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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열전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동방박사님 2023. 1. 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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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러나 잊힌
38꼭지에 담긴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 열전 2―잊힌 인물을 찾아서』는 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힘을 기울인 인물들, 개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을 배신했던 이름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찾아 떠난 책이다.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자료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을 비교?검토하는 연구에 힘을 기울여온 저자 임경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는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5쪽) 중 기억되어야 함에도 잊힌 인물들을 38꼭지에 담아 펼쳐 보인다.

저자는 특히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주목한다. “지도적 지위에 있던 사람이나 영웅적 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발굴”(7쪽)한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주된 지위를 부여한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사람들 중 다수가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오랜 시간 그들이 공식적인 독립운동 역사서에서 배제되어왔음을 지적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저자의 이 같은 노력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여러 독립운동 사건과 무명 독립운동가의 헌신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목차

『독립운동 열전』을 펴내면서

1장 김사국과 가족

01_‘혁명’에 몸 바친 김사국·사민 형제
02_혁명과 사랑의 불꽃, 박원희

2장 김한

03_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04_동지 손에 꺾인 비운의 혁명가 김한

3장 김단야

05_3·1운동의 숨은 공로자, 김단야
06_민완 기자 김단야가 상하이에 특파된 까닭
07_경성 하늘에 적기가 나부끼다
08_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 김단야

4장 홍범도

09_귀순 공작에 맞선 홍범도 장군의 아내, 이씨 부인
10_양반 의병장에 꺾인 ‘평민’ 홍범도의 큰 뜻

5장 김창숙과 두 아들

11_김창숙의 편지로 본 망명객 심정
12_김창숙의 둘째, 민족해방의 제물이 되다
13_총을 든 유학자 김창숙

6장 박진순

14_‘동양의 레닌’ 박진순의 소년 시절
15_청년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는가―박진순의 청년시대

7장 조훈

16_러시아 벌목장, 막일하는 사관생도들
17_조훈의 두 차례 국내 잠입 이유

8장 빨치산 대장들

18_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
19_박종근의 빨치산 활동
20_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
21_박영발, 빨치산이 되기까지
22_방준표의 청년시대
23_방준표, 입산하기 전에 무엇을 했나

9장 여성

24_한국의 ‘로자’, 박헌영의 연인 주세죽
25_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의 상징, 김마리아
26_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여의사 이덕요
27_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근우회의 책사, 박신우
28_‘여학생 만세 사건’ 주인공, 송계월

10장 대중 속 지도자

29_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강용흘의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풍경
30_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장재성
31_광주학생운동 전국 확산의 불쏘시개, 장석천
32_형무소에서도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농민운동가, 허성택
33_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송하 살인 사건의 진실

11장 사회주의 개척자

34_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이동휘의 진실
35_상해파 공산당 쇠락엔 그의 죽음이 있었다, 최팔용
36_사생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 홍도
37_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 청년 김규열
38_소련에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천황 모해범, 김중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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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사학과 78학번. 민청련 성대 78학번 계반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정책실 산하 [민주화의 길] 편집부에서 일했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수선사학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사에 오랫동안 천착해『이정 박헌영 전집』(전9권, 역사비평사) 간행 과정에 참여했을 뿐...
 

책 속으로

이 책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이지요
--- p.5

김사국과 김사민은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 p.18

아우 김사민의 삶을 파괴한 것이 식민지 통치기관의 폭력이라면, 형 김사국의 삶을 파괴한 것은 질병이었다
--- p.21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녀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지나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에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 p.29

1923년 1월 17일 삼판통(후암동)과 1월 22일 효제동에서 총격전이 발발한 뒤 일본 경찰은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이 이미 사망했는데도 그랬다. …… 김상옥과 조금이라도 접촉했거나 관련된 사람이면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김한金翰도 그 속에 있었다. 한때 상해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을 지냈고 합법적 사상 단체인 무산자동맹회 상임위원으로 재임 중이던 그는 37세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 p.35

망명한 지 2년이 지난 1932년,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망명지 체류가 장기화될 것을 예상하고 좀 더 장기적이고 유의미한 계획을 세웠던 듯하다. ……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벅찬 미래가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 김한은 끝내 밀정 혐의를 벗지 못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32~1934년 어느 때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했다
--- p.55~57

