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전후 서구 사회학의 고전이자 문제작!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어두운 핵심'이 아니라 '밝은 핵심'을 폭로한다!"
'유동적 현대'의 탄생을 알린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는 패러다임 중의 하나는 바로 바우만의 '유동적 현대'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패러다임을 가장 종합적이고 본격적으로 보여주었으며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도 섬뜩한 통찰을 담아 1992년에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 수여외는 '유럽 아말피 상'도 수상했다. 라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홀로코스트 이후 홀로코스트의 재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현대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현대는 '계몽의 변증법'도 '문명화 과정'도 '탈신화화'과정도 아니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시금석'이며 핵심적 양상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필연적 형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설득력 있게 논증해낸다. 하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내 안의 파시즘' '내 안의 유대인'으로 바꾸자에 그쳤다면 이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었을것이다. 오히려 바우만이 건네는 메시지는 평범하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은 준다. 즉, 현대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지도 편견도 없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목표가 된 범주의 인간 존재의 파괴에 정력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과, 이들의 참여는 도덕적이거나 또는 그밖의 다른 신념을 동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정반대로 그런 신념들의 정지와 망각 그리고 무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이다.홀로코스트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이야기를 짚어내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모덕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유동적 현대'의 탄생을 알린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는 패러다임 중의 하나는 바로 바우만의 '유동적 현대'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패러다임을 가장 종합적이고 본격적으로 보여주었으며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도 섬뜩한 통찰을 담아 1992년에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 수여외는 '유럽 아말피 상'도 수상했다. 라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홀로코스트 이후 홀로코스트의 재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현대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현대는 '계몽의 변증법'도 '문명화 과정'도 '탈신화화'과정도 아니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시금석'이며 핵심적 양상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필연적 형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설득력 있게 논증해낸다. 하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내 안의 파시즘' '내 안의 유대인'으로 바꾸자에 그쳤다면 이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었을것이다. 오히려 바우만이 건네는 메시지는 평범하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은 준다. 즉, 현대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지도 편견도 없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목표가 된 범주의 인간 존재의 파괴에 정력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과, 이들의 참여는 도덕적이거나 또는 그밖의 다른 신념을 동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정반대로 그런 신념들의 정지와 망각 그리고 무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이다.홀로코스트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이야기를 짚어내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모덕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목차
서문
1부 서론: 홀로코스트 이후의 사회학
현대성의 시금석으로서 홀로코스트│문명화 과정의 의미
도덕적 무관심의 사회적 생산3│도덕적 불가시성의 사회적 생산
문명화 과정의 도덕적 결과들
2부 현대(성), 인종주의, 인종절멸 1
유대인 소외의 몇 가지 특수성│기독교 시대에서 현대까지 유대인의
부조화 │바리케이드에 걸터앉아│프리즘적 집단
부조화의 현대적 차원│비민족적 민족│인종주의의 현대성
3부 현대(성), 인종주의, 인종절멸 2
이종공포증에서 인종주의로│사회공학의 한 형태로서의
인종주의│배척에서 절멸로│전망
4부 홀로코스트의 고유성과 정상성
문제│비정상성으로서의 제노사이드
현대적 제노사이드의 특이성│위계적·기능적 분업의 효과들·
관료적 대상들의 비인간화│홀로코스트에서 관료제의 역할
현대적 안전장치의 파산│결론
5부 피해자들의 협력 끌어내기
피해자들의 격리│‘지킬 수 있는 것은 지켜라’ 게임
집단적 파괴에 봉사한 개별적 합리성│자기보존의 합리성
결론
6부 복종의 윤리학(밀그램 읽기)
사회적 거리의 함수로서의 비인간성│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모│도덕화된 기술│부동하는 책임
권력의 다원성과 양심의 힘│악의 사회성
7부 도덕(성)에 관한 사회학 이론을 향하여
도덕(성)의 공장으로서의 사회│홀로코스트의 도전
도덕(성)의 전사회적 원천들│사회적 근접성과 도덕적 책임성
도덕적 책임성의 사회적 억압│거리의 사회적 생산
마지막 논평
8부 후기: 합리성과 수치
│아말피 상 수상 강연│도덕의 사회적 조작: 도덕적 행위자, 무관심한 행동
│2000년 판 후기│기억해야 할 의무 ─ 하지만 무엇을?
