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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람’이고 ‘시민’이라는 건, 그가 곧 ‘노동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노동자’라는 건 (성실한), (효율적인), (민첩한), (건강한), (규율을 따르는), (젊은) 근로자라는 의미다. 이 책은 누구나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정상) 노동자’란 위치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동자성’에서 미끄러졌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열정적이고 자기관리에 능통한 청년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정숙한 현모가 될 수 없는 여자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출 수 없는 사람들, 더는 젊음을 흉내 낼 수 없는 사람들, 게으름뱅이, 낙오자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비추어 본다. ‘노동자’는 어떻게 ‘사람’의 자격이 되었을까? 노동할 수 있는 (생산적인) 몸·정신·생활이란 무엇일까? ‘(정상) 노동자’ 각본에 어긋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노동자’가 될 자격을 박탈했거나 ‘노동자 되기’를 포기한 이들의 존재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사회에서 이 책은 이제껏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노동의 자격’을 바라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가? 노동자란 누구이며 세상은 왜 그것을 규정하는가?
목차
들어가며
1. 생산적으로 살아라?
: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
#성실한 #나태한
#생산적인 #쓸모없는
#열정적인 #의지박약한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
#숭고한 #얕보이는
#완성된 #결함 있는
#규범적인 #난잡한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
#강인한 #나약한
#안정적인 #불안정한
#무난한 #별난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
#젊은 #나이 든
#건강한 #골골대는
#독립적인 #짐스러운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
#민첩한 #둔한
#지적인 #멍청한
#절제력 있는 #무절제한
6. 군대보다 편하니까
: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의 첫 직장
# 남자다운 #남자답지 못한
# 건장한 #결격사유가 있는
# 성숙한 #미성숙한
1. 생산적으로 살아라?
: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
#성실한 #나태한
#생산적인 #쓸모없는
#열정적인 #의지박약한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
#숭고한 #얕보이는
#완성된 #결함 있는
#규범적인 #난잡한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
#강인한 #나약한
#안정적인 #불안정한
#무난한 #별난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
#젊은 #나이 든
#건강한 #골골대는
#독립적인 #짐스러운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
#민첩한 #둔한
#지적인 #멍청한
#절제력 있는 #무절제한
6. 군대보다 편하니까
: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의 첫 직장
# 남자다운 #남자답지 못한
# 건장한 #결격사유가 있는
# 성숙한 #미성숙한
책 속으로
인종이 달라서, 체형이 달라서, 신체 기능이 달라서. 다름이 낙인으로 이어졌다. 결혼이나 육아 형태도 영향을 미쳤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이혼을 해서, 자녀가 없어서, 자녀를 혼자 키워서, 국적이나 외양이 다른 자녀를 낳아서 구설에 올랐다. 지방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하지 않아도, 이직을 자주 해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사회적으로 더럽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서, 더울 때 더운 데서 일을 해서, 나이가 많은데도 일을 해서, 어린 나이에 일을 해서 낙인이 찍혔다. 이 많은 특성과 정체성, 경험과 직업군을 피해 간 뒤에야 우리는 한 치 오점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p. 7, 들어가며.」중에서
낙인의 기능은 비정상을 추려내는 데에만 있지 않다. 낙인은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모든 이들을 채찍질한다. 채찍질로 다그쳐 일깨우는 것은 몹시도 정상적이고 완벽한, 신인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이다. 신인류를 디자인한 사회는 ‘정상인 되기’를 강제하는 수많은 장치를 가졌다. ‘정상인’으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디자인된 진입로와 건강한 노동자로 일터에 진입하기 위해 밟아나가야 할 길은 거의 흡사한데, 그러므로 ‘건강한 노동자’가 태어나는 곳에서 ‘정상 시민’도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p. 11, 들어가며.」중에서
‘돈벌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삶을 이야기할 때 리무진을 끌고 롤렉스 시계를 차는 모습만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행복이라 말한다면 생각 없거나 속물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좋은 삶을 상상할 때는 ‘공동체’(국가 단위이건 마을 단위이건)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일자리 문제에서는 ‘공동체’라는 글자를 지우는 것이 당연해졌을까.
---「pp. 29~30, 1. 생산적으로 살아라?: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중에서
“평소에 자신을 성실하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효율적으로 살고 있다거나.”
그는 말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해요.”