3·1운동은 김단야에게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비밀결사 참여, 해외 망명, 사회주의 수용, 귀국 도중 체포 및 형무소 수감,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그의 혁명운동사의 첫 페이지에는 3·1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 p.70

김단야는 1924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상하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의 상대는 국제당 원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였다. 두 사람은 국제당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창립 문제가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 동의했고,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김단야와 보이틴스키는 행동 골자를 입안하는 데 성공했다. 4개 대회를 한꺼번에 준비한다는 복잡하고도 거창한 복안이었다. 비밀 영역에서 당과 공청의 창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합법 공개 영역에서 전국 규모의 두 종류 대중 집회를 소집한다는 계획안이었다
--- p.78

경성 주재 소련 총영사관의 설립은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다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의 역사에 부침을 초래했고, 사회주의운동사의 진행 과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해외 국제기구 사이에 또 하나의 은밀한 연락 체계가 구축됐음이 주목된다. 이 체계를 개척한 사람은 [조선일보] 기자 김단야였다. 비밀결사 고려공청의 간부이기도 했던 그는 그 뒤로도 국제공산당과 밀접한 연계를 설정하는 데 남다른 성과를 올렸다
--- p.87

김단야는 1937년 11월 5일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의 손에 체포됐다. ‘반혁명 스파이, 테러 단체 결성’ 혐의였다. 스탈린 대숙청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의 길을 걸었다
--- p.98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 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의 매복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하여 209명의 군경이 포로로 잡혔다. ……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개의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가 명령을 내렸다. “석유통의 윗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 놓아라.” 명령은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 p.108~10

홍범도 의병부대가 쇠락하게 된 이유가 양반 의병장의 독단 탓이었음이 명백했다. 의병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했던 함경도 부대를 패퇴시킨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의 양반 출신 의병장이었다. 오히려 적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 p.119

김환기는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됐다. 1927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출옥했다. 열아홉 살 청년의 신체는 손쓸 여지도 없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는 치료 도중에 1927년 12월 20일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김창숙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 p.130

김찬기는 “1942년 12월 27일에 집을 떠나 대구에서 동지들과 규합하여 준비를 마치고 1943년 1월 13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 그러나 …… 그는 해방 직후에 죽어서 돌아왔다. …… 1944년에 충칭에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몹쓸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p.138~39

김창숙이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조선으로 되돌아온 까닭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결사입국의 뜻’을 품은 이유는, 바로 독립운동자금 모금 때문이었다
--- p.142

박진순에 대한 세평에 한결같은 점이 있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언론 지면이나 경찰의 비밀 사찰기록에서도 그를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의 걸출한 투사로 지목하고 있다. 이론 능력이 뛰어나고 국제 외교에 공로가 큰 인물이라고들 말한다
--- p.151

연해주 한인사회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발원지였다. 그곳에서 어떻게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했는가? 이 물음의 답을 찾는 데 박진순의 행적이 도움이 된다.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청년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 p.158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무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영사관 측의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 ‘사관생도 32명이 결사를 맺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무관학교 재개 자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공공선을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은 고도의 윤리적 행동이었다
--- p.172

서울 한복판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설립한 직후 조훈은 다시 국외로 빠져나갔다. 국제공청과의 연락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922년 9월의 일이었다. 서울에 비합법적으로 체류한 것이 한 달 남짓일 뿐이었는데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는 12월 개최 예정인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출석할 고려공청의 대표자라는 자격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 p.184

박종근이 이끄는 제3지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10개월을 더 버텼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대규모 토벌작전의 시련을 견뎌내지는 못했다.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달한 1952년 2월 어느 날 박종근 제3지대 사령관은 총상을 입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 결국 박종근은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길을 택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위치한 포도산(748미터)의 한 기슭, 1952년 2월 27일의 일이었다
--- p.205~06

2005년 2월,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박영발 비트(비밀 아지트)가 발견됐다.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의 험한 산비탈에서였다. ……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1954년 3월 19일 피살될 때까지 최후 국면의 빨치산을 이끌던 박영발의 조난 장소 풍경이었다
--- p.207~08

