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다시 물어보는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들 그리고 전쟁의 본성
나무에 묶인 사람의 살갗과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을 '능지(凌遲)'라 부르는데,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 능숙한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 형벌은 보통,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저잣거리에서 시행되곤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는 집단 린치를 당해 목 매달려 죽은 이가 담은 사진을 대량 복사해 파는 사람도 있었다. 린치에 가담한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간직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으며, 몇 장 정도는 우편엽서로 제작되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관련돼 있다. 책 속에서 고통스런 표정을 지어가며 죽어가는 이들과 그것을 즐기거나 혹은 두려워하며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우리들. 우리는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만 바라볼 뿐이므로 실감은 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진 안에서 형을 집행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죄인(이라 여겨지는 이)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 혹은 타인을 향한 타인의 증오를 대신 내뿜는 것 뿐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 광경과 사진은 일반인들에게 포르노그라피로서 작용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연민의 대상임과 동시에 스펙타클한 '즐길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
현대 스펙터클의 최고는 단연코 '전쟁'이다. 이미 걸프전이나 최근 이라크전을 통해 마치 게임처럼 보여지는 전장상황을 지켜봤던 우리들로서는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보며 무기의 명중률이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들은 흔히 '전쟁 미학'이라 미화되지만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대규모로 고통을 유발하는 현실에 대한 눈가림일 뿐이다.
스펙타클이 아닌 실제의 고통이 무엇인지,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되물으며,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는 책.
* 책에는 「문학은 자유이다」「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등 네 편의 부록이 있는데, 미국의 보수주의 교육단체 <미국 대학이사· 동합회 협의회>가 "미국을 앞장서 비난하는 인사들"중 한 명으로 저자를 지목하게 한 기고문들이라고 한다.
『타인의 고통』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관련돼 있다. 책 속에서 고통스런 표정을 지어가며 죽어가는 이들과 그것을 즐기거나 혹은 두려워하며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우리들. 우리는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만 바라볼 뿐이므로 실감은 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진 안에서 형을 집행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죄인(이라 여겨지는 이)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 혹은 타인을 향한 타인의 증오를 대신 내뿜는 것 뿐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 광경과 사진은 일반인들에게 포르노그라피로서 작용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연민의 대상임과 동시에 스펙타클한 '즐길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
현대 스펙터클의 최고는 단연코 '전쟁'이다. 이미 걸프전이나 최근 이라크전을 통해 마치 게임처럼 보여지는 전장상황을 지켜봤던 우리들로서는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보며 무기의 명중률이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들은 흔히 '전쟁 미학'이라 미화되지만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대규모로 고통을 유발하는 현실에 대한 눈가림일 뿐이다.
스펙타클이 아닌 실제의 고통이 무엇인지,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되물으며,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는 책.
* 책에는 「문학은 자유이다」「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등 네 편의 부록이 있는데, 미국의 보수주의 교육단체 <미국 대학이사· 동합회 협의회>가 "미국을 앞장서 비난하는 인사들"중 한 명으로 저자를 지목하게 한 기고문들이라고 한다.
책 속으로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사람들이 타고났다는 주장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에드먼드 버크는 사람들이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미지를 즐겨 본다고 주장했다. "내 확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행과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얼마간, 그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그는 『숭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둘러싼 견해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1757)에 적어 놓았다. "범상치 않고 통탄해 마지 못할 재앙의 광경만큼 사람들이 열심히 좇는 광경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이아고, 그리고 무대에 올려진 악행의 매혹에 관해 쓴 어느 에세이에서 윌리엄 해즐릿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 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그의 답변에 따르면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성애적인 것을 다룬 위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인 조르쥬 바타이유는 1905년 중국의 한 죄수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하던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매일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이 사진은 1961년 바타이유가 살아 생전에 출판한 맨 마지막 책 『에로스의 눈물』에 실렸다.) 바타이유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사진은 내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이 이미지를 관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자 금기시된 성애적 지식을 해방시키는 일이다(보통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런 복잡한 반응을 보일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를 참고 볼 수 없다. 분주히 휘둘러진 칼날에 의해서 이미 양쪽 팔이 모두 떨어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질 최종 단계에 놓인 산 제물의 이미지. 이 이미지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며, 신화 속의 마르시아스가 아니라 현실의 마르시아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속의 이 희생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성 세바스티안이 그랬듯이,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이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아직도 살아 있다. 관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이렇듯 잔악한 이미지들은 몇 가지 상이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 된다. 나약함에 맞서 자신을 단련하기, 자신을 좀더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기, 도저히 구제 받지 못할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같은 요구 말이다.
