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촛불(2016년)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그것이 인간적 삶의 조건과 미래를 어떻게 그려가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작업을 기다렸다. 정치란 본래 지배의 논리일 뿐이라고 믿거나, 한낱 이벤트 내지 거창하게는 스펙터클로 변한 지 오래라고 체념하지 않고 여전히 정치가 대중의 고단한 삶을 변화시킬 인간의 역능에 속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다시 대중을 정치의 객체가 되게 하고 기껏해야 ‘손가락 혁명’에 동원되는 유권자 이상이 못 되게 만드는 촛불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타개할 정치 담론의 출현에 목말라 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 지도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꼬리를 물고 서로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가 흡사 미국의 그것을 이미 닮아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우선 갖는다. 다르게 말하면, 오바마와 트럼프 사이의,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의 진자추 운동과도 같은 반복이 앞으로도 되풀이되리라는 우려가 단지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굳어질 것 같은 어떤 기시감과 불안 때문이다. 촛불의 봉기는 정치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성찰이었지만, 오늘의 정치가 보여 주는 진퇴와 교착을 앞에 두고 촛불의 대중은 적극적인 행위자이기보다 무기력한 목격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에는, 민주주의는 고정된 무엇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끝없이 재발명되지 않으면 안 되며, 보다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멀리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다. 공허하고 지루한 반복을 분절하고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라는 민주주의 본연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다른 정치적 사유의 장소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그래서 긴요하고 긴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은 이러한 과제가 자신들의 의무임을 아는 정치철학자들의 응답이다. 지금까지 나온 다른 정치철학서에 비해 두드러지는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20세기 초중반을 짓눌렀던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여 그간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루어졌던 정치철학의 주제들(페미니즘 정치철학을 포함하여)을 오늘 한국 정치를 사유하려는 뚜렷한 문제의식 아래 전체적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는 데 있다. 그것도 국내 연구자 16명이 이미 지면에 발표된 글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의식 아래 새로이 쓴 글들로 한 권의 책을 구성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이로써 우리는 자신 속에 갇혀 한계 안을 맴도는 데서 벗어나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겨냥하는 것이 정치철학적 사유와 언어를 바로 촛불의 대중에게 건네주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작업이야말로 일견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책의 16명의 필자들의 노고가 돋보이는 이유는 주요 정치철학자들의 사유의 핵심을 속류화시키지 않으면서 명료하게 정리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업을 우리 자신의 정치적 사유의 자산으로 삼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목차
첫 번째 흐름 /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
칼 슈미트: 민주주의 속의 독재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과 맑스주의
테오도르 아도르노: 총체성과 전체주의를 넘어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과 ‘정치적 삶’
두 번째 흐름 /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미셸 푸코: 경계의 정치
질 들뢰즈: 차이의 존재론
자크 랑시에르 :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제’와 평등의 정치
세 번째 흐름 /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
낸시 프레이저: 삼차원의 비판적 정의론
마사 누스바움: 철학자 혹은 헤타이라
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의 정치 그리고 차이의 정치
주디스 버틀러: 젠더퀴어의 정치학
네 번째 흐름 /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
세 개의 하버마스: 공영역, 의사소통 합리성 그리고 토의 민주주의
찰스 테일러의 근대 비판과 인정의 정치
아감벤: 호모 사케르와 민주주의 문제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거리 두는 혁명 정치 복원
책 속으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파시즘의 폭력을 기억하는 것이다. 벤야민을 구제하는 것은 그가 쓴 글 속에서 하나의 해석을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폭력 앞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진 단순한 삶이 지옥으로 나아가는 행렬을 구원하는 것이다. 구원은 곧 혁명이다. 군중의 충격적인 아우라를 회상하는 보들레르의 우울은 블랑키의 혁명적인 실천과 코뮌의 도래에 대한 기다림이다. 혁명은 혁명 이후 도래할 집권을 향한 열망과 정치적 지배의 약속이 아니라, 죽어 간 전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일깨워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폭풍이다. …… 오늘날 벤야민이 맑스주의의 혁신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페레스트로이카 이래로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 --- pp.63-64
