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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약산 김원봉 회견기(가상)
제1장
‘떡잎’부터 남다른 어린 시절
체 게바라와 호세 리잘
‘그림자’ 같은 사나이
밀양에서 열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망국소년이 된 김원봉
전홍표 교장과 평생동지 윤세주 만나
독립운동의 묘판, 밀양
평생 동지들 만나 의기투합하다
제2장
조국독립의 꿈을 그리며
무장투쟁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
파리강화회의에 자객 보내
비폭력 3.1운동 소식 듣고 실망
무장부대 대신 폭렬투쟁론 정립
신흥무관학교 입교, 폭탄제조법 배워
제3장
폭렬투쟁의 의열단 창단
‘의열단’이라는 고유명사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열단’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
제4장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라
폭렬투쟁에 생명 걸어
부산경찰서 폭파 작전
밀양경찰서 폭파 작전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
자금 조달과 폭탄 반입의 어려움
아나키즘에 매료되기도
아나키스트 유자명과의 만남
의열단, 임시정부와는 거리 두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지원받아
일본 육군대장 처단 시도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의열단선언>은 어떤 내용인가
의열단 총회 열어 결의 다짐
‘불멸의 문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제5장
황포군관학교 입교 전후
의열단의 시련과 세력 확장
임시정부에 실망한 세력 의열단 가담
의열투쟁자금 마련에 고심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 의거
확고한 민족주의 신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유오한국혁명동지회 결성
군관학교에서 얻은 인적 자산
김성숙의 김원봉 회고담
제6장
중국혁명전선에 서다
의열단의 개조운동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
무창혁명청년회 결성
장개석의 북벌에 참전
살육의 현장을 뒤로하고 상해로
남창봉기에 직접 뛰어들어
광주봉기에는 참가하지 않아
시련을 딛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발돋움
제7장
독립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다
공산주의 이론가 안광천과의 만남
상해에서 새 활로 모색
대표자대회 열어 강령 · 슬로건 채택
창립 9주년과 3.1운동 10주년 성명
레닌주의정치학교 개설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제8장
독립군전사들의 용광로 조선혁명간부학교
세계 대공황과 파시즘 체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기까지
‘남의사’통해 중국정부로부터 재정 지원 받아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의 협력
남경 교외 탕산에 훈련소 개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에 열정을 바쳐
치열한 혁명계급론 분석
백범 김구의 격려 방문
졸업생들, 특수임무 띠고 적 후방으로
혁명음악가 정율성 배출
독립운동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왜노 몰아내는 조선독립의 역군이 돼라”
제9장
사랑과 혁명의 합주곡
북경에서 만난 여성 혁명가 박차정
젊은 혁명가들의 사랑과 조국해방투쟁
노신과 허광평의 사랑과 혁명운동
남경조선부녀회 조직, 운영지도
불꽃처럼 살다간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처럼
제10장
민족혁명당 창당 총서기에 취임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통합정당을 지도
단일대당 운동에 임시정부는 불참
민족 · 민주혁명이념 제시
당권 장악했으나 이청천 계열 이탈
《민족혁명당보》 발행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혁명당 창당의 ‘실천적 의의’
중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11장
조선의용대 창설, 총대장이 되다
중일전쟁, 한국독립 절호의 기회
조선의용대 창설
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식 가져
의용대원들의 회고
핵심대원들로 의용대 편제
일본인 반전운동가들과 연계투쟁
한국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
강도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발행
후방지역 전지공작에 투입
중국 문인 곽말약과 김성국의 회고
의용대원 김학철의 회고
의용대원 유자명의 회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결성
제12장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화북이동 전후
조선의용대의 선전공작과 유격전
“모든 반일 역량을 단결시키자”
다양한 대적선전활동 전개
일제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
일본 반전단체의 축하 메시지
조선의용대의 미래 활동 지침
조선의용대 주력 화북으로 이동
중국공산당, 김원봉의 화북행 차단
중국인 사마로의 증언
“망명자 가족 생계유지를 위해”
〈연안송〉을 지은 정율성은 조선의용대원
제13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
국권침탈기 무력항전의 전통
한국광복군의 결성과 성격
한국광복군의 역할과 사명
제14장
좌절과 민족해방의 중경 시절
잔류대원 이끌고 중경으로 이동
장개석 정부의 통합 압력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좌우 갈등
“배운 것 적어도 도량 큰 인물”
소절에 구애받지 않는 혁명가의 풍모
임시정부에서 소외당해
3.1 소년단장 최동선과 재혼
제15장
광복의 깃발 들고 27년만에 환국
일제 패망의 날, 중경
제2진으로 12월 초 환국
일제 패망과 조국독립의 의미
환국 순위 양보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서
비상국민회의 탈퇴 선언
임시정부와 결별, 민전의장 맡아
28년만의 귀향, 대대적인 환영받아
친일경찰에 붙잡혀 수모 당해
3일간 통곡, 그 눈물의 사연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기막힌 ‘해방조국’
이현상의 글, 〈혈투의 30여 성상〉
제16장
단정반대 월북 그리고 의문의 죽음
일관된 통일정부수립 노선
테러위협으로 인한 긴장된 생활
4월 9일 북한으로 가다
월북 동기와 배경
북한정권수립에 기여, 국가검열상 취임
월북,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재북 독립운동가들과 평화통일기구 만들어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그림자 사라져도 존재는 남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처럼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부록1 민족혁명당 당의 · 당강 · 정책 · 당장
부록2 우리 운동의 새 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
김원봉 연보
약산 김원봉 회견기(가상)
제1장
‘떡잎’부터 남다른 어린 시절
체 게바라와 호세 리잘
‘그림자’ 같은 사나이
밀양에서 열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망국소년이 된 김원봉
전홍표 교장과 평생동지 윤세주 만나
독립운동의 묘판, 밀양
평생 동지들 만나 의기투합하다
제2장
조국독립의 꿈을 그리며
무장투쟁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
파리강화회의에 자객 보내
비폭력 3.1운동 소식 듣고 실망
무장부대 대신 폭렬투쟁론 정립
신흥무관학교 입교, 폭탄제조법 배워
제3장
폭렬투쟁의 의열단 창단
‘의열단’이라는 고유명사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열단’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
제4장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라
폭렬투쟁에 생명 걸어
부산경찰서 폭파 작전
밀양경찰서 폭파 작전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
자금 조달과 폭탄 반입의 어려움
아나키즘에 매료되기도
아나키스트 유자명과의 만남
의열단, 임시정부와는 거리 두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지원받아
일본 육군대장 처단 시도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의열단선언>은 어떤 내용인가
의열단 총회 열어 결의 다짐
