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4.독립운동가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2. 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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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부산경찰서 하시모토 서장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의열지사 박재혁, 스물일곱 생애의 발자취를 좇다

3.1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처단하라는 명을 받은 한 청년이 부산경찰서 서장실로 의연하게 들어간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 청년은 유창한 일본말로 매섭게 꾸짖으며 준비한 폭탄을 던졌다.

청년의 이름은 박재혁(朴載赫), 부산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그는 일찍이 독립정신이 강해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과 우리나라 역사책을 손수 제작해 비밀리에 배포하는가 하면 지하서클 구세단(救世??)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던 소년투사였다. 의열단원 박재혁의 장쾌한 투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한민족의 의기를 천하에 떨쳤다. 박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돼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지만 적의 소굴로 직접 걸어들어가 적장을 처단한 사례는 이 거사가 유일하다. 일제에게는 그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목차

국난기의 ‘처변삼사’
국치시기에 태어나
떡잎부터 남다른 모습
애국 혼이 깃든 민족학교
졸업 후 취업, 김원봉 만나
일제의 만행 지켜보면서
상하이와 싱가포르·홍콩을 오가며
영남지역의 항일운동 단체
국제정세에 안목을 키우다
국내에서 3·1혁명 맞아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참여 조국광복에 투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 투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의사의 신념
순국과 그 이후
유족과 추모사업
박재혁 의사 공적 내용
덧붙이는 몇 마디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
 

출판사 리뷰

3·1혁명 좌절 후 침체된 독립운동,
의거를 통해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지피다

1919년에 일어난 3·1혁명은 비폭력 독립시위였다. 그럼에도 우리민족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했다. 일제는 이후 ‘문화통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욱 가혹한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3·1혁명의 좌절로 한국사회는 패배의식에 뒤덮였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시점에 감행된 청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처단 의거는 전국 동포들에게 다시금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청년들에게는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꺼져가는 독립운동에 다시 심지를 돋우고 불을 붙인 사건인 셈이었다.

박재혁 의사는 부산경찰서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로 옮긴 이후 긴 단식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우리 의열투쟁 역사에 샛별과도 같이 찬연히 빛나는 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박재혁 의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교과서는 물론 웬만한 독립운동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박재혁 의사는 혈육 한 점 남기지 않고 조국해방을 위해 산화했기에 남은 흔적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해방 이후 70년이 훨씬 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잊힌 존재였던 박재혁 의사의 거룩한 삶과 독립에 대한 의지, 애국정신에 대해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우리나라 근현대 인물에 대한 권위자인 김삼웅 선생이 직접 평전을 집필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생명을 바쳐 일제와 싸운 의열지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몇 분 외에는 대부분이 낯설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표현한 대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박재혁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셈해지지’ 않아서는 결코 안 될 분이다. 출신지인 부산에서만 겨우 인식되는 선열이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관된 자주독립정신, 27세라는 젊은 나이,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용기, 3·1혁명 좌절 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 역할,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결기, 무후선열이라는 가족사 등 박 의사를 기려야 할 조건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 머리말 中

3·1혁명 100주년,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우다 간
고결한 정신을 기리다

저자는 이제까지 인물평전 30여 권을 집필했다. 대부분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주름잡은 인물이거나 독립운동가 또는 민주화운동가와 비판적 정론의 지식인(언론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이번에 집필한 박재혁 의사의 평전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평전을 작업할 때는 해당 인물에 대한 자료와 증언이 넘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짧은 생애를 살고 떠난 박재혁 의사의 경우 자료가 많지 않았고 생애사도 단순했다.

[부산공립상업고등학교 → 비밀항일운동 → 상업종사 → 의열단 가입 →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 처단 → 사형선고 및 27세의 순국] 으로 진행된 스토리는 논문 한 편 쓰기에도 자료가 턱없이 모자랐다. 증언이나 문헌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일어난 거사인 관계로, 그동안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단 몇 행(行)으로 박 의사의 의거를 기록하거나 아예 제외시켜 버린 경우도 많았다.

저자는 박 의사의 행적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의 업적이 단순하거나, 의거 자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라 힘주어 강조한다. 박 의사는 의병부대나 독립군도 수행하기 어려운 일을 단신으로 수행한 인물이다. 이 거사 덕분에 국내외에서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이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항일전에도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었다.

순절하게 살다가 곱디고운 스물일곱 살 청춘을 조국해방전선에서 바친 박재혁 의사. “조국이 제자리를 찾은” 지도 70여 년이 지나고 순국한 세월도 1세기가 되어가는 지금, 저자는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맑은 이슬로 먹을 갈아 비문을 새로 쓰고, 이를 바탕으로 추모가를 짓고, 각종 기념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민족이 가장 어려웠을 때 생명을 바쳐 싸우다 순국한 의열지사의 정신은 아무리 기려도 모자라지 않기에, 저자는 이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 밖에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