20세기의 후기 자본주의는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하는 주체의 소멸을 낳았다. 개인이 전체에 종속되어 버리는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보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대중민주주의’와 ‘대중문화’,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특징을 갖는 대중사회의 부상에 따라 개인은 언제나 동일하고 사회적으로 규격화된 삶의 형식을 강요당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현실 진단이었다. 이처럼 주체의 자율성이 폐기된 세계에서 삶은 더 이상 참된 것일 수 없으며, ‘자유로운 삶’이란 가상에 불과하다. …… 그렇다면 윤리의 물음,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이제 기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더 이상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이 던져지지 않는 이상, 사회적 억압과 지배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따라서 “어떻게 주체의 윤리적 삶이 가능한 객관적 관계망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소급된다. --- pp.80-81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위험에 맞설 수 있는 정치의 역량은 어디에서 성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전체주의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들, 즉 공포와 복종으로 치환되었던 인간의 행위 능력들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 현실의 경험에서 허구와 왜곡을 판별하고 사실과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 자발적으
로 행위하는 능력, 자율적으로 정치적 결사체를 구성하고 연대하는 능력,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정의의 감수성, 사익과 공익을 구별하는 공동선에 대한 판단 능력, 자신의 머리로 사유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개성적 능력, 타인과 대화하여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고 합의하는 능력, 함께 약속하고 다시 실천하는 의지 등은 사실 오늘날 한계에 봉착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요구되는 시민의 덕에 다름 아니다. …… 오늘날 우리의 정치문화에 대해 냉소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현대인의 정치적 삶의 활성화를 위한 근본적인 조건을 탐색하고, 시민적 주체의 연대 가능성을 사유한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pp.106-107/111-112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은 ‘한계 개념’인데, 왜냐하면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 안에서 ‘최종심급’에서의 물질성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의 대상이 될 수없기 때문이다. 이 한계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정치이고 정치적 실천과 조직들이며 그 조직들의 이데올로기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역사와 미래를 향해 완전히 열려 있다. 한 유물론자가 자신의 전 생애를바쳐 용감하게 걸어온 이 길, 즉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이 길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긴 미래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p.154
푸코 사상의 핵심은 권력 개념이고, 권력에 대한 저항을 사고한 철학자이다. …… 푸코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권력이다. 그런데 푸코의 생각 중 어떤 생각을 가장 좋아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존재 미학’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푸코는 근대인은 ‘발견하는 자’라면 고대인은 ‘발명하는 자’라고 말한다. 푸코는 자유는 무엇인가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부단히 자유롭게 창안하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푸코가 관찰한 근대의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이 생산력을 가지며 우리의 삶을 예속화할 때, 푸코는 자신의 삶을 발명해 가는 존재 미학을 자신의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때로 내가 발명한 나의 삶이 사회가 쳐놓은 다양한 금기의 선을 넘어서는 것일 때 ‘감히 넘어서 보는 것’. ‘감히 알고자 하라!’라 계몽의 표어였다면, ‘감히 넘어서고자 하라!’가 푸코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라고 그를 기억하고 싶다. --- pp.172-173
들뢰즈에 따르면 소수적인 것은 민중은 없다는 조건에서 성립한다. …… (민중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 …… 민중은 지속될 수 없다. 민중이 하나의 모델이 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의 중심이 되어 더 이상 변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미국의 민중은 토착 원
주민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이주민들이 등장하면서 미국은 새롭게 변화한다. 하지만 그 이주민 역시 주권을 갖추고 하나의 모델로서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새로움을 위한 전복이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이런 민중의 모델은 아직 그 정체성마저도 확인되지 않은 소수자들 앞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 소수자들의 행위는 ‘미시정치’라는 개념으로 작동하게 된다. …… 들뢰즈의 초기 존재론의 구상이 정치학에 실현된다면, 그것이 미시정치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 pp.193-194
랑시에르는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정치’이며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 그저 추구해야하는 이념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계속되는 실천과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평등의 정치’이다. …… 이때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철학을 시원적으로 발생시킨 민주주의. 곧 아무나의 평등을 늘 이 자리에서 실현하려는 그런 민주주의를 의미할 것이다. --- p.217
