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정치적 올바름’은 항상 올바른가?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을 가리킨다. 이 사회적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무대로 만들어 “누가 더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인가?”를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도덕과 정의의 화신인 양 여길 수 있게끔 그런 담론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된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과 정의의 문제가 될수록 사람들이 그 쟁점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의는 얼른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과장되면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니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이 위험하듯이 자기과시를 위한 PC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적 순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잘 맞는 진보주의자들과 수다를 떠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도덕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이 15달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20달러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고,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더 경쟁 집단의 견해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데에 유능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준만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PC를 둘러싼 찬반 논쟁과 논란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양쪽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소통과 화해는 인기가 없는 주제지만, 그렇다고 모두 양극화 선동가들에게 놀아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함으로써 이 논쟁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을 가리킨다. 이 사회적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무대로 만들어 “누가 더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인가?”를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도덕과 정의의 화신인 양 여길 수 있게끔 그런 담론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된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과 정의의 문제가 될수록 사람들이 그 쟁점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의는 얼른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과장되면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니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이 위험하듯이 자기과시를 위한 PC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적 순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잘 맞는 진보주의자들과 수다를 떠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도덕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이 15달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20달러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고,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더 경쟁 집단의 견해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데에 유능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준만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PC를 둘러싼 찬반 논쟁과 논란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양쪽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소통과 화해는 인기가 없는 주제지만, 그렇다고 모두 양극화 선동가들에게 놀아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함으로써 이 논쟁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목차
머리말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 4
제1장 ‘정치적 올바름’의 소통을 위하여
‘정치적 올바름’이 촉발한 ‘문화 전쟁’ · 17│PC는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 21│PC의 연구 주제와 언론 보도 주제의 다양성 · 25│‘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PC의 3대 쟁점 · 28│자유 :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 · 32│“자유는 건전한 절제를 전제로 한다” · 37│위선 :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 · 40│고소득·고학력 좌파가 주도하는 PC · 45│계급 :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 · 48│PC를 통제하는 브레이크는 여론이다 · 52│‘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PC · 56
제2장 왜 싸이의 ‘흠뻑쇼’ 논쟁이 뜨거웠는가?
‘외눈박이’, ‘성적 수치심’, ‘~린이’ 표현을 쓰지 마라 · 63│배우 이엘과 작가 이선옥의 논쟁 · 67│『경향신문』과 『중앙일보』의 시각 차이 · 70│‘도덕적 우월감’ 없는 문제 제기는 가능한가? · 72│“슬랙티비즘은 사회 참여 첫걸음이다” · 75│좌파 지식인들의 PC 비판 · 78│PC 언어가 잔혹한 현실을 은폐한다면? · 80
제3장 ‘정치적 올바름’의 생명은 겸손이다
‘정치적 올바름’, 겸손하면 안 되나? · 85│좌파이자 동성애자인 사람이 왜 PC를 반대하나? · 88│“파멸하지 않으려면 이분법 광기를 멈춰야 한다” · 91│지금까지 즐겨온 농담을 할 자유의 침해 · 93│‘장애우’는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망언’인가? · 97
제4장 SNS가 규제하는 ‘유치원 국가’가 좋은가?
‘정치적 올바름’의 변질 과정 · 105│‘안전’의 ‘은밀한 개념 확장’ · 108│소셜미디어의 포로가 된 i세대 · 110│“어린이에 해를 끼치고 분열을 조장하는 페이스북” · 112│소셜미디어의 ‘가해자 지목 문화’ · 116│“학생들의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 · 119│“학생들은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소비자” · 121
제5장 ‘마이크로어그레션’과 ‘가해자 지목 문화’
‘끔찍한 고문’의 잔치판이 된 명절 · 127│미국에서 아시안에 대한 미묘한 차별 · 129│동성애자·트랜스젠더 차별 · 132│미세먼지처럼 해롭고 만연한 ‘먼지 차별’ · 134│‘의도’를 완전 무시해도 괜찮은가? · 137│SNS가 부추긴 ‘가해자 지목 문화’ · 140│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캠퍼스 문화 · 143│‘피해자 의식 문화’를 넘어서 · 145
제6장 ‘언더도그마’와 ‘약자 코스프레’의 악순환
약자는 늘 선하고 고결한가? · 153│왜 9·11 테러리스트들의 ‘용기’를 거론하나? · 155│‘샤덴프로이데’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가? · 158│이준석이 장애인 시위에 제기한 ‘언더도그마’ · 160│‘약자 코스프레’와 ‘피포위 의식’ · 164│권력 재생산을 위한 ‘피해자 서사’ · 166│‘약자 코스프레’의 탐욕인가? · 168│“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언더도그다” · 171
주 · 174
제1장 ‘정치적 올바름’의 소통을 위하여
‘정치적 올바름’이 촉발한 ‘문화 전쟁’ · 17│PC는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 21│PC의 연구 주제와 언론 보도 주제의 다양성 · 25│‘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PC의 3대 쟁점 · 28│자유 :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 · 32│“자유는 건전한 절제를 전제로 한다” · 37│위선 :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 · 40│고소득·고학력 좌파가 주도하는 PC · 45│계급 :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 · 48│PC를 통제하는 브레이크는 여론이다 · 52│‘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PC · 56
제2장 왜 싸이의 ‘흠뻑쇼’ 논쟁이 뜨거웠는가?