성애적인 것을 다룬 위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인 조르쥬 바타이유는 1905년 중국의 한 죄수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하던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매일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이 사진은 1961년 바타이유가 살아 생전에 출판한 맨 마지막 책 『에로스의 눈물』에 실렸다.) 바타이유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사진은 내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이 이미지를 관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자 금기시된 성애적 지식을 해방시키는 일이다(보통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런 복잡한 반응을 보일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를 참고 볼 수 없다. 분주히 휘둘러진 칼날에 의해서 이미 양쪽 팔이 모두 떨어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질 최종 단계에 놓인 산 제물의 이미지. 이 이미지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며, 신화 속의 마르시아스가 아니라 현실의 마르시아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속의 이 희생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성 세바스티안이 그랬듯이,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이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아직도 살아 있다. 관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이렇듯 잔악한 이미지들은 몇 가지 상이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 된다. 나약함에 맞서 자신을 단련하기, 자신을 좀더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기, 도저히 구제 받지 못할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같은 요구 말이다.
--- pp. 146∼149
관련 자료
수전 손택이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건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 번째로 현대전은 무기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대규모로 고통을 양산하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포토저널리즘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대 초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즉, 전쟁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이 책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 때문이다. 손택은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공허한 은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부가 암이나 빈곤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지만, 언제쯤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인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기 맘대로 아무런 일이나 할 수 있도록 직접 자신을 허가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종전 후의 현실은 손택의 염려대로 미국이 '제국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
『타인의 고통』한국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의미는 물론이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보려 했던 손택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살리고자 영어판과는 조금 다르게 편집했다.
- 한국어판 서문: 손택은 자기 글을 직접 소개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실제로 손택은 (주로 참고문헌이나 원래 출처만을 밝히는) '감사의 글'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저서에 '서문'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어판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서문을 써서 보내줬다. 직접 한국어판 서문을 보낸 이유는 출판사의 요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9 11사건 직후부터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 태도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왜곡된 경험을 겪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도판(총 48장): 『타인의 고통』 영어판에는 원래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이미지를 다룬 또 다른 책 『사진에 관하여』에도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 손택은 자신이 본문에서 언급한 이미지들이 서구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들이기에 굳이 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듯싶은데, 한국어판에서는 서구와는 문화적 풍토가 다른 국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총 48장의 도판을 실었다.
- 네 편의 부록: 『타인의 고통』 한국어판에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손택이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기고문 (최근에 발표된 순서대로) [문학은 자유이다],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네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교육단체 <미국 대학이사 동창회 협의회>가 "미국을 앞장서 비난하는 인사들" 중 한 명으로 손택을 지목하게 만들었던 이 기고문들은 이 책이 왜 현실에 대한 '지적 개입'일 수밖에 없는지 국내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 때문이다. 손택은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공허한 은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부가 암이나 빈곤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지만, 언제쯤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인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기 맘대로 아무런 일이나 할 수 있도록 직접 자신을 허가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종전 후의 현실은 손택의 염려대로 미국이 '제국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
『타인의 고통』한국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의미는 물론이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보려 했던 손택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살리고자 영어판과는 조금 다르게 편집했다.
- 한국어판 서문: 손택은 자기 글을 직접 소개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실제로 손택은 (주로 참고문헌이나 원래 출처만을 밝히는) '감사의 글'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저서에 '서문'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어판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서문을 써서 보내줬다. 직접 한국어판 서문을 보낸 이유는 출판사의 요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9 11사건 직후부터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 태도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왜곡된 경험을 겪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도판(총 48장): 『타인의 고통』 영어판에는 원래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이미지를 다룬 또 다른 책 『사진에 관하여』에도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 손택은 자신이 본문에서 언급한 이미지들이 서구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들이기에 굳이 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듯싶은데, 한국어판에서는 서구와는 문화적 풍토가 다른 국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총 48장의 도판을 실었다.
- 네 편의 부록: 『타인의 고통』 한국어판에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손택이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기고문 (최근에 발표된 순서대로) [문학은 자유이다],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네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교육단체 <미국 대학이사 동창회 협의회>가 "미국을 앞장서 비난하는 인사들" 중 한 명으로 손택을 지목하게 만들었던 이 기고문들은 이 책이 왜 현실에 대한 '지적 개입'일 수밖에 없는지 국내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출판사 리뷰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시상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미군의 폭격기들이 한창 바그다드 외곽 지역을 폭격하고 있던 지난 3월 말에 출판된 이 책 {타인의 고통}은 그 노력의 결정판이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손택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실 인식이 손상된 걸까?" 손택은 스스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고통의 재현물, 예컨대 전쟁이나 참화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분석해 본다. 손택의 지적에 따르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단지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얘기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즉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 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고. 이 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에도 들어맞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손택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실 인식이 손상된 걸까?" 손택은 스스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고통의 재현물, 예컨대 전쟁이나 참화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분석해 본다. 손택의 지적에 따르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단지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얘기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즉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 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고. 이 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에도 들어맞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59.생각의 힘 (독서>책소개) > 1.국제사회정치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짱깨주의의 탄생 (2022)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0) | 2023.07.05 |
---|---|
세계는 왜 싸우는가 (2019) (0) | 2023.07.05 |
보이지 않는 여자들 (2020)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0) | 2023.07.05 |
이민강국의 조건 (2023) - 어떻게 미국은 이민강국이 되었나 (0) | 2023.07.05 |
70억의 별 : 위기의 인류 (2023) (0) | 202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