한국전쟁 때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으로 빨치산을 이끌던 …… 방준표는 1920년대 중후반기 서울에서의 학창 생활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했다. 그에게 서울은 사상의 고향이자 노동운동의 무대였고 비밀결사운동의 거점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참가한 것은 29세 때였다
--- p.225~31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눈물을 잘 흘리는 청순가련한 여인! 타자의 기록에 보이는 주세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스스로 작성한 기록에는 전혀 다른 주세죽이 담겨 있다. 그녀는 혁명가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 그녀는 사회주의자였다. …… 1921년 …… 6월에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했고 11월에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녀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 그녀는 여성운동가였다. 3·1운동기에 이미 여성 비밀 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 데다가, 1924년 5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공개 여성 단체인 여성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7인 집행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됐다
--- p.252~53

김마리아의 탈출 소식은 널리 알려졌다. 도하 신문 지면을 두루 장식했다. 국내의 친지와 동료들은 그의 망명을 기뻐했다. 건강과 앞날의 행운을 빌었다. 상하이의 망명자 사회에서도 김마리아의 도래를 환영했다. 상하이 거류민들은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1921년 11월 25일에 환영회를 개최했다. 그는 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 p.265

이덕요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남녀평등과 여성인권의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고, 남존여비와 조혼을 반대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272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범죄의 낙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길고 긴 망각의 세월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비롯하여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 희생자들은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헌신을 지금처럼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 것인가?
--- p.286

고향인 함남 북청으로 요양 차 귀향한 송계월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33년 5월 31일에 사망했다. 나이 23세였다. 그의 요절 소식을 들은 기자 송봉우는 “글 쓴 것을 보아도 논지가 분명하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조리가 있고, 좀 더 자라면 여류 운동객으로 장성할 분”이었는데 정말로 아깝다고 말했다
--- p.295

『초당』에는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 기록이 담겨 있다. 소설이니만큼 그 속에 적힌 얘기들을 모두 사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 p.306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하지만 그는 살아서 형무소 문을 나서지 못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정세 속에서 그는 다른 정치범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되고 말았다고 한다.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 채였다. 전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 p.313

장석천은 학생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해간 지식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31년 12월에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색노동조합운동 현장으로 달려갔다
--- p.324

허성택은 해방 후 전평 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평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줄임말로서 해방되던 그해 11월에 설립된 전국적 노동자 단체였다. 16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1개의 합동노동조합을 아울렀고, 내부에 194개의 분회 조직과 21만 명의 조합원을 지닌 힘 있는 단체였다. ……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해방 전에 무슨 일을 했기에, 해방 공간에서 그와 같이 영향력 있는 단체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을까?
--- p.327

송하 살인 사건은 농민운동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 언론 보도는 이 사건을 ‘살모 사건’이라고 불렀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살해한 악녀로 지목받았다. 그들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됐다. …… 허씨 자매는 스스로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무고한 농민조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거절했다
--- p.343~46

이동휘에게 들씌워진 불명예가 어떤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이동휘 그룹이 성취한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이 자파의 수중으로 넘어오기를 바랐던 경쟁자들, 국제당 동아시아 담당관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이동휘에 대한 악의적 풍문은 그들에게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 풍문이 지속적으로 유포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 p.357

최팔용은 3·1운동의 도화선이라고 평가받는 2·8독립선언의 지도자였다. 그는 재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학우회 총회에서 단상에 올라 수백 명 유학생들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 p.358

그(홍도)는 20세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 p.372

두 사람은 옥중생활과 해외 유학을 거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 유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유학을 통해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은 두 사람의 이론적·정책적 입장에 차이를 불러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대표 이론가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던 것이다
--- p.386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탄압 사건’의 발단이 됐던 바로 그 사람, 유동식은 과연 누구인가? 그 사람의 본명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이었다. 세칭 ‘박열朴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지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천황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 김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 p.388
 

출판사 리뷰

잊힌 독립운동 인물들을 찾아 떠나다

저자는 민족독립운동의 투사였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던 김사국과 김사민 형제, 남편 김사국과 망명 중에도 사회주의운동 기지 구축 활동을 전개한 박원희를 통해 초기 사회주의운동을 살피고, ‘김상옥 의거’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음에도 비밀결사 내지당(조선공산당) 존재를 발설하지 않아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으나 출옥 후 일본의 밀정 혐의로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사형당하고 만 비운의 혁명가 김한의 지난했던 삶을 들춰본다.