│옮긴이 후기│
│New Directions 총서를 발간하며 │
1부 서론: 홀로코스트 이후의 사회학
현대성의 시금석으로서 홀로코스트│문명화 과정의 의미
도덕적 무관심의 사회적 생산3│도덕적 불가시성의 사회적 생산
문명화 과정의 도덕적 결과들
2부 현대(성), 인종주의, 인종절멸 1
유대인 소외의 몇 가지 특수성│기독교 시대에서 현대까지 유대인의
부조화 │바리케이드에 걸터앉아│프리즘적 집단
부조화의 현대적 차원│비민족적 민족│인종주의의 현대성
3부 현대(성), 인종주의, 인종절멸 2
이종공포증에서 인종주의로│사회공학의 한 형태로서의
인종주의│배척에서 절멸로│전망
4부 홀로코스트의 고유성과 정상성
문제│비정상성으로서의 제노사이드
현대적 제노사이드의 특이성│위계적·기능적 분업의 효과들·
관료적 대상들의 비인간화│홀로코스트에서 관료제의 역할
현대적 안전장치의 파산│결론
5부 피해자들의 협력 끌어내기
피해자들의 격리│‘지킬 수 있는 것은 지켜라’ 게임
집단적 파괴에 봉사한 개별적 합리성│자기보존의 합리성
결론
6부 복종의 윤리학(밀그램 읽기)
사회적 거리의 함수로서의 비인간성│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모│도덕화된 기술│부동하는 책임
권력의 다원성과 양심의 힘│악의 사회성
7부 도덕(성)에 관한 사회학 이론을 향하여
도덕(성)의 공장으로서의 사회│홀로코스트의 도전
도덕(성)의 전사회적 원천들│사회적 근접성과 도덕적 책임성
도덕적 책임성의 사회적 억압│거리의 사회적 생산
마지막 논평
8부 후기: 합리성과 수치
│아말피 상 수상 강연│도덕의 사회적 조작: 도덕적 행위자, 무관심한 행동
│2000년 판 후기│기억해야 할 의무 ─ 하지만 무엇을?
│옮긴이 후기│
│New Directions 총서를 발간하며 │
책 속으로
예루살렘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변호사가 제시한 변론의 요지는 사회학이 항상 말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거의 의문시되거나 공박 당하지 않았던 현대의 합리적 사회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서론」
두 합리성 ― 행위자의 합리성과 행위의 합리성 ― 의 일치는 행위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의 환경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이해관계와 자원에 의존하며, 이들 중 어느 것도 행위자가 통제하지 못한다.--- 「5장 ‘피해자들의 협력 끌어내기’」
1941년에는 홀로코스트를 예상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불안한 이유이다. 이제 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감히 배제하지 못한다.--- 「7장 ‘도덕(성)에 대한 사회학 이론을 향해’」
도덕적 무관심은 합리성의 원칙들에 내재해 있다.
두 합리성 ― 행위자의 합리성과 행위의 합리성 ― 의 일치는 행위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의 환경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이해관계와 자원에 의존하며, 이들 중 어느 것도 행위자가 통제하지 못한다.--- 「5장 ‘피해자들의 협력 끌어내기’」
1941년에는 홀로코스트를 예상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불안한 이유이다. 이제 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감히 배제하지 못한다.--- 「7장 ‘도덕(성)에 대한 사회학 이론을 향해’」
도덕적 무관심은 합리성의 원칙들에 내재해 있다.
--- 「4장 ‘홀로코스트의 고유성과 정상성’」
출판사 리뷰
‘유동적 현대’의 주창자 바우만의 대표작!!