윤재는 자신의 성실을 재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질문을 그는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런 판단을 할 필요가 없도록 “지금의 삶을 조직했다”고 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 앞에선 기존 세상의 가치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렇다. 성실에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다. 하은이 말한 “늘 쫓기는 듯한 그 기분”, 자기계발서는 그것을 동력이라 부르며 포장하지만, 실은 불안이다.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 윤재는 그 먹이를 주지 않으려 버틴다. 그를 알고난 지 한참 후에서야, 나는 그가 누구보다 주체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pp. 59~60, 1. 생산적으로 살아라?: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중에서
‘진득하게 일할 줄 모르니 애도 생각 없이 낳지.’ 지인들 중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 의중을 연지가 모를 리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퇴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해명하기도 했지만, 반복되자 해명할 기운을 잃었다. 연지의 퇴사 이유는 보통 이러했다. “직장생활이 쉽지 않은 게, 솔직히 유부남들이 되게 껄떡대는 거예요. 혼자 애 키운다 그러면 쉽게 보는 거죠. 회식하면 이혼했냐 어쨌냐 질문받게 되고, 혼자 낳았다 그러면 그때부턴 더. 그러면 제가 제풀에 회사를 그만두고. 그런 문제가 터지면 결국은 내 잘못으로 보일 거잖아요. ‘네가 꼬리를 친 거다’, ‘네가 문제가 있으니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까 봐. 말도 못 하고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다시 ‘너는 왜 정착을 못 하냐’ 이런 소리를 듣는 거고. 사람이 서서히 지치는 거예요. 나는 늘 투쟁하며 살아가는데.”
---「p. 83,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중에서
“여기 혼자 애 키우는 엄마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절박해요.”
여성 직원이 많은 사업장에 취재를 가면 한부모 가구주를 소개해주려 하거나 그들의 사례를 힘주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로 생계의 절박함을 들고, 그 절박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 부양자인 남성을 대신하는’ 여성 가장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렇게 소환되는 것이 ‘남편 없는 여성’이다. 이들은 절박함의 상징이 된다. 사업주는 혼자 애를 키우는 여성을 부당한 요구에도 저항할 수 없는 약자로 여겨 초과 노동을 시키거나 성희롱을 남발한다. 그런데 이에 저항하는 노동조합마저 혼자 애를 키우는 여성의 절박함을 내세워 임금 인상 요구의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내려 할 때가 있다. 이혼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슬픈’ 사연이 만들어진다고? 혼자 가정을 꾸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단지 한 사업장의 낮은 임금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pp. 116~117,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중에서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고 이야기해도, 이 말은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힘을 잃는다. 불산을 그렇게 가까이 두고도, 철가루를 그렇게 먹으면서도, 과로를 그렇게 하면서도 일터에서 일하다 병든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다. 나와 같은 일을 했는데 ‘멀쩡한’ 동료들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살아가며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데 나와 달리 불안과 우울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비교하다 보면, 이 아픔은 나의 책임이 된다.
---「p. 134,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중에서
“실제로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는데, 약을 먹기 전과 먹은 이후에 제가 받는 평가가 크게 다르진 않아요. 확실히 정신이 깨어 있는 듯한 느낌은 있는데, 그것으로 삶이 나아졌다고 말할 순 없고. 약 증량을 하면 (부작용 등으로 인해) 몸 상태가 힘들어지고. 그렇지만 회사에서 효율이 높아진다면 감수하는 건데, 이게 내 간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효율인가? 회사를 위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싶고.” 한 사람이 자신의 진단명을 듣고 효율에 대해 반성하게 하는 사회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p. 173,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중에서
삶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나이 듦을 혐오하는 태도는 ‘노인이라는 거울’을 유심히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내가 만난 요양보호사들은 자신이 돌보는 사람을 자신과 무관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두려움도 느끼는 것이었다. 돌봄을 받는 저 자리에 자신이 가 있을 날이 온다.
---「p. 210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중에서
현재, 비정규직이자 노인 노동자인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이것이다. 병들지 않는 것, 아프지 않는 것, 다치지 않는 것. 체력을 키운다, 병원을 자주 찾는다, 티브이 건강 방송의 열혈 애청자가 된다 …. 그렇게 건강은 ‘지켜내는’ 것이 된다. 건강 관리가 개인의 노력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 믿을수록, 병들고 약한 몸은 목표에 어긋난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병든 어르신에게 가장 많은 마음을 내준 이가 노쇠한 몸을 가장 혐오하는 이로 변하게 된다.
---「p. 202,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중에서
‘못된’ 면접의 일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일화가 있다. “운동 같은 거 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는 면접자에게 면접관이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면접장 밖에서는 갑질로 명명되지만, 사람을 점수 매기는 면접장 안에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운동은 선택이 아니다. ‘피트니스는 도덕적 의무’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몸은 신입사원도 될 수 없지만, 관리자가 될 가능성도 적다.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pp. 226~227,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중에서
이 책을 통틀어 이번 장이 인터뷰이를 섭외하기 가장 어려웠다. 당신이 과체중이기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섭외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부끄럽게 여길까 봐서가 아니다. 그가 지금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몸은 한 번도 ‘결과’였던 적이 없다.”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몸은 앞으로 만들어갈 더 ‘합당하고 적합한’ 몸이었다. 머지않아 변할 것이므로 지금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몸이 부정적인 행동과 버릇의 결과라면,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지 인정해선 안 되었다.