‘외눈박이’, ‘성적 수치심’, ‘~린이’ 표현을 쓰지 마라 · 63│배우 이엘과 작가 이선옥의 논쟁 · 67│『경향신문』과 『중앙일보』의 시각 차이 · 70│‘도덕적 우월감’ 없는 문제 제기는 가능한가? · 72│“슬랙티비즘은 사회 참여 첫걸음이다” · 75│좌파 지식인들의 PC 비판 · 78│PC 언어가 잔혹한 현실을 은폐한다면? · 80
제3장 ‘정치적 올바름’의 생명은 겸손이다
‘정치적 올바름’, 겸손하면 안 되나? · 85│좌파이자 동성애자인 사람이 왜 PC를 반대하나? · 88│“파멸하지 않으려면 이분법 광기를 멈춰야 한다” · 91│지금까지 즐겨온 농담을 할 자유의 침해 · 93│‘장애우’는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망언’인가? · 97
제4장 SNS가 규제하는 ‘유치원 국가’가 좋은가?
‘정치적 올바름’의 변질 과정 · 105│‘안전’의 ‘은밀한 개념 확장’ · 108│소셜미디어의 포로가 된 i세대 · 110│“어린이에 해를 끼치고 분열을 조장하는 페이스북” · 112│소셜미디어의 ‘가해자 지목 문화’ · 116│“학생들의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 · 119│“학생들은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소비자” · 121
제5장 ‘마이크로어그레션’과 ‘가해자 지목 문화’
‘끔찍한 고문’의 잔치판이 된 명절 · 127│미국에서 아시안에 대한 미묘한 차별 · 129│동성애자·트랜스젠더 차별 · 132│미세먼지처럼 해롭고 만연한 ‘먼지 차별’ · 134│‘의도’를 완전 무시해도 괜찮은가? · 137│SNS가 부추긴 ‘가해자 지목 문화’ · 140│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캠퍼스 문화 · 143│‘피해자 의식 문화’를 넘어서 · 145
제6장 ‘언더도그마’와 ‘약자 코스프레’의 악순환
약자는 늘 선하고 고결한가? · 153│왜 9·11 테러리스트들의 ‘용기’를 거론하나? · 155│‘샤덴프로이데’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가? · 158│이준석이 장애인 시위에 제기한 ‘언더도그마’ · 160│‘약자 코스프레’와 ‘피포위 의식’ · 164│권력 재생산을 위한 ‘피해자 서사’ · 166│‘약자 코스프레’의 탐욕인가? · 168│“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언더도그다” · 171
주 · 174
저자 소개
책 속으로
PC 비난을 전면에 내세웠던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 시사하듯이, 미국에서 ‘PC 피로증’은 중도층 유권자들은 물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존재했다. 2015년 10월 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그걸 잘 말해준다. “PC가 국가적으로 큰 문제”라는 진술에 동의한 사람은 62퍼센트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진술이 트럼프가 한 말이라는 걸 밝혔을 땐 동의율은 36퍼센트로 급감했지만, 응답자들의 정파적 반감을 감안하자면 ‘PC 피로증’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예일대학 조사에선 심층 인터뷰를 한 3,000명 중에서 80퍼센트가 “PC가 문제”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 pp.29~30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지도 모를 이런 그림을 그려보자. 친구 몇 명이 모여서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매우 즐거워한다. 그런데 그때 친구들 중 한 명이 정색을 하고 일어서면서 “이건 옳지 않아! 이런 말을 하려면 그 사람 앞에서 하는 게 옳지, 이건 비겁하단 말이야”라고 외친다면? 이 가벼운 농담을 즐겼던 당신은 졸지에 비겁하고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즐겨온 농담을 할 자유의 침해인가? 옳지 않다고 외친 친구의 말에 수긍하지 못할 건 없지만, 문제 제기를 꼭 그런 식으로 했어야만 했을까? 당신을 포함해 농담에 동참했던 친구들은 모두 이의를 제기한 ‘의인(義人)’의 싸가지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 pp.96~97
이 이메일 하나 때문에 크리태키스는 학생들에게 큰 봉변을 당해야 했다. 학생들은 그가 소수인종 학생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며 사임을 요구했다. 한 무리의 시위대는 통로를 걷고 있던 크리태키스와 그의 남편 니컬러스를 에워싸고 거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크리태키스에겐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속 자기들만 외쳐댔다. 그들의 메시지는 “이 기숙사를 집 같은 곳으로 만들어야죠!”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예일대학 교수 더글러스 스톤과 메이 슈와브-스톤은 『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예일대 같은 대학들은 대학이 가족이라는 안전한 보호소에서 벗어나 성인이 갖추어야 할 자율성과 책임감을 배워가는 과도기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고취시키려 하지 않고, 집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관념에 굴복하고 있다.”