『계몽의 변증법』 이후 유럽의 현대(성) 논의에 가장 큰 충격을 몰고 온 화제작!!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게 수여되는 아말피 상 수상작!
‘계몽의 변증법’으로도, 근대화=‘문명화 과정’(엘리아스)이라는 명제로도 또 근대=감시와 처벌이라는 패러다임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현대(성)의 맹점,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그때’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냉전의 종언 이후에도 무수한 인종학살이 자행되고, 인간을 ‘쓰레기’로 만드는 현대(성)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탈도덕을 넘어 시대의 새로운 도덕에 대한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의 치열한 탐구! 이것은 ‘여기’, 우리의 ‘오늘’ 이야기이다.
전후 서구 사회학의 고전이 된 문제작,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어두운 핵심’이 아니라
‘밝은 핵심’을 폭로한다.
홀로코스트는 현대 문명의 꽃이다!
현대성 없는 홀로코스트는 불가능하고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문명화된 현대(성)는 상상하기 힘들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일종의 샴쌍둥이라는 충격적인 진단.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의 재연再演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현대의 모든 뛰어난 성과들의 합작품이다.
왜 피해자들의 협력은 ‘합리성’의 형태를 띠는가?
왜 ‘남도 하고’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책임에서 빠져나가는 우회로인가?
어떻게 관료제는 현대의 모든 도덕과 윤리를 넘어설까?
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도덕’ 문제를 체계적으로 고민의 대상에서 배제하는가?
‘근대화’라는 신화에 그리고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온 우리의 근대화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저!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이후 홀로코스트의 재연再演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는 ‘계몽의 변증법’도 ‘문명화 과정’도 ‘탈신화화’ 과정도 아니다. 현대성에 대한 혁신적 해석으로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한 바우만의 주저.
‘유동적 현대’의 탄생을 알린 책 여기 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는 패러다임 중의 하나는 바우만의 ‘유동적 현대’일 것이다. 그러한 바우만의 패러다임을 가장 종합적이고 본격적으로 보여주어,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도 섬뜩한 통찰을 담은 문제작으로 1992년에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게 수여되는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직접 목격한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사유는 물론이요 ‘시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한탄했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충격과 경악과 공포가 너무나 커 어떠한 인간의 언어로도 그것을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극악무도한 ‘악마’가 아니라 ‘자기 일을 성실한 수행한 성실한 시민’이라는 주장을 듣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테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렌트는 공식적으로 유대 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쪽이 이 현대의 비극에 가까울까? 현대의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정도로 비극적인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너무나 인간적인 사건일 뿐인가? 아렌트의 명제는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무튼 그것이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을 벗어나 현대 사회의 본격적인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막상 현대 사회를 다루는 사회학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관심사도 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2차세계대전이라는 한시적 시간인) ‘그때’, (유대인들이라는) ‘그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와 지금과 무관한 사건이거나 아니면 역사의 어떤 돌출적인 극단적인 예외적 상태일 뿐이다. 바우만의 혜안은 바로 여기서부터 빛나기 시작한다. 즉 바우만에 따르면 양쪽 다 아니며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시금석’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성의 ‘신화’를 둘러싼 몇 가지 명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홀로코스트가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적 양상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필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해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그때, 그들의 극단적인 역사적 비극으로 외면하고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근대화=문명화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식탁 예절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을 합리적으로 제어해온 것이 현대성의 큰 성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절manners’은 그런 식으로 폭력을 순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절과 다른 예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치시킨다는 것이 바우만의 주장이다.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서도 바우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일탈’ 또는 현대성의 부정적 측면이 아니라 현대성의 정수, 즉 합리화와 객관성을 위한 도덕적 무관심, 관료주의가 합작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소이이다. 또 베버의 탈신화화에 대해서도 홀로코스트는 ‘신화’가 합리성의 억압을 뚫고 얼마나 강력하게 현대의 정치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그리고 신화가 실제로는 합리성의 또 다른 이면인지를 잘 보여준다. 바우만의 이러한 성찰은 냉전 이후의 현대 국가의 몇 가지 형태에 대해 이제 비로소 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진정 고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때 미국의 모든 공항에 붙어 있던 ‘Your security is our priority(당신의 안전이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입니다)’는 나치 강제 수용소 위에 붙어 있던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해줄지니)’와 얼마나 다를까?
