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한일관계사 연구 (독서)/6.한일관계신간

譯註 續日本紀(역주 속일본기) (상) (2022)

동방박사님 2023. 4. 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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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8세기 일본고대사의 풍부한 사료를 담은 정사(正史) 『續日本紀』의 완역본!

『속일본기』는 일본고대의 6개의 국사(國史) 중 『일본서기』에 이은 두 번째 칙찬 사서로, 697년부터 791년에 이르는 95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년의 결락도 없이 연원일 간지순으로 편찬되어 사료의 조밀도가 매우 높은 편년체 사서이다. 이 시대는 다이호(大寶) 율령의 제정으로 율령법에 기초한 국가 운용이 충실히 시행되고 있었고, 본격적인 문서행정으로 수많은 공문서가 산출되었다. 『속일본기』의 편찬 자료는 각 행정관청에 소장되어 있는 문서군을 기초로 삼았으므로, 그만큼 생생한 현장의 사건, 소식들을 담은 사실적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당대의 일본국가의 운용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율령국가의 구조, 실태를 이해하는 데 기본사료이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근간으로 하여 개별적 인민 파악을 위한 호적과 계장, 구분전, 조용조의 수취체제, 신분제로서의 양천제, 군단병사제 등이 성립되어 기능하고 있었다. 여기에 천황의 조서, 칙지를 비롯하여 중앙의 태정관부, 지방국사의 상주문 등 중앙과 지방의 문서전달체계는 중앙집권화된 율령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속일본기』는 환무천황 연력 16년(797)에 전 40권이 완성되어 진상되었다. 재임중인 천황의 치세를 사서에 기록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지만, 왕조교체가 없던 천황가의 역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반발이나 위화감없이 추진되었다고 보인다. 『속일본기』 대표편자인 스가노 마미치(菅野眞道)는 환무천황의 편찬이념을 잘 받들어 찬술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환무천황의 생모인 다카노 니이카사(高野新笠)와 같은 백제계 이주민의 후예였다. 환무 자신은 모계의 출자를 강하게 의식하였다. 그 결과 환무조에서 백제왕씨를 비롯한 백제계 씨족들이 등용되고 우대받았으며 백제계 씨족에 대한 기록도 상대적으로 많아 편찬자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차

『역주 속일본기』 상

서문
범례
해제 『속일본기』 편찬과정과 이념적 성격
관위관제표
『속일본기』 권제1
『속일본기』 권제2
『속일본기』 권제3
『속일본기』 권제4
『속일본기』 권제5
『속일본기』 권제6
『속일본기』 권제7
『속일본기』 권제8
『속일본기』 권제9
『속일본기』 권제10
『속일본기』 권제11
『속일본기』 권제12
『속일본기』 권제13
『속일본기』 권제14
 

저자 소개

저 : 연민수
 
동국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九州大學 대학원 일본사학과 수사?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전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 논저|『일본고대국가와 도래계 씨족』(학연문화사, 2021) 『고대일본의 대한인식과 교류』(역사공간, 2014) 『고대한일관계사』(도서출판혜안, 1998) 『고대한일교류사』(도서출판혜안, 2003) 『일본역사』(보고사, 1998) 『역주일본서기』 1~3(공역...

출판사 리뷰

『속일본기』의 핵심 사상은 천황주의이다. 이 이념은 이미 『일본서기』가 편찬될 때 확립되어 『속일본기』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율령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천황이라는 절대인격이 그 정점에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천황가라는 혈통의 절대성, 신성성은 기타 씨족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천황은 율령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듯이 법적 규제를 받지 않는 초법적인 존재였고, 관인의 임면권(任免權), 사성(賜姓) 정책을 통해 관료사회를 지배해 나갔다. 신격화된 천황의 통치는 천명에 의해 좌우되고 덕치에 의해 유지된다는 논리에 뒷받침되었다. 따라서 상서와 재이가 교차하고, 자연재해나 사회적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은 천황의 부덕으로 받아들이고 하늘이 내린 징벌이라는 사고가 생겨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휼, 사면 등의 조치가 내려지고, 신불(神佛)에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 거행되었다. 문화사적으로는 국가불교로서의 종교문화 및 교단의 실태, 승려의 활동, 국분사의 총본산인 동대사의 창건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일본고대인의 전통신앙인 신도, 신라와 발해, 당과의 교류를 통한 국제성이 풍부한 나라(奈良) 문화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일본국가의 권력구조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5위 이상 관인층이 세습적 특권을 갖고 권력을 공유해 나갔다. 음서제에 의한 관인층의 특권적 족벌세력의 재생산은 이전 호족연합정권 시대의 사지사민제(私地私民制)의 산물이지만, 율령시대에는 제도화된 특권이었다. 황위계승의 문제는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에 직결되어 있어 이를 둘러싼 음모와 암투가 전개되었다. 누가 황후가 되고 어느 씨족 출신의 후궁이 낳은 황자가 천황이 되느냐에 따라 권력의 핵심부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일본역사에서 이 시대에 특히 여성 천황의 즉위가 두드러졌다. 8명의 천황 중에서 4명이 천황의 모친, 딸이 즉위한 데서 보이듯 이는 적통 남계의 부재가 낳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여성 천황의 즉위와 더불어 천황 재위시에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이것이 관례화되어 가는 권력의 이중적 구조도 『속일본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아울러 『속일본기』의 사료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대외인식이다. 천황제 율령국가는 당(唐)의 제국적 천하의식, 정치체제를 모방한 중화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에 조공하면서 독자 연호를 제정하고 천황호를 사용하였으며, 신라와 발해에 대해서는 일본우위의 번국관을 고수하였다. 신라에 대한 번국관의 근거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라는 전설의 세계로서 이것으로 복속과 조공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신공황후 전설은 7세기 후반 백강전투 이후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기에 생겨난 인식이고, 신라에 대한 대항의식의 발로이다. 발해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백히 하면서 고구려 멸망기의 인식에 기반을 둔 대외관이다. 특히 외교의례의 장에서 이를 실현하려고 했고 천황주재의 신년하례의식에 이들 사절단을 참여시켜 천황의 권위를 대내적으로 연출하였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대외관이었고, 당연히 외교적 마찰을 일으켜 갈등을 유발시켰다. 실질을 동반하지 않은 이러한 일본우월적 대외인식은 결국 신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고 신라정토론으로 전화되지만, 이것은 실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신라응징이라는 내부적 성토의 장으로 변질되어 내부의 권력집중을 지향하면서 일본적 중화의식을 만족시키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일본고대사에서 8세기만큼 사료가 풍부한 시기도 없다. 『속일본기』라는 정사를 근간으로 하여 이 사서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호적, 계장, 정세장, 사경소 문서 등을 담은 정창원(正倉院)문서, 1천여 개의 율령 조문, 수십만 점에 달하는 목간이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의 기록물은 일본고대 천황제 율령국가의 연구를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항상 사료에 목말라 있는 한국고대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이들 일본 사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속일본기』에 나오는 수많은 대외교류 기사, 한국계 인명, 성씨 등은 산일된 한국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율령국가의 운용 실태는 동 시대의 신라사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