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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수상록 - 인간에 대한 위대한 통찰

동방박사님 2022. 11. 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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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진짜 인생을 위한 몽테뉴의 조언!

주관적이면서 보편적인 삶의 고민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62가지의 심도 있는 고민을 다루고 있다. 1장 ‘늙음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에서는 늘 죽음과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또한 두려움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욱 거대해질 뿐이니 아직 직면하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권한다. ‘살아 있다면 존재하기 때문에, 죽었다면 부재하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 권한 밖의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면면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이다. 2장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에서는 행복의 순간도, 불행의 순간도 인생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가진 것이 없어 초라하게 느껴지는가? 이룬 것이 없어 불행하다 느끼는가? 몽테뉴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괴롭거나 힘들지 않다.”라고 말하며 오로지 우리 자신의 판단만이 본질적이라고 말한다. 즉 행복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정신을 단련하는 데 골몰해보자.

3장 ‘진짜 나답게 되는 법을 안다’에서는 상대방의 판단이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누리라고 말한다. 명성을 좇아, 부를 좇아 자신을 낭비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경외심을 가지며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4장 ‘나 자신을 늘 경계하고 성찰한다’에서는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항상 돌아보라고 조언한다. 타인을 판단할 때의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게도 들이대라는 것이다. 또한 몽테뉴는 남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늘 스스로를 감시하며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자신을 통제하라고 말한다. 마지막 5장 ‘지식을 얻되 나의 것으로 만들라’에서는 지식의 양보다는 지식의 깊이를 강조한다.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닌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남의 학식’을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수용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에 담긴 조언들을 마음에 새겨 몽테뉴의 사상을 이해한다면 독자들의 인생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질 것을 확신한다.

 

목차

지은이의 말 _ 이 책의 소재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편역자의 말 _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위대한 고찰

1장 늙음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겁먹지 않는다
2. 담담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3.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꺼이 기다린다
4.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산다
5. 죽음이 갑자기 닥쳐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
6. 오래 살건 잠시 살건 죽음 앞에서는 매한가지다
7. 자기의 시간을 다하지 않고 죽는 이는 없다
8. 끊임없이 죽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9. 죽음은 자연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10. 늙어서 죽는 것은 드물고 이례적인 일이다
11. 늙음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알 수 없다
12. 정신의 노화를 피할 수 있는 한 피한다
13. 내 삶의 안락과 즐거움에 죽음이 자리 잡기를
14. 빨리 늙기보다는 늙어 있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15. 죽음이 결론일지언정 삶의 목표는 아니다
16. 침대보다는 말 위에서 죽고 싶다
17.내가 겪는 자연적 쇠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2장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

18. 춤을 출 때 춤만 추고, 잠을 잘 때 잠만 잔다
19.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간다
20. 현재를 외면하고 미지의 미래를 좇지 않는다
21. 잊고자 하는 열망은 기억을 선명하게 한다
22. 불행도 인간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23. 내 운명이 위대해지기를 바란 적은 없다
24.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25. 나는 최대 1년 이내의 계획만 세운다
26. 누릴 수 없다면 행운이 무슨 소용이랴
27. 나는 인생을 남들의 두 배로 즐겼다

3장 진짜 나답게 되는 법을 안다

28. 모든 애정을 내 영혼과 나 자신에게 쏟는다
29. 나라는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안다
30. 남아 있는 인생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해 산다
31. 진정한 자유와 고독을 만끽한다
32. 나는 내가 내 안에만 있다고 여긴다
33. 상대방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을 믿는다
34. 나의 견해 외에는 무엇도 신뢰한 적이 없다
35. 나는 소수의 일에만 열중하고 골몰한다
36. 나는 나 자신에게만 매달린다
37.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스스로 경외심을 갖는다
38. 명성을 탐하느라 헐값에 나를 팔지 않는다
39. 나를 잘 알기에 거짓 찬사를 즐기지 않는다
40. 나를 향한 남들의 비판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41. 내가 누리는 자유는 꾸밈없고 초연하다