3·1운동의 숨은 공로자, 기자 신분으로 세포 단체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던 혁명가, 그러나 스탈린의 광기에 휘말려 일본의 밀정 혐의를 받고 체포된 지 3개월 만에 총살당한 김단야의 치열했던 생애를 둘러보고, ‘평민’ 의병장으로서 지방 거점 도시 공략에 성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양반 의병장의 무성의와 독단으로 인해 의병부대의 쇠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홍범도의 울분을 들여다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총을 든 유학자 김창숙과 두 아들 김환기, 김찬기의 처절했던 생애를 살피고, 시베리아 3대 재사才士라 불리던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의 걸출한 투사 ‘동양의 레닌’ 박진순의 삶을 돌아보고, ‘이르쿠츠쿠파’의 중추 멤버로 성장한 후 국내 공산청년운동 통합에 나섰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조훈의 격렬했던 생애를 살펴본다. 박헌영의 연인이었던 한국의 ‘로자’ 주세죽, 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의 상징이었던 김마리아,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여의사 이덕요, 종로 네거리를 누볐던 근우회의 책사 박신우, ‘여학생 만세 사건’ 주인공 송계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둘러보고,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 등 빨치산 대장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들춰본다. 강용흘의 『초당』을 통해 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던 3·1운동의 참혹한 실상을 돌아보고, 송하 살인 사건을 통해 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일본 경찰의 교활한 각본을 파헤친다.

박제화와 영웅 서사 경계 … 무명의 헌신에 주목하다

저자가 특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무명의 헌신”(8쪽)이다. 저자는 오늘날 독립운동사 저서와 논문 대다수가 “독립운동가 개인이나 독립운동 단체를 돋보이게 하려고 긍정적인 측면만을 도드라지게 부각”하는 “박제화와 영웅 서사”(8쪽)에 힘써왔다고 지적하면서 그러한 작업은 지루하고 권태롭다고 비판한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정의에 헌신했으되 잊혀져버린 이름 없는 투사들”(7쪽)에게 눈길을 준다. 저자는 창창한 33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광주학생운동 전국 확산의 불쏘시개 장석천, 형무소에서도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농민운동가 허성택, 소련에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천황 모해범 김중한 등 낯선 독립운동가의 삶에 빛을 비춘다. 총을 든 유학자 김창숙을 살필 때는 ‘유림단 독립운동 모금 사건’에 휘말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희생당한 그의 첫째아들 김환기와 ‘왜관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 망명길에 나섰으나 유골로 귀국하게 된 둘째아들 김찬기의 생애를 돌아본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저자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가 고초를 겪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즉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어린 자식들, 남편 없이 홀로 어린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아내들, 자식을 잃은 고통에 애타하던 노부모에게도 주목한다. 홍범도를 살필 때는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일본 경찰의 귀순 공작을 거부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이씨 부인의 결기에 시선을 돌린다. 혁명에 몸 바친 김사국과 김사민 형제를 둘러볼 때는 두 아들을 잃고 탁발로 궁핍한 만년을 보내면서 맏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사국이 제사나 한번 지냈으면……”이라 탄식하던 어머니 안국당의 무거운 마음을 애달파한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제자리 찾기

저자는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그러기는커녕 정면으로 배치”(7쪽)된다고 강조한다.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마땅히 독립운동사에 포함되어야 할 뿐 아니라 역사적 기여만큼 온당한 지위와 비중을 인정받아야 한다”(7쪽)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 아래 저자는 사회주의 개척자들의 활동을 꼼꼼하게 훑는다.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한 이동휘가 조선 실정에 무지하여 레닌에게서 책망을 받았다는 유학생 출신 2030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비난을 둘러싸고 진실이 무엇인지 살피고, 2·8독립선언 작성과 선포를 주도했던 최팔용이 32세에 신병으로 요절한 것이 상해파 공산당의 쇠락을 불러왔다는 점을 밝힌다. 20세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 결사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가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소식이 끊긴 홍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고, 옥중생활과 해외 유학을 거친 후 사회주의자가 된, 공자와 레닌을 사랑했던 김규열의 생애를 훑는다. 이들의 삶은 그동안 외면받았던, 그러나 잊혀서는 안 되는 독립운동사의 또 다른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