--- pp.120~121
마이크로어그레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명절 고문’을 비교 설명의 사례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마이크로어그레션이 싫어서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는 남자들 중엔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이 적잖을 게다. 왜 이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등을 돌리는 걸까? 따지고 보면,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데도 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같은 문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명절 고문’을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포함시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
--- pp.137~138
이 시위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국민의힘 대표 이준석은 3월 26일 자신의 주장이 장애인 혐오라는 일각의 비판과 관련해 “소수자 정치의 가장 큰 위험성은 성역을 만들고 그에 대한 단 하나의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게 틀어막는다는 것에 있다”라며, “이준석을 여성 혐오자로 몰아도 정확히 여성 혐오를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못하고, 장애인 혐오로 몰아도 무슨 장애인 혐오를 했는지 설명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이준석은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되었을 때 언더도그마(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현상) 담론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라며, “치열하게 내용을 놓고 토론하기보다는 프레임 전쟁을 벌인다. 그 안에서 정작 소수자 정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해당 성역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강도만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은 담론을 건드리기를 싫어하게 되고 주제 자체가 갈라파고스화되어버리는 방식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 pp.29~30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지도 모를 이런 그림을 그려보자. 친구 몇 명이 모여서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매우 즐거워한다. 그런데 그때 친구들 중 한 명이 정색을 하고 일어서면서 “이건 옳지 않아! 이런 말을 하려면 그 사람 앞에서 하는 게 옳지, 이건 비겁하단 말이야”라고 외친다면? 이 가벼운 농담을 즐겼던 당신은 졸지에 비겁하고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즐겨온 농담을 할 자유의 침해인가? 옳지 않다고 외친 친구의 말에 수긍하지 못할 건 없지만, 문제 제기를 꼭 그런 식으로 했어야만 했을까? 당신을 포함해 농담에 동참했던 친구들은 모두 이의를 제기한 ‘의인(義人)’의 싸가지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 pp.96~97
이 이메일 하나 때문에 크리태키스는 학생들에게 큰 봉변을 당해야 했다. 학생들은 그가 소수인종 학생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며 사임을 요구했다. 한 무리의 시위대는 통로를 걷고 있던 크리태키스와 그의 남편 니컬러스를 에워싸고 거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크리태키스에겐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속 자기들만 외쳐댔다. 그들의 메시지는 “이 기숙사를 집 같은 곳으로 만들어야죠!”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예일대학 교수 더글러스 스톤과 메이 슈와브-스톤은 『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예일대 같은 대학들은 대학이 가족이라는 안전한 보호소에서 벗어나 성인이 갖추어야 할 자율성과 책임감을 배워가는 과도기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고취시키려 하지 않고, 집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관념에 굴복하고 있다.”