4장 나 자신을 늘 경계하고 성찰한다

42. 나를 지켜보는 내 두 눈을 가장 경계한다
43. 수시로 의심하고 나 자신을 경계한다
44.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항상 되묻는다
45. 타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내게도 들이댄다
46. 나의 양심은 나를 더욱 강하게 통제한다
47. 내가 바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48. 산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49. 분노가 나를 사로잡고 장악하게 하지 않는다
50. 내 격정을 숨기기보다는 내 감정들을 느낀다
51. 일상의 불행들은 결코 하찮지 않다
52. 시시각각 기분에 따라 흔들리며 살지 않는다
53.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직하게 드러낸다

5장 지식을 얻되 나의 것으로 만들라

54. 잘 살고 잘 죽기 위해 공부한다
55. 더 많이 아는 게 아니라 더 잘 알아야 한다
56. 남의 의견과 학식을 무심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57. 철인들의 가르침이 아닌 정신을 흡수해야 한다
58. 세상은 나를 알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는 거울이다
59. 불가능이라 단정 짓는 행동은 경솔한 추측이다
60. 진리를 말할 때는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
61. 내 삶의 여정에서 찾은 최고의 필수품은 책이다
62. 논쟁에서는 솔직한 의도를 견지해야 한다

 

저자 소개

저 : 미셸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하는 몽테뉴.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 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 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

편 : 정영훈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가톨릭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에서 상담과 심리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 줄곧 출판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기획하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엮은 책으로는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가족이란 무엇...
 

역 : 안해린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국제회의통역을 전공했다. 다양한 통역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책 속으로

매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모든 모습을 상상해보자. 말이 발을 헛디딜 때, 기와가 떨어질 때, 아주 작은 핀에 찔렸을 때, 즉시 “그래, 이것이 바로 죽음의 모습일 수도 있었어.” 하고 되새기자.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쓰자. 축제와 환희의 순간에도 언제나 이 구절을 떠올리며 우리의 처지를 기억함으로써 즐거움에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하자. 가끔 우리는 이 구절을 떠올리지 못해 쾌락에 빠지곤 한다. 이로써 죽음의 표적이 되고 위협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연회와 같은 큰 잔치 도중에 망자의 마른 해골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곤 했다.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곧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깨우치고 나면 반대로 죽음에 속절없이 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잊게 된다. 죽음이 뭔지를 알면 모든 굴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을 박탈당하는 것이 해악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 pp.22-23

단 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그것이 내가 죽기 전에 마쳐야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짬을 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어떤 이가 내 수첩을 뒤적이다 내가 써놓은 ‘죽은 이후에 이루어졌으면 하는 일’의 목록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집에서 1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건강하고 활기가 있을 때 그것을 적고자 서둘렀노라고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이렇듯 나는 내 생각들을 지속적으로 품고 스스로에게 새겨넣기 때문에 언제나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죽음이 갑자기 닥치더라도 놀랄 일이 전혀 없다. 우리는 언제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떠날 수 있도록 신을 신고 채비해야 한다. --- p.27

사람들은 죽음의 실제 모습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검술도 죽음 앞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미리 죽음에 대해 생각해두면 분명 굉장히 유익하니 말이다. 어떤 변화나 흥분 없이 적어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작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자연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용기를 준다. 죽음이 급작스럽고 통렬하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천천히 온다면 나는 병세가 심각해질수록 삶을 더욱 경멸하게 될 것이다. 나는 병들어 앓을 때보다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한 결의를 소화하기가 더 힘겹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삶의 매력을 더이상 누리지도, 추구하지도 않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부쩍 줄어든다. 나는 그렇게 내가 삶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삶과 죽음의 교환을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pp.33-34

극심한 노화로 기력이 쇠해 죽는 것이 가장 드문 죽음일진대 이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황당무계한 생각인가? 마치 추락해서 목이 꺾이거나 난파를 당해 질식하거나 흑사병이나 늑막염이 걸려 맞이하는 죽음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며,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닥치지 않는 듯이 우리는 노사老死하는 것만을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이 좋은 말에 아첨하지 말고 무조건 일반적이고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죽음만을 자연스러운 죽음이라 부르자. 늙어서 죽는 일은 드물다. 독특하고 이례적인 이 죽음은 다른 죽음보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노사는 죽는 방법 중에 최후이자 극단적인 방법이며 요원하기에 고대하지 않는 죽음이다. 또한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이며 자연의 법칙이 우리에게 금지한 한계다. 그러나 동시에 노쇠에 이르기까지 사는 것은 자연이 허락한 희귀한 특권이다. 2~3세기에 한 명에게나 예외적으로 베푸는 자연의 특별한 호의이며, 그렇게 오래 사는 동안에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제해준다. --- pp.38-39

