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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의 대표적 해방신학자 김근수의 4대 복음서 완결판!
〈요한복음〉에서 한반도 평화의 길을 찾다!
이 책은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의 두 눈으로 예수의 역사를 추적해온 신학자 김근수의 〈요한복음〉 해설서다. 마르코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루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에 이은 4대 복음 해설서의 완결판이다. 〈요한복음〉은 이해하기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책은 〈요한복음〉이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요한복음〉 해설서인 이 책을 출간하면서, “나는 이 책을 해방신학 관점에서 썼다. 〈요한복음〉을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려고 애썼다. 우리 시대의 징표인 여성의 목소리도 담아내려고 애썼다. 성서학계의 연구 성과를 두루 참조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운명을 의식했다.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몸으로 느끼며 책 제목을 《평화의 예수》라고 기쁘게 지었다. 복음서 해설서를 준비하는 데 30년, 쓰는 데 7년이 걸렸다. 이제 겨우 복음서 해설을 한 바퀴 마쳤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한반도에 평화를 선사합니다!” 이 책을 쓴 한국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정말일까. 2000년도 더 된 이 오래된 복음서에 한반도 평화의 키가 있다니…… 정말일까. 2018년 5월에 입적한 한국 선시의 대가 오현 스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월호가 교황의 방한 내내 화두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부처는 중생과 고통을 같이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과 고통을 같이하듯이 말이다.” 이 책의 저자 김근수는 이렇게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안고 〈요한복음〉을 읽어보자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사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했다. 〈요한복음〉이 오늘 한반도에 주고 싶은 단어도 ‘평화’ 아닐까, 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21세기 한반도에 평화를 선사하고 격려한다. 〈요한복음〉에서 단어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기꺼이 평화를 선택하겠다”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요한복음〉에서 한반도 평화의 길을 찾다!
이 책은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의 두 눈으로 예수의 역사를 추적해온 신학자 김근수의 〈요한복음〉 해설서다. 마르코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루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에 이은 4대 복음 해설서의 완결판이다. 〈요한복음〉은 이해하기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책은 〈요한복음〉이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요한복음〉 해설서인 이 책을 출간하면서, “나는 이 책을 해방신학 관점에서 썼다. 〈요한복음〉을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려고 애썼다. 우리 시대의 징표인 여성의 목소리도 담아내려고 애썼다. 성서학계의 연구 성과를 두루 참조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운명을 의식했다.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몸으로 느끼며 책 제목을 《평화의 예수》라고 기쁘게 지었다. 복음서 해설서를 준비하는 데 30년, 쓰는 데 7년이 걸렸다. 이제 겨우 복음서 해설을 한 바퀴 마쳤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한반도에 평화를 선사합니다!” 이 책을 쓴 한국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정말일까. 2000년도 더 된 이 오래된 복음서에 한반도 평화의 키가 있다니…… 정말일까. 2018년 5월에 입적한 한국 선시의 대가 오현 스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월호가 교황의 방한 내내 화두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부처는 중생과 고통을 같이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과 고통을 같이하듯이 말이다.” 이 책의 저자 김근수는 이렇게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안고 〈요한복음〉을 읽어보자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사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했다. 〈요한복음〉이 오늘 한반도에 주고 싶은 단어도 ‘평화’ 아닐까, 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21세기 한반도에 평화를 선사하고 격려한다. 〈요한복음〉에서 단어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기꺼이 평화를 선택하겠다”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목차