프레이저는 위상 모델로의 전회를 시도한다. …… 참여 동격을 정당화 방식으로 하는 위상 모델 안에서 문화적 부정의와 경제적 부정의, 나아가 정치적 부정의까지도 개념적 모순 없이 함께 고려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위상 모델 안에서 우리는 특정한 집단 구분과 정체성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위상 모델은 그러한 집단적 구분과 특정 정체성을 해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에 따르면 여성의 위상 종속을 가져오는 가부장적 상징질서, 제도화된 가치 패턴은 해체되어야 하며, 여성의 위상 종속을 가져오는 성별 분업의 경제는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분법적 젠더 구분은 해체되어야 한다. --- pp.239-240
이 땅의 ‘82년생 김지영’들은 꿈과 인생과 건강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외모에 대한 비하와 칭찬을 줄곧 들으면서 살아야 했다. 유리천장과 경력 단절, 임금 격차 등으로 인해 경제적인 불안도 겪어야 했다. 밤거리가 무서워 혼자서 길을 돌아다니려면 큰 용기를 가져야 했고, “여자애가 밤에 어딜 쏘다니냐”는 질책을 들어야 했다. …… 누스바움의 사유에서 이것들 모두는 역량을 제약당한 채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는 사회 부정의일 것이다. 누스바움에게 역량이란 무언가를 행하고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실제 기회를 뜻한다. 그리고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 줄 의무가 존재한다. 누스바움은 아마도 모든 ‘82년생 김지영’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삶을 응원하지 않을까. --- p.261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게 있어서 정치적 책임은 언제나 현재진행 중인 동시에, 미래로 향한다. 미래 지향적 정치적 책임은 사건이 미래에 미칠 파장과 관련한다는 점을 뜻하는 동시에, 정치적 책임이 늘 바로 지금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영의 정치적 책임은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개인에 근거한 책임 담론을 비판한다. 다른 사람들과 무관하고, 각자의 행위에 대한 비용은 자기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기 삶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관계에 있는 타인의 삶의 조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떤 책임을 가져야 하는지 되묻는 것이다. 이는 구조화된 제도적 관계 때문에 형성된 다른 이들의 삶의 배경과 조건에도 책임을 질 것에 대한 요청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차이의 정치학의 구체적 방식이기도 하다. --- pp.289-290
최근의 버틀러의 관심은 누구나 살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과 공동체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는 것 같다. 공동체란 무엇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일 수 있을까? 우리는 공동체성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인간 공통의 조건으로서 관계성을 바라볼 때,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러한 질문이 버틀러의 머릿속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은 얼핏 『젠더 트러블』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젠더 수행성에 관한 버틀러의 작업이 제기하는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누구일 수 있을까’라는 푸코적인 질문은 헤겔적인 의미에서 인정과 욕망에 대한 논의로 연결되면서 결국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 pp.310-311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이 다원주의적 현실에 직면하여 정체성과 가치 형성이라는 문화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자 한다면, 비논의적 의사소통 모델도 고려하는 확장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언어를 합의를 위한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존재 경험의 표현으로도 사유하는 모델이다. 이러한 언어 세계에서는 타자를 합의 지향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경험의 이해 대상으로 보게끔 할 것이다. …… 의사소통 합리성을 통한 계몽적 이성의 구제는 해방적 삶에 대한 관심의 추구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그의 이론이 의사소통적 이성과 논의 절차의 실천 역량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버마스가 신뢰하는 저 두 가지 없이는 사회의 합리적 통합은 쉽지 않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 p.340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자기 결정의 자유는 인정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하며, 인정의 정치는 자기 결정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초한 인정의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 p.361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추방(령), 예외상태 등의 개념은 근대적 주권권력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 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감벤 특유의 해방적 기획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추방된, 추방령을 받은’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처분대로 하다’는 뜻과 함께 ‘도망가게 내버려 두다’라는 표현에서처럼 ‘자유롭게’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 근대적 주권자는 자기 자신이 예외상태에 있으면서 벌거벗은 생명을 예외상태에 두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주권자는 호모 사케르를 예외상태에 추방시킴으로써 존립하는 자이다. 그런데 추방된 자는 자유롭게 도망갈 수 있는 자이며 주권자를 밀어낼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 새로운 권력을 구성하는 주체는 현실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라기보다는 자신을 호모 사케르로 인식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되어 있으면서 포획된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자야말로 예외상태로의 추방이 주권자를 밀어낼 수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안다. --- pp.388-389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철학적 성찰을 감행하면서 정치적인 입장을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급진 민주주의)로부터 정치체제의 전적인 변화(혁명적 전위주의)로 바꾼 지젝이 있다. 즉 계몽주의적인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에 영향을 받은 급진 민주주의로부터 낭만주의적이고 총체적인 정치적인 혁명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위주의자로 전환한