아이히만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아이히만이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질서의 위반이나 해체의 부정적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무랄 데 없고 도전할 수 없는 질서의 지배의 결과였다!
1945년에 맥도날드는 이미 법을 어기는 사람보다도 법에 복종하는 사람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전도되어 있는 셈이며, 홀로코스트가 ‘지금’ ‘여기’의 화두가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대성의 ‘어두운 핵심’이 아니라 ‘밝은 핵심’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지옥의 묵시론처럼 세상이 종말을 고할 때 다가온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극치를 달린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정상적으로 집행되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잘 보여주었듯이 그것을 수행한 사람들도 악마들이 아니었다. 아니 6장의 ‘복종의 윤리학’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듯이 우리는 ‘조건만’ 주어지면 누구나 그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내 안의 파시즘’을 ‘내 안의 유대인’으로 바꾸자는 추상적 논의에 그쳤다면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바우만이 건네는 메시지는 너무나 평범하며 그리하여 오히려 큰 울림을 나눈다. 즉 현대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지도 또 편견도 없는 사람들이 또한 얼마든지 목표가 된 범주의 인간 존재의 파괴에 정력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참여는 도덕적이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신념의 동원을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와 정반대로 그러한 신념들의 정지와 망각 그리고 무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시는 불가능해졌다지만 시적인 아포리즘들로 현대 사회의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집어내며 ‘홀로코스트’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이야기를 짚어내는 본서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도덕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후 유럽의 현대(성) 논의에 가장 큰 충격을 몰고 온 화제작!!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게 수여되는 아말피 상 수상작!
‘계몽의 변증법’으로도, 근대화=‘문명화 과정’(엘리아스)이라는 명제로도 또 근대=감시와 처벌이라는 패러다임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현대(성)의 맹점,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그때’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냉전의 종언 이후에도 무수한 인종학살이 자행되고, 인간을 ‘쓰레기’로 만드는 현대(성)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탈도덕을 넘어 시대의 새로운 도덕에 대한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의 치열한 탐구! 이것은 ‘여기’, 우리의 ‘오늘’ 이야기이다.
전후 서구 사회학의 고전이 된 문제작,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어두운 핵심’이 아니라
‘밝은 핵심’을 폭로한다.
홀로코스트는 현대 문명의 꽃이다!
현대성 없는 홀로코스트는 불가능하고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문명화된 현대(성)는 상상하기 힘들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일종의 샴쌍둥이라는 충격적인 진단.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의 재연再演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현대의 모든 뛰어난 성과들의 합작품이다.
왜 피해자들의 협력은 ‘합리성’의 형태를 띠는가?
왜 ‘남도 하고’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책임에서 빠져나가는 우회로인가?
어떻게 관료제는 현대의 모든 도덕과 윤리를 넘어설까?
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도덕’ 문제를 체계적으로 고민의 대상에서 배제하는가?
‘근대화’라는 신화에 그리고 국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온 우리의 근대화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저!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이후 홀로코스트의 재연再演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는 ‘계몽의 변증법’도 ‘문명화 과정’도 ‘탈신화화’ 과정도 아니다. 현대성에 대한 혁신적 해석으로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한 바우만의 주저.