---「pp. 231~232,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중에서
군대를 둘러싼 어떤 경계가 눈에 들어왔다. ‘군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군대’라는 단어도 통용되지 않지만, 병역의 의무가 수행되는 영역이었다. 이 경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방위병, 공익요원이라는 명칭을 거쳐 요즘은 사회복무요원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내 눈길을 끈 이유는 경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렇듯 이들도 ‘정상성’을 완성할 퍼즐 한 조각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p. 248, 6. 군대보다 편하니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의 첫 직장」중에서
‘우대’라는 말은 당사자들에게마저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한다. 군필자 스스로가 ‘지금 노예 뽑냐’는 말을 하게 되는 동시에 스스로 경쟁력을 가진 인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 ‘경쟁력’이 2년 가까이 통제된 곳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규칙과 규율을 몸에 익히고, 불합리한 지시에 복종하는 경험을 반복한 끝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군필자도 알고 사장도 안다. 이것을 알기에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고 말하는 사장도 자기 아들이 성년이 될 미래에는 군 입대가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길 바란다. 그러나 미래가 아닌 현실에선 ‘군인 노예’가 ‘편의점 노예’가 되고, ‘그 외’ 알바 지원자들은 절망한다. ‘편의점 사장은 왜 군필자를 선호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니 군대는 다녀와야 한다는 말로 맺음을 한 어느 인터넷 게시물에 누군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미필자는 군대 가면 되지만, 면제자는요?’ 그 말에 ‘이민을 가라’는 답글이 달렸다.
---「p. 7, 들어가며.」중에서
낙인의 기능은 비정상을 추려내는 데에만 있지 않다. 낙인은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모든 이들을 채찍질한다. 채찍질로 다그쳐 일깨우는 것은 몹시도 정상적이고 완벽한, 신인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이다. 신인류를 디자인한 사회는 ‘정상인 되기’를 강제하는 수많은 장치를 가졌다. ‘정상인’으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디자인된 진입로와 건강한 노동자로 일터에 진입하기 위해 밟아나가야 할 길은 거의 흡사한데, 그러므로 ‘건강한 노동자’가 태어나는 곳에서 ‘정상 시민’도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p. 11, 들어가며.」중에서
‘돈벌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삶을 이야기할 때 리무진을 끌고 롤렉스 시계를 차는 모습만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행복이라 말한다면 생각 없거나 속물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좋은 삶을 상상할 때는 ‘공동체’(국가 단위이건 마을 단위이건)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일자리 문제에서는 ‘공동체’라는 글자를 지우는 것이 당연해졌을까.
---「pp. 29~30, 1. 생산적으로 살아라?: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중에서
“평소에 자신을 성실하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효율적으로 살고 있다거나.”
그는 말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해요.”
윤재는 자신의 성실을 재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질문을 그는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런 판단을 할 필요가 없도록 “지금의 삶을 조직했다”고 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 앞에선 기존 세상의 가치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렇다. 성실에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다. 하은이 말한 “늘 쫓기는 듯한 그 기분”, 자기계발서는 그것을 동력이라 부르며 포장하지만, 실은 불안이다.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 윤재는 그 먹이를 주지 않으려 버틴다. 그를 알고난 지 한참 후에서야, 나는 그가 누구보다 주체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pp. 59~60, 1. 생산적으로 살아라?: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중에서
‘진득하게 일할 줄 모르니 애도 생각 없이 낳지.’ 지인들 중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 의중을 연지가 모를 리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퇴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해명하기도 했지만, 반복되자 해명할 기운을 잃었다. 연지의 퇴사 이유는 보통 이러했다. “직장생활이 쉽지 않은 게, 솔직히 유부남들이 되게 껄떡대는 거예요. 혼자 애 키운다 그러면 쉽게 보는 거죠. 회식하면 이혼했냐 어쨌냐 질문받게 되고, 혼자 낳았다 그러면 그때부턴 더. 그러면 제가 제풀에 회사를 그만두고. 그런 문제가 터지면 결국은 내 잘못으로 보일 거잖아요. ‘네가 꼬리를 친 거다’, ‘네가 문제가 있으니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까 봐. 말도 못 하고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다시 ‘너는 왜 정착을 못 하냐’ 이런 소리를 듣는 거고. 사람이 서서히 지치는 거예요. 나는 늘 투쟁하며 살아가는데.”
---「p. 83,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중에서
“여기 혼자 애 키우는 엄마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절박해요.”