--- pp.120~121
마이크로어그레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명절 고문’을 비교 설명의 사례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마이크로어그레션이 싫어서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는 남자들 중엔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이 적잖을 게다. 왜 이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등을 돌리는 걸까? 따지고 보면,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데도 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같은 문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명절 고문’을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포함시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
--- pp.137~138
이 시위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국민의힘 대표 이준석은 3월 26일 자신의 주장이 장애인 혐오라는 일각의 비판과 관련해 “소수자 정치의 가장 큰 위험성은 성역을 만들고 그에 대한 단 하나의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게 틀어막는다는 것에 있다”라며, “이준석을 여성 혐오자로 몰아도 정확히 여성 혐오를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못하고, 장애인 혐오로 몰아도 무슨 장애인 혐오를 했는지 설명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이준석은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되었을 때 언더도그마(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현상) 담론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라며, “치열하게 내용을 놓고 토론하기보다는 프레임 전쟁을 벌인다. 그 안에서 정작 소수자 정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해당 성역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강도만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은 담론을 건드리기를 싫어하게 되고 주제 자체가 갈라파고스화되어버리는 방식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 pp.161~162
출판사 리뷰
‘정치적 올바름’은 항상 올바른가?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을 가리킨다. 이 사회적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무대로 만들어 “누가 더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인가?”를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도덕과 정의의 화신인 양 여길 수 있게끔 그런 담론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된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과 정의의 문제가 될수록 사람들이 그 쟁점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의는 얼른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과장되면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니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이 위험하듯이 자기과시를 위한 PC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적 순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잘 맞는 진보주의자들과 수다를 떠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도덕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이 15달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20달러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고,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더 경쟁 집단의 견해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데에 유능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준만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PC를 둘러싼 찬반 논쟁과 논란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양쪽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소통과 화해는 인기가 없는 주제지만, 그렇다고 모두 양극화 선동가들에게 놀아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함으로써 이 논쟁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PC는 ‘소수자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으로 성 차별적·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PC 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 외모에 대한 차별,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PC 운동은 전통이나 관습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 지식인들은 주로 출판 활동 등을 통해 PC 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을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급기야 PC 반대자들은 이 운동에 반대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라는 딱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새로운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 운동을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AIDS만큼 치명적인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등과 같은 비난과 함께 PC 운동가들을 ‘언어 경찰’이나 ‘사상 경찰’로 비난했다.
PC의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의 문제다. PC 논쟁은 소극적 자유도 적극적 자유도 아닌 제3의 자유인 ‘비지배 상태’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을 선행할 때에 생산적인 국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둘째,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이다. 엘리트 계급의 언행 불일치로 인해 냉소주의가 확산된 가운데 PC는 단지 말뿐인 위선의 제도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으나, 문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의 위선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셋째,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의 문제다. PC 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는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정체성 정치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온 빈부격차 문제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 계급 정치의 실패와 그런 실패에도 이론적 수준에서 여전히 계급 이외의 이슈 제기를 적대시한 계급 정치의 독선과 오만으로 인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싸이의 ‘흠뻑쇼’ 논쟁이 뜨거웠는가?
PC 논쟁은 ‘도덕적 우월감’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는 “진보가 보여주는 꼴불견 중에 하나가 도덕적 우월의식이다”는 상식과 상통한다. 도덕적 우월감이 없는, 상대편이 그런 의심조차 할 수 없게끔 도덕적 우월감이 완전히 배제된 문제 제기는 가능한가? 타인에 대한 훈계는 아닐망정 계몽의 재미조차 박탈된 PC 언어가 가능할 것인지 그것이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이른바 ‘슬랙티비즘’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으른 사람’과 ‘행동주의’의 합성어인 슬랙티비즘은 시민 참여나 집단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등장한 말로, 지식인들 사이에 열띤 쟁점이 되고 있다.
슬랙티비즘은 온라인 공간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도 막상 실질적인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네티즌을 비꼬는 말로도 쓰이지만, 중립적으로 보자면 사람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주저하면서 최소한의 관여만으로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는 참여, 즉 소심하고 게으른 저항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어쩌면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PC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PC 논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흠뻑쇼’ 논쟁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PC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진보는 ‘친(親)PC’, 보수는 ‘반(反)PC’ 성향을 보여왔지만, 최근에는 진보 쪽에서도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반PC’로 돌아서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생명은 겸손이다
PC의 생명은 겸손에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적질’을 받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PC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때에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특정인을 겨냥해 속된 말로 잘난 척하면서 싸가지 없게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PC의 부작용을 증폭시킨 결정적 이유다. 어쩌면 PC가 우리 시대의 테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PC가 정치판으로 들어가면 상대편을 때려눕히려는 몽둥이가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역지사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더 나은 태도를 원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문제를 지적할 때에는 왜 자신의 태도는 잊을까? PC를 남을 비난하고 모멸하기 위한 도구로 써먹는 이런 작태는 ‘정치적 올바름’의 좋은 뜻마저 죽이고야 말 것이다. PC를 남들에게 으스대는 완장의 용도로 쓰지 말자. 그것은 PC를 죽이는 일이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PC는 PC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을 가리킨다. 이 사회적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무대로 만들어 “누가 더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인가?”를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도덕과 정의의 화신인 양 여길 수 있게끔 그런 담론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된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과 정의의 문제가 될수록 사람들이 그 쟁점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의는 얼른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과장되면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니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이 위험하듯이 자기과시를 위한 PC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적 순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잘 맞는 진보주의자들과 수다를 떠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도덕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이 15달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20달러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고,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더 경쟁 집단의 견해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데에 유능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준만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PC를 둘러싼 찬반 논쟁과 논란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양쪽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소통과 화해는 인기가 없는 주제지만, 그렇다고 모두 양극화 선동가들에게 놀아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함으로써 이 논쟁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PC는 ‘소수자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으로 성 차별적·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PC 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 외모에 대한 차별,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PC 운동은 전통이나 관습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 지식인들은 주로 출판 활동 등을 통해 PC 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을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급기야 PC 반대자들은 이 운동에 반대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라는 딱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새로운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 운동을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AIDS만큼 치명적인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등과 같은 비난과 함께 PC 운동가들을 ‘언어 경찰’이나 ‘사상 경찰’로 비난했다.