‘유동적 현대’의 탄생을 알린 책 여기 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는 패러다임 중의 하나는 바우만의 ‘유동적 현대’일 것이다. 그러한 바우만의 패러다임을 가장 종합적이고 본격적으로 보여주어,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도 섬뜩한 통찰을 담은 문제작으로 1992년에 유럽 최고의 사회학자에게 수여되는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직접 목격한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사유는 물론이요 ‘시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한탄했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충격과 경악과 공포가 너무나 커 어떠한 인간의 언어로도 그것을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극악무도한 ‘악마’가 아니라 ‘자기 일을 성실한 수행한 성실한 시민’이라는 주장을 듣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테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렌트는 공식적으로 유대 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쪽이 이 현대의 비극에 가까울까? 현대의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정도로 비극적인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너무나 인간적인 사건일 뿐인가? 아렌트의 명제는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무튼 그것이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을 벗어나 현대 사회의 본격적인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막상 현대 사회를 다루는 사회학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관심사도 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2차세계대전이라는 한시적 시간인) ‘그때’, (유대인들이라는) ‘그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와 지금과 무관한 사건이거나 아니면 역사의 어떤 돌출적인 극단적인 예외적 상태일 뿐이다. 바우만의 혜안은 바로 여기서부터 빛나기 시작한다. 즉 바우만에 따르면 양쪽 다 아니며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시금석’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성의 ‘신화’를 둘러싼 몇 가지 명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홀로코스트가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적 양상들이 종합되어 나타난 필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해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그때, 그들의 극단적인 역사적 비극으로 외면하고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근대화=문명화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식탁 예절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을 합리적으로 제어해온 것이 현대성의 큰 성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절manners’은 그런 식으로 폭력을 순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절과 다른 예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치시킨다는 것이 바우만의 주장이다.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서도 바우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일탈’ 또는 현대성의 부정적 측면이 아니라 현대성의 정수, 즉 합리화와 객관성을 위한 도덕적 무관심, 관료주의가 합작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소이이다. 또 베버의 탈신화화에 대해서도 홀로코스트는 ‘신화’가 합리성의 억압을 뚫고 얼마나 강력하게 현대의 정치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그리고 신화가 실제로는 합리성의 또 다른 이면인지를 잘 보여준다. 바우만의 이러한 성찰은 냉전 이후의 현대 국가의 몇 가지 형태에 대해 이제 비로소 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진정 고전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때 미국의 모든 공항에 붙어 있던 ‘Your security is our priority(당신의 안전이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입니다)’는 나치 강제 수용소 위에 붙어 있던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해줄지니)’와 얼마나 다를까?
아이히만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아이히만이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질서의 위반이나 해체의 부정적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무랄 데 없고 도전할 수 없는 질서의 지배의 결과였다!
1945년에 맥도날드는 이미 법을 어기는 사람보다도 법에 복종하는 사람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전도되어 있는 셈이며, 홀로코스트가 ‘지금’ ‘여기’의 화두가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대성의 ‘어두운 핵심’이 아니라 ‘밝은 핵심’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지옥의 묵시론처럼 세상이 종말을 고할 때 다가온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극치를 달린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정상적으로 집행되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잘 보여주었듯이 그것을 수행한 사람들도 악마들이 아니었다. 아니 6장의 ‘복종의 윤리학’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듯이 우리는 ‘조건만’ 주어지면 누구나 그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내 안의 파시즘’을 ‘내 안의 유대인’으로 바꾸자는 추상적 논의에 그쳤다면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바우만이 건네는 메시지는 너무나 평범하며 그리하여 오히려 큰 울림을 나눈다. 즉 현대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지도 또 편견도 없는 사람들이 또한 얼마든지 목표가 된 범주의 인간 존재의 파괴에 정력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참여는 도덕적이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신념의 동원을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와 정반대로 그러한 신념들의 정지와 망각 그리고 무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시는 불가능해졌다지만 시적인 아포리즘들로 현대 사회의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집어내며 ‘홀로코스트’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이야기를 짚어내는 본서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도덕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4.폭력연구 (박사전공>책소개) > 6.홀로코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코스트 나치스와 유대인 (2015) (0) | 2023.07.08 |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2020) -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0) | 2023.07.08 |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2013) - 종교 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틈에서 (0) | 2023.07.08 |
홀로코스트 그 역경을 넘어서 (2011) (0) | 2023.07.08 |
홀로코스트 (2002) (0) | 2023.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