여성 직원이 많은 사업장에 취재를 가면 한부모 가구주를 소개해주려 하거나 그들의 사례를 힘주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로 생계의 절박함을 들고, 그 절박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 부양자인 남성을 대신하는’ 여성 가장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렇게 소환되는 것이 ‘남편 없는 여성’이다. 이들은 절박함의 상징이 된다. 사업주는 혼자 애를 키우는 여성을 부당한 요구에도 저항할 수 없는 약자로 여겨 초과 노동을 시키거나 성희롱을 남발한다. 그런데 이에 저항하는 노동조합마저 혼자 애를 키우는 여성의 절박함을 내세워 임금 인상 요구의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내려 할 때가 있다. 이혼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슬픈’ 사연이 만들어진다고? 혼자 가정을 꾸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단지 한 사업장의 낮은 임금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pp. 116~117, 2.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 혼자 양육하는 딸들의 노동」중에서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고 이야기해도, 이 말은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힘을 잃는다. 불산을 그렇게 가까이 두고도, 철가루를 그렇게 먹으면서도, 과로를 그렇게 하면서도 일터에서 일하다 병든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다. 나와 같은 일을 했는데 ‘멀쩡한’ 동료들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살아가며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데 나와 달리 불안과 우울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비교하다 보면, 이 아픔은 나의 책임이 된다.
---「p. 134,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중에서
“실제로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는데, 약을 먹기 전과 먹은 이후에 제가 받는 평가가 크게 다르진 않아요. 확실히 정신이 깨어 있는 듯한 느낌은 있는데, 그것으로 삶이 나아졌다고 말할 순 없고. 약 증량을 하면 (부작용 등으로 인해) 몸 상태가 힘들어지고. 그렇지만 회사에서 효율이 높아진다면 감수하는 건데, 이게 내 간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효율인가? 회사를 위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싶고.” 한 사람이 자신의 진단명을 듣고 효율에 대해 반성하게 하는 사회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p. 173, 3.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의 직장생활」중에서
삶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나이 듦을 혐오하는 태도는 ‘노인이라는 거울’을 유심히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내가 만난 요양보호사들은 자신이 돌보는 사람을 자신과 무관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두려움도 느끼는 것이었다. 돌봄을 받는 저 자리에 자신이 가 있을 날이 온다.
---「p. 210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중에서
현재, 비정규직이자 노인 노동자인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이것이다. 병들지 않는 것, 아프지 않는 것, 다치지 않는 것. 체력을 키운다, 병원을 자주 찾는다, 티브이 건강 방송의 열혈 애청자가 된다 …. 그렇게 건강은 ‘지켜내는’ 것이 된다. 건강 관리가 개인의 노력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 믿을수록, 병들고 약한 몸은 목표에 어긋난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병든 어르신에게 가장 많은 마음을 내준 이가 노쇠한 몸을 가장 혐오하는 이로 변하게 된다.
---「p. 202, 4.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노년 돌봄노동자의 자기관리」중에서
‘못된’ 면접의 일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일화가 있다. “운동 같은 거 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는 면접자에게 면접관이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면접장 밖에서는 갑질로 명명되지만, 사람을 점수 매기는 면접장 안에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운동은 선택이 아니다. ‘피트니스는 도덕적 의무’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몸은 신입사원도 될 수 없지만, 관리자가 될 가능성도 적다.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pp. 226~227,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중에서
이 책을 통틀어 이번 장이 인터뷰이를 섭외하기 가장 어려웠다. 당신이 과체중이기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섭외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부끄럽게 여길까 봐서가 아니다. 그가 지금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몸은 한 번도 ‘결과’였던 적이 없다.”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몸은 앞으로 만들어갈 더 ‘합당하고 적합한’ 몸이었다. 머지않아 변할 것이므로 지금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몸이 부정적인 행동과 버릇의 결과라면,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지 인정해선 안 되었다.
---「pp. 231~232, 5.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 과체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적 활동」중에서
군대를 둘러싼 어떤 경계가 눈에 들어왔다. ‘군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군대’라는 단어도 통용되지 않지만, 병역의 의무가 수행되는 영역이었다. 이 경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방위병, 공익요원이라는 명칭을 거쳐 요즘은 사회복무요원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내 눈길을 끈 이유는 경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렇듯 이들도 ‘정상성’을 완성할 퍼즐 한 조각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p. 248, 6. 군대보다 편하니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의 첫 직장」중에서
‘우대’라는 말은 당사자들에게마저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한다. 군필자 스스로가 ‘지금 노예 뽑냐’는 말을 하게 되는 동시에 스스로 경쟁력을 가진 인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 ‘경쟁력’이 2년 가까이 통제된 곳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규칙과 규율을 몸에 익히고, 불합리한 지시에 복종하는 경험을 반복한 끝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군필자도 알고 사장도 안다. 이것을 알기에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고 말하는 사장도 자기 아들이 성년이 될 미래에는 군 입대가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길 바란다. 그러나 미래가 아닌 현실에선 ‘군인 노예’가 ‘편의점 노예’가 되고, ‘그 외’ 알바 지원자들은 절망한다. ‘편의점 사장은 왜 군필자를 선호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니 군대는 다녀와야 한다는 말로 맺음을 한 어느 인터넷 게시물에 누군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미필자는 군대 가면 되지만, 면제자는요?’ 그 말에 ‘이민을 가라’는 답글이 달렸다.