서문_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을 때 함께 피 흘리는 예수
1부 예수 증언의 책
프롤로그_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
1막
1장 예수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
2장 예수를 증언하는 첫 번째 제자들
2막
1장 가나 혼인 잔치 포도주 기적
2장 예수의 성전 항쟁
3장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4장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세례 베푸는 예수
5장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
6장 고관 아들의 병을 고침
3막
1장 예수의 세 번째 기적: 베짜타 연못에서 병자 치유
2장 예수의 네 번째·다섯 번째 기적: 5000명 먹임과 물 위 걸음
3장 예수와 적대자들의 커지는 갈등
4막 A
1장 죄지은 여인과 예수의 용서
2장 자신을 증언하는 예수
3장 시각장애인 치유
4장 착한 목자 예수
5장 하느님의 아들 예수
2부 예수 영광의 책
4막 B
1장 라자로의 부활
2장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
3장 예수 장례를 미리 치른 마리아
4장 예수 최후의 시간 .322
5장 예수의 죽음과 악의 세력
5막
1장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
2장 예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3장 예수의 작별 인사: 성령과 평화
4장 예수의 유언: 박해받을 용기
5장 예수의 유언: 악에 저항하라
6장 세상과 믿는 자를 위한 기도
6막
1장 체포되고 재판 받는 예수
2장 로마 군대에게 사형선고 받는 예수
3장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예수
7막
1장 죽음과 악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
에필로그_ 예수가 원하는 세상과 교회
주
참고 문헌
1부 예수 증언의 책
프롤로그_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
1막
1장 예수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
2장 예수를 증언하는 첫 번째 제자들
2막
1장 가나 혼인 잔치 포도주 기적
2장 예수의 성전 항쟁
3장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4장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세례 베푸는 예수
5장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
6장 고관 아들의 병을 고침
3막
1장 예수의 세 번째 기적: 베짜타 연못에서 병자 치유
2장 예수의 네 번째·다섯 번째 기적: 5000명 먹임과 물 위 걸음
3장 예수와 적대자들의 커지는 갈등
4막 A
1장 죄지은 여인과 예수의 용서
2장 자신을 증언하는 예수
3장 시각장애인 치유
4장 착한 목자 예수
5장 하느님의 아들 예수
2부 예수 영광의 책
4막 B
1장 라자로의 부활
2장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
3장 예수 장례를 미리 치른 마리아
4장 예수 최후의 시간 .322
5장 예수의 죽음과 악의 세력
5막
1장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
2장 예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3장 예수의 작별 인사: 성령과 평화
4장 예수의 유언: 박해받을 용기
5장 예수의 유언: 악에 저항하라
6장 세상과 믿는 자를 위한 기도
6막
1장 체포되고 재판 받는 예수
2장 로마 군대에게 사형선고 받는 예수
3장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예수
7막
1장 죽음과 악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
에필로그_ 예수가 원하는 세상과 교회
주
참고 문헌
책 속으로
〈요한〉은 정의가 불의를 이겼다는 역사 해석학이다. 예수 고난의 역사는 이 세상 고통 받는 사람들과 운명을 나눈 희생의 역사다. 〈요한〉은 희생자 입장에서, 희생자를 위해 쓰인, 희생자를 위한 복음이다. 예수의 저항과 싸움이 예수를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예수와 같이 불의에 저항하거나 투쟁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한〉의 참맛을 느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르〉가 길고 자세한 서문이 있는 고난의 역사라면, 〈요한〉은 처음부터 고난 복음이다. 나는 〈요한〉이 고난 복음보다 십자가 복음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십자가는 고난 이전에 저항이다. 저항이 없었으면 십자가도 없었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생긴 고난이 아닌 고난은 참거나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예수는 고난을 당했다기보다 고난을 불러일으키고 부추기고 기쁘게 맞이했다. -10쪽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복음서에서 자주 오해되는 말 중 하나다. 예수가 곧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정보를 전해주는 말이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 곁에 마지막으로 있을 때 가장 적절한 일을 선택했다. 가난한 사람보다 예수에게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과 예수 중 누구에게 먼저, 더 신경 써야 하는지 묻는 문제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냐, 예수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문제도 아니다.