지젝이 그것이다. …… 지젝의 (이러한) 혁명 정치학에 관해 부정적인 학자들은 메시아주의와 의지주의를 지적하면서 그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헤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고 이를 토대로 유물 변증법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레닌의 혁명 정치를 복권시킨다.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신자
유주의가 지배하고 진보 이론들이 여기에 포섭되는 이론적 진공 상태에서 독일관념론과 혁명 정치의 연관성을 독창적으로 제시하고 현대 철학계의 주요 논쟁을 이끌며. 이를 통해 전 세계 많은 청년들과 지식인의 철학적 멘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현대 정치철학의 사유를 통해 모색해 보는 대안적, 대항적,
해방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2016년의 촛불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적 실천들과 그에 관한 담론들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새 촛불은 추억이 되었고, 대중적 에너지는 제도권 정치의 블랙홀 속에서 소진되고, 그 자리엔 정치권의 공방과 이합집산, 그리고 이를 좇는 미디어와 그들이 매일 같이 만들어 내는 정치 흥행물에 눈을 고정시킨 무기력한 대중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30년 가까이 지난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라면 지나친 판단일까. 대중의 정치적 무기력이 민주주의의 한계를 만드는지,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가 정치의 공백을 낳게 하는 것인지를 따질 겨를도 없이, 조금도 과장 없이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은 자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불안과 공허 속을 그저 부유하고 있다. 그러한 대중은 때로는 정치적 불의의 임계점 앞에서 봉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엉뚱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월가 시위’ 이후 미국의 정치가 트럼프 집권으로 귀결된 것 역시 다르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오바마까지 이어지는 민주당의 월가(자본) 친화적인 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대중적 염증이 불러낸 자기 파괴적인 반란이었다. 노동하는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데 대한 대중적 실망이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는 정치의 선동에 현혹되는 아니러니. 우리는 그것을,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던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의 당선에서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 지도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꼬리를 물고 서로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가 흡사 미국의 그것을 이미 닮아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우선 갖는다. 다르게 말하면, 오바마와 트럼프 사이의,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의 진자추 운동과도 같은 반복이 앞으로도 되풀이되리라는 우려가 단지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굳어질 것 같은 어떤 기시감과 불안 때문이다. 이제 집권 2년을 넘어서는 문재인 정부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염원에는 그러한 희비극이 의미 없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과 남북한 평화체제 이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삶의 곤궁이 나아질 기미가 없을 때 그 지점을 파고드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운 우익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다급한 물음은 물론 한국에서 먼저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확고해진 이래 민주주의는 인간적 삶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의 형식이 아니라 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을 숨기는 알리바이가 되었다는 비판이 저 민주주의의 선진 국가들에서 먼저 제기된 지도 오래다.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 깃든 독재의 가능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히틀러 독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했던 칼 슈미트, 그보다 앞서 프랑스혁명과 반동의 역사를 지켜본 칼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간파했던 대의제 민주주의의 ‘구멍’. 이 구멍을 직시하지 않고서 민주주의 자체를 물신화해 버릴 때,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라는 말은 명목일 뿐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토론을 종국에는 쓸모없는 탁상공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허한 희비극의 반복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촛불을 이룬 대중의 역능이 일상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위 능력으로 유지되고 강화되는 길을 여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사유의 토대를 전면적으로 성찰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세계사적 좌표 위에서 조망하고 20세기와 21세기의 오늘로 이어지는 정치에 대해 깊이 사유해 온 철학적 사유의 성과를 통해 인식의 기반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는 우선 이 땅에서 정치철학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철학적 사유의 담지자는 삶의 위기와 고단함 속에서도 미래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대중(민중)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기획되고 씌어진 책이다.