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83년에는 노부나가의 유력 무장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오미(近江)의 시즈카다케(賤ケ岳)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또, 같은 해에는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서 이시야마(石山)의 본원사(本願寺)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오사카성(大坂城)을 축성하였다.
오사카성의 현재 모습
이어서 히데요시는 전국 제패를 위해 각 지역으로 진격해 1584년에는 고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및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 노부나가의 차남)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전황이 고착 상태에 빠져 결국은 상호간의 화목으로 결착을 보았다. 이때부터 히데요시는 동국(東國)에 대한 군사적 정벌이라는 방침에서 전환하여 조정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지배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1585년, 조정으로부터 관백(關白)이라는 직위를 수여받고 다음 해에는 도요토미(豊臣)성을 부여받았는데,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고 하여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의 상호간 전쟁을 금지하는 총무사령(惣無事令, 全國의 평화)을 실시하였다. 이것에 의해 백성에서부터 대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은 전투와 사적인 전쟁이 금지되었고, 이른바 전국 시대(戰國時代)도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풍신평화령(豊臣平和令)이라고도 한다.
통일 정책 중에서 후세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 중에는 검지(檢地)와 도수령(刀狩令)이 있다. 검지에서는 토지 면적의 단위를 통일하여 촌락 단위로 경작지와 가옥을 측량하고, 생산량에 의한 등급을 정하여 연공(年功)과 노역을 분담하게 하였다. 이전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가 정리되어 근세적인 지행 제도(知行制度)가 확립되었고, 농민 지배와 조세 확보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이 검지 정책을 태합검지(太閤檢地)라고도 부른다.
도수령은 1588년에 전국적으로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兵農) 신분의 구별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봉기를 방지하여 검지의 실시를 용이하게 하려고 시행한 것이다. 1591년에는 인귀령(人歸令)이라는 일종의 신분 통제책을 실시하여 무사가 정인(町人)이나 농민이 되고, 농민이 상업을 운영하는 등의 신분 이동을 강력히 통제하였다. 이리하여 병농 분리(兵農分離)가 완성됨과 동시에 에도 시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제도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18.일본혼슈.동경.오나교(1997~2018) <여행지> > 3.교토.나라.아라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토 헤이안신궁 (0) | 2010.07.06 |
---|---|
교토 귀무덤 (0) | 2010.07.06 |
기요미즈데라 가는길 (0) | 2010.07.06 |
교토 청수사 풍경 (0) | 2010.07.01 |
교토역 야경 (0) | 2010.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