교회나 성당에서 이 말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오직 예수에게 신경 쓰면 되는 줄 아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예수에게 가는 방법은 없다. 예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가난한 사람을 만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이 곧 예수다. -319쪽
교회는 성례전에서 빵과 포도주를 생각하기 전에 가난한 사람의 식량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인이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고 신자나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신부나 목사가 먹을 것이 없으면 왜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은 수없이 굶어 죽었지만, 신부나 목사가 굶어 죽은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신부나 목사가 가난하지 않다는 현실이 그리스도교의 큰 스캔들 중 하나다. -528쪽
〈마르〉가 길고 자세한 서문이 있는 고난의 역사라면, 〈요한〉은 처음부터 고난 복음이다. 나는 〈요한〉이 고난 복음보다 십자가 복음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십자가는 고난 이전에 저항이다. 저항이 없었으면 십자가도 없었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생긴 고난이 아닌 고난은 참거나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예수는 고난을 당했다기보다 고난을 불러일으키고 부추기고 기쁘게 맞이했다. -10쪽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복음서에서 자주 오해되는 말 중 하나다. 예수가 곧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정보를 전해주는 말이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 곁에 마지막으로 있을 때 가장 적절한 일을 선택했다. 가난한 사람보다 예수에게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과 예수 중 누구에게 먼저, 더 신경 써야 하는지 묻는 문제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냐, 예수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문제도 아니다.
교회나 성당에서 이 말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오직 예수에게 신경 쓰면 되는 줄 아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예수에게 가는 방법은 없다. 예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가난한 사람을 만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이 곧 예수다. -319쪽
교회는 성례전에서 빵과 포도주를 생각하기 전에 가난한 사람의 식량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인이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고 신자나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신부나 목사가 먹을 것이 없으면 왜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은 수없이 굶어 죽었지만, 신부나 목사가 굶어 죽은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신부나 목사가 가난하지 않다는 현실이 그리스도교의 큰 스캔들 중 하나다. -528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본 〈요한복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인민 편’
저자는 이 책에서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요한복음〉을 보자”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생명’이란 단어가 달리 보일 것이라고도 한다. ‘생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추상명사 생명이 아니라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생존부터 생각할 것이다. 생존이 생명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예수는 ‘해방신학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계급 모순은 성서를 보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다. 억압과 불평등이 판치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요한복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예수와 부자가 보는 예수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복음과 부자가 보는 복음은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그리스도교와 부자가 보는 그리스도교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부자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절실함이 크게 다르다.” 이 책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주일미사나 예배도 버거울 수 있다. 부자의 눈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교회도 세상도 역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덜 봐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성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아픈 말이 있다. 우리는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저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인민 편’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다고도 강조한다. 세상을 걱정하는 종교의 진짜 모습도 소개하고 싶은 뜻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우리는 왜 성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을 때 함께 피 흘리는 예수는 존경받습니다.”
왜, 무엇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가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불의로 가득한 세상을 뒤집어엎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중산층 신자의 지식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성서 공부는 올바른 성서 공부가 아니다. 부자와 권력자에게 봉사하는 성서 공부는 올바른 성서 공부가 아니다. 성서를 공부하고 해설할 때 정의를 대변하고 세상의 변화에 참여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라고.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루가복음〉은 소설 같고, 〈요한복음〉은 논문 같다는 말이 있다.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루가복음〉에서 소설 같은 매력을 느낀다면, 〈요한복음〉에서 철학 강의의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us)와 싸웠다. ‘영지주의’는 선택받은 소수만 비밀스런 방법으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엘리트주의를 내세웠다. 〈요한복음〉은 엘리트주의와 싸우면서 누구나 쉽게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무시하고 이 세상을 멸시하며, 사후 세계만 강조하는 가현설(假現說, Doketismus)과도 싸웠다. 〈요한복음〉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이겨내라고 격려한다. 〈요한복음〉은 역사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역사에 무관심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은 가현설을 따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왜 우리 시대 한국에는 어떤 영지주의와 가현설이 날뛰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론적 가현설과 싸웠지만, 지금 한국 그리스도교는 실제적 가현설과 싸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성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 성직주의는 영지주의에 속한다. 〈요한복음〉에 추상명사가 자주 나온다. 명사를 동사로 풀어 쓰면 이해하기 쉽다. 예수는 길이니, 우리는 예수와 함께 걷는다. 예수는 진리이니, 가짜 뉴스나 나쁜 언론에 속지 않고 진실을 밝힌다. 