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의 정치와 민주주의적 상황을 포착해 온 정치철학의 흐름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고, 이 주제 영역을 개척하거나 새롭게 발명한 주요 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민주주의 속의 독재의 가능성을 포착했던(그를 통해 나치체제를 옹호하는 이론가가 되었던) 칼 슈미트로부터 시작하여, 세속화된 근대사회에서 물신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를 타개하려는 오늘의 급진적 정치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특히는 지금까지의 체제 변혁적인 사유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한계를 날카롭고 찢으며 차이와 평등의 정치를 결합하려는 페미니즘 정치철학까지, 지금까지 분리된 채 논의되어 온 주제들을 오늘날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우리 자신의 정치적 사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문제의식 아래 재구성해 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은 독자들이 쉽게 접근함으로써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으로 작성된 본격적인 대중적 정치철학서이다. 한마디로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촛불의 대중에서 무기력한 정치적 객체로 머무는 대중에게 정치적 사유와 언어를 건네주려는 시도라는 데 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공통의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이 역능을 가진 대중만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그 한계 너머로 더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반복되어 온 희비극을 중단시키고 인간의 시간을 거기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부는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여기서는 나치 세력의 집권 전후로 현대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관해서 성찰했던 철학자들이 다뤄진다. 이 책의 첫 장에 등장하는 칼 슈미트는 한때 나치의 협력자였고, 총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이론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내에서 독재의 출현 가능성, 그리고 전체주의적 지배의 위험을 사고하고자 할 때 반드시 다뤄져야 할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이 슈미트와 논쟁을 벌인 발터 벤야민의 개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벤야민의 정치·역사철학적 고찰들을 다룬 다음 장은 그의 고유한 맑스주의적 관심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이어지는 아도르노, 아렌트 또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철학적 사변의 주된 관심으로 삼은 철학자들이다. 전통 철학의 개념적 동일성에 대한 강박적 사고에 주목하면서, 철학적 동일성 원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이를 맑스주의, 정신분석학, 합리화 이론 등과 접목시켜 전체주의적 지배의 원리를 밝히는 전략을 택한 아도르노와, 정치의 근본 개념들을 규정하면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구분 속에서 전체주의적 지배로 전락한 현대 정치의 한계를 비판한 아렌트를 대비해 보는 기회도 된다. 이러한 20세기 현대철학의 전체주의 비판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반지성주의의 흐름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와 (이주민, 난민, 무슬림,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 선동의 빠른 확산 속에서 어떠한 대항적 의제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이다. 20세기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68혁명은 사회적 실재를 분석하는 새로운 분석틀을 요구했고, 이 혁명을 전후로 터져 나온 프랑스의 급진적 정치철학들은 흔히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라는 타이틀 속에서 논의된다. 첫 글에서 소개되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은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교차점을 형성하면서, 전통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넘어서 사회적 구성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자신의 권력이론을 전개한 푸코는 고고학과 계보학의 방법을 통해 권력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며, 이를 생명권력과 통치성에 관한 고찰들로 이어 나갔다. 이어서 다뤄지는 들뢰즈의 차이의 존재론은 차이와 강도(强度), 생성의 역량을 강조하면서, 68혁명과 같은 (체계성에 고정되지 않는) 혁명적 투쟁의 분출과 같은 사건을 개념화하고자 했다. 한편 이러한 투쟁의 분출 과정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갖는 의미 속에서 고찰하면서, 정치와 치안의 이중 운동이 내는 불화 속에서 해방적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렇듯 68혁명을 전후로 프랑스 지성사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의 계보들이 보여 주는 지평들은 오늘날 촛불 ‘이후’의 정치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에게 분명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3부는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은 오늘날 시대적 정의를 상징하는 흐름이 되었다. 