---「p.250, 6. 군대보다 편하니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의 첫 직장」중에서
출판사 리뷰
모두 일해야 한다지만 아무나 일할 수 없는 사회,
다가설 수 없는 ‘노동의 자격’에 대하여
“그러게 좀 열심히 살지…” 산업재해나 과로사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달린 댓글을 심심치 않게 본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 다치고 사망한 이들에게 ‘열심’이란 잣대를 들이댄다. 다치고 죽은 이들이 행한 ‘열심’과 세간의 ‘열심’은 다르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았다면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졸업 후 변변한 곳에 ‘정식’ 취업을 하지 못할 리 없다고 여긴다.) 이렇듯 누군가의 ‘열심’은 ‘진정한 열심’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열심’을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개인의 탓이 된다.
이 책은 누구나 제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세상, 즉 ‘노동자’가 ‘사람’의 자격이 된 세상,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노동시장에서 소외될 수 없다고 믿는 세상에서 ‘일할 자격’이 진정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것인지를 묻는다. “당신은 젊은가? 몸이 건강한가? 외모가 준수한가? 신체에 손상이 없는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이 없는가? 의지는 강한가? 생활 패턴이 안정적인가? 교우 관계가 원만한가? 최종 학력이 평균 이상인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있는가?” 당신은 이 질문들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 지금의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정상) 노동자’로 살아가는 시간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노동의 시간 전체에서 아주 잠깐일지도 모른다.
일할 자격이 없어 말할 자격도 없던
낙인찍힌 노동자들이 바라보는 일의 세계
‘사람’이라면 ‘노동자’여야 한다는 조건은 너무도 강력해서, 우리는 노동자가 되는 데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이 자격에서 박탈된 이들의 문제는 ‘노동’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책은 ‘성실하지 못한’, ‘생산성 없는’, ‘나태한’, ‘난잡한’, ‘늙은’, ‘불안정한’, ‘골골대는’… 일터에 들어올 자격을 박탈한 ‘낙인찍힌’ 이들의 시선으로 일의 세계를 바라본다. 노동자의 자격을 지배하는 정상 권력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낙인이 정상성의 반대항이었다면, 가치의 위계를 뒤집어보는 시선에서 낙인은 정상성의 거울상이다. ‘열정적임’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정상) 노동자’의 자격이 될수록, ‘의지박약하다’는 낙인은 꼭 그만큼 누군가에게서 일할 자격을 박탈한다. 이 책은 “낙인의 기능은 비정상을 추려내는 데에만 있지 않다”는 것, “규율과 통제를 수락하고, 이윤의 획득을 긍정적 가치로 이해하고, 자신의 몸이 그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됨을 적극적으로 수락하는” 노력을 잠시라도 게을리하는 모든 이들을 채찍질한다는 것, 그리하여 ‘(정상) 노동자’들조차도 사실상 일터의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비춘다.
이 책을 쓰며 “나와 연결된” 일터의 낙인들을 우선하여 떠올려보았다는 저자는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나태한, 의지박약한), ‘혼자 양육하는 비혼모들’(얕보이는, 난잡한),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나약한, 불안정한), ‘노년 돌봄노동자들’(골골대는, 짐스러운), ‘과체중인 사람들’(둔한, 무절제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남자답지 못한, 결격사유가 있는)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낸다. 1장 ‘생산적으로 살아라?’는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를 다룬다. ‘자기관리’를 넘어 스스로를 기업처럼 운용하는 ‘자기 경영적 주체’로 살아가기를 요청받는 시기에 “차곡차곡 스펙을 쌓지 않고, 취업 준비를 유예하고, 취업해도 자꾸 퇴사하고, 사람들이 정식 일자리로 보지 않는 곳에서만 일을 구하는” 청년들이 어떻게 ‘일할 자격’과 ‘스스로를 설명할 자격’을 잃게 되는지(이들에게 사회는 ‘게으름뱅이’, ‘낙오자’ 외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를 살핀다. 동시에 시장의 원리를 내면화한 ‘좋은 일자리’의 조건과 이 질서 안에서만 의미를 획득하는 ‘성실’이라는 가치, ‘성실’과 한 몸이 된 ‘불안’이라는 감정이 일의 세계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살펴본다.
2장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에서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자 노동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절박하기에’ 직장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처지라고 여겨지는 이들은 불안정하고 고된 일자리에 쉽게 고용되고, 그로 인해 일터에서 쉽게 소진되고 쉽게 내쳐진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러게 누가 낳으랬냐’라는 타박의 시선과 ‘모자란 어머니’라는 자책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어려운 이들은 비혼을 말하는 여성들조차 비혼모의 삶의 종착지는 결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미완성’, ‘난잡함’ 등의 낙인을 쓰고 노동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정상)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는 것과 어떻게 포개어지는지를 보게 한다.
