 등도 소개한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예술의 터를 가다』는 길에서 만나는 역사 이야기이며 동시에 도보 여행 가이드다. 근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 표지석이 설치된 거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돌에 새긴 역사의 공간을 가다
표지석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인 공간을 직접 경험하면 이 책의 가치는 배가 된다. 표지석에는 공간이 전하는 인문학이자 인류학, 역사학이 들어있다. 표지석을 통해서 공간을 바라보면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를 직접 다녀온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새롭게 만든다. 표지석이 있는 현재 사진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지석을 설치한 공간의 역사를 소개하고 그 터의 현재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터를 대표하는 그림을 넣었다.
언론, 문화, 교육의 터에서 현재 우리 문화를 돌아본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는 문화, 예술, 교육의 거점(표지석이 있는 장소)에 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 인물을 정리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이며, 근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교육에 관한 기록이다. 책과 신문을 만들고 근대 교육과 문화가 시작된 역사적인 공간을 조명한다. 표지석으로 남은 문화, 예술의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사진을 촬영하고 자료를 조사하여 그 터를 대표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표지석이 설치된 장소와 의미를 생생하게 설명하여 역사적인 공간의 지식을 전한다.
돌에 새긴 ‘고도(古都) 서울의 역사’
‘서울’은 시대에 따라 한양, 한성, 경성으로 불렀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기관이 서울에 모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 고도(古都) 서울은 시대별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의 표지석은 그 터, 그 사람, 그 시대를 후대에 전한다.
서울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변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서울의 역사를 간직하기 위해 서울시와 정부에서 보존·전시하는 유물과 유적이 많다. 하지만 개발과 경제 논리를 앞세워 덮어버린 역사는 훨씬 더 많다. 동양극장과 국도극장은 1990년대에도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제 기능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난 뒤에 그곳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역사적 자료를 고증하여 표지석을 세웠다. 서울의 표지석은 유럽의 고도 못지않게 서울이 역사를 간직한 도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울 거리에서 만나는 근대 서울의 표지석을 통해서 기억해야 하는 장소와 인물, 공간의 역사를 살펴본다.
『표지석 따라 걷기 : 언론 문화 교육의 터를 가다』에는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를 만든 출판사와 서점, 신문사, 극장, 문인과 교육의 터를 담았다. 표지석이 설치된 그 터에서 그 시대를 더 깊이 이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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