한쪽 성이 배제된 채 논의되는 민주주의와 정의, 진보는 반쪽짜리일 뿐만 아니라, 한쪽 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반(反)민주적이며 불공정하고, 사회의 퇴보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얻기 시작한 반면, 페미니즘의 물결에 대한 기존 남성 중심 사회의 백래시 현상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다른 사회적 운동들, 예컨대 계급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운동이나 생태주의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또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을 어떻게 규정하며, 다른 성소수자들(LGBT)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의 논의들은 이러한 논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첫 번째로 다뤄지는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의의 여러 차원들을 경제적 재분배/문화적 인정/정치적 대의 사이의 관계로 규정하면서, 페미니즘과 지구적 정의의 문제에 관한 정교한 틀을 제시하고 있다. 성적 대상화, 혐오 등 페미니즘 이론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들을 규정한 마사 누스바움은 각 개인의 역량이 종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의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배제를 넘어서는 역량의 증대로서의 정의에 대한 고민은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게서도 이어진다. 영은 현대 정의론의 고전인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재분배의 문제 설정을 넘어서 특정한 사회집단의 지위와 관련된 영역에서 차이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디스 버틀러에게서 차이의 문제는 고정된 젠더 역할의 수행을 거부하는 횡단적 해체의 움직임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에 퀴어와 해체라는 키워드를 도입하여, 실체화된 여성성과 젠더 이분법을 넘어 모든 억압적 젠더 역할로부터 해방되는 주체의 자기 긍정적 관계를 선언한다. 이러한 다양한 각도의 페미니즘 철학의 논의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제기되는 여러 화두들에 의미 있는 준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4부는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에서는 근대 민주주의 담론 전반에 대한 양극적인 논의들이 다뤄진다. 따라서 이 4부는 일관적이지 않은 구성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먼저 위르겐 하버마스와 찰스 테일러는 세속화된 질서로서 근대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그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착하기 위한 규범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면, 아감벤과 지젝은 근대 민주주의론 자체의 근본적 한계를 제시하면서 세속화된 현대사회 질서 내에서 또 다른 우상과 물신이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서구 기독교 전통이 현대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대성을 사유하며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를테면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에서의 의사소통 합리성에서 비롯하는 토의 민주주의가 체계적 합리성의 자립화와 생활세계 식민화를 견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테일러는 근대 이후 자유주의의 확산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세속화된 근대성이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조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주의적, 정치적 자유의 관점을 제시한다. 반면 아감벤은 세속화된 근대사회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속화된 기독교 신학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면서, 근대 주권론이 갖는 생명정치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근본적 차이란 없으며, 근대 주권의 구조가 벌거벗은 생명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위기의 징후를 드러내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세속화된 근대의 역설인 이데올로기적 유령과 물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라진 공산주의의 전통이 부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이러한 사유를 전통 맑스주의로부터 직접 도출하기보다는, 프로이트와 라캉, 헤겔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경유해 이끌어 낸다.
이상 논의된 네 가지 주제들과 이 한 권의 책만으로 현대 정치철학적 사유들을 모두 망라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이 책이 놓친 주제들―예컨대 영미 정치철학에서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된 현상학적 공동체론, 이탈리아 자율주의 이론,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최근 논의 등―은 추후에 후속 기획을 통해 다룰 수 있으리라는 기획자(필자)들의 바람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역동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사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발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일어난 3·1운동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민중 봉기에서 출발하여, 4·19, 5·18 항쟁과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며 얻어 낸 민주화, 그리고 2016-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 역사는 지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대한 열망을 표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온전히 민주화되지 않았다. 엘리트 중심의 정치 질서와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속에 퍼지는 정치 혐오는 오늘날 사회의 탈정치화로 귀결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된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주제들이 촛불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사유와 논의의 진전과 확산에 기여하기를 바라며, 나아가 현재의 조건에서 대안적, 대항적, 해방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논쟁의 지평들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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