예수는 생명이니, 불평등을 강요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불의의 세력과 싸우며 생명을 지킨다. 예수는 사랑이니, 가난한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을 한다. 예수는 평화이니, 전쟁에 반대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애쓴다. 명사를 동사로 풀고, 우리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해설하면 〈요한복음〉이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가 실제로 〈요한복음〉 저자일까? 〈요한복음〉 저자가 연극의 모든 내용을 아는 전지적 시점의 인물로 창작하여 일부러 넣은 상상의 인물일까?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동일한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복음〉 저자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엘살바도르 유학 시절에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되기 직전까지 몇 년 동안 지낸 작은 집에 여러 번 가보았다. 자그마한 로메로 대주교가 누운 침대 곁에서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지금도 그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백성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을 때 함께 피 흘리는 예수는 존경받습니다.’”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평화의 예수를 배우고 따르자. 평화의 예수를 배우고 따르면서 우리 땅 한반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가자”며 책을 마무리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인민 편’
저자는 이 책에서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요한복음〉을 보자”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생명’이란 단어가 달리 보일 것이라고도 한다. ‘생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추상명사 생명이 아니라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생존부터 생각할 것이다. 생존이 생명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예수는 ‘해방신학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계급 모순은 성서를 보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다. 억압과 불평등이 판치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요한복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예수와 부자가 보는 예수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복음과 부자가 보는 복음은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그리스도교와 부자가 보는 그리스도교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부자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절실함이 크게 다르다.” 이 책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주일미사나 예배도 버거울 수 있다. 부자의 눈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교회도 세상도 역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덜 봐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성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아픈 말이 있다. 우리는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저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인민 편’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다고도 강조한다. 세상을 걱정하는 종교의 진짜 모습도 소개하고 싶은 뜻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우리는 왜 성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을 때 함께 피 흘리는 예수는 존경받습니다.”
왜, 무엇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가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불의로 가득한 세상을 뒤집어엎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중산층 신자의 지식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성서 공부는 올바른 성서 공부가 아니다. 부자와 권력자에게 봉사하는 성서 공부는 올바른 성서 공부가 아니다. 성서를 공부하고 해설할 때 정의를 대변하고 세상의 변화에 참여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라고.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루가복음〉은 소설 같고, 〈요한복음〉은 논문 같다는 말이 있다.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루가복음〉에서 소설 같은 매력을 느낀다면, 〈요한복음〉에서 철학 강의의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us)와 싸웠다. ‘영지주의’는 선택받은 소수만 비밀스런 방법으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엘리트주의를 내세웠다. 〈요한복음〉은 엘리트주의와 싸우면서 누구나 쉽게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무시하고 이 세상을 멸시하며, 사후 세계만 강조하는 가현설(假現說, Doketismus)과도 싸웠다. 〈요한복음〉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이겨내라고 격려한다. 〈요한복음〉은 역사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역사에 무관심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은 가현설을 따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왜 우리 시대 한국에는 어떤 영지주의와 가현설이 날뛰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론적 가현설과 싸웠지만, 지금 한국 그리스도교는 실제적 가현설과 싸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성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 성직주의는 영지주의에 속한다. 〈요한복음〉에 추상명사가 자주 나온다. 명사를 동사로 풀어 쓰면 이해하기 쉽다. 예수는 길이니, 우리는 예수와 함께 걷는다. 예수는 진리이니, 가짜 뉴스나 나쁜 언론에 속지 않고 진실을 밝힌다. 예수는 생명이니, 불평등을 강요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불의의 세력과 싸우며 생명을 지킨다. 예수는 사랑이니, 가난한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을 한다. 예수는 평화이니, 전쟁에 반대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애쓴다. 명사를 동사로 풀고, 우리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해설하면 〈요한복음〉이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가 실제로 〈요한복음〉 저자일까? 〈요한복음〉 저자가 연극의 모든 내용을 아는 전지적 시점의 인물로 창작하여 일부러 넣은 상상의 인물일까?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동일한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복음〉 저자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엘살바도르 유학 시절에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되기 직전까지 몇 년 동안 지낸 작은 집에 여러 번 가보았다. 자그마한 로메로 대주교가 누운 침대 곁에서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지금도 그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백성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을 때 함께 피 흘리는 예수는 존경받습니다.’”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평화의 예수를 배우고 따르자. 평화의 예수를 배우고 따르면서 우리 땅 한반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가자”며 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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