정신은 육체에 아주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만 나를 버리고 끊임없이 육체의 고난을 뒤쫓기에 혹시 배신자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정신에게 아첨도 하고 설득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
렇게 정신이 육체와 공모하지 않도록 회유하고자 정신에게 세네카와 카툴루스Catullus, 귀부인들과 왕실의 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동반자가 복통을 일으킬 때 정신은 그와
똑같이 앓는 듯하다. 이럴 때는 정신이 가진 고유의 능력도 발휘되지 못하고 육체와 함께 지쳐버린다. 육체가 기쁘지 않으면 정신도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 스승들이 잘못 알았다. 그들은 영혼이 눈부시게 도약하는 이유를 신성한 황홀경, 사랑, 호전적인 격분, 시, 와인 등에서 찾았고 건강은 고려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강력하고 생기 있고 완전하며 안정적인 건강이 나에게 주었던 기쁨을 이제는 정정亭亭함과 안정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쁨의 불은 우리가 가장 명랑하고 격정적으로 열광할 때 우리 정신이 빛나던 것보다 더 강렬하고 반짝이는 빛을 우리 정신에 비춘다. --- pp.44-45

철학은 우리에게 죽음을 항상 눈앞에 두고, 미리 생각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지와 생각이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사항과 규칙을 알려준다. 이는 약물과 의술을 시험 해보기 위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의사들의 행태와 같다.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고 그 일생의 마지막을 변형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의연하고 평온하게 사는 법을 알았다면 그렇게 죽는 법도 알 것이다. 철학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부한다. “죽음을 연구하는 데 삶 전체를 바쳤다.”라고. 그러나 나는 죽음이 결론일지언정 삶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의 끝이자 극단에 죽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삶의 목적은 아니다. 삶이 삶 자체의 목적이자 목표여야 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처신하도록 용인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염려에 무게를 실어주지만 않는다면 이는 가벼운 삶의 요소일 수 있다. --- pp.53-54

내 몸이 수차례 무너질 때도 정신의 온기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워주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의 정신은 쾌활하거나 혹은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또한 4~5개월 동안 사일열을 앓았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망가졌으나 정신만은 유쾌하게 유지되었다. 고통이 떠나가면 쇠약과 우울도 나를 그다지 슬프게 하지 않았다. 이름만 들어도 겁나는 육신의 질병이 무수히 많지만 나는 내가 실제로 겪는 수천 개의 격정과 정신의 동요가 더 두렵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겪는 자연적 쇠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인생이 참나무의 수명만큼 길고 강하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 p.60

본성은 저절로 자신을 드러내니 우리는 그저 운영할 따름이다. 본성은 모든 계층에 존재하며 장막이 없는 듯 뒤에서도 드러난다. 본인의 품행을 꾸밀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책을 지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휴식을 취할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도시와 제국을 점령한 이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인간 최대의 걸작은 바로 온당하게 사는 인생이다. 통치하고 재산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는 다른 모든 일들은 기껏해야 부수적이고 사소한 찌꺼기들일 뿐이다. 세간에 인간은 늘 미래의 일들에 얼이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 지나간 것들을 붙잡지 않았듯이 앞으로의 것들도 손에 쥘 생각이 없는 듯 그저 현재의 것들을 꽉 붙들고, 또 그 위에 자리 잡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만약 본성에 따라 이끌려간 결과들도 감히 오류라 칭한다면, 그자들은 인간의 가장 흔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신보다는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짓된 생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pp.66-67

우리가 때때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타인을 감시하고 외부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할애하는 시간을 차라리 자신을 탐구하는 데 쏟는다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조각들로 이루어졌는지 금세 발견할 수 있다.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과 상상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논쟁해온 인간의 최고선最高善이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의견이 수렴되지 못한 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p.71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불행’의 부재일 뿐이다. 이것은 쾌락을 가장 예찬했던 철학 학파(에피쿠로스 학파)가 행복을 괴로움의 부재라고 정의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엔니우스Ennius가 “불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듯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불행의 부재다. 일부 즐거움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한 건강과 무통無痛 이상의 것을 주는 듯한 흥분과 욕구는 곧 적극적 쾌락이다. 말하자면 변화무쌍하고 통렬하며 신랄한 이 적극적 쾌락은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진다. 바로 고통을 피하는 것. 예를 들어 여인을 향한 정열은 결국 고통을 뒤쫓게 하는데, 이 고통은 격렬하게 불타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정열이라는, 이 적극적 쾌락은 오직 그 열기를 채우거나 잠재우거나 해소해줄 것을 요구한다. 다른 욕망도 마찬가지다. --- p.77