3장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에서는 정신질환 증상을 겪으면서도 “매일 같은 곳으로 출근하고, 인사권을 지닌 존재와 한 공간에서 일하며, 평판을 공유하는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직장인에 주목한다. “버티면 베테랑이 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아무 저항을 받지 않는 “진공 상태”에 머물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남몰래 ‘광인’이 된다. 일터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약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질환이 일의 효율을 방해할까 전전긍긍한다.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의 막막한 의문을 저자는 “‘일터에 나가기 위해’ 약을 먹는 일을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묻는다.
4장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에는 80대 노인을 돌보는 60대 재가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르신’을 “애”라고 칭하며 정해진 방문일이 아닌 날에도 돌봄을 자청하는 이들이 왜 자신의 노동을 ‘일’이 아닌 ‘봉사’로 여기는지, 노인에게 가장 많이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늙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본다. “만 60세 정년을 정해둔 세상에서 만 61세의 노인이 일하지 않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이 사회의 못 미더움과 배제가 돌보는 사람과 의존하는 대상으로,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소비자로 노인과 노인이 만나는 공간에서 관계와 노동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들여다본다.
5장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에서는 과체중인 이들의 공적 활동을 이야기한다. ‘뚱뚱한’ 몸이 ‘자기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날씬함은 그 자체로 능력이 된다. 이 장에서는 ‘체중’이 ‘일할 자격’을 어떻게 가르는지, 일터 내의 입지와 이미지를 어떻게 좌우하며 일하는 이의 능력과 평판에 개입하는지를 알아본다. 동시에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체중을 둘러싼 낙인은 당사자에게도 진지한 문제로 인식되기 어렵다는 점을 함께 짚으며 ‘살아 숨 쉬는 몸’을 바라보는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6장 ‘군대보다 편하니까’에서는 “‘군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군대’라는 단어도 통용되지 않지만 병역의 의무가 수행되는 곳”에서 첫 직장(발령받은 근무지)을 갖게 되는 ‘사회복무요원’들의 노동에 다가간다. 어딘가 아프고 손상되었다는 이유로 4급 판정을 받지만, “건강하지 않은 청년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들은 “꾀병”을 부리며 “꿀이나 빠는” “나약한” 남성이 된다. ‘취약한’ 이들이 소환되는 ‘더 취약한’ 일터의 현실 또한 함께 짚으며 거대한 노동시장의 하부를 떠받치는 무상노동과 강제노동의 세계를 살펴본다.
자격이 아닌 삶으로서 일터에 서기
일터에서 부당함을 겪은 사람들을 긴 시간 취재해온 저자는 그간 “직장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만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장 문턱”을 넘을 수 없거나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노동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다른 노동”의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성실과 효율”이라는 이 사회의 노동 문법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저자 희정의 솔직하고 섬세한 탐구로 쓰였다. 또한, 자신을 ‘(정상) 노동자’로 호명하지 않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며 일하려는 인터뷰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용기로 쓰였다.
누구나 노동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일할 자격’은 사실 ‘일할 능력’으로 바꾸어 불러야 적절할 만큼 끝없는 노력을 요한다. 이를 짚으며 이 책은 자격이 박탈된 ‘비정상’이기에 누군가가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문법에 소외가 필요하기에 누군가가 ‘비정상’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이 보여주듯 “일의 세계가 차별을 통하지 않고는 굴러가지 못하”는 세계라면, ‘일할 자격’을 박탈한 이들은 일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의 세계를 굴리는 문법을 “가장 먼저 겪는” 이들이자, 우리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법’을 떼어내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일터의 낙인을 탐구하는 과정은 사회가 각각 ‘청년’의, ‘어머니’의, ‘노인’의, ‘남성’의, ‘신체와 정신’의 정상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과 포개어진다. 이렇듯 낙인과 정상성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낙인과 정상성으로 굴러가는 노동의 세계 역시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세계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좋은 노동자일까?’라고 스스로의 일할 자격을 검열하던 것에서 벗어나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일터의 정상성은 무엇을 향해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자격을 말하지 않고 일터에 설 수 있을까?
다가설 수 없는 ‘노동의 자격’에 대하여
“그러게 좀 열심히 살지…” 산업재해나 과로사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달린 댓글을 심심치 않게 본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 다치고 사망한 이들에게 ‘열심’이란 잣대를 들이댄다. 다치고 죽은 이들이 행한 ‘열심’과 세간의 ‘열심’은 다르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았다면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졸업 후 변변한 곳에 ‘정식’ 취업을 하지 못할 리 없다고 여긴다.) 이렇듯 누군가의 ‘열심’은 ‘진정한 열심’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열심’을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개인의 탓이 된다.