‘불멸의 문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제5장
황포군관학교 입교 전후
의열단의 시련과 세력 확장
임시정부에 실망한 세력 의열단 가담
의열투쟁자금 마련에 고심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 의거
확고한 민족주의 신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유오한국혁명동지회 결성
군관학교에서 얻은 인적 자산
김성숙의 김원봉 회고담
제6장
중국혁명전선에 서다
의열단의 개조운동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
무창혁명청년회 결성
장개석의 북벌에 참전
살육의 현장을 뒤로하고 상해로
남창봉기에 직접 뛰어들어
광주봉기에는 참가하지 않아
시련을 딛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발돋움
제7장
독립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다
공산주의 이론가 안광천과의 만남
상해에서 새 활로 모색
대표자대회 열어 강령 · 슬로건 채택
창립 9주년과 3.1운동 10주년 성명
레닌주의정치학교 개설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제8장
독립군전사들의 용광로 조선혁명간부학교
세계 대공황과 파시즘 체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기까지
‘남의사’통해 중국정부로부터 재정 지원 받아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의 협력
남경 교외 탕산에 훈련소 개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에 열정을 바쳐
치열한 혁명계급론 분석
백범 김구의 격려 방문
졸업생들, 특수임무 띠고 적 후방으로
혁명음악가 정율성 배출
독립운동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왜노 몰아내는 조선독립의 역군이 돼라”
제9장
사랑과 혁명의 합주곡
북경에서 만난 여성 혁명가 박차정
젊은 혁명가들의 사랑과 조국해방투쟁
노신과 허광평의 사랑과 혁명운동
남경조선부녀회 조직, 운영지도
불꽃처럼 살다간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처럼
제10장
민족혁명당 창당 총서기에 취임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통합정당을 지도
단일대당 운동에 임시정부는 불참
민족 · 민주혁명이념 제시
당권 장악했으나 이청천 계열 이탈
《민족혁명당보》 발행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혁명당 창당의 ‘실천적 의의’
중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11장
조선의용대 창설, 총대장이 되다
중일전쟁, 한국독립 절호의 기회
조선의용대 창설
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식 가져
의용대원들의 회고
핵심대원들로 의용대 편제
일본인 반전운동가들과 연계투쟁
한국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
강도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발행
후방지역 전지공작에 투입
중국 문인 곽말약과 김성국의 회고
의용대원 김학철의 회고
의용대원 유자명의 회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결성
제12장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화북이동 전후
조선의용대의 선전공작과 유격전
“모든 반일 역량을 단결시키자”
다양한 대적선전활동 전개
일제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
일본 반전단체의 축하 메시지
조선의용대의 미래 활동 지침
조선의용대 주력 화북으로 이동
중국공산당, 김원봉의 화북행 차단
중국인 사마로의 증언
“망명자 가족 생계유지를 위해”
〈연안송〉을 지은 정율성은 조선의용대원
제13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
국권침탈기 무력항전의 전통
한국광복군의 결성과 성격
한국광복군의 역할과 사명
제14장
좌절과 민족해방의 중경 시절
잔류대원 이끌고 중경으로 이동
장개석 정부의 통합 압력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좌우 갈등
“배운 것 적어도 도량 큰 인물”
소절에 구애받지 않는 혁명가의 풍모
임시정부에서 소외당해
3.1 소년단장 최동선과 재혼
제15장
광복의 깃발 들고 27년만에 환국
일제 패망의 날, 중경
제2진으로 12월 초 환국
일제 패망과 조국독립의 의미
환국 순위 양보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서
비상국민회의 탈퇴 선언
임시정부와 결별, 민전의장 맡아
28년만의 귀향, 대대적인 환영받아
친일경찰에 붙잡혀 수모 당해
3일간 통곡, 그 눈물의 사연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기막힌 ‘해방조국’
이현상의 글, 〈혈투의 30여 성상〉
제16장
단정반대 월북 그리고 의문의 죽음
일관된 통일정부수립 노선
테러위협으로 인한 긴장된 생활
4월 9일 북한으로 가다
월북 동기와 배경
북한정권수립에 기여, 국가검열상 취임
월북,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재북 독립운동가들과 평화통일기구 만들어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그림자 사라져도 존재는 남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처럼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부록1 민족혁명당 당의 · 당강 · 정책 · 당장
부록2 우리 운동의 새 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
김원봉 연보
책 속으로
김원봉은 자신의 생애에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제1기생 졸업식에서 목 메이는 어조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하자”고 역설했다. 1기생 졸업식에서 행한 김원봉의 훈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은 졸업 후에 차차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입교 시기의 혁명적 정신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크게 투쟁할 뿐 아니라, 6개월 동안 받은 교육을 기초로 삼아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여 진취적인 정신을 기르고 결사적인 투쟁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강토에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투쟁을 위해 헤어진 동지들이 최후에는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기쁜 얼굴로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8장」중에서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결성식에는 100여 명의 대원이 자리잡았고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인과 중국의 군·정 관계 요인들이 참석했다. 대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제1지대와 제2지대의 지대장에게 각각 군기를 수여하고 ‘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라는 한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한국의용군’라는 영문이 새겨진 배지를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원들은 태극기와 군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김원봉 앞에 도열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굳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또 “우리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3000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이라는 김원봉의 연설은 대원들의 가슴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나 내빈 그리고 주역인 김원봉에게 무장부대의 창설은 생애를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행사가 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당당하게 무장한 군사력을 갖춘 조선의용대가 출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장」중에서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김원봉의 존재가 대단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원봉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 황용주(전 MBC 사장)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두 사람의 사이, 그 내면의 관계는 ‘빙탄불상용’과 같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미 남로당계 인사들과 연안파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한 바 있다. 이제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연부역강한 김원봉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숙청되었을지 모른다. 숙청 과정에서 자결이냐 살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밀하게 살해됐을 수도 있고 옥중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을 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 수도 있다.
