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책소개)/8.문화유산.문화재

창덕궁 실록으로 잃다

동방박사님 2022. 4. 1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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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실질적인 조선의 법궁이었던 창덕궁!
궁궐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로 완벽하게 설계되었던 경복궁을 누르고 왕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창덕궁. 흔히들 창덕궁의 매력은 후원뿐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철저한 좌우대칭의 법칙 안에서 건설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의 주변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에서 생을 보냈으며, 이 곳을 더 편안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많은 이야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손을 더 많이 탄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좀 더 인간적인 왕들의 생활상도 더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경복궁에 이어, 실록을 근거로 창덕궁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다뤘다. 책은 단순히 궁을 답사하기 위한 가이드북이 아닌 우리의 역사를 함께 되짚어보며 시간 속에 지워져 가던 창덕궁의 진정한 의미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목차

머릿말 _4

궁성과 문 _10
창덕궁 개관 - 조선왕실이 가장 오래 머문 궁궐 _11
돈화문 - 조선의 자존심을 드러내다 _21
금호문 - 송학선 의사의 혼이 서린 곳 _38
단봉문 - 인조반정의 비밀통로 _44

외조 일원 _58
금천교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_59
진선문 - 신문고가 설치되다 _68
궐내각사[내각 일원] - 제2의 규장각 _75
궐내각사[옥당 일원] - 출세의 관문 _81
궐내각사[약방 일원] - 대장금과 허준이 활동한 곳 _91
궐내각사[구선원전 일원] - 종묘에 비견되는 건물 _102
인정문 외행각 - 대비의 곡소리가 울려퍼지다 _112
빈청 - 조선 최고의 논쟁이 벌어진 곳 _125

치조 일원 _141
인정문 - 이인좌를 치죄하다 _142
인정전 - 철종의 한이 맺힌 곳 _154
선정문 - 27세 최연소 병조판서의 비극 _170
선정전 - 이곳에서 조선당쟁사를 간추려보다 _175
희정당 - 암행어사 박문수의 전설이 탄생하다 _205

대전과 중궁전 일원 _221
대조전 - 대전일까? 중궁전일까? _222
경훈각 - 대조전이 대전이 될 수 밖에 없는 증거 _238

동궁 일원 _243
정조는 진정한 보수주의자? _244

낙선재 일원 _255
외국출신 왕실여인들이 머문 곳 _256

후원 일원 _270
부용지와 주합루 일원 - 신하들을 가르치는 국왕 _271
애련지와 연경당 일원 - 이토 히로부미 제대로 분석하기 _277
관람지와 존덕정 일원 - 정조의 자신감이 넘치는 곳 _286
옥류천 일원 - 유상곡수거의 흔적을 찾아서 _292
 

저자 소개 

저 : 최동군
 
강원도 원주에서 육군 보병 장교 최준호 대위와 김주자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3년 부산 연제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동해중학교, 동인고등학교를 거쳐 1991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문화와 역사에는 특별한 지식이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러던 중 1997년 태어나서 처음 참여하게 된, 2박 3일간의 경주 문화답사에서 거의 신내림에 가까운 큰 문화적 충격 및 감명을 받았고 그 후로 우리...
 

출판사 리뷰

조선시대에도 촛불집회가 있었다?!

지난 겨울 광화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촛불이 아닌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었으리라. 민주주의시대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행동으로 실행했다.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였다면 가능한 이야기였을까? 하지만 실록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순종때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고종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등불을 들고 모였으며, 국왕이었던 순종은 백성의 대표자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등불을 들고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이 광화문으로 촛불을 들고 나아가던 우리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리더는 적극적으로 그들과의 소통을 주도했다는 점일 것이다.
자유와 소통, 민주주의가 당연시 여겨지는 현 시대보다 만인지상 왕이 군림하던 군주제의 리더십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은 왜일까?

순종 1년(1908) 3월 10일 / 돈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등불 행렬을 보고 한성 부윤을 소견하다
돈화문 밖으로 거둥하여 각 학교들과 일반 백성들의 등불 행렬을 관람하였으며, 만세를 축원하는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백성들의 대표인 한성부윤(漢城府尹) 장헌식을 인견(引見)하고 위문하였다.

창덕궁엔 종묘만큼 중요한 곳이 있었다?!

수많은 사극드라마에서 단골로 나오는 대사를 꼽으라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와 ‘짐이 종묘사직을 위해…’ 이 두 가지 대사는 순위 안에 꼭 있을 것이다. 종묘사직은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종묘와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나타낸다. 유교국가이면서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 때 종묘사직은 국가 자체를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종묘사직과 지위가 같은 건물이 경복궁도 아니고 창덕궁에 있었으니 바로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태조 이하 역대 국왕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었다. 조선왕조는 역대 임금을 추모하면서 제향하는 건물로서 궁궐 밖에는 종묘를, 궁궐 안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선원전이 가지는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실록기사는 바로 영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고 죽이려고 뒤주에 넣기 전 선원전에 들려 이런 사실을 선조들에게 고했다. 이런 엄청난 사건 전에 직접 들려 그 일을 고했다는 것은 선원전의 지위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중략)…
한번 나경언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待命, 과실이 있을 때에, 상부에서 내리는 처분(處分) 또는 명령을 기다림)을 풀어주고, 동행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을 특파(特罷)하고 다시 세자에게 행례(行禮)하기를 재촉하였다. …(후략)…

과거시험이 치러지던 인정전,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경복궁을 대신하여 법궁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후 큰 규모의 왕실행사들은 모두 인정전에서 치러졌다. ‘조하’나 ‘조참’ 같이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행사는 물론이고, 외국 사신들의 공식 접견도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참가자가 있는 과거시험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많은 수가 몰리는 과거시험 때는 그 많은 인원의 화장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간이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했던 그 시절엔 인정전 주변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정전이 더러워졌고, 그 행위를 엄금하도록 하라는 왕의 명이 실록에 실려있을 정도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 화장실이 없어 궁 여기저기 있는 배설물과 오물을 피하기 위해 하이힐이 발달한 것을 보면 궁에서의 화장실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한 주제였던 모양이다.

정조 18년(1794) 2월 21일 / 인정전에 거둥하여 삼일제를 거행하다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삼일제(三日製, 3월3일에 보던 과거)를 거행하였다. 문 안에 들어온 유생의 숫자가 2만 3천 9백여명이나 되어 뜰에 전부 수용할 수가 없자, 인정전 뜰에서 금천교(禁川橋) 밖에까지 늘어 앉도록 하였다. 거둔 시권(試券)이 1만 5백 68장이었는데,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취강은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였고, 회시(會試, =복시)에 곧바로 응시토록 한 사람이 1백 명, 점수를 준 사람이 1백 명, 상을 준 사람이 1백 명이었다.

광해 10년(1618) 10월 9일 / 전시에 인정전에서 소변 보는 일 등을 엄금하도록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전시(殿試)를 누차 거행하여 매우 더러워졌다. 소변을 보는 일 따위를 병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금하게 할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이처럼 각 건물들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를 컴퓨터로 예를 들자면 유물 또는 문화재들은 하드웨어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역사)는 소프트웨어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화재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자.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들어난 창덕궁의 하드웨어만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본 서적에 실린 소프트웨어(역사)를 잘 숙지하여 창덕궁의 하드웨어와 접목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창덕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