이 책은 누구나 제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세상, 즉 ‘노동자’가 ‘사람’의 자격이 된 세상,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노동시장에서 소외될 수 없다고 믿는 세상에서 ‘일할 자격’이 진정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것인지를 묻는다. “당신은 젊은가? 몸이 건강한가? 외모가 준수한가? 신체에 손상이 없는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이 없는가? 의지는 강한가? 생활 패턴이 안정적인가? 교우 관계가 원만한가? 최종 학력이 평균 이상인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있는가?” 당신은 이 질문들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 지금의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정상) 노동자’로 살아가는 시간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노동의 시간 전체에서 아주 잠깐일지도 모른다.
일할 자격이 없어 말할 자격도 없던
낙인찍힌 노동자들이 바라보는 일의 세계
‘사람’이라면 ‘노동자’여야 한다는 조건은 너무도 강력해서, 우리는 노동자가 되는 데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이 자격에서 박탈된 이들의 문제는 ‘노동’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책은 ‘성실하지 못한’, ‘생산성 없는’, ‘나태한’, ‘난잡한’, ‘늙은’, ‘불안정한’, ‘골골대는’… 일터에 들어올 자격을 박탈한 ‘낙인찍힌’ 이들의 시선으로 일의 세계를 바라본다. 노동자의 자격을 지배하는 정상 권력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낙인이 정상성의 반대항이었다면, 가치의 위계를 뒤집어보는 시선에서 낙인은 정상성의 거울상이다. ‘열정적임’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정상) 노동자’의 자격이 될수록, ‘의지박약하다’는 낙인은 꼭 그만큼 누군가에게서 일할 자격을 박탈한다. 이 책은 “낙인의 기능은 비정상을 추려내는 데에만 있지 않다”는 것, “규율과 통제를 수락하고, 이윤의 획득을 긍정적 가치로 이해하고, 자신의 몸이 그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됨을 적극적으로 수락하는” 노력을 잠시라도 게을리하는 모든 이들을 채찍질한다는 것, 그리하여 ‘(정상) 노동자’들조차도 사실상 일터의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비춘다.
이 책을 쓰며 “나와 연결된” 일터의 낙인들을 우선하여 떠올려보았다는 저자는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나태한, 의지박약한), ‘혼자 양육하는 비혼모들’(얕보이는, 난잡한),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나약한, 불안정한), ‘노년 돌봄노동자들’(골골대는, 짐스러운), ‘과체중인 사람들’(둔한, 무절제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남자답지 못한, 결격사유가 있는)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낸다. 1장 ‘생산적으로 살아라?’는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를 다룬다. ‘자기관리’를 넘어 스스로를 기업처럼 운용하는 ‘자기 경영적 주체’로 살아가기를 요청받는 시기에 “차곡차곡 스펙을 쌓지 않고, 취업 준비를 유예하고, 취업해도 자꾸 퇴사하고, 사람들이 정식 일자리로 보지 않는 곳에서만 일을 구하는” 청년들이 어떻게 ‘일할 자격’과 ‘스스로를 설명할 자격’을 잃게 되는지(이들에게 사회는 ‘게으름뱅이’, ‘낙오자’ 외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를 살핀다. 동시에 시장의 원리를 내면화한 ‘좋은 일자리’의 조건과 이 질서 안에서만 의미를 획득하는 ‘성실’이라는 가치, ‘성실’과 한 몸이 된 ‘불안’이라는 감정이 일의 세계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살펴본다.
2장 ‘덮어놓고 낳든, 낳지 않든’에서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자 노동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절박하기에’ 직장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처지라고 여겨지는 이들은 불안정하고 고된 일자리에 쉽게 고용되고, 그로 인해 일터에서 쉽게 소진되고 쉽게 내쳐진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러게 누가 낳으랬냐’라는 타박의 시선과 ‘모자란 어머니’라는 자책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어려운 이들은 비혼을 말하는 여성들조차 비혼모의 삶의 종착지는 결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미완성’, ‘난잡함’ 등의 낙인을 쓰고 노동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정상)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는 것과 어떻게 포개어지는지를 보게 한다.
3장 ‘약봉지를 흔들며 걸어간 곳, 직장’에서는 정신질환 증상을 겪으면서도 “매일 같은 곳으로 출근하고, 인사권을 지닌 존재와 한 공간에서 일하며, 평판을 공유하는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직장인에 주목한다. “버티면 베테랑이 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아무 저항을 받지 않는 “진공 상태”에 머물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남몰래 ‘광인’이 된다. 일터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약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질환이 일의 효율을 방해할까 전전긍긍한다.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의 막막한 의문을 저자는 “‘일터에 나가기 위해’ 약을 먹는 일을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묻는다.