동지들은 졸업 후에 차차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입교 시기의 혁명적 정신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크게 투쟁할 뿐 아니라, 6개월 동안 받은 교육을 기초로 삼아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여 진취적인 정신을 기르고 결사적인 투쟁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강토에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투쟁을 위해 헤어진 동지들이 최후에는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기쁜 얼굴로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8장」중에서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결성식에는 100여 명의 대원이 자리잡았고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인과 중국의 군·정 관계 요인들이 참석했다. 대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제1지대와 제2지대의 지대장에게 각각 군기를 수여하고 ‘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라는 한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한국의용군’라는 영문이 새겨진 배지를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원들은 태극기와 군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김원봉 앞에 도열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굳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또 “우리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3000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이라는 김원봉의 연설은 대원들의 가슴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나 내빈 그리고 주역인 김원봉에게 무장부대의 창설은 생애를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행사가 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당당하게 무장한 군사력을 갖춘 조선의용대가 출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장」중에서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김원봉의 존재가 대단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원봉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 황용주(전 MBC 사장)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두 사람의 사이, 그 내면의 관계는 ‘빙탄불상용’과 같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미 남로당계 인사들과 연안파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한 바 있다. 이제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연부역강한 김원봉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숙청되었을지 모른다. 숙청 과정에서 자결이냐 살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밀하게 살해됐을 수도 있고 옥중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을 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 수도 있다.
---「16장」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20세기 최고의 독립운동가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 그는 일제 관헌이 그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렸다던 의열단을 창단하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조선의용대 총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인민공화당 대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그가 역임한 직위만도 10개가 넘는다.
광복 뒤 환국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테러의 위협과 정치적인 모략이었다. 그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좌우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고, 이승만 세력에 빌붙은 친일 세력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는다. 결국 김원봉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1958년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과 북 어디에도 그의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파의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다. 김원봉의 월북과 의문의 죽음을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김원봉이란 존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한국현대사의 전면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 그는 일제 관헌이 그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렸다던 의열단을 창단하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조선의용대 총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인민공화당 대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그가 역임한 직위만도 10개가 넘는다.
광복 뒤 환국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테러의 위협과 정치적인 모략이었다. 그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좌우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고, 이승만 세력에 빌붙은 친일 세력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는다. 결국 김원봉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1958년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과 북 어디에도 그의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파의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다. 김원봉의 월북과 의문의 죽음을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김원봉이란 존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한국현대사의 전면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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