PC의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의 문제다. PC 논쟁은 소극적 자유도 적극적 자유도 아닌 제3의 자유인 ‘비지배 상태’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을 선행할 때에 생산적인 국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둘째,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이다. 엘리트 계급의 언행 불일치로 인해 냉소주의가 확산된 가운데 PC는 단지 말뿐인 위선의 제도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으나, 문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의 위선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셋째,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의 문제다. PC 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는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정체성 정치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온 빈부격차 문제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 계급 정치의 실패와 그런 실패에도 이론적 수준에서 여전히 계급 이외의 이슈 제기를 적대시한 계급 정치의 독선과 오만으로 인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싸이의 ‘흠뻑쇼’ 논쟁이 뜨거웠는가?
PC 논쟁은 ‘도덕적 우월감’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는 “진보가 보여주는 꼴불견 중에 하나가 도덕적 우월의식이다”는 상식과 상통한다. 도덕적 우월감이 없는, 상대편이 그런 의심조차 할 수 없게끔 도덕적 우월감이 완전히 배제된 문제 제기는 가능한가? 타인에 대한 훈계는 아닐망정 계몽의 재미조차 박탈된 PC 언어가 가능할 것인지 그것이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이른바 ‘슬랙티비즘’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으른 사람’과 ‘행동주의’의 합성어인 슬랙티비즘은 시민 참여나 집단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등장한 말로, 지식인들 사이에 열띤 쟁점이 되고 있다.
슬랙티비즘은 온라인 공간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도 막상 실질적인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네티즌을 비꼬는 말로도 쓰이지만, 중립적으로 보자면 사람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주저하면서 최소한의 관여만으로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는 참여, 즉 소심하고 게으른 저항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어쩌면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PC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PC 논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흠뻑쇼’ 논쟁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PC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진보는 ‘친(親)PC’, 보수는 ‘반(反)PC’ 성향을 보여왔지만, 최근에는 진보 쪽에서도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반PC’로 돌아서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생명은 겸손이다
PC의 생명은 겸손에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적질’을 받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PC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때에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특정인을 겨냥해 속된 말로 잘난 척하면서 싸가지 없게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PC의 부작용을 증폭시킨 결정적 이유다. 어쩌면 PC가 우리 시대의 테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PC가 정치판으로 들어가면 상대편을 때려눕히려는 몽둥이가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역지사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더 나은 태도를 원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문제를 지적할 때에는 왜 자신의 태도는 잊을까? PC를 남을 비난하고 모멸하기 위한 도구로 써먹는 이런 작태는 ‘정치적 올바름’의 좋은 뜻마저 죽이고야 말 것이다. PC를 남들에게 으스대는 완장의 용도로 쓰지 말자. 그것은 PC를 죽이는 일이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PC는 PC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59.생각의 힘 (독서>책소개) > 2.한국사회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숫자 사회 (2023) - 순 자산 10억이 목표가 된 사회는 어떻게 붕괴되는가 (0) | 2023.07.04 |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2023) (0) | 2023.07.04 |
반지성주의 (2023) - 우리의 자화상 (0) | 2023.07.04 |
공감의 비극 (2023) - 차라리 공감하지 마라 (0) | 2023.07.04 |
고성국의 공(空)산당선언 (2023) (0) | 2023.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