4장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에는 80대 노인을 돌보는 60대 재가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르신’을 “애”라고 칭하며 정해진 방문일이 아닌 날에도 돌봄을 자청하는 이들이 왜 자신의 노동을 ‘일’이 아닌 ‘봉사’로 여기는지, 노인에게 가장 많이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늙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본다. “만 60세 정년을 정해둔 세상에서 만 61세의 노인이 일하지 않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이 사회의 못 미더움과 배제가 돌보는 사람과 의존하는 대상으로,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소비자로 노인과 노인이 만나는 공간에서 관계와 노동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들여다본다.
5장 ‘뚱뚱해서 게으르다고 여길까 봐’에서는 과체중인 이들의 공적 활동을 이야기한다. ‘뚱뚱한’ 몸이 ‘자기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날씬함은 그 자체로 능력이 된다. 이 장에서는 ‘체중’이 ‘일할 자격’을 어떻게 가르는지, 일터 내의 입지와 이미지를 어떻게 좌우하며 일하는 이의 능력과 평판에 개입하는지를 알아본다. 동시에 “지금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체중을 둘러싼 낙인은 당사자에게도 진지한 문제로 인식되기 어렵다는 점을 함께 짚으며 ‘살아 숨 쉬는 몸’을 바라보는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6장 ‘군대보다 편하니까’에서는 “‘군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군대’라는 단어도 통용되지 않지만 병역의 의무가 수행되는 곳”에서 첫 직장(발령받은 근무지)을 갖게 되는 ‘사회복무요원’들의 노동에 다가간다. 어딘가 아프고 손상되었다는 이유로 4급 판정을 받지만, “건강하지 않은 청년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들은 “꾀병”을 부리며 “꿀이나 빠는” “나약한” 남성이 된다. ‘취약한’ 이들이 소환되는 ‘더 취약한’ 일터의 현실 또한 함께 짚으며 거대한 노동시장의 하부를 떠받치는 무상노동과 강제노동의 세계를 살펴본다.
자격이 아닌 삶으로서 일터에 서기
일터에서 부당함을 겪은 사람들을 긴 시간 취재해온 저자는 그간 “직장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만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장 문턱”을 넘을 수 없거나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노동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다른 노동”의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성실과 효율”이라는 이 사회의 노동 문법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저자 희정의 솔직하고 섬세한 탐구로 쓰였다. 또한, 자신을 ‘(정상) 노동자’로 호명하지 않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며 일하려는 인터뷰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용기로 쓰였다.
누구나 노동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일할 자격’은 사실 ‘일할 능력’으로 바꾸어 불러야 적절할 만큼 끝없는 노력을 요한다. 이를 짚으며 이 책은 자격이 박탈된 ‘비정상’이기에 누군가가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문법에 소외가 필요하기에 누군가가 ‘비정상’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이 보여주듯 “일의 세계가 차별을 통하지 않고는 굴러가지 못하”는 세계라면, ‘일할 자격’을 박탈한 이들은 일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의 세계를 굴리는 문법을 “가장 먼저 겪는” 이들이자, 우리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법’을 떼어내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일터의 낙인을 탐구하는 과정은 사회가 각각 ‘청년’의, ‘어머니’의, ‘노인’의, ‘남성’의, ‘신체와 정신’의 정상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과 포개어진다. 이렇듯 낙인과 정상성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낙인과 정상성으로 굴러가는 노동의 세계 역시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세계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좋은 노동자일까?’라고 스스로의 일할 자격을 검열하던 것에서 벗어나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일터의 정상성은 무엇을 향해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자격을 말하지 않고 일터에 설 수 있을까?
추천평
누군가는 노동의 대가를 따져보기 전에 노동자로서의 자격부터 검증당한다. 당신은 ‘정상적인’ 사람인가. 당신은 ‘우리’의 동료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노동시장은 젊고 건강한 노동자를 원하고, 젊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노동자의 자격조차 갖추기 어려워 더 큰 경제적 곤궁을 겪는다. 그리고 이 경제적 취약함이 다시 건강을 위협한다. 이렇듯 노동자의 자격을 지배하는 정상 권력은 너무도 정상적이라 드러나지 않는 인권 문제다. 이 책에 담긴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시장이 어떻게 차별을 정상화하며 굴러가는지 들어보길 바란다.
-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말을 부수는 말』)
-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말을 부수는 말』)
‘우리는 좋은 노동자인가요?’, ‘나는 비정상적인가요?’라는 질문은 이 책에서 무력한 말이 된다. 작가가 마주한 이야기들은 불성실하고 절박하지 않은, 한 사람의 몫을 다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개인들의 서사가 아니라, 강박적으로 사람들에게 ‘정상 인간’, ‘좋은 노동자’ 되기를 강제하고 규율화하는 일터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희정 작가가 그러했듯이, 독자들 또한 자신의 삶과 일터에서 이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연결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일터에 서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을 타인의 노동과 만나며 삶을 영위할 존재로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 천주희 (문화 연구자,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 천주희 (문화 연구자,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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