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9.경남권 관광

이견대 3.9

동방박사님 2013. 3. 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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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이견대(利見臺)는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이후 신문왕은 이곳에 행차하였다가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오는 산으로 들어가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견대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권71 악지(樂志) 삼국속악(三國俗樂) 신라(新羅)의 이견대조에서도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 부자는 헤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상봉하게 되자 대(臺)를 쌓아서 부자상봉의 기쁨을 다하고 이를 지어 노래로 부르고 그 대를 이견이라고 불렀다. 이는 대개 주역(周易)의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취한 뜻이다. 왕의 부자가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 이웃나라에서 만났거나 혹은 질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世傳 羅王父子久相失 及得之 築臺相見 極父子之懽 作此以歌之 號其臺曰利見 盖取易利見大人之意也 王父子無相失之理 或出會隣國 或爲質子 未可知也)”라고 하여 이곳에서 신라왕의 부자가 상봉하였으며, 그 기쁨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이곳을 이견대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 악고(樂考)17 속부악(俗部樂)1 신라악조에도 전하고 있다

 

 

 

배경설명 :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 바위(大王岩)라고 불러왔다.

 

대왕암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을 안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은 본명이 법민(法敏)이고 무열왕의 맏아들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 밖에서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이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