부유함과 궁핍함은 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부든, 명예든, 건강이든, 그것을 소유한 이가 부여한 의미 이상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지니지 못한다.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 스스로의 확신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진실한 것이다.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지 못한다. 단지 우리의 영혼에 재료와 씨앗을 주어 더욱 강해진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향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자의만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유일한 근거이자 주권자다. 외부적인 성취는 내부적인 조직을 통해 맛과 색을 가진다. 우리가 옷을 입었을 때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은 옷 자체에 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산하는 열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몸을 차갑게 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한기를 얻는다. --- pp.84-85

젊은이는 인생을 준비하고 늙은이는 인생을 만끽해야 한다고, 현인들은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발견한 가장 큰 오류는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살기 시작한다. 한 발은 이미 무덤 속에 있건만 욕구와 필요는 계속 소생하기만 한다.“죽는 순간에 대리석을 재단하면서도 무덤에 세울 생각은 않고 집을 건설하는구나.”나는 최대 1년 이내의 계획만 세우며 언제나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모든 새로운 희망과 사업에 거리를 두고 내가 떠나는 모든 장소에 작별을 고하며 내가 가진 것들에서 매일 조금씩 멀어진다. “내가 아무것도 잃지도, 얻지도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보다는 지금까지 비축해둔 것이 더 많다.”--- pp.86-87

타인을 위한 삶은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아 있는 인생만큼은 자신을 위해 살자. 모든 생각과 의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안위를 지향하게 하자. 확실한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 다른 일과 병행하기에는 다소 벅찰 수 있다. 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떠날 겨를을 주었으니 채비를 하자. 짐을 꾸리고 직장에서 미리 휴가를 얻자. 그리고 다른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우리를 옭아매는 폭력적인 속박들을 풀어내자. 그 속박이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의무감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사랑하되, 오직 자신과만 혼인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과 관계를 맺되 자신의 일부를 벗겨내거나 뜯어버리지 않고서는 그것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하거나 달라붙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회에 기여할 것이 없으므로 사회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무언가를 빌려줄 수 없는 사람은 빌리지도 말아야 한다. 기력이 쇠하고 있으니 남은 힘은 안으로 끌어모아 자신을 위해서만 쓰자. --- pp.101-102

스스로 반성하고 사색에 온전히 몰두할 줄 아는 사람에게 명상은 완전하고 강력한 수련법이다. 나는 내 정신을 배불리기보다는 단련시키기를 더 좋아한다. 자기의 정신을 따라 생각을 지키는 것보다 더 쉽거나 강한 작업은 없다. 위인들에게 ‘산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자기 업으로 삼는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묵상보다 오랫동안 전념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이것은 자연이 준 특혜다. 일상적으로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들도 그토록 오래 하지는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상이란 신들이 하는 일이며 우리가 명상을 통해 지복을 누리듯 신들은 명상으로 천복을 누린다.”라고 말했다. --- p.157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나 현상을 괴물이나 기적이라 부른다면 우리 눈앞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괴물과 기적은 얼마나 많은가? 지금 우리가 아는 지식을 얻기까지 안개 속에서 얼마나 암중모색했는지 떠올려보면 우리가 가진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습관 덕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도 질리도록 많이 봐서 이제는 누구도 눈을 들어 찬란한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우리가 이미 아는 것들도 만일 지금 처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그 무엇보다 놀랍게 여기리라.“이것들이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우리 눈앞에 별안간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토록 불가사의하고 기상천외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강을 보면 그것이 대해大海인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만큼이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규모라고 생각한다. “아주 크지 않은 강일지라도 더 큰 강을 본 적 없는 이에게는 거대해 보이게 마련이다. 나무나 사람도 마찬가지이며, 모든것에 있어 우리는 자신이 본 가장 큰 것을 막대하다고 여긴다.”
--- pp.188-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